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두 소설Q
이주혜 지음 / 창비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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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은 희생을 동반한다. 아니, 강요당한다. 직업일 경우 사명감 같은 게 따라붙기도 한다. 과거에는 돌봄은 여성에게 한정된 책무였다. 그 힘듦에 대해 알려 하지 않았고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세상은 당연한 것은 없다. 시대가 바뀌고 돌봄은 어엿한 하나의 직업이 되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돌봄의 대상이 가족이라는 이유로, 비용을 지불했다는 이유로 정성까지 요구한다. 과연 옳은 것일까? 돌봄을 직업을 선택한 이들이 대부분 여성이기에 그런 건 아닐까. 평범한 번역가인 ‘나’의 일상으로 시작하는 이주혜의 『자두』는 그런 질문을 던진다. 여성의 삶에 대해, 여성의 위치에 대해서 말이다. 아니 인간에 대한 이해와 존중에 대한 질문이 더 맞겠다.


‘나’의 남편 ‘세진’은 어린 시절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의 손에 자랐다. 그런 아들의 며느리로 나를 탐탁해하지 않았지만 결혼 후 좋은 시아버지가 되었다. 며느리를 아끼고 사랑해 마지않는 누가 봐도 좋은 관계였다. 하지만 그 내면에 담긴 진실은 시아버지가 암에 결려 병원에 입원하면서 서서히 드러난다. 박사인 아들에 비해 부족하고 아이를 낳지 않아 대가 끊겼다고 막말을 퍼붓는다. 물론 병세가 깊어져 섬망 증세에 쏟아져 나온 것들이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남편은 나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둘의 관계는 틀어진다.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남편과 아버지는 철저하게 자신을 외면했다는 걸 확인한다.


그런 나를 위로하는 이는 오직 간병인 영옥 씨뿐이었다. 어떤 말을 나누거나 감싸는 행동을 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분명 알 수 있었다. 간병인 영옥의 등장으로 나와 세진은 제대로 된 잠을 잘 수 있었고 조금이나마 일상을 회복할 수 있었다. 처음엔 영옥의 손톱이나 외모가 묘한 이질감을 불러왔고 간병비에 대한 부담이 있었다. 하지만 영옥은 모든 것에 완벽했다. 때로는 시아버지를 달래고 때로는 폭언을 고스란히 감당했다. 영옥이 없었더라면 그 몫은 오롯이 나에게 돌아올 것이었다. 아들이 아닌 며느리 말이다.전문적으로 돌봄 역할을 하는 기관이 등장하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그런 수모와 모멸감을 견뎠을까. 돌봄의 역할은 왜 여성으로 기우는가. 아내, 며느리, 딸에게 희생과 돌봄을 요구하는가. 드러나지 않는 차별과 희생을 생각한다. 어쩌면 여성 작가의 시선이기에, 나 역시 그들과 같은 여성이라서 그런 게 아니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과연 그럴까. 여전히 사회 곳곳에 만연한 가부장제를 생각해 보라. 그러니 남편 세진은 전혀 느낄 수 없는 영옥의 소외감과 고통을 ‘나’는 알 수 있었고 영옥 역시 그러했다.


우리는 잠시 아무 말도 없이 담배 한 대를 피웠습니다. 어느 순간 서로 눈이 마주쳤고 우리 두 사람은 동시에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저는 아직 눈물이 마르지 않은 얼굴로 웃었습니다. 절대로 웃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지만 그렇게 웃고 나니 조금 힘이 나는 것도 같았습니다. 그날 우리는 옥상에서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습니다. 말 한마디 없이 담배를 두 대씩 피우고 잠시 숨을 고르고 병실로 돌아왔을 뿐입니다. 어떤 말도 나누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말해버린 기분이었습니다. 영옥 씨도 그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105~106쪽)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어떤 것. 같은 시대를 경험하고 살아온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감정들. 그래서 아프게 공감한다. 소설 초반에 저자가 직접 번역한 에이드리언 리치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의 에이드리언 리치와 엘리자베스 비숍의 만남은 나와 영옥의 만남으로 이어진다. 차별 금지와 평등을 외치는 시대에 존재하는 약자들이 누군인가 생각한다. 여성의 연대와 공감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평범하면서도 보편적인 소재를 통해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것들을 건드리는 소설이다. 한 집안에서 벌어지는 개인의 서사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것이다.


