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벨리 평전 - 시인을 닮은 한 정치가의 초상 대우학술총서 신간 - 문학/인문(번역) 484
로베르토 리돌피 지음, 곽차섭 옮김 / 아카넷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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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심이 전혀 천박하지 않았던 한 인물. 현실주의자이자 냉소적인 인물. 시시껄렁한 농담과 더불어 공화국의 안위를 심각하게 논했던 피렌체의 외교관. 그리고 마키아벨리와 같이 얘기하는 리돌피. 그의 해박한 전기적 지식과 역사 서술에 대한 탁월한 감각. 가장 현실적이면서 분석적인, 또한 감동적인 평전, 그 이상. 하나 더 - 전공자의 훌륭한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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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념의 모험 한길그레이트북스 1
화이트헤드 지음 / 한길사 / 199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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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독창적인 문화사일 뿐, 그도 아니라면 품위있는 아카데미안들을 위해 정리한 서양 관념사의 두 궤적(희랍과 히브리)? 그러나 이렇게만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유명한 책?  관념은 모험이기 보다 오히려 전통의 축적에 더 가깝지 않은가? 등등 ... 의심스러운 점 여러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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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크리틱 - 칸트와 마르크스 넘어서기
가라타니 고진 지음, 송태욱 옮김 / 한길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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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레타리아는 천 개의 가면을 쓴다. 그렇다고 가면 뒤에 어떤 본질이 숨어 있는 것도, 목소리 뒤에 어떤 실체가 숨어 있는 것도 아니다. 이들은 초재적인 주체성으로부터 또는 어떤 일자로부터 이데아를 분유(methexis)받지도 않는다. 그들은 세계의 표면을 횡단하고, 접속하며, 분산하며, 수렴한다. 이들은 계열이며, 양태고, 적합 관념들(adequate ideas)이며 결과적으로 기쁨과 혁명적 열정을 표현한다.

 

1848년 프랑스 혁명에서부터 1871년 빠리 꼬뮌에 이르기까지 프롤레타리아들의 가면은 전문노동자다. 1917년 러시아에서 그들은 대중노동자의 가면을 더 선호했다. 1968년과 1977년-79년 동안 이들은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하나의 고원(plateaux)으로 삼아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라고 외쳤다. 이때 이들은 다중이었고, 또는 사회적 노동자였다. 그리고 1994년 멕시코 라칸돈 정글에서 봉기한 싸빠띠스따들과 시애틀을 가득 매운 반세계화 시위대에서 프롤레타리아는 전지구적 노동자로서, 다중으로서, 그리고 검은 스키마스크를 쓰고 대륙간 회의를 통해 서로 악수하는 전개체적 특이성 자체가  된다. 전세계적, 세계사적 투쟁 순환의 역동적 힘(puissance)이 된다.

 

그렇다고 고진이 이런 가면 쓴, 스스로 변용(affectio)하는 분자들을 완전히 파악한 것은 아니다. 프롤레타리아는 파악 불가능한 미분화의 지대, 그 어두운 지대(zone obscure)를 통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질문은 다음과 같다. 트랜스크리틱(transcritique)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무기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차라리 고진에게 이 질문은 철지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구호일 뿐인가? 그런데 만약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일괴암적인 공산당, 또는 사회당의 재현 시스템이 아니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사실상 맑스에게 코뮤니즘은 그런 것이 아니다. 고진 또한 그것을 잘 안다.

 

이쯤 해서 그는 맑스의 유명한 정식을 가지고 올 것이다. G-W-G'(상품-화폐-상품). 중요한 지점은 <이전>의 지점이 아니다. <이후>의 지점이다. 즉 노동자는 W-G'의 지점에 일정한 파열구를 형성할 수 있다. 즉 이때 노동자는 곧 소비자고, 일종의 <노동자=소비자>라는 새로운 투쟁 주체를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분명 노동자는 스스로가 생산한 상품의 소비자이며 여기에 자본주의의 약한 고리가 있다는 것. 고진이 실천적(그의 표현대로라면 <도덕적>)이라고 부르는 측면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니 <불매운동>이 투쟁수단이 된다. 고진에 의하면 이 운동은 언제나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그리고 이 운동과 더불어 <새로운 시스템>, 세미라티스(Semilatice)형 생산-소비 공동체가 조력해야 한다. 새로운 화폐(LETS), 다시 말해 지역간 유통과 교환에서 어떠한 실재적인 잉여도 표장하지 않는 순전한 가치 상징물로서의 화폐가 효율적으로 작동해야 한다. 실제로 고진은 이러한 운동에 깊이 간여하고 있다.

