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진 자리에 연두가 가득하다. 여리고 단단한 연두 물결이 눈을 맑게 밝히는 듯하다. 아무도 모르게 숨어 있던 건 아닐 텐데, 갑자기 짠하고 나타난 것만 같다.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공간에서 기지개를 폈을지도 모른다. 잠깐 일이 있어 떠난 그곳에서 이곳으로 온 선생님과 통화를 했다. 서로 다른 공간에서 우리는 서로를 그리워했고 마음을 전했다. 이곳에서 그곳으로, 그곳에서 이곳으로 마음이 전해진다는 건 아무렇지 않았던 하늘에 무지개가 뜨는 것 같은 일이다. 선생님을 뵐 수 없었지만 아쉬움도 달콤했다. 우리는 서로 다른 공간에서 산다. 당신이 사는 그곳의 도시 이름만 들어도 나는 당신을 생각한다. 당신이 좋아하는 꽃이 피는 계절이 오고 있다는 게 신나고 즐겁다. 당신도 마찬가지 일 터.

 

 이번 주는 생일 주간이다. 그러니까 23일은 책의 날이었다. 책의 생일날에 축하 선물은 내가 받은 것이다. 착한 가격의 책 『서로의 나라에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선물한 책은 김건우의 『대한민국의 설계자들』. 읽고 있는 책은 책의 생일 주간에 맞게 황광수의 『셰익스피어』다.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 클림트도 읽고 싶다. 잠시 주춤했던 읽고 싶은 책 목록이 늘어난다. 지인이 추천한 이갑수의 『편협의 완성』,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의 첫 시작인 편혜영의 『죽은 자로 하여금』, 곧 피어날 작약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유희경의 시집『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까지. 구매 목록으로 변경될지는 미지수다.


 

 

 

 

 

 

 

 

 

 

 얼마 남지 많은 4월의 날들을 손으로 꼽아본다. 4월에는 감정을 흔드는 일이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확인 사살 같은 것이었다.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그리고 예상했던 일을 맞닥뜨리는 건 힘들다. 감정을 조절할 수 있을 거라 연습하고 다짐했지만 말이다. 상상했던 것과 현실, 그 감정의 온도는 다르다. 한동안은 그럴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4월, 내가 사랑하는 4월, 올해의 4월은 좀 잔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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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이라고 말하면 여름으로 변할 것 같은 날씨다. 날씨만 그런 게 아니라 입맛도 그렇다. 나는 벌써 냉면과 비빔면을 챙겨 먹고 있다. 하지만 커피는 아직 뜨겁게 마신다. 곧 얼음을 동동 띄운 커피를 마시겠지. 봄, 여름, 가울, 겨울 사계절이 있어 계절마다 제철 음식을 먹지 않으면 서운한 마음이 들기 시작한 지 오래되었다. 대형마트에만 가면 과일, 채소를 언제든지 먹을 수 있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땅에서 바로 채취한 것이 주는 기쁨을 만끽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올봄에는 쑥개떡을 먹지 못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손바닥 반 정도의 쑥개떡을 먹은 게 전부다. 향긋한 쑥과 콩을 버무려 만든 촌스러운 모양새의 떡을 맘껏 먹지 못하고 여름을 맞을 것 같다. 항상 누군가가 내밀어 덥석 받기만 했던 것. 내 손으로 쑥을 뜯고 콩을 불려 반죽해서 먹은 기억은 없다.

