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글로 나를 표현하고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 말은 어딘가에 소속되었다는 걸 확인시키기도 한다. 외모는 한국인과 똑같지만 한국어를 사용하지 못하는 이들은 입양, 이민자, 혹은 이방인이라고 판단한다. 반대로 외국인의 외모를 지녔지만 유창하게 한국어를 구사하는 이들에게 우리는 한국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삶의 소속감은 언어에서 오는 것일까. 떠났거나 떠나온 이들에게 말은 어떤 의미일까. 이곳과 그것을 나누는 선이 될까. 그 경계에 있는 삶은 어디에서 안정된 구성원으로 살고 싶은 걸까.

 

 임재희의 소설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폴의 하루』속 인물은 떠나온 이들이거나 떠나온 곳으로 돌아온 이들이다. 소설의 제목처럼 말하자면 그곳에 속하거나 이곳에 속하는, 혹은 그곳에도 속하지 못하고 이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삶에 대한 이야기다. 피부색이 같고 외형적으로 닮았지만 다른 언어를 쓰거나 같은 언어를 쓰더라도 생활 습관이나 사고가 달라 어울리기 힘든 사람들의 외로움과 고독이 가득하다. 어쩌면 그것은 작가 임재희의 고유한 감성이 묻어있기에 가능한지도 모른다. 임재희의 소설을 처음 읽었고 작가의 말을 읽기 전에 수록된 9편으로 인해 그녀가 타국에서 살거나 돌아왔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은 결국 자신의 일부를 드러내기 마련이니까.

 

 표제작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폴의 하루」은 소설집 전체의 분위기를 집약할 수 있다. 한국에 살고 있는 엄마를 만나러 온 폴은 4박 5일의 일정으로 한국을 둘러보고 돌아가려 한다. 스탠바이 티켓 때문에 공항 근처에서 대기해야 하는 폴은 자신을 대하는 이들에게서 비슷한 동질감을 느끼면서도 그들에게 완전히 속할 수 없는 자신을 확인한다. 같으면서 다르고 다르면서 같은 것, 그것은 때로 위로가 되면서도 낯설다. 폴의 경우는 잠시 다니러 온 경우지만「히어 앤 데어」의 동희나 「천천히 초록」의 나는 다르다. 한국을 떠났다가 돌아온 동희는 계속 한국에서 살 수도 있고 미국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왜 돌아왔냐고 묻는 이들에게 동희는 답을 하지 못한다. 그녀 스스로도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곳을 떠난 이들은 어떨까? 좀 더 나은 삶을 위한 선택으로 떠났지만 그곳에서의 하루하루는 고단한 삶이다. 마노아에 집을 짓고 정원을 가꾸며 살기를 바랐던 「로사의 연못」속 부부는 마침내 꿈을 이룬다. 완벽을 위해 남편은 연못을 만들고 친구들을 불러 모으지만 그 안에서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와 마주한다. 그것은 그들이 진실로 바랐던 건 그런 게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떠난 곳을 향한 그리움을 가슴에 묻고 정착하기 위해 애를 쓰는 이들의 모습도 다르지 않다. 어머니를 모시고 미국에 사는 동생 부부를 만나러 온 「라스트 북스토어」의 나는 헌책방에서 한국어를 건네는 여자에게 설명할 수 없는 위로를 받는다. 우울증을 앓는 올케와 가장의 무게를 견디며 살아가는 동생에게도 누군가 그런 위로를 전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누군가 우리의 끝, 세상이라는 이름의 아찔한 절벽 끝에 묵묵히 서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미안하리만치 깊은 위안을 받았다. (85쪽)

 

