혹자는 자아실현을 위해 직업을 갖는다고 거창하게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생계를 위해서다. 먹고살기 위해 지긋지긋한 직장에 나가고 적게나마 저축을 한다. 꿈꾸는 미래는커녕 당장 하루살이처럼 살아가는 이들이 많은 게 요즘 현실이다. 그러니 사직서를 가슴에 품었다고 함부로 말할 수 없다. 상대가 누구든 말이다.

 

 취업이 어려운 시대에 직장에 대한 고민과 불만은 복 겨운 소리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힘든 건 힘들다고 말하고 부당하다는 건 부당하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어쩌다 우리는 이런 사회에 살게 된 것일까. 쓰무라 기쿠코의 라임포토스의 배를 읽다 보니 잊었다고 생각했던 상사가 떠올라 나도 모르게 나쁜 말을 하게 된다. 반면 마음이 맞는 동료가 있었기에 힘들었지만 즐겁게 그 시절을 견딜 수 있었다. 지루할 만큼 반복된 일상에서 휴가나 여행은 보상처럼 다가온다. 그러나 공장일이 끝나면 친구의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주말에는 컴퓨터 강의를 하고 밤에는 데이터 입력을 하며 돈을 모으는 스물아홉의 나가세는 그저 살아간다. 그저 물만 주면 잘 자라는 라임포토스를 키우는 게 유일한 나가세의 취미라 할 수 있다. 일에 대한 기쁨과 즐거움 대신 도구처럼 사용되는 자신의 모습에 우울하기만 하다.

 

 ‘‘시간을 돈에 파는 듯한 기분’이라는 생각이 든 순간 몸이 굳었다. 일하는 자신이 아니라, 자신을 계약직으로 고용한 회사가 아니라,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역겨웠다. 시간을 팔아 번 돈으로 음식물과 전기, 가스와 같은 에너지를 고만고만하게 사들여 겨우겨우 살아가는 자신의 불안한 삶이. 앞으로도 그래야만 한다는 사실이.’ 「라임포토스의 배」, 14~15쪽

 

 그러다 휴게실에서 세계일주 광고 포스터를 통해 새로운 계획을 세운다. 일 년 치 월급과 맞먹는 163만엔.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는 50년 된 낡은 집도 수리해야 한다. 우선은 실현 가능한 지 모르지만 목표를 세운다. 나가세는 점점 더 돈을 아낀다. 전업주부로 살고 있는 친구가 함께 놀러 가자는 제안에 어쩔 수 없이 나가지만 머릿속으로 돈 계산에 바쁘다. 설상가상으로 다른 친구가 남편과 별거를 하면서 아이와 나가세의 집으로 들어오고 생활은 더 쪼들리게 된다. ​친구에게 돈을 빌려주고도 받지 못할까 봐 걱정하고 어머니와 친구 모녀가 가깝게 지내는 모습에 서운한 마음도 든다.

 

 ‘돈 때문에, 돈을 쓰지 않으려고, 무익한 시간을 만들지 않으려고 열심을 일을 한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조금 떨어진 곳에 사는 친구 집에 갈 여유조차 없다. 세계일주 비용은 순조롭게 쌓여갔지만 나가세는 왠지 모르게 허무함을 느꼈다.’ 「라임포토스의 배」, 81~82쪽

 

 「라임포토스의 배」는 나가세와 친구를 통해 스물아홉의 삶을 보여준다. 여행이라는 목표를 세운 나가세, 직장을 그만두고 카페를 차린 친구, 전업주부로 살아가는 친구, 남편과 이혼을 결정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친구. ​저마다의 고민을 갖고 살아가는 모습은 우리네 그것과 닮아 무척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힘든 시간이지만 곁에 있는 이들과 함께 마음을 나누고 그 안에서 소소한 일상의 감사를 누리는 삶.

 

 누구나 한 번쯤 경험했을 직장생활을 다룬 「라임포토스의 배」에 비해 「12월의 창가」는 직장 내의 따돌림의 이야기다. 출판 인쇄와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는 주인공은 폭언을 일삼는 직장 상사 때문에 힘든 시간을 보낸다.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 계속 일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다 결국 사표를 낸다. 작가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린 소설이라 그런지 지위를 이용한 직장 내 여성 따돌림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며 직장인의 비애를 고스란히 전달한다.