 

 음식이라는 게 직접 손으로 재료를 손질하고 요리를 해서 먹어야 제맛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지만 막상 요리를 하려면 겁부터 난다. 매일 먹는 밥과 김치, 찌개, 반찬 가운데 밥과 찌개 정도만 직접 하는 것이다. 혼자 먹을 때는 찌개를 끓이는 일도 하지 않는다. 저마다 바쁜 일상을 보내기에 가족 구성원 전부가 밥을 먹는 때도 주말 오후, 치킨이나 피자를 배달해서 먹는 야식이 전부다. 먹는다는 일이 정말 부담스러웠던 기억은 병원 식사다. 아주 정확한 시간에 맞춰 하루 세 번 먹어야 하는 밥, 열심히 먹기를 바라는 간호하는 이의 눈빛. 가족이나 친구가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건강에 좋으니 먹어야 한다고 무조건 권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했을 정도다. 그들이 좋아하지 않는 음식을 맛있게 먹을 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먹는 즐거움을 함께 나누는 시간에는 조금은 수선스러운 대화가 있고 함께 하지 못한 이들에 대한 그리움, 아쉬움이 있다. 음식과 요리를 테마로 한『파인 다이닝』에서도 그러하다. 음식을 준비하는 시간에는 그것을 먹을 이를 생각하면 냄새가 기쁘고 소리도 즐겁다. 한 그릇의 미역국을 끓이기 위해 새벽에 일어나 정성을 들이는 일은 한 사람을 위한 것이다. 수녀가 된 ‘나’가 둘째 아이를 낳은 언니를 위해 미역국을 끓이면서 들려주는 최은영의「선택」에는 비정규직 열차 승무원의 치열한 투쟁을 배경으로 한다. 비정규직 승무원의 파업이 시작되고 그 현장이 어땠는지, 그들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이 어땠는지, 언니의 삶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나’의 이야기. 곳곳의 파업과 시위 현장, 그곳에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이들과 그들의 가족을 생각한다. 식탁에 모여 하루 일과를 공유하며 밥을 먹는 보통의 일상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란다.

 

 작은 섬의 카페를 배경으로 하루 동안 다양한 커피의 종류와 맛을 소개하며 커피를 주문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옴니버스 형식으로 그들의 절절한 사연을 들려주는 이은선의「커피 다비드」는 커피를 부른다. 고단한 하루, 피곤을 덜어 줄 커피와 맞닿은 짧은 순간의 위로라고 할까. 직장에서의 업무로 인해 늦은 귀가를 하는 싱글맘의 아이를 돌보는 베이비시터로 일하는 승혜와 연인 미오의 관계와 심리를 그려낸 윤이형의「승혜와 미오」에는 ‘밀푀유나베’란 음식이 등장한다. ‘밀푀유나베’를 만든 승혜는 엄마랑 같이 먹겠다는 아이와 함께 아이 엄마를 기다린다. 연인인 미오가 고기를 먹지 않기에 승혜도 자연스레 좋아하는 고기를 멀리한다. 고기를 먹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면서도 말이다. 퇴근한 아이 엄마는 돌아가려는 승혜에게 같이 먹기를 제안하고 승혜는 주저하다 음식을 먹는다. 너무 맛있는 음식이 아니라서 승혜는 미오에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먹어보지 않았을 때는 몰랐을 맛이다. 모든 음식이 상대의 마음을 지레 짐작하지 말고 물어봐야 한다. 미오에 대해 혼자 판단하고 속상해하며 거리를 느낀 승혜는 이제 미오와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사랑을 표현하지 않을까.

 

 승혜는 국물을 한 숟갈 더 떠서 입에 넣었다. 이런 맛, 궁금했는데, 생각과는 달랐다. 심심하고, 슴슴하고, 대단한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너무 아무렇지 않은 맛이었다. 그 아무렇지 않음 때문에, 실망스러우면서도 안심이 되는 그 별것 아님 때문에, 자꾸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승혜와 미오」, 99쪽)

 

