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
다비드 그로스만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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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에게는 나만의 이야기가 있다. 당신에게는 당신만의 이야기가 있듯이 말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우리의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나와 당신은 우리가 될 수 있을까? 무엇이 나와 당신을 우리로 묶어줄 수 있을까? 유년시절을 함께 보낸 추억, 이별했지만 한때 사랑했던 감정, 말하고 싶지 않은 어떤 비밀이 나와 당신을 우리로 만든다. 우리가 되었을 때 우리는 고통의 조각이나 벗어나고 싶은 악몽과 대면할 힘을 키우기도 하는데 그것은 말처럼 쉬운 건 아니다. 기억에도 없는 낯선 남자 ‘도발레’와 그의 전화를 받고 쇼를 보러 간 ‘아비샤이’는 아직 완벽한 우리가 아니기에 서로에게 힘이 될 수 없었다.

 

 자신의 쉰일곱 살 생일에 스탠딩 업 코미디 공연을 하는 도발레는 멋지고 잘 나가는 코미디언도 아니었고 그저 그런 성적 농담과 유머로 관객을 상대하고 있었다. 전화로 통화하면서 언뜻 함께 과외를 받았던 열네 살 소년의 모습이 떠오르기는 했지만 아비샤이는 그 자리에서 도발레의 공연을 관람하면서 동시에 관찰자이자 기록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판사로 퇴직한 그는 개 한 마리와 사랑하는 타마라를 잃은 상실로 채워진 삶을 살고 있었기에 스탠드 업 코미디는 관심이 없었다. 이런 시큰둥한 마음은 독자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도발에는 무대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도구로 삼았다. 그러니까 158CM의 작은 키, 홀쭉한 몸, 안경을 쓴 외모부터 손짓 발짓, 고개를 숙이고 슬픔을 감춘 듯한 표정, 무대를 가로지르며 큰 소리를 외치기도 하면서 말이다. 적절하게 관객과 밀당을 하면서 웃음을 이끈다. 하지만 재미있는 쇼를 기대했던 인내심이 적은 몇몇 손님은 그곳을 떠나기도 했다.

 

 “나는 당신들한테 다른 누구에게도 준 적이 없는 걸 줄 거야. 더럽혀지지 않은 거. 인생 이야기. 그래, 그게 가장 훌륭한 이야기지” (99쪽)

 

 그가 하고 싶은 진짜 이야기는 뭘까. 언제 시작하는 것일까. 이런 눈치를 모를 이 없는 도발레는 아비샤이를 소개하면서 분위기를 바꾼다. 자신의 공연에 전직 판사인 아비샤이 라자르가 이 자리에 왔다고 말이다. 판사와 코미디언이라니, 둘은 무슨 사이일까. 뭔가 특별하고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었던 게 아닐까 기대를 하고 다시 무대의 도발레에게 집중한다. 열네 살에 군사 캠프에 갔던 일을 꺼내기 시작한다. 그건 학창시절의 즐거운 기억이 아닌 비극의 기억, 고통의 역사였다. 군사 캠프에서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당시 그 자리에 있던 아비샤이는 문득 두려워진다. 조롱과 무시를 당하는 도발레를 지켜보았던 자신의 행동을 관객에게 폭로하는 게 아닌가 하고.

 