 

 ‘“황당한 실수를 저질러도 일은 계속해야만 하니까요. 머나먼 하늘 밑에서 바보 취급을 당하면서도 회사원은 일을 해야죠.”’ 「12월의 창가」, 130쪽

 

 두 편의 소설을 통해 일과 일하는 여성에 대해 생각한다. 그것은 일, 연애, 결혼, 육아로 확장된다. 직장 여성이라면, 위킹맘이라면 더욱 크게 와 닿을 것이다. 여자만이 느낄 수 있는 감각으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일상을 잔잔하게 그렸기에 더욱 특별하게 느껴진다.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와 닮은 듯 다른 감성, 이 작가의 다른 소설을 더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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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는 바람이 있었고 오늘은 약간의 바람도 존재하지 않는다. 일관성 있게 바람이 불었으면 좋겠다. 변함없이 매미소리는 우렁차다. 내일이 없다는 걸 다 안다는 소리인가. 오늘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살아야 한다는데. 변화, 변신, 변장이란 단어를 생각한다. 순간마다 변화하는 모든 것들. 바람의 크기, 햇볕의 세기, 숨소리, 그리고 내 마음. 마음의 변화는 얼마나 충동적인가, 얼마나 간사한가. 냉장고 속 복숭아와 자두는 어제는 그것이 아니다. 복숭아는 미세하게 숙성된 맛을 보여준다. 뜨거웠던 김치찌개는 냉장고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었다. 폭염이 이어지는 날들, 밤마다 뒤척인다. 올림픽에 열중하지 못하면서도 경기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잠들지 못하기에. 바로 잠드는 날은 언제 올 것인가.

 

 8월 11일이라는 날짜에 화들짝 놀라고 만다. 오늘은 누군가의 생일이고 작은 언니가 말라위에서 돌아오기로 예정된 날이다. 계획대로라면 밤늦게, 혹은 내일 새벽에 도착할 것이다. 하루를 지배하는 건 무엇일까. 무엇이 나를 지배하고 때로 나를 농락할까. 나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나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은 예전의 그것과 다르게 변화한다.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그래도 고유한 무언가는 변하지 않을 것 같다.

 

 여러 권의 책을 늘어놓고 읽는 흉내를 낸다. 무언가 몰입할 수 있다면 더위도 잠시 잊을 수 있기를 바라지만 생각뿐이다.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선뜻 답할 수 없는 작가 요시모토 바나나의 『바다의 뚜껑』은 충동구매였다. 처음부터 읽는 것도 아니다. 아무 곳이나 펼쳤다. 그랬더니 이런 문장이 나를 붙잡았다. 세상에나, 내 머릿속에 들어온 거 아니야? 이 소설에 대한 사랑은 오래 지속될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엄청난 힘을 갖고 있다. 누가 없애 버리려 하거나, 일부러 획일화하려 해도, 아무리 억압해도 절대 없어지지 않는, 그런 힘을.’

 

 ‘거푸 돌아오는 계절을 영원히 볼 수는 없다. 적어도 버드나무보다는 먼저, 나는 이 세상에서 사라지리라.’

 

 장석주의 『단순한 것이 아름답다』는 그의 산문이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시로 만난 장석주가 아닌 산문을 읽고 싶었다. 많은 책 가운데 이 책을 선택한 건 제목이 주는 울림 때문이다. 그리고 며칠 전부터 오정희의 『새』를 다시 읽고 싶었다. 천진하다고 할 수 없는 우미의 눈빛과 마주하고 싶었다. 내일에 대한 아무런 기대도 없이 살아가는 삶에도 변화는 존재한다. 어떤 일이 벌어질까 기대감이 아닌 두려움으로 마주하는 시간들은 무겁고 어둡다. 작고 미세한 변화를 감지하는 세포를 키우는 여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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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직 둘만이 세상의 중심이 되어 뜨겁게 사랑하고 있는 중에도 사랑을 의심하는 경우가 있다. 연인의 사랑에 대한 불신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이다. 내 곁에 있는 사랑이 나를 버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랑이 줄어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랑은 밥도 아니고 사랑은 돈도 아니라서 먹을 수도 없고 좋은 물건을 사는데 사용할 수도 없다. 사랑은 한 사람을 사랑하는 순간, 사랑받는다는 느낌만으로 존재한다. 그 사랑이 때로 누군가를 살게 하고 누군가를 죽게 만든다. 그렇다면 폴에게는 사랑은 삶의 이유이자 목적이었을까. 아니면 고칠 수 없고 버릴 수 없는 습관이었을까.