 같이 밥을 먹으려고 배고픔을 참으며 엄마를 기다리는 소설 속 어린아이에게서 저녁을 준비하고 바깥에서 안으로 돌아올 이들을 기다리는 마음을 본다. 밥벌이를 위해 집을 나섰지만 제대로 된 밥은커녕 간편한 도시락이나 김밥 한 줄로 끼니를 때우는 이들을 안쓰럽게 여기는 마음. 그것은 엄마의 마음일까. 갓 지은 밥에서만 취할 수 있는 냄새가 있듯 추억의 맛은 아무리 똑같이 재현해도 그 시절의 맛을 데려올 수 없다. 그 맛을 지울 수 없어 함께 먹었던 이들을 찾고 그리움에 빠져든다. 그래서 황석영의  산문『황석영의 밥도둑』에서 나는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맛, 이름도 생소한 음식이 등장하고 경험하지 못한 시대의 맛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은 기분이 듣는 이유다. 내가 맛있게 먹은 음식을 조카는 알지 못하고 권해도 먹으려 하지 않는다. 많은 시간이 지나면 나의 맛을 조카가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 역시 돌아가신 엄마가 맛있게 드시던 음식을 그때는 손에 대지도 않았으니까.

 

 내가 잃어버렸다고 하는 것은, 지금은 먹을 수 없다거나 만들 수가 없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그때의 맛이 되살아나지 않는다는 얘기다. 사람이 변했든지 세월이 변했든지 했을 터이기에. (83쪽)

 

 먹을거리가 충분한 시대를 살고 있지만 여전히 너무 비싼 음식은 자주 먹지 못한다. 채널을 돌리면 먹방을 마주하는 시대, 먹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언제부턴가 나도 몸에 좋은 음식을 찾는다. 비타민을 챙기기 시작했고 가을의 끝 무렵에는 겨울을 대비해 홍삼즙을 들인다. 그리고 돌아가신 엄마처럼 친구나 가족과의 통화 끝에는 항상 밥은 잘 챙겨 먹느냐고 묻는다. 우리는 살기 위해 먹는 것일까, 먹기 위해 사는 것일까. 가장 단순한 질문을 어렵게 생각하는 시대에 사는 건 아닐까. 한 그릇의 뜨거운 밥을 짓기 위한 첫 번째 과정, 모내기를 준비하는 눈에 가득한 물을 보면서 김훈의 이런 문장이 떠오르는 건 왜 일까.

 

 봄에 새잎 돋는 나무를 바라보면서 나는 늘 마음이 아팠다. 나무들은 이파리에 엽록소가 박혀 있어서 씨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으면서 햇빛과 물을 합쳐서 밥을 빚어낸다. 자신의 생명 속에서 스스로 밥을 빚어내는 나무는 얼마나 복 받은존재인가. 사람의 밥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굴러다닌다. 그래서 내 밥과 네 밥이 뒤엉켜 있다. 핸드폰이 필요한 것이다. 엽록소가 없기 때문에 핸드폰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다들 핸드폰을 한 개씩 차고 거리로 나아간다. (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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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8-04-17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서 제일 맛난 음식은 직접 자기손으로 만든 음식이라고 영화 속 대사가 떠오르네요. 리틀 포레스트에서 여주인공이 그래요. 남이 해준 밥이 제일 맛나다는 요즘 여자들 우스개와는 달리요.

자목련 2018-04-17 18:39   좋아요 0 | URL
영화를 보지 못했지만 영화 속 요리를 해서 먹는 장면을 보면김태리처럼 직접 요리하고 싶어질 것 같아요. 저도 남이 해준 밥이 제일 맛있어요, ㅎ

서니데이 2018-04-17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날씨가 낮에 따뜻한 시간이 있긴 하지만, 바람이 차갑게 불어요.
그래도 비빔면은 맛있고, 가끔 덥다고 느껴지는 순간엔 아이스커피도 좋지만, 먹고나면 금방 추운 날씨예요.
자목련님, 저녁 맛있게 드시고,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자목련 2018-04-19 16:48   좋아요 0 | URL
일교차가 심한 걸 보면 뒤늦은 꽃샘추위인가 싶어요. 눈에 닿은 연두가 예쁜 날들입니다. 서니데이 님도 신나는 오후 보내세요^^
 

