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만세 소설, 향
오한기 지음 / 작가정신 / 202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한기 작가를 생각하면 아니, 생각한다는 게 아니라 그의 이름을 보면 저절로 ‘홍학’이 떠오른다. 나는 그의 여러 소설 가운데 장편소설 『홍학이 된 사나이』를 읽었기 때문이다. 어려웠다. 읽었지만 어떤 내용인지 설명할 수 없다. 읽은 지 한참이나 지났고 독특한 소설이라고 기억할 뿐이다. 그 기억에 더해 『인간만세』를 읽고 나는 더욱 그의 소설을 독특하다고 기억할 것이다. 유머가 장착되었지만 나는 그 유머를 좋아할 수 없는 것 같다. 그렇다고 그 유머가 이상하다는 건 아니다. 단지 취향의 문제라는 것이다.


소설은 답십리 도서관 상주 작가 경험을 토대로 쓴 소설이다. 도서관에 그런 게 있었나. 읍에 사는 나에게는 너무도 낯선 지원 사업이다. 검색을 해보니 ‘정지돈’ 작가가 이 사업에 참여한 인터뷰에 ‘오한기’ 작가를 언급한 기사를 읽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도서관 상주작가를 하면서 만나 사람들과 도서관 이용자들과의 모임, 강의에 대한 개인적인 느낌이 소설에 녹아있다고 짐작할 수 있다.


도서관은 남녀노소 모두에게 열려있는 공간이며 그 안에서 만날 수 있는 책은 무한대가 아닌가. 어쩌면 소설의 소재를 얻고 소설을 쓰기에도 가장 적합한 공간일지도 모른다. 근처 도서관에서 작가를 초대해 독자와의 대화 같은 걸 하면 참여하고 싶었던 적이 있다. 특히 작가가 내가 좋아하는 작가라면 더욱 부러움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도서관과 작가, 그리고 소설. 완벽한 조합의 소설이 탄생할 수 있는 완벽한 조건. 하지만 도서관 내부의 사정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갈등은 아무도 모른다. 오직 관계자만이 알 수 있다. 오한기는 어떤 소설을 쓰고 싶었던 걸까?


도서관이 무대이면서도 똥과는 달리 깔끔하고, 적당히 유머러스하고 풍자적이며, 무엇보다 인간미가 넘치는 이야기. 그게 사람들이 선호하는 문학이다. 나는 그런 문학을 써야 한다. 전작들과 달리 심연을 건드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문득 떠오르는 건 우정이다. 우정만큼 인간의 심연을 울리는 건 없다. 더불어 우정은 문학의 은유다. 쓰잘데기없지만 있어도 나쁘지 않은 것. 그게 문학과 우정이다. (57쪽)


오한기는 그런 소설을 썼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만세』가 그런 소설이니까. 도서관이 배경이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똥’이 등장하면서도 그것은 우리 인간과 밀접한 존재라는 걸 부정할 수 없으니까. 도서관에서 만나는 괴팍하고도 이상한 인간들과의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 애쓰는 화자‘나’도 있지 않은가. 소소하면서도 진중한 에피소드. 거기다 대출한 책으로 기발한 일을 벌이는 이용자 ‘진진’과의 우정도 흥미롭다. 등장인물이 모두 실제의 인물은 아니겠지만 비슷한 유형의 인간을 우리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사실 화자 즉 오한기의 입장에서 보면 도서관 이용자와 벌이는 사소하고도 진중한 다툼(대화 혹은 토론)은 아주 유용했을 것이다. 소설을 쓰는 작가에게 독자의 의견은 무사할 수 없는 것 가운데 하나다. 이를테면 소설 속 교수가 던진 질문은 문학을 향한 가장 궁극적인 물음이 아니던가.