 도발레의 진짜 쇼는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열네 살 소년에게 닥친 거대한 슬픔, 영문도 모르고 가방을 챙겨 늦지 않게 장례식에 도착해야 한다며 자신을 이끄는 교련 담당 하사. 장례식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어린 소년에게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쉰일곱의 도발레가 들려주는 그 날의 이야기는 엄마와 아버지에 대한 것이었다. 도발레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 사람, 그런 엄마가 있어 삶을 지탱할 수 있었던 이발사 아버지. 아들 도발레와 단둘이 있을 때에는 환하게 웃고 다정했던 엄마는 홀로코스트의 생존자였다. 우울증을 앓고 있는 엄마의 퇴근 시간에 맞춰 마중을 나갔던 어린 도발레, 자신을 분노의 대상으로 삼아 폭력을 행하던 아버지. 그것은 유대인 학살, 홀로코스트에 대한 것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엄마(살아남은 자)의 트라우마에 관한 것이다. 이쯤이면 아비샤이와 독자인 나도 그 장례식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가장 사랑하는 이를 잃는다는 게 어떤 건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도발레에게 운전병은 개그 경연 대회가 있다면서 유머랍시고 이상한 개그를 던진다. 먼 훗날 그 운전병이 절망에 빠진 열네 살 소년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걸 도발레는 알게 된다. 유머라는 게 그렇다. “아무 일도 없잖아! 이게 유머의 위대한 점이라고. 가끔은 그냥 웃어넘길 수도 있는 거야!” (87쪽)란 도발레 외침은 사십삼 년 전 그 운전병에서 시작된 건 아닐까. 비극의 역사를 그냥 웃어넘길 수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순간순간의 일부를 웃음으로 넘길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점점 장례식장에 가까워질수록 도발레는 엄마를 불러온다. “엄마가 다시 내 귀에 대고 말했어. 모든 사람이 짧은 시간만 살다 간다는 걸 기억하고, 그 사람들이 그 시간을 유쾌하게 보낼 수 있게 해줘야 해.” (224쪽)

 

 정말 우리는 짧은 생을 살아간다. 그 짧은 생이 비극과 슬픔, 절망, 분노로 채워진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그런 고통의 삶에서 도발레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코미디를 해야만 했던 건 아닐까. 누구도 열네 살 이후 도발레의 인생이 얼마나 힘든 날들의 연속이었을지 알지 못한다. 아비샤이는 생각한다. 그때 그 군사캠프에서 도발레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라면, 그를 그렇게 혼자 내버려두지 않았더라면. 너무 늦은 후회였다. 물론 도발레가 ​판사 아비샤이에게 어떤 판결이나 그 시절에 대한 사과를 원하는 건 아니다. 그냥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를 바랄 뿐. 그래서 이제라도 우리가 되어주기를 바랄 뿐. 후회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비극의 역사가 재탄생되지 않기를.

 

 나는 이 소설에 담긴 대단한 의미를 재생시킬 수 없다. 전쟁, 홀로코스트, 전범들에 대한 판결, 살아남은 자의 회복,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온전한 기록에 대해 어떻게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잘 살아왔다고, 살아내느라 수고했다고, 앞으로 살아갈 짧은 생에는 슬픔을 이기는 진짜 유머가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는 것. 그저 무대 위 작고 야윈 한 남자 도발레가 두 시간 정도로 압축한 그의 이야기를 들었고 기억해야 한다는 정도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우리 할머니의 이야기가 될 수 있고, 우리의 역사와 겹쳐질 수 있다는 걸 생각한다. 어쩌면 곧 잊고 나의 이야기에 취해 살지도 모른다. 그러나 꼭 기억해야 할 그의 말은 마음에 깊이 새겨두고 꺼내보겠다.

 

 “그냥 살아 있자는 게 얼마나 놀라운 생각인지 이해할 수 있어? 그게 얼마나 전복적인 것인지?” (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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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8-05-17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올해의 맨부커 인터내셔널 수상작인가요.
저도 책 소개는 본 것 같은데, 아직 읽어보지 못했어요.
사람마다 서로 다른 이야기를 가지고,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라서 공감할 수 있을 이야기도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같은 이야기를 조금 더 듣고 싶은 이야기로 바꾸는 건 재능 같고요.
잘 읽었습니다.
자목련님, 편안하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자목련 2018-05-21 14:39   좋아요 1 | URL
네, 2017년맨부커인터내셔널상수상작이에요. 시대의 아픔과 상처를 어떻게 받아들이냐, 그것에 대해 많은 생각을 던져주는 소설이 아니었나 싶어요. 서니데이 님도 활기찬 한 주 시작하세요^^
 