 

 꽃을 보러 간다는 건 어떤 볼 일을 보러 나가는 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연인을 만나러 가는 것처럼 설레는 일이고 나는 꽃이 아님에도 꽃단장을 하는 시간이 길어진다. 꽃을 피운다는 것에 대한 경이로움과 지는 꽃을 바라보는 안타까움을 감출 수 없다.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는 여유로움, 그리고 마주한 꽃터널. 가까운 곳에 이렇게 멋진 장소가 있었는데 나는 왜 이제야 이 꽃들을 만나러 왔을까. 사진을 잘 찍고 싶다는 마음이 든 순간이다. 늦은 오후에 누리는 호사였다.

 

 

 

 

 

 아무것도 내어주지 않고 이렇게 귀한 것을 받아도 되는 것일까. 게으름과 우울, 무기력으로 봄을 앓던 나는 미안한 마음뿐이다. 꽃이 지고 초록의 옷을 입은 터널을 다시 만나러 오겠다고 다짐했다. 꽃 피는 봄이 아니라 사계절 내내 그곳에 있을 나무를 보러 오겠다고. 집으로 돌아와 아파트 단지를 보니 자목련도 활짝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서니 더욱 우아해 보였다. 거기 있다는 게, 정말 고마웠다. 항상 그 자리에 있다는 건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주말에는 비가 오고 꽃비가 내릴 것이다. 그리고 봄은 급하게 떠날지도 모른다. 붙잡을까 말까 망설이는 사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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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8-04-13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벚꽃과 자목련이네요. 여긴 목련이 이제 피는 중이고, 아직 자목련은 조금 분홍빛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이번주도 벌써 금요일, 자목련님,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자목련 2018-04-16 14:26   좋아요 0 | URL
주말에 내린 비로 꽃이 지고 연두 잎사귀가 환해요. 새로운 한 주 활기차게 보내세요^^

붕붕툐툐 2018-04-13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이 찍으신 자목련 사진. 우힛~^^

자목련 2018-04-16 14:25   좋아요 0 | URL
^^*
붕붕툐툐 님, 평온한 오후 보내세요^^

2018-04-13 2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16 14: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름다운 문장을 읽고 감동하는 건 쉽다. 그 뒤에 감춰진 슬픔과 고통을 제대로 가늠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슬픔과 고통이기에 섣불리 안다고 할 수 없고 안다고 해서도 안된다. 전쟁을 소재로 한 소설을 읽은 경우 특히 그러하다. 아무리 소설이라 해도 우리는 이미 그 전쟁을 알고 있지 않은가. 전쟁터에서 벌어지는 잔혹한 일상과 광기의 역사를 글로 읽어내는 일은 힘겹다. 누군가의 삶과 죽음이 거기 있기에 말이다. 리처드 플래너건의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을 읽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주인공 도리고가 최초의 기억 속 빛을 떠올리는 아름다운 장면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전쟁과 함께 살아가는 지독히 아픈 삶을 들려준다.


 소설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생생한 전쟁의 현장을 중계하는가 하면 전쟁의 모든 기억은 잊은 듯 살아가는 전후 생존자의 현재를 보여주는데 그것은 마치 전쟁은 꿈이었다고 말하는 듯하다. 어쩌면 도리고를 비롯한 모두는 자신의 몸과 영혼이 기억하는 전쟁이라는 꿈을 꾸었다고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제2차 세계대전에 군의관으로 참전한 도리고 앞에 나타난 동백꽃의 여인 에이미와의 만남만이 꿈이 아닌 현실은 아니었을까. 도리고에게는 약혼자 엘라가 있었고 에이미에게는 남편 키스가 있었다. 비밀스럽게 만남을 유지하는 도리고와 에이미의 사랑은 전쟁이라는 배경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현실은 죽음으로 채워진 전쟁터였다.