좋아하는 자두에 끌려 선택한 소설이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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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01-19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하지 않아도 모든 것을 말해버린 기분이란게 뭘지 알것 같으면서도 궁금하네요 ~!! 자두라는 제목과 표지가 멋있습니다. 왜 제목이 자두일까도 궁금하군요. 나와 영옥이 자두를 나눠먹어서 그런걸까요? 😅

자목련 2022-01-20 10:02   좋아요 1 | URL
새파랑 님의 기대처럼 나와 영옥이 자두를 맛있게 먹었으면 좋았겠지만 그건 아니고요.
살짝 알려드리면 자두는 시아버지의 추억입니다.
 
클락워크 도깨비 - 경성, 무한 역동 도깨비불 고블 씬 북 시리즈
황모과 지음 / 고블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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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변한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삶도 변한다.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변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기가 힘든 이들은 중심이 아닌 변방으로 이동한다. 자신만의 삶을 개척하며 살아간다. 황모과의 소설 『클락워크 도깨비』 속 연화의 아버지가 그러한 것처럼.

급변하는 조선 말, 연화는 아버지와 산속에서 단둘이 살고 있다. 대장장이인 아버지를 따라 연화를 불을 다룰 줄 알았고 불을 좋아했다. 불이 주는 힘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밤마다 친구가 되는 사람이 되고 싶은 도깨비 갑이의 불도 좋았다. 둘은 금세 친해졌고 비밀이 없었다. 어디든 함께 갈 수 있었다. 경복궁에 최초의 전등이 점등되는 걸 구경한다. 그 환한 불을 보면서 다른 세상이 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연화의 삶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산에서 내려온 연화는 살길을 찾는다. 연화는 자신이 만든 인력거로 생계를 이어간다. 연화의 인력거는 달랐다. 대장장이 아버지가 만들어준 원진이 붙어 있어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있었다.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며 살아가는 연화를 세상은 가만두지 않았다. 자신의 모든 것을 일본에 빼앗겼고 아버지처럼 농사를 지으며 조용히 살았다. 하지만 불에 대한 마음은 그대로였다.

자기 안의 불을 함부로 식히지 않을 작정이었다. 진짜로 온 세상이 흉흉해지도록 마음속 불을 지피고 싶었다. (60쪽)


근대화의 세상은 놀라웠다. 철도가 놓이고 자동차가 활보하며 사람 깡통으로 된 몸을 가진 인조 노동자라 불리는 이상한 사람들이 등장했다. 일본인 뿐 아니란 조선인 중에도 깡통 장치로 몸을 바꾸는 이가 늘어났다. 더 이상 경성은 연화가 있을 곳이 아니었다. 연화의 삶은 더 바깥으로 향했다. 인력거 사업을 할 때 인연이 닿았던 진홍과 함께 강원도로 떠났다.

산속에서 조용히 살기를 원했던 연화의 삶은 그 시대를 살아온 여성의 불행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날 수 없었지만 연화는 주제적으로 살고자 했다. 작가는 연화의 시선으로 그 시대를 말한다. 역사를 읽는 다양성에 대해 생각한다. 역사로 기록되지 않는 수많은 여성들의 일대기를 상상한다. 약자로서 연대하며 서로를 지키려 했던 그들을 말이다.

19세기 산업혁명 시기 증기기관을 바탕으로 기술이 발전한 가상의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스팀펑크 소설에 관심 있다면 매력적인 소설이다. 그런 점에서 조선말 개화기 시대의 사회적 시류를 도깨비 갑이를 통해 표현한 점도 흥미롭다.

