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쓴 것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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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잘 살고 싶다는 마음이 사라졌다. 마치 도달해야 할 목표처럼 여겼던 잘 사는 일 말이다. 잘 사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 모르기도 하고 사는 그 자체로도 충분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나이가 든 거라고 친구는 놀릴지도 모른다. 흐르는 물처럼 바람처럼 살 수는 없겠지만 그냥 순리대로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날들이다. 그럼 순리는 무엇일까. 조남주의 소설집 『우리가 쓴 것』을 읽으면서도 그런 마음이 더욱 강해졌다. ‘우리가 살아온 것’이라고 혼자 중얼거리면서 읽었다.


수록된 8편의 소설이 그랬으니까. 소설 속 여성 화자는 모두 우리였으니까. 과거의 우리, 지금의 우리, 미래의 우리 말이다. 어쩌면 모두 여성 화자라서 우리의 이야기로 친근하고 다정하게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그녀들의 상실과 슬픔을 타인의 것이 아니라 내 것 같아서 함께 분노하고 함께 기도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읽은 「매화나무 아래」는 눈 오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은 소설이다. 눈 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날이 있을까. 고요하고 평온한 마음으로 지내는 날들에야 가능할까. 아니 그런 날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내게는 그런 느낌이었다. 치매에 걸린 큰언니를 만나러 요양원에 가는 화자 동주가 들려주는 큰언니 금주, 작은언니 은주의 이야기. 세 자매로 지냈던 시절, 그리고 남은 큰언니와 동주.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세월의 흐름, 삶의 고단함, 이별을 준비하는 가느다란 시간을 생각한다. 연약하고 위태롭게 삶과 이어진 시간들. 사는 건 무엇일까. 가만히 이런 문장을 읽는다. 소설 속 세 자매도 눈이 되었다가 꽃이 될 것이다. 그게 인생일 것이다.


봄이 오면 눈들은 꽃이 되겠지. 새하얀 꽃들이 늙은 나무를 뒤덮으면 마르고 갈라진 나무껍질은 보드라운 꽃잎에 가려 보이지도 않겠지. 벅차게 흐드러진 풍경이 눈앞에 그려지며 코끝에 매화 향이 날라오는 듯했다. 바람이 불면 새하얀 꽃잎들이 나비처럼 팔랑일 것이다. 그러다 못 이기고 한꺼번에 떨어져 함박눈처럼 흩날릴 것이다. (「매화나무 아래」 중에서)


모든 걸 다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은 게 노년이라면 치열하게 혼란스러운 지금의 시간을 견딜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혼자서는 불가능할 것이다. 나와 똑같은 마음은 아니더라도 지지하는 마음, 응원하는 마음이 있다면 해낼 수 있다. 화자인 소설가가 악플러를 고소한 내용으로 시작하는 「오기」는 그런 마음을 말한다. 이해와 공감, 단단한 연대로 나갈 수 있다는 믿음 같은 것. 이 단편을 읽으면서 여성 서사란 무엇일까. 생각한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경험했던 어떤 순간들, 당혹스럽고 불편하고 아팠던 기억이 떠오른다. 가부장제와 차별의 단어를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은 상처들. 그래서 ‘오기’란 제목이 ‘다짐’, ‘결속’처럼 다가온다.


그런 마음은 사랑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나’가 아닌 상대에게 모든 걸 맞추는 「현남 오빠에게」나 어디에도 안전지대는 없는 수많은 폭력과 폭행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는 「여자아이는 자라서」 속 딸을 둔 화자와 연결된다. 인식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스스로 변화를 만들어 내야 한다고. 그건 단순하게 여성의 문제만이 아니라고 유쾌하게 풀어낸 「미스 김은 알고 있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사실 이 단편을 너무 재밌게 읽었지만 가장 씁쓸하고 속상했다. 직장에서 뭐든 다 해내는 미스 김의 존재가 우리의 20~30대 청춘 같아서.


알면서 버티고 모르면서 버티는 게 삶인가. 자신이 자리를 잃고 싶지 않은 마음은 누구나 같다. 육아로 힘들지만 복직한 직장을 그만둘 수 없는 딸의 속상함을 알지만 워킹맘인 엄마도 손주를 봐줄 수 있는 여력이 없다. 「오로라의 꿈」 속 모녀는 가장 현실적인 우리의 모습이다.


성실하고 꾸준하게 자기 일을 해 나가는 것. 그 평범한 일상이 삶을 버티게 해 준다는 것을 안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도. 누군가에게는 싸워 얻어내야 하는 어려운 일이라는 것도. (「오로라의 꿈」 중에서)


우리가 쓰는 삶, 우리가 살아내는 삶을 생각한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다양한 여성의 삶. 그들의 고군분투는 나의 일상이다. 웃고, 울고, 화내고, 속상한 마음을 다시 다잡고 나아가는 우리와 닮았다. 소설 속 그들처럼 우리의 시간이 먼 훗날 어떻게 채워질까 기대하며 오늘을 더 사랑하며 살아간다. 잘 살지 않아도 괜찮다고, 서로를 응원하면서 절망하지 않고 같이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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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7-02 08: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말씀 처럼 ‘우리가 쓰는 삶, 우리가 살아내는 삶‘
오늘 하루 열심히, 잘 살지 않아도, 서로 부등 부등 응원하며!
자목련님 7월 건강하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e^

자목련 2021-07-02 17:23   좋아요 2 | URL
응원하는 삶, 좋아요!
더위가 몰려오는 7월 시원하게 보내세요^^

초딩 2021-08-06 17: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앙 자목련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자목련 2021-08-09 17:34   좋아요 0 | URL
^^*
행복한 한 주 이어가세요^^

그레이스 2021-08-06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

자목련 2021-08-09 17:34   좋아요 0 | URL
건강하고 즐거운 일이 가득한 시간 보내세요^^

서니데이 2021-08-06 18: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자목련 2021-08-09 17:34   좋아요 1 | URL
가을의 소리가 들리는 한 주 보내세요^^

새파랑 2021-08-06 18: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축!하! 드려요 역시 👍

자목련 2021-08-09 17:35   좋아요 1 | URL
감사드리며, 저도 한다발의 축하를 드립니다^^

강나루 2021-08-06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축하드려요^^

자목련 2021-08-09 17:36   좋아요 1 | URL
강나루 님도 축하드려요, 시원하고 즐거운 날들 이어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