 

 이혼 경력이 있고 이별의 경험이 있지만 반복되는 상실을 감당하기에 서른아홉 살의 실내장식가 폴은 지쳐있었을지도 모른다. 연인 로제에 대해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도 혼자라는 외로움을 이겨낼 수 없을까 두려워서다. 폴을 사랑하지만 그 사랑에 완벽한 책임감을 강요당하는 걸 원하지 않았던 로제는 폴과 이별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자신이 언제라도 돌아갈 수 있는 곳에 폴이 있다고 굳게 믿었다.

 

 사랑이라는 게 날씨처럼 예측할 수 없다는 걸 폴과 로제는 모르는 척했다. 스물다섯 시몽이 폴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걸 알았지만 폴과 로제는 그들의 관계가 여전히 맑음이라고 착각했다. 시몽에게 폴은 새로운 날의 시작이었고 그녀를 사랑하는 일만이 중요했다. 시몽은 폴의 외로움을 건드렸다. 폴은 부정할 수 없었다. 로제의 이기적인 사랑을 말이다. 점점 커지는 로제와의 간극 사이에 시몽이 우뚝 솟았다. 폴에게 시몽의 말과 행동은 어리숙하며 불완전했다. 그러나 서로가 서로에게 향하는 마음을 거부할 수 없었고 시몽의 뻔한 질문에 결국 무너지고 만다. 아니, 폴은 사랑이 아닌 자기의 현재 모습을 보게 된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그 짧은 질문이 그녀에게는 갑자기 거대한 망각 덩어리를, 다시 말해 그녀가 잊고 있던 모든 것,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던 모든 질문을 환기시키는 것처럼 여겨졌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자기 자신 이외의 것, 자기 생활 너머의 것을 좋아할 여유를 그녀는 여전히 갖고 있기는 할까?’ (57쪽)

 

 시몽의 눈에 비친 폴의 삶은 불행하고 쓸쓸해보였다. 그런 폴에게 충분히 아름다웠고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했고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는 걸 일깨워주고 싶었다. 시몽은 서른아홉이라는 나이가 갖는 삶의 무게를 몰랐다. 아니 알 수 없었다. 폴과의 사랑만으로 모든 게 다 잘 될 거라 자신했으니까. 그런 시몽의 젊음과 사랑에 폴은 빠져들었고 로제가 아닌 시몽을 선택할 수 있다고 다짐했다.

 

 오래된 연인과 켜켜이 쌓인 시간의 힘이었을까. 젊은 남자의 육체를 탐한다는 소문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았던 탓일까. 폴에게 사랑은 습관이었는지도 모른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고 경험할 수 없는 삶을 사는 시몽의 열정적인 감정을 원하면서도 로제를 받아들인다. 도저히 버려지지 않는 로제를 향한 마음을 인정한 것이다.

 

 ‘그녀는 한 번 더 그를 품에 안고 그의 슬픔을 받쳐 주었다. 이제까지 그의 행복을 받쳐주었던 것처럼. 그녀는 자신은 결코 느낄 수 없을 듯한 아름다운 고통, 아름다운 슬픔, 그토록 격렬한 슬픔을 느끼는 그가 부러웠다.’ (150쪽) 

 

 세 사람의 사랑이 모두를 만족시키고 행복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사강의 이미지를 떠올리면 예상 밖의 선택이다. 본인 외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게 사랑이다. 폴에게 기다림만을 안겨준 로제의 구속 아닌 구속을 견딜 수 없다는 듯 당연히 시몽과의 멋진 사랑으로 끝나야 하지 않았을까. 사강은 사랑과 연애가 아닌 폴의 내면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가오는 사랑을 통해 여자의 심리를 잘 보여준다.