대체 문학은 무슨 의미가 있는 거죠? 소설에는 어떤 가치가 있는 거냐고요. (20쪽)


그리하여 독자는 문학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나에게는 어떤 의미이고 가치일까. 소설과 문학에 의미를 부여하는 건 독자의 몫이 아닐까. 작가가 문학의 목적이 인간을 탐구하고 인간을 이해하기 위함이라고 해도 독자는 그냥 재미, 즐거움, 감동으로 끝날 수 있다. 작가의 고민과 의도를 독자가 완벽하게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니 진진의 이런 대답이 오히려 가장 쉬운 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고민할 필요가 있을까요? 작법의 문제 같은데, 상징이란 게 그런 거잖아요. 상징은 열려 있기 마련이죠. 작가님이 정하고 쓴다고 그게 그대로 읽히지 않아요. 그대로 읽히면 오히려 하수 아닌가요? 상징은 우리가 만든 게 아니라 독자들이 만드는 거죠. (153쪽)


오한기는 내게 여전히 ‘홍학’으로 남을 것 같지만 이 소설을 읽으면서 너무 많이 웃었고 기존의 도서관을 감싸던 권위가 살짝 내려갔다. 그건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도서관은 책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열린 공간이며 주인이 될 수 있는 공간이라는 걸 이용자는 때로 잊고 있으니까. 도서관의 문턱은 더 낮아도 좋다. 그런 점에서 오한기의 이런 소설에 나도 만세를 외친다. 소설 만세!!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21-06-01 11: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이 무대라니 좀 궁금해집니다. ㅎㅎ

자목련 2021-06-02 15:29   좋아요 1 | URL
내가 안다고 여긴 도서관과 다르구나 싶었어요. 물론 소설 속 이야기지만요.
작가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소설이라 리얼리티는 살아 있는 듯도 하고요. ㅎ

황금모자 2021-06-01 11: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간 이꼬르 똥 끄끄끄끄끄

자목련 2021-06-02 15:28   좋아요 1 | URL
똥에 대한 부분은 아이들이 무척 만족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ㅎㅎ
 
딜레마
B. A. 패리스 지음, 김은경 옮김 / arte(아르테) / 202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다 아는 사실이다. 두 개의 선택지가 있을 때 하나를 선택하면 나머지 하나는 포기해야 한다. 둘 다 선택할 수 없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 후회는 어쩔 수 없다.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게 좋다. 하지만 살다 보면 둘 중 어느 것을 선택하더라도 감당할 수 없는 결과를 맞이하는 일이 생긴다. 그럴 때 선택의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B. A. 패리스의 장편소설 『딜레마』는 그런 선택에 대한 소설이다. 단 하루의 시간을 배경으로 아내 리비아와 남편 애덤을 오가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리비아와 애덤은 학창 시절에 아이를 임신해 결혼했다. 리비아의 부모님은 그 일로 딸과 연락을 끊었다. 리비아는 단출한 결혼식을 했고 그것에 대한 아쉬움으로 마흔 살의 생일을 오래전부터 기대해왔다. 단 하루, 가장 멋진 파티를 열기로 한 것이다. 애덤은 목공예가로 리비아는 변호사가 되었다. 어린 나이에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지금은 안정된 중년의 삶을 누리고 있다. 아들 조시와 딸 마니는 아주 잘 자라주었다.


누가 봐도 화목한 가정이다. 하지만 삶에는 언제나 이면이 있기 마련이다. 애덤은 조시가 어렸을 때 한 가장의 역할을 제대로 해주지 못했고 마니가 태어나면서부터 달라졌다. 그랬기에 애덤은 아들보다는 딸과 가깝다. 그래도 현재는 최선을 다하는 아빠다. 딸 마니와는 비밀이 없다고 믿는 그런 아빠. 정말 마니와 아빠는 비밀이 없을까.


마니의 모든 생활이 홍콩에서 이루어지는데 우리 부부는 그 생활의 일부만 안다는 사실을 깨닫자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21쪽)


마니는 홍콩에서 대학에 다니는 마니는 엄마의 생일에 올 수 없다. 공식적으로는 그랬다. 깜짝 등장으로 엄마를 놀라게 하기로 애덤과 준비를 한 것이다. 리비아의 생일 당일 그들 가족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6월 8일 토요일 고대하던 리비아의 생일, 모든 건 완벽했다. 집에 오지 못하는 마니는 꽃배달을 보냈고 조시는 파티 준비를 열심히 했다. 마니가 탑승했을지도 모를 비행기가 추락했다는 뉴스를 접하기 전까지.


