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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떠나온 세계
김초엽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10월
평점 :
품절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을 상상한 적이 없다. 그러니까 지구를 떠나는 삶에 대해서 말이다. 편협한 사고로 안주를 추구하는 나의 성향과 상상력의 부재 때문이다. 그러나 김초엽의 소설을 읽고 나면 달라진다. 내가 모르는 존재들이 내 주변을 서성이고 나에게 말을 걸고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아주 먼 과거에서 이곳으로 떠나온 어떤 존재와 반대로 미래에서 이곳으로 왔을지도 모른 존재들에 대해서 생각한다.
김초엽의 소설은 하나의 세계가 아닌 무구한 그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가정, 그들의 언어, 그들의 기호, 그들의 생활방식은 우리와 다르겠지만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며 돌보는 세상을 추구한다. 경계하면서도 선을 긋지 않고 불화하면서도 소통하려는 노력에 대해 말한다. 그리하여 다른 존재와의 공존을 꿈꾼다.
『방금 떠나온 세계』에서도 다르지 않다. 낯설면서도 친절하게 나와 다른 존재, 인류의 미래 혹은 과거에 대해 들려준다. 다른 공간에서 새로운 체계를 구축하는 이들과 우리가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 알려준다고 할까. 존재의 이유에 대해 하나의 가치나 방식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제껏 우리가 지녔던 관념을 깨부순다고 할까. 그런데 이상한 건 그게 너무 따뜻하고 통쾌하다는 거다.
죽음 그 이상의 멸망의 행성에 가서 남은 자원과 정보를 회수하는 일을 맡은 「최후의 라이오니」 의 로몬인 ‘나’는 행성 3420ED에서 묘한 기분은 느낀다. 그곳에 남은 기계들에게 붙잡혀 감금당하지만 이상하게 그들은 자신을 해할 것 같지 않다. 기계의 대장인 ‘셀’은 나에게 ‘라이오니’라며 반갑게 맞는다. 어쩌면 이전의 나는 셀이 말하는 라이오니였을지도 모른다. 자신을 떠난 라이오니를 믿고 기다린 셀과 다른 기계들. 기계와 인간 사이의 긴밀한 신뢰는 가능한 것일까. 내가 경험할 수 없는 미래의 공간에서는 나는 누군가가 잊지 않고 기다려준 존재가 될 수 있을까.
김초엽이 그리는 세계가 남다른 건 다름에 대한 인정이다. 완전하다는 기준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는 게 놀랍다. 아니 감동한다. 쉽게 말해 돌연변이, 장애를 지닌 이들의 삶에 대해 그들이 느끼는 평범함의 기준이 타인의 그것과 같다고 여기는 일이 부당한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걸 소설로 알려주다니. 시지각 이상증을 겪는 모그 ‘마리’가 춤을 배우겠다는 설정을 통해 왜 그들은 춤을 배우면 안 되는가 우리에게 묻는다. 그건 자유의지 아니던가. 「마리의 춤」은 그런 의미에서 더욱 훌륭하다. 모그들이 느끼는 감각에 대해서 우리는 알려고 하지 않고 오직 시각 정보에 대한 결핍만 느끼고 있던 게 아닐까. 그런 부끄러움을 「로라」에서도 만나다.
「로라」는 선천적이나 후천적 질병이나 사고로 인해 신체의 이상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다. 김초엽은 소설에게 그것을 신체 지도로 표현하는데 ‘로라’와 같은 이들에게는 ‘잘못된 지도’라 명명한다. 하지만 그게 잘못된 것일까. 수술로 인해 소실된 팔, 다리의 감각을 느끼는 게 과연 잘못된 걸까. 그들이 새로운 다리를 원하거나 아예 절단을 원하는 건 당연한 건 아닐까. 그들이 아닌 우리는 그들의 감각과 고통을 모르니까. 소설에서 로라는 세 번째 팔을 원하고 화자인 진은 이해할 수 없다. 로라의 말처럼 사랑과 이해는 같을 수 없다. 그러나 진은 로라를 사랑하기에 그녀를 인정한다.