악스트 Axt 2018.5.6 - no.018 악스트 Axt
악스트 편집부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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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여선이라서, 그래서 악스트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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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카르테 1 - 이상한 의사
나쓰카와 소스케 지음, 채숙향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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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든 아플 수 있다. 알면서도 아프지 않았기를 바라며 살아갈 뿐이다. 병원에 가서야 세상에 아픈 사람이 이렇게 많구나 착각한다. 그곳에서 마주하는 의사나 간호사에게는 절대적으로 의지하게 되고 병동의 환자에게 동질감을 느낀다. 의사는 신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환자에게는 그와 동급이다. 내가 모르는 나의 병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이가 바로 그 의사이기에.  그러나 환자에게는 주치의가 한 명뿐이지만 의사에게 환자는 너무도 많다. 그들에게 모두 다정하고 친절한 의사가 될 수 없는 이유다. 부족한 의료기기와 의료진은 말할 것도 없다.

 

 나쓰카와 소스케의『신의 카르테』를 읽는 동안 몇 차례의 수술과 입원 생활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제법 씩씩한 환자였지만 고열로 인해 퇴원이 미뤄졌을 때는 정말 무서웠던 기억도 따라온다. 환자에게 가장 좋은 의사는 어떤 의사일까. 소설 속 구리하라 이치토는 분명 좋은 의사였다. 좋은 의사란 뛰어난 의술을 펼치는 의사를 뜻하는 게 아니다. 구리하라의 말처럼 의사는 치료만 하는 게 아니니까.

 

 나는 의사이다. 의사는 치료만 하는 게 아니다. (105쪽)

 

 소설은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소도시의 혼조병원을 배경으로 숨 가쁘게 흘러가는 병원의 일상이다. 바쁘게 돌아가는 응급실,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환자와 그들을 치료하는 구리하라를 비롯해 동료 의사와 간호사의 이야기다. 주인공 구리하라는 좀 유별난 의사처럼 보인다. 나쓰메 소세키의 『풀베개』를 들먹이며 이상한 말투를 사용하기도 하고 동료와 지인에게 자신만의 별명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러니까 구리하라는 권위적인 의사가 아닌 보통의 이웃 같은 의사인 것이다. 시골 병원의 특성상 전공인 내과를 시작으로 응급실에서 외과의가 되기도 한다.

 

 하루하루를 전쟁처럼 보내는 구리하라는 자신의 생활에 만족한다. 새벽까지 이어진 응급실 진료가 끝나고 옛 예관을 개조한 집에서 결혼기념일도 챙기지 못하는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와 달을 보고 이웃과 술을 마시며 휴식을 갖는다. 그렇다고 구리하라가 고민이 없는 건 아니다. 대학병원과 혼조병원 사이에서 갈등한다. 대학병원 의국에서 최첨단 기술로 진료를 하고 연구를 하면 좋을 것이다. 모든 의사가 대학병원으로 간다면 혼조병원 같은 시골 병원의 환자들은 어떻게 될까. 소설과 현실의 의료 상황은 비슷했다. 구리하라가 혼조병원에서 돌보는 환자는 대부분 혼자 사는 고령의 환자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소설 속 담낭암 환자 72세의 아즈미 할머니는 우리 주변의 그들처럼 보였다.

 

 아즈미 할머니가 원하는 마지막을 허락하고 옥상까지 함께 가서 할머니가 먹고 싶어 한 카스텔라를 준비하는 구리하라 같은 의사는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구리하라의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 특유의 소독약 냄새와 표정이 없는 의사들로 가득한 병원이 아닌 환자의 마음까지 어루만지는 구리하라.