마니의 사고 소식을 접한 애덤은 마니가 그 비행기를 타지 않았을 거라 믿었다. 딸과 연락이 닿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기대를 놓을 수 없었다. 단 하루, 오늘을 준비한 아내에는 그 사실을 알릴 수 없었다. 만약 마니에게 최악의 사태가 발생했더라도 마니는 엄마가 행복한 하루를 보내기를 바랐을 테니까. 가족, 친구, 동료, 모두를 다 초대한 파티였다. 애덤에게 하루는 지옥과 같았다. 털어놓을 상대가 없었다. 애덤이 마니의 방에서 홀로 느끼는 절망과 슬픔. 그 복잡한 심경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리비아에게도 비밀이 있었다. 마니가 유산을 한 사실이다. 문득 과거 자신의 일을 떠올렸다. 마니가 자신과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아서 다행이라 여기는 어쩔 수 없는 안도감. 연락을 끊은 부모의 마음을 생각한 것이다. 상대가 누구인지 혼자 짐작하고 마니를 걱정하면서 전전긍긍한 시간을 보냈다. 아무리 주변 인물을 살펴봐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그 상대를 알고 경악했다. 마니에게 실망했고 애덤에게도 알려야 했다. 더 늦기 전에 좋은 타이밍을 찾아야 했는데. 애덤은 자신의 생일을 준비하느라 피곤한 눈치다. 리비아는 자신의 욕심 때문에 너무 거한 파티를 여는 게 아닌가 자책하기도 했다. 리비아와 애덤은 마주칠 때마다 고마움을 표시하고 사랑한다 말했다. 사로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간직한 채.


애덤은 끝내 마니의 사고를 알리지 못했다. 리비아의 생일 파티가 다 끝나고 아들 조시와 아내에게 털어놓기로 한 것이다. 신은 그에게 너무 가혹했다. 리비아는 절규했다. 애덤을 보고 싶지 않았고 이해할 수 없었다. 딸의 생사도 모르면서 생일을 자축하고 웃고 떠들고 즐겼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어떤 엄마가 그럴 수 있겠는가.


단 하루 동안 리비아와 애덤의 복잡한 심리를 탁월하게 묘사한 소설이다. 제목 그대로 인생의 가장 큰 ‘딜레마’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선택해야 하는지 묻는다. 소설을 읽는 내내 긴장감이 흐르고 제발 마니가 마지막에 등장하기를 바랐다. 결말을 먼저 보고 싶었던 소설은 처음이다. 사랑하는 이를 위한다는 게 무엇일까. 그 선택으로 인한 파국은 누가 감당할 수 있을까. 복잡한 마음이 든다. 내가 가장 잘 안다고 믿는 이가 내게 감추고 있는 비밀은 무엇일까, 엉뚱한 생각까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너는 나의 시절이다 - 정지우 사랑 애愛세이
정지우 지음 / 포르체 / 202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유독 비가 잦은 5월이다. 누군가의 눈물일까 싶은 생각을 하니 저 비를 다 받아두고 싶다. 비를 좋아하기에, 비가 내리면 아련한 기억이 떠오른다. 하나의 우산을 받쳐 들고 연인과 빠른 걸음으로 빗속을 걷던 풍경. 서로에게 집중하던 시절이었고 그 시절이야말로 온통 ‘너’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다음의 행보가 각자의 우산을 걷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사랑을 말할 때, 사랑의 기억을 더듬을 때, 그 장면은 다정하게 나를 안아준다. 어쩌면 나는 정지우 사랑 애愛세이 『너는 나의 시절이다』를 통해 사랑의 애틋함을 마주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무감한 나를 흔들어줄 그런 글들을 기대했다고 할까.


사랑에 대한 사유가 언제나 감미롭고 아름다운 건 아니다. 우리는 사랑을 원하지만 사랑에 대해 다 안다고 믿고 사랑에 대해 소홀하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정성을 다하는 일이고, 즐거운 일이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이고, 그것에 몰입하는 일인데. 익숙함에 길들여져 어느 순간 그 모든 것들의 소중함을 놓치고 만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이 결국엔 하루하루 사랑하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렇다. 순간의 감정을 놓치고, 대화를 미루고 만다.