역사를 다루고 말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역사를 읽고 배우는 일도 마찬가지다. 황모과의 소설로 만난 역사는 가슴 아픈 한 부분이지만 그 안에 타오르는 불은 역사 속에서 끝끝내 꺼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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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김금희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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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기 다른 것들을 이야기하는데 그 끝은 같은 것으로 통하는 게 가능할까. 그건 내가 그렇게 읽었기 때문이다. 『2020 김승옥문학상 수상 작품집』 을 읽으면서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막연하게 묻는다. 들어줄 이도 없도 대답할 이도 없는데 혼자 묻는다. 대상작인 김금희의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란 제목 때문이라도 해도 좋을까.


언제나 그렇듯 김금희는 명랑하고 유쾌하다. 그래서 그 안에 담긴 슬픔과 괴로움을 단숨에 알아보지 못한다. 과거에서 시작해 현재로 이어지는 서사나 구성도 비슷하지만 질리지 않는 건 그런 명랑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도 마찬가지다. 현재는 행방이 묘연한 ‘기오성’이라는 남자에 대한 기억으로 시작한다. 한 교수 집안의 종가 족보를 정리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고택에서 석 달 동안 함께 지낸 사이다. 교수의 손녀 ‘강선’과 화자인 ‘은경’은 그와 어울리며 지냈다. 더운 여름 고택을 빠져나와 천변에서 맥주와 피자를 먹으며 “미쳤어”라고 소리를 지르면 보냈던 시절이다.


기오성과 나, 강선의 삼각관계로 사랑에 대한 기억일까 싶지만 그건 그 시절의 일부에 불과하다. 기오성과 나에게는 절대적인 권위와 기득권층인 교수를 꼰대로 대하는 손녀 강선이 보여주는 세대 간의 격차, 한적하고 조용한 시골마을과 활기찬 청춘의 극명한 대비 불협화음 같았다. 거기다 유학을 갔다 돌아왔지만 부적응으로 다시 유학을 준비하는 강선의 모습은 시대와 미래에 대한 불안을 보여준다. 어쩌면 그것은 그 시절 그들이 누릴 수 있는 하나의 감정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중년의 화자가 회상하는 기억처럼 붙잡고 싶었던 시절에 대한 아쉬움과 떠난 사람에 대한 그리움으로 남았다. 잊은 줄 알았지만 잊지 못하는 기억과 그 기억의 주인이 된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것은 때로 현재의 삶에 작은 위안이 된다는 사실에 아프면서도 애틋하다.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고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어서 울고 싶은 기분으로 그 시절을 통과했다는 것. 그렇게 좌절을 좌절로 얘기할 수 있고 더이상 부인하지 않게 되는 것이 우리에게는 성장이었다.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 40쪽)


『2020 김승옥문학상 수상 작품집』의 수록 작품은 모두 여성 작가의 소설이다. 여성의 서사나 시선을 섬세하게 보여준다. 권여선의 「실버들 천만사」와 정한아의 「바다와 캥거루와 낙원의 밤」은 모녀가 등장한다. 각각 이혼을 한 상태로 엄마들은 자신이 선택한 삶을 최선을 다했다. 권여선의 소설에선 이혼 후 딸과 지내지 못했고 정한아의 소설에서 딸은 엄마의 두 번의 이혼을 모두 지켜본다. 「실버들 천만사」에서 엄마와 딸은 여행을 통해 그들의 지난 시간과 삶을 이해하고 화해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에 반해 「바다와 캥거루와 낙원의 밤」의 딸은 십 대의 소녀로 한 번도 엄마가 자신을 돌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정한아의 소설은 오랜만이라 그런지 매끄럽지 않다. 대학강사로 일해지만 두 번의 이혼과 동시에 아버지의 건물에 관리자로 생활을 이어간다. 가난하고 병든 자들이 모인 건물을 관리하는 일은 너무도 고단한데 딸은 친부가 있는 호주로 유학을 선택한다. 혼자 남은 화자의 삶은 어디로 흘러갈까.