 9편 중에서 내 마음을 흔든 건 남편과 이혼하고 무작정 다른 언어를 쓰는 곳으로 떠나온 세레나의 사연「분홍에 대하여」와 미국으로 입양된 입양아 압시드가 들려주는 이름의 이야기「압시드」였다. 흐릿한 기억 속 생부가 자신을 입양 보낼 당시 알고 있던 알파벳 ABCD란 이름을 지었을 때 그 안에 담긴 사랑을 알기에 압시드는 그 이름을 사랑한다. 한국 이름 아닌 영어 이름을 지어주며 미국에서 잘 지내기를 바라는 마음, 버려진 아이가 아니라 사랑받는 아이였다는 사실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미국에서 조화로 된 꽃을 만드는 세레나에게 말은 사랑이었고 존재의 이유였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곳에서 세레나가 아는 말과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난다면 그녀에게 세상은 두렵거나 무서운 곳이 아닐 터였다. 그러니 꽃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나’와 세레나의 말은 전혀 다른 언어였다. 그러니 노신사 주문한 핑크 장미를 세레나에게 핑크로 전했을 뿐이다. 오직 세레나만이 분홍과 핑크를 구분할 수 있었다. 핑크와 분홍을 구분할 수 있다는 건, 그 안에 담긴 감정을 헤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세레나가 입술을 오므리고 분홍이라고 말했을 때 나는 분명히 그걸 느꼈다. 핑크가 절정으로 치닫던 어느 순간들의 화려함이라면 분홍은 붉은빛의 모든 열기가 다 빠지며 남긴 지울 수 없는 흔적이었다. (168쪽)

 

 작가 임재희는 한국을 떠나 오랜 시간 타국의 삶을 살았다. 작가에게 한국말은 애틋하지만 서툴고 어려울 것이다. 소설을 쓰는데도 마찬가지 일터. 그럼에도 한국어로 소설을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임재희의 소설은 중국에 살면서 모어(母語)인 한글로 소설을 쓴 작가 금희(錦姬)의 『세상에 없는 나의 집』가 내내 겹쳐 보였던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금희의 소설집에 나오는 인물은 한족, 조선족, 북한을 탈출한 이들이다. 경제적인 이유로 한국과 조선을 오가는 사람들, 자유를 찾아 북한을 떠났지만 주변의 불편한 시선을 감수하며 살아가는 이들이다. 어디에 있든 그곳 사람들과 온전하게 어울리지 못하고 그 삶에 녹아들지 못한다. 누군가는 두 가지 언어를 사용할 줄 안다고 부러워하지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해 흔들리는 정체성으로 힘들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가까운 곳에서 조선족인, 탈북민을 만나면서도 우리는 그들과 선을 긋기도 한다. 보이지 않을 거라고 여기면서. 하지만 그들은 보고 느낀다.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사람이 있을까.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바로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그 자체일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한 회색 지대들, 그 지대마다 완전히 그 지대에 속하는 것들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두 개의 완전 수 사이에 확실하게 존재하는 무수한 소수들처럼. (세상에 없는 나의 집, 21)

 

 단 한 번의 이동도 없이 나고 자란 곳에서 죽음을 맞는 이는 몇이나 될까. 우리의 삶은 가깝거나 먼 곳으로 이동한다. 이민이나 유학처럼 타국으로 이동, 공간의 이동뿐 아니라 가족을 떠나는 이동도 있고, 헤어짐으로 인한 관계의 이동도 있다. 이곳에서 그곳으로 떠났다가 이곳으로 돌아오고,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니 소설 속 그들에게 어딘가에 속하거나 정착하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다. 지금 머문 그곳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아니까. 그곳이 어디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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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8-10-09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핑크와 분홍은 비슷한 색을 말하는 것 같은데, 글자가 달라서 느낌이 다른가봐요.
자목련님, 한글날 휴일 즐겁게 보내셨나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자목련 2018-10-11 07:19   좋아요 0 | URL
소설을 읽고 분홍과 핑크, 그 느낌은 어떻게 다를까, 저도 잠깐 생각했어요. ㅎ
날씨가 많이 추워졌어요. 따뜻한 하루 시작하세요^^
 

 