 

 약물이나 항생제 등을 이용해 끊어지는 목숨을 연장한다는 것은 사실 오만한 일이다. 원래 수명은 인간의 지혜를 벗어난 영역이다. 처음부터 운명은 정해져 있다. 흙에 묻힌 정해진 운명을 파내어 빛을 비추고 좀 더 나은 임종을 만들어간다. 의사란 그런 존재가 아닐까. (181쪽)

 

 소소한 유머가 넘치고 다정한 의사가 진료를 하는 병원, 소설이 아닌 현실에서도 만나고 싶은 바람은 너무 큰 욕심일까. 그런 그렇고 따뜻한 기운을 전해주는 소설이다. 잔잔한 재미와 더불어 먹먹한 감동까지 안겨준다. 이렇게 말해도 괜찮다면 착한 소설이라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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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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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가 살아온 삶의 궤적을 아무런 수고 없이 마주하는 건 행운이다. ‘추사체’로 잘 알려진 김정희에 대해 대단한 수고를 대신한 유홍준의 『추사 김정희』를 통해 김정희의 생과 그가 살아온 시대를 읽으면서 든 생각이다. 김정희에 대한 방대한 기록과 사료를 수집하고 연구한 유홍준에 대한 수고에 놀라는 마음이 앞서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더불어 기록한다는 것에 대한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출생부터 김정희의 일대기를 다루었고 그의 업적과 함께 작품을 하나하나 설명해준다. 대부분의 자료는 일본의 동양철학자 후지쓰카 지카시의 연구에 의한 것으로 청조 고증학과 경학의 업적을 후지쓰카 지카시가 논문을 통해 발표한 것이다. 유홍준에게는 아마도 가장 고마운 사람이 아닐까.

 

 추사 김정희를 떠올리니 내게는 한승원의 소설에서 초의와의 우정이 생각났다. 서로를 존중하며 교류하며 함께 성장하는 우정, 역시나 이 책에서도 김정희 곁에는 사람이 많았다. 스승, 선배, 제자, 그리고 소중한 인연들. 책을 읽으면서 한 사람의 생을 마주하면 그를 둘러싼 이들, 그와 이어진 이들의 생까지 알아야 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어쩌면 그것은 유홍준의 관점이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김정희가 박제가의 제자였고 그의 영향을 받아 청나라 연경에 가서 그곳의 문인들과 활발하게 교류했다는 것과 흥선대원군인 이하응과도 교류했다는 점은 다소 놀라웠다. 내게는 서예와 그림의 예(藝) 인으로만 알려졌던 김정희는 역사리지, 금석학, 불교학 등 다방면에서 활약한 진정한 전문인이었다.


 

 

 

 

  “학문하는 방도는 굳이 한나라, 송나라로 나룰 필요 없이, 심기(心氣)를 고르게 하고 널리 배우고 독실하게 실천하면서 사실에 의거하여 진리를 찾는 자세로 나아감이 옳다.” (107쪽)

 

 뛰어난 인물의 생에는 언제나 고초가 있기 마련일까. 김정희의 삶도 순탄하지는 않았다. 정치적인 이유로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끝내고 좀 편안한 생활을 하는 가 싶었는데 66세 노년의 나이에 북청으로 유배를 명 받았으니 말이다. 김정희 혼자만의 일이 아니었으니 그의 형제들에게도 고통의 시절이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에게「세한도」가 탄생한 것으로 잘 알려진 제주도 유배에서 그는 아내의 죽음을 접했다는 점이다. 모든 일상을 편지로 전하며 같이 생활하는 듯했던 김정희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아버지와 남편으로의 김정희가 아닌 학자 김정희를 살펴보면 그는 지식에 대한 열망이 대단했던 것 같다. 지인들과 교류한 편지에서 책을 구해달라는 내용이 많은 걸 보면 말이다. 그만큼 그림과 학문에 오만할 정도로 당당했고 자신의 확고한 의지를 제자에게도 전했다. 당시의 진경산수와 문인화풍을 인정하면서도 소치에게는 청나라 화가가 원말 4대가의 그림을 방작한 그림을 모은 화첩을 주고 폭마다 열 번씩 그려보라고 했다니 한다. 어쩌면 그건 현재에 만족하지 말고 더욱더 발전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었을까. 지독하고 완벽한 성격은 지필묵에 대한 글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는 쓰고자 하는 글씨의 성격에 따라 붓을 골라 쓰는 섬세함 그 이상으로 예민했다고 하니 말이다. 그러니 추사 곁에는 그 모든 것을 충족하는 이들이 함께였던 것이다.