은희경의 「우리는 왜 얼마 동안 어디에」는 뉴욕에 사는 친구 민영을 찾은 승아의 이야기다. 뉴욕의 삶은 민영의 인스타에서 본 것과는 달랐다. 화려하지도 평화롭지도 않았다. 한때 전부를 안다고 여긴 민영의 현실에 승아를 위한 작은 쉼은 없었다. 그건 당연한 것이다. 한국에서 승아가 치열하게 살아왔듯 민영 역시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 각자의 삶에 지쳐 서로의 안부를 묻지 못하고 소통하지 못한 현실은 우리의 그것과 다르지 않기에 ‘우리는 왜 얼마 동안 어디에’란 말이 메아리로 돌아온다. 무엇을 위해 사느라 그랬을까. 헛헛한 마음이 차오른다.


기준영의 「들소」는 아름다운 성장소설이었다. 화자인 십 대 소녀 ‘고푸름’은 엄마와 함께 노부부가 사는 마당이 있는 집에 살게 된다. 엄마가 노부부의 실종된 딸과 닮았다는 이유로 호의를 베푼 것이다. 할머니는 둘째 딸 ‘에스더’ 이 스위스에서 춤을 배우고 있다고 말했다. 소녀의 시선을 따라 보여주는 삶의 다양한 파편들. 딸을 잃은 할머니의 멍한 얼굴, 이른 결혼이 가져온 불행한 결혼 생활로 별거를 하는 엄마의 넋두리 같은 조언, ‘길우’라는 새로운 남자 친구를 통해 느끼는 맑고 순수한 감정들. 복잡한 어른들의 이해관계에서 눈치를 볼 수밖에 없지만 소녀는 그 모든 것들을 아름다운 상상의 세계로 치환한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전부를 다 옮기고 싶을 만큼 좋다.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몰라도 소설 속 소녀의 상상 속에서 잠시 머물러도 괜찮을 것 같다. 잠시는 그래도 될 것 같다는 삶의 허락을 받는 기분이다.


나는 이에스더가 되어본 적이 있었다. 할머니가 원하는 게 내가 원하는 것과 같다고 느꼈고, 그건 우리 둘만의 확신이었으니 둘 사이에만 묻어두었다. 일생에 단 한 번, 돌에 새겨둔 언약처럼. 나는 마루에 서 있었지만, 스위스의 자연 속에도 있었다.(…) 나는 생과 생 사이의 함정에 빠져버린 가련한 젊은 여자 에스더였지만, 들썩이며, 흔들리며, 벽장에서, 천장에서, 마당의 나무 그림자 뒤에서 튀어나와 춤을 추었다. 그때는 모든 순간이, 모든 감정이 완전하다고 느껴졌다.(…) 또 한편으로는, 다행하고 무사한 길우와 내 미래를 본다. 운명에는 탄성이 있다. 어느 한때 우리는 마흔세 살쯤이고, 하루가 저무는 속도로 하루를 잃는 보통의 어른이다. 아이일 때보다 훨씬 많은 비밀을 품고 살지만, 비슷한 스타일의 외투 서너 벌 속에 스스로를 단정히 채워 넣는 사람이다. 아름다운이라는 단어를 귀중하다는 표현과 나란히 붙여놓고 볼 수는 있으나 타인에게 쉽게 발설하지 않는 사람. (「들소」, 2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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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떠나온 세계
김초엽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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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아닌 다른 곳을 상상한 적이 없다. 그러니까 지구를 떠나는 삶에 대해서 말이다. 편협한 사고로 안주를 추구하는 나의 성향과 상상력의 부재 때문이다. 그러나 김초엽의 소설을 읽고 나면 달라진다. 내가 모르는 존재들이 내 주변을 서성이고 나에게 말을 걸고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아주 먼 과거에서 이곳으로 떠나온 어떤 존재와 반대로 미래에서 이곳으로 왔을지도 모른 존재들에 대해서 생각한다.