그런 로라의 마음은 「숨그림자」의 ‘조안’으로 이어진다. 음성 언어를 사용하는 인류의 원형 조안과 호흡으로 의미를 읽는 지하인 ‘단희’는 통역기를 이용해 대화한다. 단희는 지하 세계인 숨그림자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조안의 언어가 품은 것들이 궁금하다. 숨그림자 사람들은 조안을 같은 사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우주로 떠나는 조안의 말은 현재의 우리에게 전하는 말 같다.
“이곳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들이 이곳을 덜 미워하게 하지는 않아. 그건 그냥 동시에 존재하는 거야. 다른 모든 것처럼.” (「숨그림자」, 182쪽)
다른 세계로의 이동은 어떤 의미일까. 소설에선 탐사와 연구를 위한 이동이 많다. 새로운 곳에서 마주한 이들과의 어떠한 불편도 없이 잘 지낼 수 있을까. 그건 불가능하다. 마찰과 충돌이 생기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한 쪽이 다른 한쪽을 무조건 포용한다면 달라진다. 「오래된 협약」에서 ‘오브’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래서 자신의 것들을 내주고 공유하며 공존을 선택한다. 침입자로 여겼을 수도 있는데 오브들은 아니었다. 서로를 연민할 줄 아는 마음, 지구라는 행성에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마음이라는 걸 배운다.
먼 우주에서 온 탐사선이 이 행성에 도착했을 때, 오브들은 탐사선에서 내린 작은 생물들을 면밀히 관찰했어요. 그리고 오브들은 곧 알아차렸습니다. 이 개체들은 다른 환경에 취약하고 지극히 생태 의존적인 생물이며, 심지어 폭력적이고 비도덕적이지만, 어쨌든 그들은 모두 자아를 가지고 생각하며 움직이는 존재들이라고요. 오브들에게 우리는 불청객이었지요. 그들은 우리가 단지 죽어가도록, 절망하도록, 흔적도 없이 사라지도록 내버려 둘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연민할 줄 아는 존재였으니까요. (「오래된 협약」, 222쪽)
우주의 행성으로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한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그 시대에 어쩌면 더 나은 곳, 더 높은 곳으로 이동하기 위해 이곳을 잊는 건 당연한 것으로 여길지도 모른다. 그것이 옳다고 현명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인지 공간」속 ‘제나’는 그렇게 믿었다. 그래서 모두가 인지 공간으로 진입을 할 때 몸이 약한 ‘이브’가 함께 가기를 원했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이브는 혼자 남았다. 인지 공간의 관리자였던 제나는 점점 이브와 멀어지고 인지 공간이 세상의 전부라 여긴다. 공동의 인지 공간이 아니라 저마다의 개별적인 인지 공간을 말했던 이브가 죽고 나서야 제나는 사라진 것들, 잊힌 것들의 소중함을 생각한다. 층위의 맨 아래에서 조금씩 사라지는 것들은 그대로 사라져야 하는 것들일까. 다수를 위해 소수의 희생은 당연한 것일까.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인지 공간이 필요하다. 아마도 제나가 자신의 세계를 떠난 이유도 그런 게 아닐까 싶다.
나는 고개를 돌려 내가 멀어져 온 격자 구조물을 보았다. 자정이 되어 서기관이 인지 공간의 조명을 세 번 깜빡였다. 조명이 완전히 꺼졌을 때 나는 처음으로 어둠에 잠긴 격자 구조물을 마주 보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의 인지 공간이었다. 공동의 기억이었다. 한때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었다. 그리고 방금 내가 떠나온 세계이기도 했다. (「인지 공간」, 269~270쪽)
미래를 상상하는 건 즐겁고도 무섭다. 새로운 공간과 세계가 열릴 거라는 기대와 함께 그것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두렵다. 김초엽의 소설은 그런 마음을 다 아는 것 같다. 부적응자와 약자, 소외자를 항상 배려한다. 아니, 배려가 아니라 나와 다른 존재를 인정하고 연대하는 삶을 말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SF 소설의 새 지평을 여는 김초엽의 소설을 기대하고 갈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