 

 도리고의 부대는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고 타이-미얀마 간의 철도 건설의 노역에 투입되었다. 의사였던 그는 직접 노역 현장에 동원되지 않았고 환자를 돌봤다. 콜레라와 괴질과 각기병으로 죽음의 사투를 벌이는 병사를 살리기 위해 그들을 현장으로 내모는 일본 장교 나카무라와 대치한다. 무조건 철도(라인)를 건설해야 한다는 일본군에게 폭력은 의지와 실천이었다. 다치고 병든 포로를 철로로 이끌어내야만 했다. 포로들에게 같은 공간에서 먹고 자며 동료의 죽음을 목도하는 일은 삶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살아남은 자들에게 가장 선명하게 남은 기억도 동료의 죽음이었다. 함께 살아남아서 고향으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기를 염원한 이들의 환영이 그들 곁을 맴돌았다.  

 

 인간은 많은 것 중 하나에 불과하며, 이 모든 것이 살기를 갈망한다. 그리고 삶의 가장 고귀한 형태는 자유다. 인간이 인간답게, 구름이 구름답게, 대나무가 대나무답게 사는 것. (375쪽)


 라인은 망가졌다. 모든 선은 궁극적으로 그렇게 되기 마련이다. 모든 노고가 허사로 돌아갔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사람들은 계속 의미와 희망을 갈망했지만, 과거 기록은 오로지 혼란만이 가득한 흐릿한 이야기에 불과하다. (375쪽) 


 전쟁이 끝나고 살아남은 자의 삶을 어떻게 지속되었을까. 도리고를 비롯한 포로들은 각자의 삶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오물과 진흙탕에서 어떻게 견뎌냈는지 말하고 싶지 않았다. 동료의 죽음에 나팔을 부는 것으로 애도하며 지낸 시절은 절대 기억 밖으로 나와서는 안 되었다. 일본인 나카무라는 전범 재판에 회부될까 두려워 과거와는 다른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착한 아내를 만나 딸을 낳고 좋은 아빠가 되기로 한다. 고타 대령을 만나 도움을 받았지만 가족에게 진실을 밝힐 수는 없었다. 일본 장교로 포로를 학대하던 그 시절은 그게 선(善)이었다고 다짐하면서 말이다. 그것만이 나카무라를 살 수 있게 만든 힘이었을 것이다.    


 그가 무엇보다도 사랑한 것이 바로 시詩인데, 천황 폐하는 그 자체로서 시였다. 어쩌면 가장 위대한 시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는 우주를 모두 포함했으며, 모든 도덕과 고통을 초월했다. 위대한 예술이 모두 그렇듯이, 천황 폐하라는 시 또한 선과 악 너머에 있었다. (478쪽)


 나카무라가 그렇게 자신을 지키며 살았듯 도리고 역시 그러했다. 완벽한 아내와 가정, 성공한 외과의사이자 전쟁영웅으로 자신을 감추고 포장하며 살았다. 에이미를 가슴에 품고 살면서도 아닌 척 연기했다. 술을 마시고 여자를 만났지만 사랑이 아닌 단순한 유희였다고 자신했다. 현재의 고독과 허무의 허기를 달래는 유일한 방법은 지난 삶을 회상하는 것뿐이었다. 전쟁이라는 트라우마를 치유할 수 있는 게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뿐이라니 이 얼마나 잔인한가.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생각한다. 전쟁에 휩싸인 삶, 전쟁이라는 감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리처드 플래너건의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을 읽으면서 앤서니 도어의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과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를 생각한다. 공교롭게도 모두 문학상 수상작이다. 풀리처 상과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내일을 기대할 수 없는 전쟁, 언제 폐허가 될지 모르는 순간을 견디는 인물을 그렸다. 리처드 플래너건과 헤르타 뮐러의 소설에는 포로의 시간이 겹친다. 앤서니 도어와 헤르타 뮐러의 소설에는 소년과 소녀가 등장한다.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속 도리고에 비하면 아이들이 감당할 공포는 우주 그 자체였을지도 모른다. 더욱이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속 주인공은 눈먼 소녀 마리로르와 고아 소년 베르너다.