김초엽의 소설은 하나의 세계가 아닌 무구한 그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가정, 그들의 언어, 그들의 기호, 그들의 생활방식은 우리와 다르겠지만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며 돌보는 세상을 추구한다. 경계하면서도 선을 긋지 않고 불화하면서도 소통하려는 노력에 대해 말한다. 그리하여 다른 존재와의 공존을 꿈꾼다.


『방금 떠나온 세계』에서도 다르지 않다. 낯설면서도 친절하게 나와 다른 존재, 인류의 미래 혹은 과거에 대해 들려준다. 다른 공간에서 새로운 체계를 구축하는 이들과 우리가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 알려준다고 할까. 존재의 이유에 대해 하나의 가치나 방식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제껏 우리가 지녔던 관념을 깨부순다고 할까. 그런데 이상한 건 그게 너무 따뜻하고 통쾌하다는 거다.


죽음 그 이상의 멸망의 행성에 가서 남은 자원과 정보를 회수하는 일을 맡은 「최후의 라이오니」 의 로몬인 ‘나’는 행성 3420ED에서 묘한 기분은 느낀다. 그곳에 남은 기계들에게 붙잡혀 감금당하지만 이상하게 그들은 자신을 해할 것 같지 않다. 기계의 대장인 ‘셀’은 나에게 ‘라이오니’라며 반갑게 맞는다. 어쩌면 이전의 나는 셀이 말하는 라이오니였을지도 모른다. 자신을 떠난 라이오니를 믿고 기다린 셀과 다른 기계들. 기계와 인간 사이의 긴밀한 신뢰는 가능한 것일까. 내가 경험할 수 없는 미래의 공간에서는 나는 누군가가 잊지 않고 기다려준 존재가 될 수 있을까.


김초엽이 그리는 세계가 남다른 건 다름에 대한 인정이다. 완전하다는 기준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는 게 놀랍다. 아니 감동한다. 쉽게 말해 돌연변이, 장애를 지닌 이들의 삶에 대해 그들이 느끼는 평범함의 기준이 타인의 그것과 같다고 여기는 일이 부당한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걸 소설로 알려주다니. 시지각 이상증을 겪는 모그 ‘마리’가 춤을 배우겠다는 설정을 통해 왜 그들은 춤을 배우면 안 되는가 우리에게 묻는다. 그건 자유의지 아니던가. 「마리의 춤」은 그런 의미에서 더욱 훌륭하다. 모그들이 느끼는 감각에 대해서 우리는 알려고 하지 않고 오직 시각 정보에 대한 결핍만 느끼고 있던 게 아닐까. 그런 부끄러움을 「로라」에서도 만나다.


「로라」는 선천적이나 후천적 질병이나 사고로 인해 신체의 이상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다. 김초엽은 소설에게 그것을 신체 지도로 표현하는데 ‘로라’와 같은 이들에게는 ‘잘못된 지도’라 명명한다. 하지만 그게 잘못된 것일까. 수술로 인해 소실된 팔, 다리의 감각을 느끼는 게 과연 잘못된 걸까. 그들이 새로운 다리를 원하거나 아예 절단을 원하는 건 당연한 건 아닐까. 그들이 아닌 우리는 그들의 감각과 고통을 모르니까. 소설에서 로라는 세 번째 팔을 원하고 화자인 진은 이해할 수 없다. 로라의 말처럼 사랑과 이해는 같을 수 없다. 그러나 진은 로라를 사랑하기에 그녀를 인정한다.