 추석 당일에는 예배를 드리고 아침을 먹었다. 멀리서 온 작은 집식구가 만들어 온 음식을 함께 먹었다. 작은 집식구들은 아침을 먹자마자 길을 나섰고 우리는 점심까지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후에는 영화를 보러 나갔다. 영화관에는 삼삼오오 우리처럼 가족들이 많았다. 영화는 나쁘지 않았고 돌아오는 길에는 달을 찾았다. 아파트 동 사이로 달이 떠올랐다. 손에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까맣고 까만 하늘에 둥근 달이 참 편안해 보였다. 정말 그 어딘가 토끼가 살고 있을 것 같았다.

 

 남은 연휴에는 게으름을 부렸고 기름진 음식을 먹었다.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하는 사촌 오빠에 대해 말을 나누고 극장에서 보지 못한 영화를 보았다. 얼굴이 달처럼 커졌고 몸무게는 늘었다. 명절이니까, 괜찮다고 어젯밤에는 잠들기 전에 혼자 중얼거렸다.

 

 뒤늦은 명절 인사를 문자로 주고받고 9월이 아닌 10월 달력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10월 할 일을 기록하고 병원 예약 일도 챙기고 알람을 설정하고 친구의 생일을 확인했다. 블로그에서 알려주는 지난날의 기록도 읽어보니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르지 않다는 건 좋은 일일 수도 있고 좋지 않은 일일 수도 있다. 좋지 않더라도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이 대상 수상작, 우수작품상으로 엮인 신간에 대한 문자를 여러 통 받았다. 한 권으로 충분하다는 소식이나 다름없었다. 걷기 좋은 계절 걸어본다 시리즈도 눈에 들어온다. 베란다에 창문을 열고 고개를 들어 달을 본다. 손에 잡힐 것 같지만 닿을 수도 없다. 어떤 일이 그러하듯이. 달을 보는 일, 세상사와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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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꾸 뭔가를 쓰는 날에는 소비해야 할 감정이 있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고 남아 있는 감정이라고 할까. 여하튼 지금 내가 그렇다. 어제 받은 치과 진료로 인해 컨디션은 아직 회복되지 않았고 폭우로 인해 미용실 방문은 미뤄졌다. 벌써 9월하고도 4일이라니, 왜 이리 9월은 빠르게 달리는지. 내 방의 달력은 아직도 8월인데. 첫날 새벽 기도를 오랜만에 다녀왔다. 지난 3달엔 매달 첫날에 다른 곳에 있었던 이유도 있고 연약한 믿음 때문이기도 하다. 간사하게도 간절한 무언가와 맞닥뜨릴 때 나의 기도는 더욱 절실하다. 매일매일 기도하는 삶을 지향하지만 지향일 뿐이다.


 감정의 소비는 충동구매로 이어졌다. 다소 늦게 선정된 2018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배수아의 『뱀과 물』을 읽을 수 있을까, 걱정스럽지만 이 기회가 아니면 읽지 못할 것 같아서 구매했다. 여전히 배수아는 어렵지만 도전이다. 유현준의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는 진짜 좋은 책인지 확인하고 싶어서다. 두 권 모두 뒷북인 셈이다. 남들이 읽을 때 읽지 않고 뒤늦게 궁금하니 말이다. 주문을 끝냈는데 진짜 뒷북이 나타났다. 이연식의 『뒷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뒷모습은 내가 좋아하는 단어, 풍경과 마찬가지다. 미셀 투르니에와 나란히 책장에 있으면 멋질 텐데. 이번 주문에 추가는 못하고.