대화에 대한 정지우의 글은 나를 멍하게 만들었다. 열심히 기억하고 열심히 알려고 했던 시절을 생각나게 한 것이다. 하나라도 놓칠까 두려워 뭐든 다 알아내려고 했던 날들. 우리는 모두 반성해야 한다. 대화의 기본, 대화의 목적은 결국 서로에 대해 스며드는 거라는걸.


각자 서로에게 무엇이 중요하고, 그것이 어떻게 다른지에 관해서는, 사소한 것 하나에서부터 일일이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마치 기계적으로 장부를 작성하듯이 서로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외우고, 주입식으로 암기해야 한다. 사실, 그것이 대화이고 이해인 것이다. (41쪽)


사랑에 대한 글은 결국 우리 삶에 대한 이야기다. 사랑의 대상은 무한하고 사랑에 대한 감정은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정지우가 들려주는 사랑 역시 그러하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사랑, 우리를 구원한다고 믿는 그 사랑은 과연 무엇일까. 지금의 나를 만든 사람들, 지금까지 나를 견뎌준 사람들, 그리고 내일도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 그들에 대한 애정을 기억하고 끊임없이 서로를 생각하는 일, 그 모든 게 사랑일 것이다.


어제 당신을 사랑한다고 믿었던 일을 기억하는 것, 오늘 당신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내일도 사랑하리라 믿는 것. 결국은 그 무한한 순환고리, 논리가 파괴되는 동어반복과 자가당착의 세계 속에서 어떻게든 버티며 빠져나오지 않는 것, 그게 사랑의 전부일 것이다. (132쪽)


정지우의 담담한 사유를 읽으면서 사람을 향하는 선한 마음을 지키는 일에 생각한다. 이익에 따라서 사람을 대하는 관계로 상처받고 마음을 굳게 닫았던 날들, 모두와 잘 지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피곤했던 시절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게 나를 향한 선의의 마음들 때문이었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것이다.


한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은 놀라운 기쁨을 안겨준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감정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알아가는 일이라서 그렇다. 예전에 알지 못했던 세계라고 할까. 타인이었던 당신과 내가 우리로 속하는 일이라는 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설령 다시 타인으로 돌아갔더라도 그 아름다운 관계의 첫 떨림을 생각하면 나쁨보다는 좋음으로 기억될 것이다. 뒤늦은 깨달음이라고 해도 괜찮다. 살아가는 일도 그런 것 같다. 아이가 주는 감동을 통해 부모가 주신 사랑을 비로소 알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모르는 세계는 여전히 무궁무진할 것이다. 그 안에 숨겨진 사랑과 비밀을 발견하는 일이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일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상대의 비밀스러움과 무한함은 곧 내가 속한 공간 전체로 확대되어 나간다. 내가 속해있는 이 공간이, 이 세계가 둘도 없는 어떤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 세계가 무언가로 가득 차있다. 이전에 알던 그런 세계감이 아닌 다른 세계감, 세계의 낯선 이면, 그 세계성이 불러오는 감각이 우리를 휘감는다. 그렇게 우리는 사랑의 공간에, 사랑의 시간에 속하게 된다. (186쪽)


정지우의 글은 흐림의 기분을 맑음으로 이동시키는 힘이 있다. 혼탁한 마음이 정갈해진다고 할까. 복잡한 감정들이 차분하게 정화된다. 또한 따뜻한 차를 마시는 것 같다. 뜨거운 차가 아닌 알맞게 식혀 따뜻한 기운을 안겨주는 글이다. 아내와 아이에게 최선을 다하면서도 자신의 시간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의 글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알 것 같다. 아내와 아이에게 종종 노래를 불러주는 사람, 수영을 할 때마다 아버지를 떠올리고, 운전을 할 때마다 어머니를 떠올리는 사람, 여동생과 한 방에서 잠들며 수다를 떠는 사람의 글에는 온기가 있다. ‘우리는 화목하니까’, ‘화해할 수 있으니까 괜찮다’는 말이 내게로 왔다. 그래, 조금 다투더라도 화해하면 된다. 조금 부족하더라도 우리는 불화가 아닌 화목하니까 된다는 마음이 전염된다. 기분 좋은 전염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파랑 2021-05-24 14: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뭔가 따뜻한 책일거 같네요. 표지부터 마음에 듭니다~!! 이런 내용의 책은 많은데 자목련님 리뷰 보니 읽어보고 싶네요 ^^