그런 로라의 마음은 「숨그림자」의 ‘조안’으로 이어진다. 음성 언어를 사용하는 인류의 원형 조안과 호흡으로 의미를 읽는 지하인 ‘단희’는 통역기를 이용해 대화한다. 단희는 지하 세계인 숨그림자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조안의 언어가 품은 것들이 궁금하다. 숨그림자 사람들은 조안을 같은 사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우주로 떠나는 조안의 말은 현재의 우리에게 전하는 말 같다.

“이곳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들이 이곳을 덜 미워하게 하지는 않아. 그건 그냥 동시에 존재하는 거야. 다른 모든 것처럼.” (「숨그림자」, 182쪽)


다른 세계로의 이동은 어떤 의미일까. 소설에선 탐사와 연구를 위한 이동이 많다. 새로운 곳에서 마주한 이들과의 어떠한 불편도 없이 잘 지낼 수 있을까. 그건 불가능하다. 마찰과 충돌이 생기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한 쪽이 다른 한쪽을 무조건 포용한다면 달라진다. 「오래된 협약」에서 ‘오브’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래서 자신의 것들을 내주고 공유하며 공존을 선택한다. 침입자로 여겼을 수도 있는데 오브들은 아니었다. 서로를 연민할 줄 아는 마음, 지구라는 행성에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마음이라는 걸 배운다.


먼 우주에서 온 탐사선이 이 행성에 도착했을 때, 오브들은 탐사선에서 내린 작은 생물들을 면밀히 관찰했어요. 그리고 오브들은 곧 알아차렸습니다. 이 개체들은 다른 환경에 취약하고 지극히 생태 의존적인 생물이며, 심지어 폭력적이고 비도덕적이지만, 어쨌든 그들은 모두 자아를 가지고 생각하며 움직이는 존재들이라고요. 오브들에게 우리는 불청객이었지요. 그들은 우리가 단지 죽어가도록, 절망하도록, 흔적도 없이 사라지도록 내버려 둘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연민할 줄 아는 존재였으니까요. (「오래된 협약」, 222쪽)


우주의 행성으로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한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그 시대에 어쩌면 더 나은 곳, 더 높은 곳으로 이동하기 위해 이곳을 잊는 건 당연한 것으로 여길지도 모른다. 그것이 옳다고 현명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인지 공간」속 ‘제나’는 그렇게 믿었다. 그래서 모두가 인지 공간으로 진입을 할 때 몸이 약한 ‘이브’가 함께 가기를 원했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이브는 혼자 남았다. 인지 공간의 관리자였던 제나는 점점 이브와 멀어지고 인지 공간이 세상의 전부라 여긴다. 공동의 인지 공간이 아니라 저마다의 개별적인 인지 공간을 말했던 이브가 죽고 나서야 제나는 사라진 것들, 잊힌 것들의 소중함을 생각한다. 층위의 맨 아래에서 조금씩 사라지는 것들은 그대로 사라져야 하는 것들일까. 다수를 위해 소수의 희생은 당연한 것일까.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인지 공간이 필요하다. 아마도 제나가 자신의 세계를 떠난 이유도 그런 게 아닐까 싶다.


나는 고개를 돌려 내가 멀어져 온 격자 구조물을 보았다. 자정이 되어 서기관이 인지 공간의 조명을 세 번 깜빡였다. 조명이 완전히 꺼졌을 때 나는 처음으로 어둠에 잠긴 격자 구조물을 마주 보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의 인지 공간이었다. 공동의 기억이었다. 한때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었다. 그리고 방금 내가 떠나온 세계이기도 했다. (「인지 공간」, 269~270쪽)

미래를 상상하는 건 즐겁고도 무섭다. 새로운 공간과 세계가 열릴 거라는 기대와 함께 그것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두렵다. 김초엽의 소설은 그런 마음을 다 아는 것 같다. 부적응자와 약자, 소외자를 항상 배려한다. 아니, 배려가 아니라 나와 다른 존재를 인정하고 연대하는 삶을 말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SF 소설의 새 지평을 여는 김초엽의 소설을 기대하고 갈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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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1-14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초엽이 그리는 다름의 이해나 표현, 자목련님 말씀대로 정말 큰 장점인거 같아요 ~