 

 결국 폴은 세 개의 점이 만드는 삼각형을 벗어나 점과 점이 이어진 선을 원했던 것일까. 그 선이 아름다운 글과 그림을 만들 수 있다고 믿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이 혼자 선을 그어나가야 한다는 걸 스물네 살의 사강은 알고 있었나 보다. 어찌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자신을 던지는 일이 사랑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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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저께 트렁크에 짐을 챙겼던 작은 언니는 어제 아침에 일찍 인천공항으로 떠났다. 조심해서 잘 다녀오고 연락할 수 있을 때 연락을 하라고 인사를 나눴다. 오후에 도착한 문자는 비행기 연착으로 인해 공항에서 대기 중이라는 내용이었다. 다시 연락이 온 건 밤 11시 30분쯤, 홍콩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떠난다고 했다. 22시간 이상을 소요해 도착할 계획은 더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할 것이다. 지금 어느 곳에 있는지 알 수 없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이 자꾸만 생각난다. 폭염의 날들, 집 안에서도 고생은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늦은 오후에는 친구가 안부를 전했다. 카페와 갤러리를 운영하는 친구인데 건강이 좋지 않아 걱정이다. 친구는 여름을 견디는 중이라고 말했다. 잘 견뎌야 하는데 그냥 견딘다고. 그러니 여름을 잘 견디자는 말이 마지막 인사가 되었다. 통화를 끝내고 나는 계속 생각했다. 잘 견딘다는 건 무엇일까. 견딘다는 것과 잘 견딘다는 건 감정의 차이일까. 받아들임의 차이일까. 견디는 것만으로도 대견한데 잘 견디라는 건 압박을 가하는 게 아닐까. 견디다, 견디다,를 중얼거리다 말았다.

 

 밤에도 쉬이 잠들지 못한다. 옅은 현기증과 함께 지속되는 낮이다. 어린 시절 모깃불을 피우며 별을 보던 날들의 아름다움을 생각한다. 싱그러웠던 여름밤은 추억 속에서만 존재하고 지나고 보면 모든 것은 아름답다, 모든 것은 괜찮다,로 통한다. 여름의 시간은 낮과 밤의 분명한 경계를 만든다. 밤이 되면 이 문장을 다시 읽고 싶다. 밤에 만나는 문장은 낮에 만나는 문장과 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에게 말을 건넬 수 있을 것 같다. 낮에는 세상이 너무 훤해서 보이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밤의 어둠은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겸허하고 충만하게 받아들이게 한다. 밤에 나는 더 작은 존재이다. 그래서 더 큰 존재에 포함되는 존재다. 밤에 나는 상상의 나래를 펴고, 생각, 생각을 하고, 그리고 글을 쓴다. (김행숙 『사랑하기 좋은 책』의 일부)

 

 여름의 시간이 흐른다. 아주 천천히 흐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흘이 지나면 입추인데 여름은 고여있는 것만 같다. 조금씩 흐르는 여름. 어쩔 수 없이 작년의 여름을 떠올린다. 작년에도 더웠고, 작년에도 땀을 많이 흘렸고, 작년에도 무기력했다. 서로를 격려했던 여름이었구나, 서로를 안아주던 여름이었구나, 뜨거운 공기보다 더 뜨거운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던 여름이었구나. 서로에게 더 많은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었던 여름이었지만, 말은 움직이지 못하고 멈춰있었다. 겨우, 사랑한다는 말만 건넸을 뿐이다. 그 안에 모든 게 담겨있다고 믿으면서.

 

 박솔뫼의 『머리부터 천천히』를 읽는다. 조금씩 읽는다. 누구의 이야기인지, 누구에게 건네는 말인지 모른 채 읽는다. 그저 하지 않으면 안 될 이야기를 하고 있구나, 생각한다. 여름의 시간은 머리부터 천천히 물속으로 스며든다. 여름의 시간은 머리부터 천천히 당신을 생각한다. 여름의 시간은 그렇게 흐른다. 그렇게 견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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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는 오지 않았다. 기다렸는데 오지 않아서 화가 났다. 약속을 저버린 애인 같았다. 며칠째 일기예보는 비가 내릴 것처럼 비구름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곳에는 비가 오지 않았다. 강력한 더위의 힘은 커졌고 나는 점점 말을 잃었다. 할 말이 없기도 했지만 말이 되어 나오는 마음에 화가 있었기 때문에 차라리 말을 하지 않는 게 더 나았다.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인데 한강 소설의 말을 잃은 여자가 어떤 기분일까, 잠시 상상하게 되었다. 할 수 없는 말, 하고 싶은데 하지 않는 말. 말과 말 사이의 거리는 잴 수 없을 만큼 멀다. 꼭 해야 할 말만 한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이 돌아다니며 일을 벌이고 있다. 말 없는 도시는 고요할까. 말 없는 도시의 풍경은 어떨까. 비가 쏟아지면 좋겠다. 그럼 말도 쏟아질 것 같다. 비가 쏟아지면 더러운 말도 비에 씻겨 흘러갈지도 모른다. 비가 쏟아지만 조금 평온해질 것도 같다.