 

문제는 고진이 <소비자=노동자> 운동에 방점을 두었다는 데 있지 않다. 문제는 그 운동의 가치 여부와는 상관없이 운동을 정당화하는 고진의 비판(비평), 트랜스크리틱 자체에 놓여 있다. 불매운동과 지역화페 운동으로 대항운동을 조직하자는 것을 누가 마다할 것인가? 그러나, 고진은 코뮤니즘 운동이 자본주의적 조건 아래에서 생성된다는 맑스의 냉정한 통찰에 <그러나>라는 접속사를 쓴 후 이렇게 말한다. <이 현실을 구성하는 힘 자체는 자본주의에서 온다. 그러한 의미에서 코뮤니즘은 자본주의 운동에 부수되는 것이고, 자본주의 자체가 낳는 대항운동으로 존재한다>(367). 고진에게 <그러한 의미>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자본주의가 현실을 구성하는 힘이라는 것이고,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운동은 그것에 부수되며 결과로서만, 수동적으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고진에 대해 우리가 너무 멀리 나간 것이 아니다. 그는 프롤레타리아 ‘주체성’을 반응적(reactif)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투쟁 순환 동안 프롤레타리아가 맡아 왔던 능동적 역할들과 창조적 탈주들은 어떻게 되는가? 물론 미시적인 측면의 반동과 더 큰 측면들에서의 배신행위들을 간과하자는 것은 아니다. 스탈린이 그랬고, 동독이 그랬으며,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그러하다. 그러나 이런 것이 프롤레타리아 역능의 탓인가? 고진조차 그렇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이 지점에서 고진의 <소비자=노동자> 주체성은 자본주의 암적 유기체의 자장 안에서 지난한 생존을 영위해야만 한다. 어떤 ‘출구’도 없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진의 실천이 완전히 자본에의 포섭 아래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럴 것이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 가능성이 짙을 뿐이다.

 

다시 한번 살펴보자. 트랜스크리틱. 고진은 말한다. <내가 트랜스크리틱(Transcritique)이라 부르는 것은 윤리성과 정치경제학 영역의 사이, 칸트적 비판과 마르크스적 비판 사이의 코드 변환(Transcoding), 즉 칸트로부터 마르크스를 읽어내고 마르크스로부터 칸트를 읽어내는 시도이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칸트와 마르크스에 공통된 ‘비판’(비평)의 의미를 되찾는 일이다. … 일반적으로 그들은 마르크스주의라고 불리는 유물론에 결여된 주체적․윤리적 계기를 찾아내고자 했다. 사실 칸트는 결코 부르주아적인 철학자가 아니다. … 타자를 단지 ‘수단’으로만 취급하는 자본주의 경제에서 칸트가 말하는 ‘자유의 왕국’이나 ‘목적의 왕국’이 코뮤니즘을 의미하는 것은 분명하다. 반대로 코뮤니즘은 그러한 도덕적 계기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15-16). 고진의 언급은 매우 가공할 만한(?) 것처럼 보인다. 칸트와 맑스 ‘사이’에 고진은 있고 싶어 하는 것이다. 칸트가 부르주아 철학자가 아닌 이유는 주로 그의 ‘영구평화론’이 도덕적 정언명법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유와 목적의 왕국이고 책임 있는 도덕적 주체들이 최고선을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곳, 이념들의 고향 ... 등등. 이 왕국에서 맑스와 칸트는 화해한다. 고진은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어째서? 대답은 맑스와 칸트가 유사한 방법론을 구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진도 그러려고 한다. 트랜스크리틱. 맑스는 리카도와 베일리 사이에 있었으며 헤겔과 포이어바흐를 횡단했고, 칸트는 <독단적인 합리론에 대해 경험론으로 맞서고, 독단적인 경험론에 대해 합리론으로 맞서는 일을 반복했다>(30). 따라서 고진은 맑스와 칸트 사이에 있으며, 잰걸음으로 둘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트랜스포지션(transposition)말이다. 초월적 통각은 화폐와 더불어 이동을 행한다. 초유의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화폐가 눈부신 모습으로 등장한다. 고진의 맑스주의에서 화페는 기본적으로 잉여가치와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 왜냐하면 앞서 말했다시피 가치의 실현은 ‘이후’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즉 상품의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종합은 유통 국면에서 실현된다. 잉여가치가 유통 국면에서 나타난다는 것은 고진의 이론만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는 매우 멀리 나가고 있음에 틀림없다. <산업자본의 잉여가치는 단순히 노동자를 일하게 함으로써가 아니라 (총체로서의) 노동자가 만든 물건을 노동자 자신이 사는 데서 발생하는 차액에서 얻어진다>(38).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고진이 맑스가 그토록 강조했던 잉여가치의 원천으로서의 생산부부문을 고의적으로 탈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그렇게 치부하는 것으로 고려될 뿐이다. 고진에게 잉여가치의 최종심급은 화폐의 유통과 소비에 있다. 이로써 고진의 <소비자=노동자> 주체성의 이론적(계급적) 계보가 드러난다. <상인자본이 공간적인 차이에서 잉여가치를 얻는다면, 산업자본은 기술혁신에 의해 끊임없이 시간적으로 다른 가치체계를 만들어냄으로써 잉여가치를 얻는다>(39). 결국 잉여가치는 유통과정에서의 부등가 교환과 기술혁신이라는 두 가지 차이의 체계로부터 나온다는 말이다. 그리고 짐짓 구좌파들의 무지를 꾸짖는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마르크스주의자들 가운데서는 가치 체계들 사이의 차이에서 잉여가치를 찾는 대신 그것을 생산과정의 ‘착취’에서만 찾아내는 사고가 지배적이라는 사실이다>(39). 그러나 아마도 그것은 잉여가치를 칸트의 초월철학에서 찾는 것보다 더 위대하게 난해한, ‘사이’의 사유과정은 될 수 없을 것이다. 트랜스크리틱 말이다. 이럴 경우 최근의 신좌파들은 분명히 옛동지들의 명예를 위해 싸울 것 같다. 맑스가 블랑키를 위해 그런 것처럼 말이다. 상인자본의 잉여가치는 애초에 프롤레타리아와는 상관 없으며, 블랑키는 동일한 전선의 다른 계열에 속하는 공명(resonance)의 한 항(term)이기 때문이다.