 

 이 <세한도>에서 더욱 감동적인 면은 서화 자체의 순수한 조형미보다도 그 제작 과정에 서린 추사의 처연한 심경이 생생히 살아 있다는 것이다. 그림과 글씨 모두에게 문자향과 서권기를 강조했던 추사의 예술세계가 소략한 그림과 정제된 글씨 속에 흥건히 배어 있다는 것이 이 그림의 본질이다. <세한도>의 진가는 그 제작 경위와 내용, 그림에 붙은 글씨의 아름다움, 그리고 갈필과 건묵이라는 매체 자체의 특성에 있다. 즉 그림과 글씨와 문장이 고매한 문인의 높은 격조를 드러내는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288~289쪽)

 

 서법에 충실하면서도 그것을 뛰어넘은 글씨, 그래서 얼핏 보기에는 괴이하나 본질을 보면 내면의 울림이 있는 글씨, 그것이 추사체이다. (412쪽) 

 

 추사 김정희를 안다는 건 비단 그 한 사람만을 아는 게 아니라 그 시대를 알고 그 시대의 문화, 역사, 외교, 풍습을 아는 것이다. 우리에게 알려진 것보다 알려지지 않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내가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책에 수록된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일도 즐겁다. 옛것의 아름다움과 그 존재의 위대함을 알아가는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 후대까지 이어져야 할 본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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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05-08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사 김정희도 엄청난 독서가였다죠! 서점에 디스플레이된 책 사고싶었는데 은근히 설레고 기대되는 책입니다

자목련 2018-05-09 17:31   좋아요 1 | URL
아마도 김정희는 세상의 모든 책과 지식을 습득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어요^^

프레이야 2018-05-08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주 대정읍의 추사 유배지와 추사기념관의 기억이 납니다. 비오는 날이었어요.
다시 가고프네요. 이 책도 담아갑니다. 장바구니가 터질 듯하네요.
좋은 봄날 보내세요^^

자목련 2018-05-09 17:32   좋아요 0 | URL
말씀하신 유배지와 기념관에 대해서도 책에서 만났어요. 김정희가 제주도에서 수선화에 반했다는 점도 흥미로웠어요. 프레이야 님도 환하고 반짝이는 봄날 보내세요^^

카알벨루치 2018-05-09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의 아버지들”이란 책에 보면 김정희가 글씨에 대한 이야길 하면서 글씨에도 독서사가 필수적이란 이야길 합니다
 
셰익스피어 - 런던에서 아테네까지, 셰익스피어의 450년 자취를 찾아 클래식 클라우드 1
황광수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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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셰익스피어의 시대에도 성직자들은 걸핏하면 연극을 공격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많은 연극인들이 기독교적인 시간관에 입각해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셰익스피어의 수많은 연극들의 대단원도 최후의 심판과 흡사하다. 그것은 시간의 흐름을 단절시키며 과거로부터 흘러온 삶의 방식을 전면적으로 돌이켜보게 한다. (262쪽)

 

 우리가 위대한 작가에게 반하는 건 무엇 때문일까? 아름다운 문장과 놀라운 상상력, 그리고 시대를 반영하는 통찰력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삶은 순환하고 역사는 반복된다. 시대가 변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싸우고 사랑하며 자신의 것을 지키려 한다. 단순하지만 단순하지 않을 것들. 그런 면에서 과거에서 현재를 발견하고 미래를 예측한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문학에서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고전을 읽는 일이 그러하니까.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의 첫 번째인 셰익스피어를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다.

 

 

 

 

 나는 셰익스피어에 대해 잘 모른다. 욕심을 내 구매한 그의 작품이 몇 권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그의 작품을 많이 읽지도 않았거니와 그의 희곡을 무대에 올린 연극도 관람한 적이 없다. 그저 잘 알려진 명성 그대로 작품 가운데 희극 정도만 기억할 정도다. 어쩌면 이렇게 모르는 독자이기에 이 책을 통해 셰익스피어를 여행하는 길에 동행하는 게 즐거웠는지도 모른다. 이 책은 어떤 면에서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대한 해석이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의 무대가 된 지역을 여행하는 여행서이기도 하다.

