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림지구 벙커X - 강영숙 장편소설
강영숙 지음 / 창비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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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할 수 없는 자연재해가 발생했을 때 인간은 무기력한 존재가 된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이성적 판단을 쉽게 할 수 없고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갇히고 만다. 정부의 대책도 믿을 수 없고 누구도 신뢰할 수 없는 세상에 의지할 수 있는 게 있을까? 나와 같은 처지의 누군가에게 의심 없이 다가갈 수 있을까? 더 이상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닌 현실이 될 수 있는 이야기, 바로 강영숙의 『부림지구 벙커 X 』다

소설은 지진이 휩쓸고 간 부림지구의 벙커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지진으로 인해 도시는 무너졌고 삶은 망가졌다. 가족과 삶의 터전을 잃어버렸다. 많은 이들이 부림지구를 떠났다. 대규모 제철 단지였지만 현재는 쇠락한 도시가 돼버렸다. 그런데다 지진 발생 후 폐허로 전락해버렸다. 정부는 부림지구를 오염된 곳으로 지정하고 사람들을 근처 N시로 이주시킨다. 주민과 협의된 사항이 아니었다. 이주 조건으로 몸에 칩을 이식해야 한다. 그들을 관리하겠다는 뜻이다. 생존자인 이재민들은 오염된 사람들로 치부한다. 소설 속 화자인 40대 여성 유진은 부림지구에서 태어나 자랐고 떠났다가 돌아왔다. 그러니까 부림지구의 흥망성쇠의 역사와 함께 한 것이다. 유진은 지진 후 흙더미에서 구조되었고 이재민이 되어 벙커에 살게 되었다. 유진과 같이 벙커에 사는 이들은 다양하다. 인격장애를 앓는 십 대 소녀, 신문기자였던 남자, 교수 출신의 노부부,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 그들을 이끄는 대장, 지진 역학 조사를 하는 연구원 등이다. 소설의 초반은 유진과 연구원의 인터뷰 과정으로 지진을 겪은 이들의 심리를 상당하는데 그 내용이 무척 인상적이다.

“지진을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요?”

연구원이 물었다. 평소에 하던 어떤 놀이 경험을 떠올려보라고도 했다.

“놀이 경험요? 지진은 그냥 다 무너지는 거예요. 겪어놓고도 그렇게 말해요? 놀이에 비유하는 건 말이 안 되는데.” (41~42쪽)

 

지진은 지진인데, 무엇을 떠올릴 수 있단 말인가. 이 부분에서 나는 몇 해 전 경험한 태풍의 공포가 살아났다. 베란다 유리창을 날려버린 태풍, 그것은 죽음이었다. 지진과 태풍 같은 재해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소설 속 유진을 비롯한 이들처럼 삶을 이어갈 뿐이다. 어둡고 축축한 좁은 공간에서의 생활은 비참하다. 정부가 그들에게 지급한 건 최소의 생존 키트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부림지구의 벙커를 떠나려 하지 않는다. 대장을 중심으로 허물어진 도시를 돌아다니며 혹시 모를 생존자를 찾거나 먹을 것을 구한다.

​부림타운을 돌아다니는 게 하루 일과였다. 단순히 산책만 하는 것은 아니었고 우리도 뭔가를 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살아 있는 무언가를 구하러 다녔다. 대장이 먼저 시작한 일이었다. 그러다 내가 대장을 따라나섰고, 나중엔 해나도 함께했다. 우리는 밖으로 나올 때마다 나뭇가지를 이용해 벙커 개폐구를 잘 가리는 걸 잊지 않았다. 우리의 벙커는 우리가 꼭 지켜야 했다. (72쪽)

​소설을 읽는 이들은 모두 2017년에 발생한 포항의 지진을 생각할 것이다. 아니, 지금 우리에게 닥친 바이러스의 공포를 대입한다. 목적은 다르지만 방역복을 입고 벙커 주변을 다니며 이재민을 찾는 이들의 모습마저도. 유진이 살고 있는 벙커 X도 그들의 손길을 피할 수 없다. 그들 중 일부는 N 도시로 향하고 유진과 몇 명만 돌아온다. 어떤 미래도 꿈꿀 수 없는 현실이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기댈 수 공간은 벙커가 유일했다. 정신적 안정이 가능한 장소라고 할까.

지금 내가 가진 유일한 소유물은 더러워진 정맥류 스타킹과 지진으로 인해 다 부서져버린 이 삶뿐이다. 벙커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벙커에서는 그래도 좋았다. 좋았던 시간, 앞으로 그런 시간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염된 지역에 남은 우리만이 이제 부림지구의 주인이었다. (290쪽)

앞으로 어떤 재해와 재난이 우리에게 닥칠지 알 수 없다. 어떻게 대비해야 할까. 어느 미래엔 소설과 현실을 따로 떼어낼 수 없는 날들을 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현재 우리가 겪는 상황을 잘 이겨낸다 해도 미래는 희망과 공포가 함께 온다. 그럼에도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건 희망이 아닐까. 유진에게 벙커가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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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0-03-17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진 같은 재해는 사람이 어떻게 하지 못하는 거군요 지진이지만 지금 일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소설 속 일이 소설만은 아니다는 느낌도 들어요 지금이 지나가면 또 다른 일이 일어나겠지요 그렇다 해도 희망을 갖고 살아야 할 텐데... 모든 것이 무너지고 사라져도 살아 있다면 살아가겠지요 그게 좀 슬프기도 하지만...


희선

자목련 2020-03-18 12:05   좋아요 1 | URL
맞아요. 지진은 과거의 일이고 현재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생각나요. 소설을 소설 속의 일로만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희선 님 건강하고 환한 봄날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