 

 어제 거침없이 내렸던 폭우를 품었던 하늘은 말간 얼굴로 빛을 뿜어낸다. 바람도 부드럽다. 빨간 꼬리가 예쁜 고추잠자리를 보았다. 가을이 슬금슬금 걸어오고 있다. 당연한 수순인데 신비롭다. 캔맥주처럼 차가운 여름밤은 가고 연인의 손가락처럼 부드러운 가을이 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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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북소녀 2018-09-07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 죄송한데요... 상단에 책꽂이처럼 저렇게 설정은 어디서 하나요 ㅠㅠ

자목련 2018-09-07 15:19   좋아요 0 | URL
서재관리에 들어가서 TTB2광고설정을 클릭하고 설명에 따라 설정하면 돼. 제대로 알려준 게 맞나 모르겠네.

루쉰P 2018-09-09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저도 밤중에 불현듯 읽고 싶다는 충동이 생겨 구매했어요 ㅋ

자목련 2018-09-10 20:36   좋아요 0 | URL
읽고 싶다는 마음이 읽음으로 이어져야 하는데, 때때로 읽고 싶다는 마음에서 멈춰있어요. ㅠ.ㅠ
 

 

 생각하지 못했던 일들이 일어난다. 언젠가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 조금 일찍 도착했다고 해야 할까. 아니다,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일을 하게 된다. 그게 인생인가 보다. 대단하고 거창한 일이 아니다. 그저 준비할 서류가 많아지는 일, 이런저런 서류를 구경하는 일, 동생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생겼다. 한 편으로는 걱정도 크고 한 편으로는 응원하는 마음도 크다.

 

 어느 시절 나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으로 살았다. 필요한 것도 없었고 소유할 것도 없었다. 마치 존재를 증명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의 나는 너무 많은 걸 갖고 있다. 내 것이 아닌데 내 것이 되어버렸다. 그것의 무게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거웠다. 소유한다는 것, 그것은 관리한다는 것이며 제대로 사용해야 한다는 의무를 부여한다. 

 

 폭우가 이어진다. 지난 장마가 아쉬워 가던 일을 돌아온 게 아닐까 싶다. 여기저기 피해 현장을 보면서 마음이 아프다. 알알이 여문 과일과 농산물이 잠긴 물속에 가득하다니. 자연은 해마다 우리를 단련시킨다. 아직도 부족하다고 책망하는 것만 같다.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면서 빗소리를 들으면서 솟아오르는 감정을 숨길 수가 없다. 텅 빈 마음을 눌러 채우는 것들, 여름의 끝자락에 아껴두었던 맥주를 마시는 이유다. 걱정과 두려움들, 다가오지 않은 날들에 대한 불안. 회복되었다고 자신했던 어떤 것들이 슬그머니 머리를 내밀고 자리를 잡는다. 알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알기까지 거대한 형체로 우리를 압도한다.

 

 두려움과 불안의 옷을 벗어버리는 일이 필요하다. 감정의 두께를 얇고 가볍게 만들자. 다른 생각으로의 전환, 방향을 바꾸는 일상이 재미와 즐거움, 기쁨을 준다. 가벼운 수다, 살짝 과한 배달음식, 계획에 없던 책들과의 만남 같은 일이 그렇다. 9월에는, 시집을 읽어야지 하다가 검색한 책이다. 제목과 표지만 보고 에세이(나는 왜 이런 편견에 갇혔는가)라고 생각한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 좋아하는 김혜진의 단편 때문에 읽고 싶은 『소설 보다: 봄-여름 2018』. 읽기의 스피드를 내서 즐기는 날들을 기대한다. 너무 천천히 읽고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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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복이 지나고 계절이 바뀌고 있다고 확신했다. 아침에는 뜨거운 커피를 마셨으니까. 모두 위장이었다. 여름이니 태풍이 올 거라 예상했지만 이렇게 강력한 태풍과 마주할 줄 몰랐다. 태풍 경로, 태풍 위치를 검색하고 있다나는 바람이 너무 무섭다2010년 태풍 곤파스 때문이다. 경험이 이렇게 무섭다.

 바람이 증발한 것처럼 고요하다. 매미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 같다. 아찔한 고요다. 태풍이 지날 때까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다. 부디 피해가 없기를. 이동하면서 태풍의 크기가 줄어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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