 

 책은 셰익스피어의 고향 스트랫퍼드와 그가 활발하게 활동한 런던의 여정, 『햄릿』과 『끝이 다 좋으면 다 좋다』의 무대인 파리에서 중서부 유럽인 빈으로의 여정에 이어 『한여름 밤의 꿈』의 무대인 아테네로 이어진다. 저자의 말대로 끌리는 작품과 지역을 먼저 골라 읽어도 무방하다. 물론 나는 저자의 일정을 고스란히 따라 읽었다. 내게는 셰익스피어의 고향인 스트랫퍼드로 가는 길, 그리고 그의 생가, 그의 아내 앤 해서웨이의 생가에 대한 소개가 흥미로웠다. 셰익스피어가 떠난 지 400년이 되었지만 그 안에서 살아 숨 쉬는 그를 발견할 수 있다니 근사하지 않은가. 고향으로 돌아와 작성한 유서가 134통이나 되었다는 것도 정말 놀라웠다. 죽음 후까지 계획한 철두철미한 셰익스피어라고 해야 할까.

 

 모든 작품에 대한 해설과 도착하는 지역에 대한 저자의 감상이 완벽한 하모니를 이룬다. 저자가 얼마나 셰익스피어를 사랑했고 사랑하는지 충분히 전해진다. 셰익스피어의 은유적 표현에 감춰진 다른 은밀한 부분을 통해 작품 속 인물의 갈등과 욕망을 곁들여 설명한다고나 할까. 작품마다 짤막하게 소개하는 대사를 통해 나는 연극의 한 장면을 상상하고 관객이 될 수 있다. 나에게 특별하게 다가온 건 괴테가 자신의 소설에서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대해 언급했다는 점과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과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에서 변신을 비교한 부분이다.

 

 카프카의 ‘변신’이 인간관계의 심리적 그늘을 곤충의 이미지에 응축한 것이라면, 셰익스피어의 ‘변신’은 억압된 욕망을 동물적 이미지로 표출한 것이다. (173쪽)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 있는 위대한 거장을 한 권의 책으로 다 만나볼 수 있다는 건 대단한 착각이다. 겨우 이 책을 읽고 셰익스피어에 대해 뭐라 말을 꺼내기도 매우 부족하고 부끄럽다. 때문에 셰익스피어를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는 버거울 수도 있다. 반대의 경우, 그러니까 이미 훌륭한 독자로 셰익스피어를 잘 아는 이라면 아주 황홀한 여행서가 된다. 책에는 셰익스피어 사극의 특징과 그의 시 세계, 셰익스피어 문학의 특징과 현재적 의미에 대한 글도 수록해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셰익스피어를 여행하는 이 행복한 여정이 끝나는 게 몹시 아쉬울 것이다.

 

 대중성이 풍부하다’는 말은 일차적으로 당대의 대중적 현실과 일상적 생활 감각이 풍부하게 녹아들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예술성을 담보하지 못한 대중성은 문학작품을 통속적 수준에 머물게 한다. 대중성과 예술성은 하나가 결핍되면 다른 쪽도 상처를 입게 되는 그런 관계 속에서 작동한다. 셰익스피어가 빚어낸 대중성과 예술성 사이의 상호작용을 세계문학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진폭이 크다. 그래서 그의 작품세계는 당시 대중의 환호와 지금 비평가의 탄성이 동시에 터져 나오는 시공간이 된다! (프롤로그 중에서, 3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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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8-05-04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불지만 햇볕이 좋은 오후입니다.
바람은 여전히 세게 불고 있어요.
자목련님, 즐거운 금요일 보내세요.^^

자목련 2018-05-04 17:33   좋아요 1 | URL
어른이지만 어린이날을 즐겁게 보내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