 전쟁이라는 가장 참혹함을 견딜 수 있었던 건 그들을 위로할 누군가(무엇)가 있었기 때문이다. 도리고에게는 병사들이, 마리로르에게는 라디오(소리)였고 레오에게는 손수건이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를 기억하는 일. 도리고가 가슴에 품은 여인 에이미, 눈이 보이지 않는 딸을 위해 집과 거리를 모형으로 만든 아버지, 레오를 기다리는 가족. 세 권의 소설 모두 아름다운 문장이 가득하다. 너무도 섬세하고 생생하게 담아냈다. 아름답지만 너무도 아픈 소설들이다. 소설이면서도 소설이 아니라서 독자는 읽으면서 고통을 느낀다. 누군가의 가족이 전쟁의 현장에 있었다는 걸 알기에. 돌아오지 못한 이들이 있다는 걸 알기에.

 

 음악이 라디오에서 나선을 그리며 흘러나온다. 침대 겸용 소파에서 꾸벅꾸벅 조는 것, 따뜻하게 있으면서 배불리 먹는 것,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려 어딘가 다른 곳으로 데려가 주는 문장들을 만끽하는 기분은 황홀하기 그지없다.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1권, 207쪽)

 

 너는 돌아올 거야. 그 말을 작정하고 마음에 새긴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수용소로 가져갔다. 그 말이 나와 동행하리라는 것을 몰랐다. 그러나 그런 말은 자생력이 있다. 그 말은 내 안에서 내가 가져간 책 모두를 합친 것보다 더 큰 힘을 발휘했다. 너는 돌아올거야는 심장삽의 공범이 되었고, 배고픈 천사의 적수가 되었다. 돌아왔으므로 나는 말할 수 있다. 어떤 말은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 (『숨그네』, 17쪽)

 

 전쟁은 끝났다고 이제는 그저 과거일 뿐이라고 누군가는 말하지만 여전히 누군가의 일상을 지배한다. 피할 수 있었으면 피하고 싶었을 삶이었을 것이다. 숨 막힐 듯 호흡을 흔드는 문장 속으로 빠져들다가도 문득 그들을 생각한다. 내가 누리는 이 안온함, 내가 보는 세상의 빛, 깊게 잠드는 밤을 알지 못하는 그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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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에는 간단한 예배를 드리고 떡국을 먹었다. 굴을 넣고 끓인 시원한 떡국이었다. 굴을 좋아하지 않은 나는 굴을 골라내어 동생의 그릇에 옮겼다. 점심은 먹은 후 근처에 사시는 고모 댁으로 향했다. 신선하고 큼직한 굴을 전해드리기 위함이다. 언제나 그렇듯 집안은 정결했고 기어코 깍두기를 담가 주시겠다는 고모의 말씀에 저녁까지 먹고 돌아왔다. 작년과 다르지 않았다. 평창 동계 올림픽 경기를 시청하는 것으로 밤은 채워졌다.


 낮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동생과 나누는 대화와 고모 댁에서 사촌 오빠와 나누는 이야기는 모두 과거의 것이었다. 우리는 이제 현재나 미래가 아닌 과거를 이야기하는 나이가 되었다. 엄마에 대한 기억은 저마다 달랐다. 언니와 내가 기억하는 엄마는 한 번도 욕을 하거나 매를 들지 않았는데 남동생은 엄마한테 많이 혼나고 매도 맞았다고 기억했다. 딸 셋을 낳고 얻은 막내아들이라서(오빠가 있지만 아들을 하나 더 원했기에) 온갖 귀여움을 독차지했지만 그래서 떼도 많이 부렸다. 우리는 자주 울었던 동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는 “엄마 살아 계실 때는 하지 않았던 말들을 엄마가 돌아가시니 하고 있네, 엄마 보고 싶네”로 끝이 났다. 엄마의 삶을 기억하고 추억하는 시간, 명절이라 그랬을까.


