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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룸 - 영원한 이방인, 내 아버지의 닫힌 문 앞에서 ㅣ Philos Feminism 6
수전 팔루디 지음, 손희정 옮김 / arte(아르테) / 2020년 1월
평점 :
여성학이나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수전 팔루디의 저서는 필독서라고 알고 있다. 나는 그녀가 어떤 형태로 페미니스트가 되었는지 어떤 활동을 하는지 잘 모른다. 여성운동, 여성학,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나 에세이를 접한 게 전부다. 그러니 내게는 수전 팔루디의 『다크룸』을 읽는 일은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공부하는 입장에서 이 책을 읽은 건 아니다. 그저 궁금했을 뿐이다. 폭력적이고 무서운 아버지가 엄마와 이혼 후 오랜 시간 연락을 끊고 지낸 딸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 때문이다. 안부가 아니라 자신의 근황에 대해 설명한 편지였다.
저자는 2004년 여름 한 통의 이메일을 받았다. 발신자는 아버지였고 내용은 자신이 태국에서 성전환수술을 받았고 현재 여성으로 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뀌었으니 이름도 이제는 '스티브 팔루디'가 아닌 '스테파니 팔루디'라고 말이다. 아버지는 미국이 아닌 헝가리에 거주하고 있었고 저자는 아버지를 만나러 간다. 아버지와 딸의 만남이 아닌 그녀와 나의 만남이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수술 과정을 상세히 설명해 주고 현재 여성으로의 삶에 무척 만족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여성인 자신에게 친절하고 배려하는 태도에 좋아했다. 70세가 넘은 여성에게 친절하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있겠냐마는 말이다. 그녀의 집에는 여성스러운 옷이 가득했고 사진도 많았다. 마치 한 단 번도 남성으로 살아오지 않은 것처럼. 그러나 그녀에게는 여전히 과거 아버지가 보였던 성향도 존재했다.
저자는 아버지의 결정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어린 시절 함께 살았던 기억을 떠올리면 아버지는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가장이었고 마초맨 그 자체였다. 무엇이 그를 여성으로 살고자 했을까. 저자는 태국에서 수술 후 회복을 도와준 아버지의 지인들과 아버지와 같은 사례를 분석한다. 성전환 수술을 했지만 완전한 여성으로 살아가는 일은 쉬운 게 아니었다. 신체적인 외형은 다른 성으로 바꿀 수 있겠지만 내면에는 항상 정체성으로 힘들어하고 있었다. 수술 후 일정 시간이 지나면서 나타나는 신체적 변화나 사회적 시선, 그 모든 것들은 그들에게 감내하기 힘든 일이었다.
“나는 중성인 것 같아요, 하지만 중성이 되지 싶지는 않아요.” “사람들은 구분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어요. 경계에 있는 사람들조차 구분이 필요하죠. 그래야 경계에 있을 수 있잖아요. 정체성이 있어야 해요.” (217쪽)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바로 ‘정체성’이다. 저자가 아버지인 그녀와 헝가리에서 그녀의 과거에 대해 추적하면서 마주하는 그녀의 삶은 고통과 혼란 그 자체였다. 아니, 살아남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헝가리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그에게 애정을 쏟지 않았다. 부모의 이혼 위기에서 자신의 존재로 인해 재결합을 했다는 걸 말하면서는 딸인 저자에게 분노를 표출했다. 자신은 가정을 지켰지만 딸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딸은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았고 아버지를 버렸다고 화를 냈다. 아버지가 감추고 싶었던 그녀의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은 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진다. 헝가리를 점령한 나치는 유대인을 수용소로 보냈고 그곳에서 많은 이들이 죽었다. 아버지의 가족도 전쟁에서 죽음을 맞았다. 당시 아버지는 유대인인 아닌 나치를 선택했고 나치 행세를 하면서 그의 부모를 구했다. 그리고 이후에 헝가리를 떠나 덴마크, 브라질, 미국으로 왔다. 유대인이었지만 철저하게 자신을 속여야 했다. 그래야 살 수 있었다. 미국에서 가난하게 살면서 만난 어머니와 결혼 후에는 미국 사회가 원하는 삶을 선택했다. 이 역시 그가 선택할 수밖에 없는 삶이었다.
“정체성은 사회가 너를 받아들이는 방식이야. 사람들이 인정한 대로 행동해야 하지. 그렇지 않으면 적이 생긴단다. 나는 그렇게 살았어. 그래서 아무런 문제가 없는 거지.” (517쪽)
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헝가리의 역사를 알아야 했다. 책에는 헝가리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설명한다. 전쟁 당시 유대인의 실상, 정권의 흐름, 그리고 아버지가 거주하는 현재의 헝가리의 상황까지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아버지가 꺼내기 싫어하는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필요했다. 저자는 아버지의 친구와 친척들을 통해 정보를 얻는다. 두 번의 아이를 잃고 얻은 아들을 냉대한 어머니. 자신들을 나치로부터 탈출하게 만든 아들에게 유산으로 천 원도 안 되는 금액의 유산을 남겼다는 사실까지.
2004년부터 10년에 걸쳐 헝가리를 방문해 아버지와 아버지의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고 과거의 현장을 함께 찾아가는 과정은 600여 쪽의 이야기로 부족할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트랜스젠더에 대한 이야기에 집중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헝가리의 역사에 집중할 수도 있다. 어렵기만 할 것 같았던 기대와는 달리 아버지의 과거를 추적하는 방식으로 현재의 아버지를 이해하려는 저자의 이야기 무척 진솔하다. 마지막 죽음을 앞두고 치매로 힘들어하는 아버지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저자의 모습은 페미니스트도 아니고 저널리스트도 아닌 그냥 아버지를 오래 돌보고 싶은 딸의 모습이다.
아버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녀가 살아 있을 때 그렇게나 자주 그랬던 것처럼 얼굴을 돌리고 있었다. 살아 있는 동안, 그녀는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유대교도인가 기독교인가? 헝가리인인가 미국인인가? 여자인가 남자인가? 너무 많은 상반되는 것들이 함께 존재했다. 하지만 그녀의 누워 있는 몸을 보면셔, 나는 생각했다. 이 우주에는 단 하나의 구분, 단 하나의 진정한 이분법이 있구나. 살과 죽음, 다른 모든 것들은 그저 녹아 없어질 수 있는 것들이었다. (622~623쪽)
한 사람을 온전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을 것이다. 드러난 외면으로 짐작하는 것들, 그 이면에 숨겨진 어둡고 깊은 내면을 발견하는 일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저 가능할 거라 바라면서 더 가까이 다가가고 노력하는 것 외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