 

 눅눅한 날에 우유에 곡물가루를 타서 마셨다. 꿀을 넣었다. 달콤했지만 우유가 적어서 텁텁했다. 맛없는 감자를 먹었고 상추를 먹었다. 그런데도 졸거나 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차가운 물에 얼음을 가득 부어 마셨고 냉커피를 마셨다. 땀을 흘렸고 샤워를 했고 오랜만에 드라마를 시청했다. 서로의 상처를 감싸주는 연인이, 참 예뻤다. 서로에게 기대어 둘이 아닌 하나를 꿈꾸는 연인과 혼자의 사랑을 끝내고 술을 마시는 모습에서 슬픔보다는 다짐이 보였다. 건강한 다짐이라고 할까.

 

 어제 오전에는 선생님의 명예퇴직 소식을 들었다. 마음이 복잡하다는 선생님께 나는 그동안 수고하셨다고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언제나 선생님으로 존재하실 선생님, 그런 대상이 있다는 건 참 기쁜 일이다. 베트남 하노이에 계신 선생님과 더위를 나누고 중복에 치킨이라도 먹어야겠다고 말했다. 선생님이 베트남에 가신 후 두 시간 느린 그곳을 생각한다. 아침에는 그곳의 날씨를 검색했다. 알지 못하며 가본 적 없는 곳의 풍경을 상상하는 일, 낯설지만 즐겁다. 다음 주에는 말라위를 상상할 것이다. 날씨와 음식을 검색하겠지.

 

 내게 중요한 것을 상대에게 강요할 수 없다. 그것은 내게만 속한 일이니까. ​상대의 도움이 필요하더라도 그에게 재촉할 수 없다. 상대에게는 귀찮은 일에 속하니까. 부탁을 했으니 기다려야 하고, 기다림이 길어져도 할 수 없고, 기다림의 끝에 아무런 결과가 없더라고 상대를 탓할 수 없다. 그런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걸 경험하는 중이다.

 

 인터파크에서 개인 정보가 유출되었다. 비밀번호를 바꿨지만 기분이 나쁘다. 모르는 사이 다른 곳에서도 같은 일이 행해지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알고 나니 산뜻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 남았던 적립금으로 우선 책을 구매하고 탈퇴를 할까, 고민 중이다. 비처럼 상쾌한 선물이 될 책들. 반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최은미의 『쇼코의 미소』 , 청량한 기운을 안겨줄 것 같은 너무 시끄러운 고독, 이광호의 『사랑의 미래』와 왠지 닮았을 것만 같은 김행숙 시인의 산문 『사랑하기 좋은 책, 최윤필 기자의 『가만한 당신,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누운 배.

 

 

 

 

 

 

 

 

 

 

 

 

 오늘은 비가 올까, 비가 오면 정말 반가울 텐데. 비야, 좀 내려주면 안 되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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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6-07-27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산은 비가 엄청 왔답니다
그래도 너무너무 더워요 ㅠㅠㅠ

자목련 2016-07-28 10:39   좋아요 0 | URL
아, 엄청난 비도 더위를 식히기에는 부족했군요.
오늘은 어제보다 시원한 바람이 그곳에 닿기를 바라요^^

서니데이 2016-07-27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오늘도 많이 더운 날이었어요. 그래도 즐겁고 좋은 저녁시간 보내세요.^^

자목련 2016-07-28 10:38   좋아요 0 | URL
어제는 진짜 더운 하루였어요. 비는 병아리 눈물만큼만 내렸어요. 그래도 오늘은 어제보다 바람이 많아서 시원해요. 서니데이 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