자목련 2021-05-25 09:45   좋아요 1 | URL
사랑에 대한 철학적 사유와 일상에서 느끼는 사랑에 대한 잔잔한 글이라고 할까요.
어떤 부분은 어렵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나쁘지 않았어요. 새파랑 님, 활기찬 화요일 보내세요^^
 
너라는 생활
김혜진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관계를 끝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상대에 대한 사랑 때문일까. 혼자 남는다는 두려움, 이별 그 후에 대한 걱정일지도 모른다. 혈연으로 연결된 가족 사이도 얼굴을 보지 않고 그저 가끔씩 안부만 묻는 사이로 지내기도 하는데. 도대체 사랑이라는 건 뭘까. 어쩌면 그런 감정들은 사랑이라는 말로는 채울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너’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으로 채워진 소설집. 너의 행동과 말투, 너의 일상이 나는 때로 안쓰럽고 때로 답답하고 때로 화가 난다. 그러나 정작 나를 너를 놓지 못한다. 나는 너를 끊어내지 못하고 네가 안타깝고 네가 아프다.


김혜진의 단편집 『너라는 생활』의 8개의 단편은 모두 ‘너’와 ‘나’의 이야기다. 8편의 단편에 각기 다른 인물, 다른 이야기를 품고 있지만 마치 하나로 연결되어 서로의 과거나 현재인 것처럼 여겨진다. 수많은 타인 속에서 특정한 한 사람, ‘너’를 향한 마음이라고 할까. ‘너’는 연인이 될 수도 있고, 그저 알고 지내는 사이 일 수도 있고, 친구 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특정한 한 사람이 아니라 이웃이나 주변 인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연인의 경우는 모두 여성 커플이다. 여전히 누군가의 시선에선 이상한 사람들, 불편한 존재로 보인다.


표제작 「너라는 생활」에서 ‘너’는 취업을 위해 복지관에 면접을 보러 간다. 그 자리에 동행한 ‘나’는 네가 당하는 일, 그러니까 담당자가 너를 무시하고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모습을 본다. 나는 화가 나지만 너는 어떡해서든 그 자리에 일하고 싶고 끝까지 담당자에서 그동안의 경력을 말한다. 구차하게 매달리는 모습이 너무 싫어서 너를 끌고 나가고 싶다. 너는 언제나 너무 착하고, 사람에게 친절하고, 공과 사의 경계가 없다. 처음에는 그런 너를 돕고 너와 같이 행동하고 싶었지만 언제부턴가 나는 점점 화가 난다. 힘든 하루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너를 위로하지만 마음속은 언제나 복잡하다. 관계를 끝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하면서도 끝내지 못하는 나에게 너는 전부가 된 것이다.


그만하자, 헤어지자, 내내 벼르듯 쥐고 있었던 그런 말은 또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내일은, 모래는, 더 좋아질 거라는 말을 하게 된다. 이렇게 오 년이 지났구나, 이대로 십 년이 가고 또 십 년이 갈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에 오싹해지면서도 네가 없는 생활은 상상할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너라는 생활」, 86쪽)


혼자서도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너를 놓을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정 무렵」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를 배려하지 않고 너의 생각, 너의 모임, 너의 관계망 속에 아무렇지 않게 나를 흡수시키려는 너를 어떻게 해야 할까. 나에게는 오직 너와의 시간이 중요하고 최선을 다하고 싶은데 그걸 몰라주는 너를 이해해야만 할까. 너는 왜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일이 더 중요한 것일까.


