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김금희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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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기 다른 것들을 이야기하는데 그 끝은 같은 것으로 통하는 게 가능할까. 그건 내가 그렇게 읽었기 때문이다. 『2020 김승옥문학상 수상 작품집』 을 읽으면서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막연하게 묻는다. 들어줄 이도 없도 대답할 이도 없는데 혼자 묻는다. 대상작인 김금희의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란 제목 때문이라도 해도 좋을까.


언제나 그렇듯 김금희는 명랑하고 유쾌하다. 그래서 그 안에 담긴 슬픔과 괴로움을 단숨에 알아보지 못한다. 과거에서 시작해 현재로 이어지는 서사나 구성도 비슷하지만 질리지 않는 건 그런 명랑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도 마찬가지다. 현재는 행방이 묘연한 ‘기오성’이라는 남자에 대한 기억으로 시작한다. 한 교수 집안의 종가 족보를 정리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고택에서 석 달 동안 함께 지낸 사이다. 교수의 손녀 ‘강선’과 화자인 ‘은경’은 그와 어울리며 지냈다. 더운 여름 고택을 빠져나와 천변에서 맥주와 피자를 먹으며 “미쳤어”라고 소리를 지르면 보냈던 시절이다.


기오성과 나, 강선의 삼각관계로 사랑에 대한 기억일까 싶지만 그건 그 시절의 일부에 불과하다. 기오성과 나에게는 절대적인 권위와 기득권층인 교수를 꼰대로 대하는 손녀 강선이 보여주는 세대 간의 격차, 한적하고 조용한 시골마을과 활기찬 청춘의 극명한 대비 불협화음 같았다. 거기다 유학을 갔다 돌아왔지만 부적응으로 다시 유학을 준비하는 강선의 모습은 시대와 미래에 대한 불안을 보여준다. 어쩌면 그것은 그 시절 그들이 누릴 수 있는 하나의 감정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중년의 화자가 회상하는 기억처럼 붙잡고 싶었던 시절에 대한 아쉬움과 떠난 사람에 대한 그리움으로 남았다. 잊은 줄 알았지만 잊지 못하는 기억과 그 기억의 주인이 된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것은 때로 현재의 삶에 작은 위안이 된다는 사실에 아프면서도 애틋하다.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고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어서 울고 싶은 기분으로 그 시절을 통과했다는 것. 그렇게 좌절을 좌절로 얘기할 수 있고 더이상 부인하지 않게 되는 것이 우리에게는 성장이었다.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 40쪽)


『2020 김승옥문학상 수상 작품집』의 수록 작품은 모두 여성 작가의 소설이다. 여성의 서사나 시선을 섬세하게 보여준다. 권여선의 「실버들 천만사」와 정한아의 「바다와 캥거루와 낙원의 밤」은 모녀가 등장한다. 각각 이혼을 한 상태로 엄마들은 자신이 선택한 삶을 최선을 다했다. 권여선의 소설에선 이혼 후 딸과 지내지 못했고 정한아의 소설에서 딸은 엄마의 두 번의 이혼을 모두 지켜본다. 「실버들 천만사」에서 엄마와 딸은 여행을 통해 그들의 지난 시간과 삶을 이해하고 화해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에 반해 「바다와 캥거루와 낙원의 밤」의 딸은 십 대의 소녀로 한 번도 엄마가 자신을 돌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정한아의 소설은 오랜만이라 그런지 매끄럽지 않다. 대학강사로 일해지만 두 번의 이혼과 동시에 아버지의 건물에 관리자로 생활을 이어간다. 가난하고 병든 자들이 모인 건물을 관리하는 일은 너무도 고단한데 딸은 친부가 있는 호주로 유학을 선택한다. 혼자 남은 화자의 삶은 어디로 흘러갈까.


은희경의 「우리는 왜 얼마 동안 어디에」는 뉴욕에 사는 친구 민영을 찾은 승아의 이야기다. 뉴욕의 삶은 민영의 인스타에서 본 것과는 달랐다. 화려하지도 평화롭지도 않았다. 한때 전부를 안다고 여긴 민영의 현실에 승아를 위한 작은 쉼은 없었다. 그건 당연한 것이다. 한국에서 승아가 치열하게 살아왔듯 민영 역시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 각자의 삶에 지쳐 서로의 안부를 묻지 못하고 소통하지 못한 현실은 우리의 그것과 다르지 않기에 ‘우리는 왜 얼마 동안 어디에’란 말이 메아리로 돌아온다. 무엇을 위해 사느라 그랬을까. 헛헛한 마음이 차오른다.


기준영의 「들소」는 아름다운 성장소설이었다. 화자인 십 대 소녀 ‘고푸름’은 엄마와 함께 노부부가 사는 마당이 있는 집에 살게 된다. 엄마가 노부부의 실종된 딸과 닮았다는 이유로 호의를 베푼 것이다. 할머니는 둘째 딸 ‘에스더’ 이 스위스에서 춤을 배우고 있다고 말했다. 소녀의 시선을 따라 보여주는 삶의 다양한 파편들. 딸을 잃은 할머니의 멍한 얼굴, 이른 결혼이 가져온 불행한 결혼 생활로 별거를 하는 엄마의 넋두리 같은 조언, ‘길우’라는 새로운 남자 친구를 통해 느끼는 맑고 순수한 감정들. 복잡한 어른들의 이해관계에서 눈치를 볼 수밖에 없지만 소녀는 그 모든 것들을 아름다운 상상의 세계로 치환한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전부를 다 옮기고 싶을 만큼 좋다.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몰라도 소설 속 소녀의 상상 속에서 잠시 머물러도 괜찮을 것 같다. 잠시는 그래도 될 것 같다는 삶의 허락을 받는 기분이다.


나는 이에스더가 되어본 적이 있었다. 할머니가 원하는 게 내가 원하는 것과 같다고 느꼈고, 그건 우리 둘만의 확신이었으니 둘 사이에만 묻어두었다. 일생에 단 한 번, 돌에 새겨둔 언약처럼. 나는 마루에 서 있었지만, 스위스의 자연 속에도 있었다.(…) 나는 생과 생 사이의 함정에 빠져버린 가련한 젊은 여자 에스더였지만, 들썩이며, 흔들리며, 벽장에서, 천장에서, 마당의 나무 그림자 뒤에서 튀어나와 춤을 추었다. 그때는 모든 순간이, 모든 감정이 완전하다고 느껴졌다.(…) 또 한편으로는, 다행하고 무사한 길우와 내 미래를 본다. 운명에는 탄성이 있다. 어느 한때 우리는 마흔세 살쯤이고, 하루가 저무는 속도로 하루를 잃는 보통의 어른이다. 아이일 때보다 훨씬 많은 비밀을 품고 살지만, 비슷한 스타일의 외투 서너 벌 속에 스스로를 단정히 채워 넣는 사람이다. 아름다운이라는 단어를 귀중하다는 표현과 나란히 붙여놓고 볼 수는 있으나 타인에게 쉽게 발설하지 않는 사람. (「들소」, 2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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