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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 - 노재희 소설집
노재희 지음 / 작가정신 / 2013년 5월
평점 :
우리는 존재함과 동시에 누군가와 마주한다. 혼자가 아닌 세상에 합류한 것이다. 나 아닌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지만, 우리는 언제나 고독을 갈망한다. 부모와 지낸 어린 시절에도, 친구가 제일이었던 학창 시절에도, 사랑하는 이를 만났어도 혼자 만의 시간을 꿈꾼다. 우리가 꿈꾸는 궁극적인 고독은 나와 마주하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노재희의 소설집 『너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 에는 고독을 꿈꾸는 이들의 이야기다. 그러니까, 가족과 지인과의 단절이 아닌 진정한 고독을 찾아 헤매는 모습을 만날 수 있다.
<고독의 발명>은 시인이 되기를 원하는 엄복태의 이야기다. 그는 든든한 직장에 다니고 아내와 아이가 있는 누가 봐도 행복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시를 쓸 수 없다. 그에게 시라는 고독와 마주할 시간과 공간이 없다. 그 애타는 마음을 알아주는 이가 없다. 둘째를 임신한 아내, 해고를 앞둔 친구, 기러기 아빠로 회사에서 야근을 일 삼는 직장 상사, 그들에게 시를 쓰지 못하는 자신의 고통을 말할 수 없었다. 어느 날 대학 시동아리 모임에서 시집을 팔아 풍류를 즐겼던 선배를 만나고 그를 통해 시잡지를 출판하는 대표를 만난다. 엄복태에게 기회가 온 것이다. 하지만 잡지는 나오지 않고 출판사 사정을 빌미로 돈까지 빌려간 대표는 연락이 끊긴다. 엄복태에게 시는 무엇이었을까? 시를 쓰기 위해 몸부림치는 순간, 그는 모든 것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가 바랐던 건 그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은 가족이 아닌 자신을 선택한 아버지가 등장한다. 아버지는 멕시코 지사로 발령을 받아 떠나면서 연락이 끊긴다. 20여 년 만에 아들은 아버지를 찾아 나선다. 무엇 때문에 가족을 버렸는지 묻고 싶었기 때문이다. 시골에서 농자를 짓고 음식 배달일을 하며 혼자 자유롭게 사는 아버지는 아들에게 어떤 질문이나 답을 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만이 느낄 수 있는 우주, 그 고요한 눈에서 말이다.
나머지 다른 소설 속 인물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독립된 무언가를 갈망한다. 어느 날 갑자기 아픈 무릎에서 꽃이 피는 기이한 일을 경험하면서 두려움 보다 혼자만의 시간을 누릴 수 있어 기뻐하는 <누구 무릎에 꽃이 피나>의 춘복 씨. 그녀는 꽃을 뽑지 않고 그대로 둔다. 손녀를 돌보는 피곤함에서 잠시 멀어지고 싶었다. 부모의 불행한 결혼 생활 때문인지 자신을 떠난 여자를 잊지 못하는 <시간의 속>의 화자가 원하는 건 시간이다. 아니 과거에서 벗어나기를 원했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이 징글징글한 생일파티에 초대되어 문 앞에서 하나씩 받은 고깔모자를 쓰지 않을 도리가 없다고 언젠가 그녀가 말했다. 고깔모자에는 차곡차곡 지나간 시간이 쌓이고 있으며 우리 각자의 현재 좌표는 뒤집어놓은 고깔모자의 꼭짓점이라는 거였다. 현재가 늘 괴로운 건 과거로 가득 찬 고깔모자의 꼭짓점에 집중되는 하중 때문이었다. 나는 고깔모자 인생론이 꽤 그럴듯하다고 그녀를 칭찬해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떠나버린 그때, 그녀와의 과거로 가득한 고깔모자의 꼭짓점에서 나는 압사할 지경이었다.’ (187쪽, <시간의 속> 중에서)
철학 박사 과정을 포기하고 학원 강사로 일하면서 공무원인 아내를 대신하여 살림을 하는 <생활의 기술>의 주인공은 현실을 탈피하고 싶다. 집 안을 청소하고 아이를 돌보고 장을 보는 일상이 아닌 다른 삶을 꿈꾸지만 실천하지 못한다. 안주하고 싶은 현실과 벗어나고 싶은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는 모습이다. 어쩌면 그는 주변 어디서나 마주하는 우리의 모습일 수 있다.
‘내가 겪어보지 않는 일까지 통제하고 싶은 거야. 방심하고 있는 사이에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는 걸 견디지 못하니까. 모든 것이 자신이 아는 질서 속에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겠지.’ (284쪽, <생활의 기술> 중에서)
<당신 손목을 붙드는 그림자>는 책에 매료된 어머니를 추억하는 소영의 이야기다. 소영의 기억 속에 어머니는 언제나 책을 읽고 있었다. 책의 무엇이 어머니를 빠져들게 하는지 그녀는 나중에야 알게 된다. 소영은 이혼을 하고 아들을 키우면서 교정교열과 서재장식일을 한다. 읽기 위한 서재가 아니라 보여주기 위한 서재를 갖기를 원하는 이들을 도와주는 것이다. 고급의 양서와 함께 낡고 오래된 책을 장식하면서 사람들의 결핍을 본다. 지식이 아닌 무언가를 채우기 위한 그들을 통해 소영은 어머니를 기억한다.
‘무엇보다 세상 의 별별 이야기 속에 쏙 빠져드는 것이 굉장했지. 그런데 말야,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그걸 싫어한다는 것은 참, 견디기 어려운 일이야. 대체 내가 뭘 잘못한 걸까, 그러면서도 계속 그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는 것도. 있잖아, 우리가 인생의 어느 순간, 빛나는 걸 보게 되면 나머지 인생 동안에 그 그림자에 붙들려 살아야 하는 것 같아. 일단 어떤 아름다움을 알게 되면 우리는 평생 그 아름다움의 자장(磁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337쪽, <당신 손목을 붙드는 그림자> 중에서
우리 삶의 결핍을 채우는 게 어디 책 뿐일까. 그것을 채우려는 모든 행위가 고독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어떤 이에게는 시가, 어떤 이에게는 추억이, 어떤 이에게는 돈이, 어떤 이에게는 사랑이 고독이다. 그러니 ‘너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 란 제목처럼 삶은 자신만의 고독 속으로 달아날 때 충만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