나를 이곳까지 끌고 온 게 너라는 확신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어쩌면 내가 벗어나고자 하는 건 이 낯선 동네가 아니고 바로 너라는 사람이라는 사실도. 실은 그것이 오래전부터 내가 바라온 일이라는 것도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다. (「자정 무렵」, 115쪽)


김혜진은 소설 속 너와 나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는 들려주지 않는다. 나에 대한 것도 그러하다. 너와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이라는 것 정도. 그러니까 어떻게 만남이 시작되고 어떻게 현재까지 이어졌는지 구체적인 에피소드는 등장하지 않는다. 처음의 호의, 처음의 설렘, 처음의 기대는 중요하지 않다는 듯 말이다. 네가 만나는 이들은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 많고, 비주류의 삶은 산다. 공감과 연대로 시작됐을지도 모른다. 그 연대를 지지하고 오래 이끌 수 있는데 필요한 건 무엇일까. 사회적 지지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여자 두 명이 함께 한 집에서 살아가는 이상한 일은 아닌데 사람들은 보통이 아닌 특별한 삶이라 여긴다. 김혜진의 장편소설 『딸에 대하여』에서는 가장 가까운 엄마조차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 사회 전반의 시선은 얼마나 따가운지 짐작할 수 있다.


이상한 사람들.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 직장이 없는 사람들. 가족이 아닌 사람들. 밤에도 낮에도 할 일 없이 동네를 어슬렁거리는 사람들. 서로의 신분을 보장해 줄 수 있는 것이 너와 나뿐인 사람들. (「동네 사람」, 128쪽)


사소한 말투에 감정이 상하고 누군가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는 건 그 삶의 일부가 되거나 그 삶에 깊숙이 파고드는 일이다. 자신의 모든 일에 끊임없이 지지할 거라 믿는 순간이 어느새 사소한 말투에 감정이 상하고 만다.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다른 관계를 생각하게 된다. 너와 나는 영원한 우리가 될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너와의 관계는 왜 이렇게 계속 이어져온 것일까. 완전히 연락이 끊어지고 그래서 처음부터 모르는 사람처럼 서로의 삶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릴 몇 번의 기회가 있었는데. 서로에 대해 편안한 기억만 나눠 가질 수 있었는데. 나는 왜 겁도 없이 네 연락을 받고, 안부를 듣고, 네 삶에 조금씩 더 가까이 다가서는 걸 포기하지 못한 것일까. (「우리는」, 172쪽)


함께 한 시간이 너무 많이 쌓여서 분리될 수 없는 우리가 된다는 건 그 모든 걸 감당할 준비가 되었다는 말이다. 결국 너와 나는 처음부터 달랐다는 걸 인정하는 일이다. 그 처음이 서로를 향한 강한 끌림이었을지라도. 소설 속 ‘너’와 ‘나’는 현실 속 ‘너’와 ‘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는 이유다. 우리로 살아간다는 건 간단하지 않고 여전히 힘들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초딩 2021-06-05 17: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혈연은 모르겠지만, 타인이나 물건에 대해 소중함을 느끼는 것은 그 들인 시간이라고 어린왕자에선가 본 것 같아요 ^^
그리고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자목련 2021-06-07 08:40   좋아요 0 | URL
^^*
 
소설이 곰치에게 줄 수 있는 것
최석규 지음 / 좋은땅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제와 같은 오늘에 만족하면서 다른 오늘을 살기를 바란다. 뭔가 대단한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건 아니다. 그저 조금은 다른 삶, 조금은 의미 있는 삶을 갈망한다. 그렇다면 의미 있는 삶이란 무엇일까? 저마다 추구하는 게 다르겠지만 중요한 존재가 되고 싶은 삶인지도 모르겠다. 최규석의 단편집 『소설이 곰치에서 줄 수 있는 것』를 읽으면서 소설 속 인물이 원하는 삶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표제작 「소설이 곰치에게 줄 수 있는 것」의 주인공 곰치는 떼인 돈을 받아주거나 배우자의 불륜 증거를 수집하는 일을 한다. 상대에게 욕을 하거나 위압하는 게 일상이다. 그런 그가 우연하게 소설 합평에 참여한다. 소설을 쓰는 이들의 모임에서 그는 학상시절을 회상한다. 심부름센터의 곰치가 아닌 문예반에서 자신의 글이 일등이었던 때가 있었다. 곰치는 그때의 스승을 찾으면 다시 책을 읽는다. 곰치가 아닌 ‘차석주’로 살았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일까. 아니, 이제라도 ‘차석주’로 살고 싶은 간절함인지도 모른다.


