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의 끝이 아쉬운지 밤새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바람은 제 할 일을 했다. 기온도 내려가서 창문이 열리지 않는다. 잠깐 그대로 두어야 할 것이다. 힘을 주어 열려고 한다면 탈이 날 것이다. 어제는 안부를 전하려고 휴대폰 전화 목록을 살피다가 가장 많이 받은 문자가 재난문자라는 걸 실감했다. 우리가 사는 시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시스템이었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우리는 모든 정보에 쉽게 접근하고 더 깊게 알 수 있다. 빠른 정보도 좋겠지만 정확한 정보 전달이 더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전기압력밭솥을 버리면서도 그랬다. 폐가전 무료 수거를 신청했지만 소형의 경우에는 5개를 모아서 신청을 해야 한다는 안내를 받았다. 5개를 모을 수도 없고 집안에 둘 공간도 마땅치 않아서 관리사무소에 문의를 했더니 경비 아저씨께 여쭤보라는 답을 했다. 스티커 가격을 듣고 조금 놀랐다. 여름에는 무료(오디오와 비디오)로 버렸으니까. 재활용을 위한 분리수거를 하지 않았던 날들이 떠올랐다. 버리스타가 되어야 한다는 공익광고를 볼 때마다 언젠가 이 세상은 쓰레기 천국이 될 것 같은 공포를 느낀다. 무조건 다 재활용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기억하고 실천해야 한다. 사소한 것들이 중요하고 소중하다. 분리수거를 하는 방법도 조금씩 달라진다. 잘 알아야 하니 잘 버릴 수 있다는 생각에 동의한다. 나도 잘 지켜야 하는데. 때때로 부끄러운 순간이 많다.
12월 31일이 흐른다. 내일은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의 첫날이다. 오늘과 내일, 똑같은 하루지만 의미를 부여하니 다른 세상으로 구분된다. 송구영신예배는 올해도 드리지 못할 것 같다. 작년에도, 그전에도 참석하지 않았던 예배인데 올해는 참석하지 못한다는 쪽으로 기우니 조금 아쉽다.
2021년을 위한 달력이 많아졌다. 동네 치킨집에서 배달을 시켰더니 맛있는 메뉴가 가득한 탁상 달력이 함께 왔다. 서점에서 보내준 달력까지 생각지 않았던 달력 풍년이다. 코로나로 인해 은행이나 거래처에 방문을 하지 않아서 달력을 구매했다는 친구가 생각났다. 생일이나 주요 행사를 달력에 표기한다는 친구다. 집안에 있는 게 익숙해서 필요한 곳이 아니면 외출을 아예 생각하지 않는다는 친구의 말이 쓸쓸하게 다가오는 날들이다.
새벽에 내린 눈이 녹고 있다. 눈사람으로 변하는 한강의 단편 <작별>이 생각난다. 소설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일까. 어쩌면 내가 모르는 세상에서는 더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눈사람은 아니더라도 마른 감정의 삶, 뜨거운 눈물이 사라지는 그런 삶일지도 모른다. 어제 우연히 방송에서 배우 이순재 씨가 60년 만에 친구를 만나는 장면을 보았다. 살아있다면 만나고 싶은 친구라는 부제가 뭉클했다.
모든 걸 다음으로 미루는 시간을 사는 해는 올해로 끝났으면 한다. 한 해의 마지막 날 봄을 기다리는 기대와 설렘을 품어본다. 조심스럽지만 기대를 키울 수 있는 날들이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런 시를 읽으면서 씁쓸한 마음으로 보내는 마지막 날, 내년에는 산뜻하고 신나는 일상을 꿈꿔도 괜찮다는 말이 듣고 싶다.
너무 이상한 관계들
너무 이상한 싸움들
너무 이상한 진실들
너무 이상한 당신들
너무 이상한 공기들
싸구려가 된 죽음 싸구려가 된 골짜기
모르고 싶어요
나는 몰라요
(……)
당신은 사하라
나는 툰드라
우리
만나지 말아요
그래야, 남을 수, 있어요 (「놀라운 일, 바이러스」,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