 ‘엄마’라는 말 때문인지 잠깐 시청한 드라마 <마더>속 엄마들이 생각난다. 딸을 살리기 위해 딸을 버려야만 했던 엄마, 정성을 다해 딸을 키운 엄마, 엄마가 되지 않겠다던 다짐을 깨고 엄마가 된 엄마까지. 엄마를 닮은 시라고 하면 억지일지도 모르겠다. 김소연의 「너를 이루는 말들」을 옮기고 읽는다.

 


 

한숨이라고 하자

그것은 스스로 빛을 발할 재간이 없어

지구 바깥으로 맴돌며 평생토록 야간 노동을 하는

달빛의 오래된 근육


약속이라고 해두자

그것은 한 번을 잘 감추기 위해서 아흔아홉을 들키는

구름의 한심한 눈물


약속이 범람하자 눈물이 고인다 눈물은 통곡이 된다

통곡으로 우리의 간격을 메우려는 너를 위해

벼락보다 먼저 천둥이 도착하고 있다

나는 이 별의 첫번째 귀머거리가 된다

한 도시가 우리의 손끝에 빠르게 녹슬어간다


너의 선물이라도 해두자

그것은 상아에게 물어뜯긴 인어의 따끔따끔한 걸음걸이

반짝이는 비늘을 번번이 바닷가에 흘리고야 마는

너의 오래된 실수


기어이

서글픔이 다정을 닮아간다

피곤함이 평화를 닮아간다


고통은 슬며시 우리 곁을 떠난다


소원이라고 하자

그것은 두 발 없는 짐승으로 태어나 울울대는

발 대신 팔로써 가 닿는 나무의 유일한 전술

나무들의 앙상한 포옹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상처

나무 밑둥을 깨문 독사의 이빨 자국이라 하자

동면에서 깨어나 허기진 첫 식사라 하자

우리 발목이 그래서 이토록 욱신욱신한 거라 해두자



 

 어제 통화를 한 친구와는 건강과 나잇살이 붙는다고 말하면서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해 걱정하다가도 알 수 없으니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지 말고 그저 오늘을 잘 살자고 웃으며 안부를 나눴다. 반가운 한귀은의 『오늘의 나이, 대체로 맑음』이라는 책 제목이 생각나는 건 당연하다. 이상하게 이원의 『최소의 발견』과 함께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이원의 산문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단정하게 해주는 힘이 있다고 할까. 어쩌면 밤에 읽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좋다는 말이다. 한귀은의 에세이도 그럴 것이다. 언제나 그러했듯, 그녀의 문장을 나는 기대하고 흠모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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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18-02-19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의 글도 읽으면 늘 마음이 정리정돈 되는 느낌인데 고모님댁도 정결하단 문장이 퍽 와닿습니다^^
형제분이 많으시네요?
전 제 밑으로 두 남동생만 있어 늘 엄마 대행을 해야만 하는 심적 의무감이 생기곤 하더라구요.
그래서 늘 잔소리만 해대곤 합니다.
나이가 잔소리를 늘게 하는건지,
원래 그랬었던 건지......
암튼, 올 한 해는 더 멋지게 살아볼 일입니다.^^

자목련 2018-02-20 11:21   좋아요 0 | URL
5남매라서 어린 시절에는 정말 싫었어요. 근데 자라고 보니 다섯도 많은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큰언니가 하늘나라로 떠나니 더욱 그러해요. 밑으로 남동생이 하나 있어서 저도 종종 잔소리를 해요, ㅎ
책읽는나무 님의 멋진 한 해 응원할게요, 더불어 저도 멋지게 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