곰치가 살아온 세상은 늘 이랬다. 아픔의 이유를 생각하는 것도 부질없었다. 그러는 동안 심장은 밤 껍질처럼 단단해졌다. 발목에 숨겨 놓은 잭나이프로도 그것은 베어지지 않았다. (「소설이 곰치에게 줄 수 있는 것」, 20쪽)


지금의 내가 아닌 다른 나로 살아가고 싶은 마음, 그건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무언가 놓치고 잃어버렸다는 걸 인식했을 때에는 이미 늦었다. 돌이킬 수 없는 삶에 대한 후회가 밀려올 뿐이다. 사라진 아내를 찾는 과정을 담은 「회전초」 속 남편과 아내가 그러하다. 앞만 보고 열심히 일했을 뿐인데 삶을 행복하지 않았다. 아내와 아무 문제가 없다고 믿었다. 사람을 찾아주는 사설업체에 의뢰를 하고 아내에 대해 알아가는 동안 남편은 그제야 느낀다. 아이를 잃은 상처를 위로하기는커녕 서로를 힐난하고 회피했던 지난 시간을. 처음 아내를 만났던 순간, 함께 그림을 보고 아내의 글을 읽고 감상을 말해주던 순간의 감정들. 어쩌면 우리도 소설 속 아내와 남편처럼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괜찮지 않으면서도 괜찮은 척, 나아지는 게 뭔지도 모르면서 언젠가 지금보다 나아지면 다 잘 될 거라고 미루며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럼, 어제만큼만 살아도 충분하다고 말해도 괜찮은 걸까. 하긴 어제만큼 살기도 힘든 세상이다. 코로나19의 시대에서는 특히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 모든 걸 통달한 이들을 찾는다. 그들에게 뭔가 특별한 가르침이 있을 것 같으니까. 「할슈타트에서 온 절대 무공」속 ‘나’가 스스로를 고수라 말하는 노인에게 반하는 것처럼. 틱장애가 있는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지낸다. 어릴 적부터 잘 알던 형의 운영하는 태권도 도장에서 절대 고수를 만난다. 노인은 형에게 대결을 청한다. 노인의 사상에 빠진 나는 그 대결을 성사시킨다. 고수는 진정한 고수였을까. 자신을 믿었던 노인에게는 그럴지도.


고수는 절대 튀지 않는다. 진짜 절대 무공은 아주 평범한 모습으로 우리 사이에 숨어산다. ( 「할슈타트에서 온 절대 무공」, 40쪽)


이 단편은 노인과 형의 대결의 결과에 대한 궁금증이 가장 큰 이야기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가 우연하게 만난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고 챙기는 혜영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혜영 역시 다양한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길고양이를 돌보는 일을 한다. 동네 사람들은 길고양이의 중성화 수술에 대해 관심이 없고 그저 고양이들이 사라지기만을 바란다.


난 진실을 말하는데 사람들은 관심조차 없어요. 하지만 이해는 해요. 진실이란, 사실이 아니잖아요. 각자 믿고 싶은 것을 말하는 거지. ( 「할슈타트에서 온 절대 무공」, 58쪽)


각자 믿고 싶은 것들을 말할 수 있다면 그건 좀 나은 삶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다가 우리는 믿고 싶은 것들을 감추거나 말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일까. 제목의 ‘곰치’ 대신 나의 이름을 넣어 보았다. 소설이 나에게 주는 건 무엇일까. 더 많은 삶, 더 많은 이야기, 그것들을 통해 때때로 안도하며 숨겨두었던 감정들과 마주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선 2021-05-12 0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수, 절대 무공은 평범한 모습으로 우리 사이에 숨어 산다는 말 맞는 것 같기도 하네요 소설이 여러 사람한테 도움이 되고 잠시라도 위안이 되면 좋을 듯합니다 그런 게 없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건 그것대로 받아들여야겠지요


희선

자목련 2021-05-12 08:56   좋아요 1 | URL
맞아요, 특별한 재능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일을 꾸준하게 하는 사람들이 고수 같아요
희선 님,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