자목련 2022-01-15 16:23   좋아요 1 | URL
네, 멋지고 당당하게 확장시키는 김초엽의 세계라고 할까요. ㅎ
 
세상 끝 아파트에서 유령을 만나는 법 고블 씬 북 시리즈
정지윤 지음 / 고블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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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은 제목이 시놉시스를 대신한다. 정지윤의 『세상 끝 아파트에서 유령을 만나는 법』 이 그러하다. 유령이 등장할 거라는 기대와 세상 끝 아파트가 가리키는 것이 결코 해피엔딩은 아닐 거라 짐작한다. 세상 끝 아파트는 유일무이한 존재,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책을 읽기도 전에 제목과 표지에 끌린다는 건 나쁜 징조는 아니다.


증강현실의 삶을 살아가는 가까운 미래, 그것과 거리를 두는 이들이 함께 살아가는 아파트 ‘베니스힐’가 있다. 저마다의 선택으로 텐서칩과 확장 현실을 거부하는 이들이 모인 곳이다.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 사이에 뭔가 비밀이 있는 건 아닐까? 친한 친구 J의 죽음에 의문을 품은 십 대 소년 ‘요한’과 그를 돕는 과외 선생 ‘쌤’이 비밀에 다가선다.


요한의 친구는 죽기 전에 ‘베니스힐’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이상한 일이라니. 과연 무엇일까? 요한은 친구가 죽은 진짜 이유를 알기 위해 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요한의 어머니에게 신뢰를 쌓은 쌤은 요한과 밖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요한에게 ‘베니스힐’를 벗어난 곳은 다른 세상이었다. 그러니까 증강현실이 가능한 삶,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을 직접 경험하면서 놀라고 감탄한다. 요한은 소설 밖 독자와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요한을 통해 독자는 함께 증강현실의 세계로 빠져든다. 동시에 왜 ‘베니스힐’는 증강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일까. 의문이 생긴다. 그 중심에는 요한의 부모가 있었고 그들을 지지하는 이들과 부동산 투기가 있었다.


쌤은 밖에서 요한은 ‘베니스힐’안에서 정보를 수집한다. 명문대 출신인 쌤은 요한이 ‘베니스힐’에서 도청과 해킹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 과정에서 요한은 ‘베니스힐’에서 벌어지는 다툼과 인간의 욕망과 마주한다. 놀랍게도 요한의 어머니가 개입되었고 쌤도 자신의 외삼촌 죽음을 밝기기 위해 요한을 이용한 것이었다.


가상으로 그려낸 미래의 모습이지만 과연 가상으로 끝낼 수 없다. 증강현실, 메타버스는 이미 우리 삶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소설 속 ‘베니스힐’처럼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들의 공동체 공간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모두에게 과학의 발전을 강요할 수 없으니까.


모든 연구와 과학의 발전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것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기술을 독점으로 사용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어쩌면 이 소설은 그런 경고를 전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SF 소설의 재미를 충분히 지니면서 사회적 이슈를 건드리는 르포 형태의 현실 고발 소설이다. 짧은 스토리에 담긴 강력한 주제가 오래 남는다. 소설 속 미래가 우리가 마주하는 미래는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감출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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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2-01-12 23: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점에서 검색하다가 이 책 시리즈 보았는데, 다른 책보다 가볍고 소재도 괜찮은 것 같았어요.
잘읽었습니다. 자목련님, 추운날씨 감기 조심하시고, 좋은 밤 되세요.^^

자목련 2022-01-13 09:21   좋아요 1 | URL
네, 한 손에 쏙 들어오는 판형이라 어디서든 즐겁게 읽을 수 있는 듯해요.
서니데이 님, 오늘은 눈이 가득입니다. 따뜻한 하루 이어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