 

고진이 이렇게까지 나아가는 데에 어떤 분명한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이 책 속에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생산-소비 공동체 운동이 충분히 실효를 가질 수 있으며, 전체 프롤레타리아 운동에 기쁜 촉발을 가져올 수도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싶진 않다. 그러나 어째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이 이론의 ‘사이’ 운동과 사유의 ‘잰걸음’에 대해 반응해야 하는 것일까? 하긴 고진은 이 책을 프롤레타리아들을 위해 쓴 것이 아닐 것이다. 대상은 자기 자신일 수도 있고, 칸트일 수도 있으며, 죽은 브레즈네프나 헤겔, 키에르케고르 ... 등등 이 책에 매우 많이 등장하는 인물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산노동’인 다중(multitude)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칸트의 정언명법에 따라 건설된 코뮤니즘의 왕국에 한 무더기의 이신론자들이 회당 꼭대기에 십자가를 내걸든 말든 그것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세계사적 투쟁 순환과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인가?

 

그러므로 트랜스크리틱은 그 누구의 (심지어 부르주아의) 무기도 아니며, 왼쪽으로는 맑스와 한 꾸러미의 계열을, 오른쪽으로는 칸트와 또 다른 한 꾸러미의 계열을 배치해 놓지만 결과적으로 어떤 공명도 산출하지 못한다. 상인자본 또는 쁘띠들. 고진의 <가능한 코뮤니즘>은 혹시 그런 것이 아닌가? 도대체 거기에는 저들 한가한 대학 교수들 외에 뭐가 있단 말인가? 게다가 쾨니히스베르크의 철학자가 트랜스크리틱을 위해 그의 비판서 한 줄의 인용이라도 허용할지 의문이라고 한다 해도 괜한 추측은 아닐 것이다. 코뮤니즘은 가능한(possible) 것이 아니라 잠재적(virtual)이며, 현실적(actual)일 뿐이다. 칸트가 있든 없든 그 사실은 동일하다. 고진의 로도스는 신화일 뿐이다. 프롤레타리아의 가면들 중에 고진의 것은 없다.   -  Noma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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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식모들 - 제1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박진규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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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0kg의 고등학생 신경호는 쥐에 대한 환상에 시달린다. 소설은 이 환상으로부터 시작해서 다른 환상을 거치고 마침내 환상으로 끝난다. 갈 데까지 가는 것이다. 작가도 말했듯이 신경호의 비만은 자본주의의 상징이고(너무나 순진한 상징이다) 쥐들은 이 밀림에 기생하는 저항의 오브제다. 풍요와 환락을 위해  제 몸집을 불려 온 수 백년간의 환상이 쥐들에 의해 갉아 먹힌다. 거부된 환상 또는 ‘수상한 식모들’이 쥐들의 틈바구니에서 기생한다. 아니 순진하고 독실한 부르주아 가정의 먼지 낀 책장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주인집 남편을 꼬드겨 내고 아이들의 귀에 쥐들을 우겨 넣는다. 그런데 이 식모들은 사실 우리의 단군께서 설화 속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면서 일찌감치 퇴장시켜 버린 그 참을성 없고 모자란 호랑이의 후예들이다. 황당무계하다. 근데 소설에서 황당무계함이 문제가 될 리가 없다. 차라리 어수룩하게 환상의 겉옷을 걸치고 소설인양 하는 게 문제다. 작가 박진규는 소설의 이런 ‘막가는’ 생리를 잘 알고 있다.

이야기로 돌아가자. 호랑이의 후예들은 ‘호랑아낙’이라 불리며, 이들이 다소 경박하게 일신한 그룹이 ‘수상한 식모들’이다. 이들은 단군신화에서부터 동항농민전쟁을 거쳐 광주무장봉기와 현재에 이르기까지 명맥을 유지한다. 그런데 그냥 멀뚱하니 역사를 지켜보는 축들은 아니다. 이들이 역사에 개입하는 방식은 복수다. 역사 속에서 소진되거나 이용당해온 혁명들, 그리고 그 찬란한 전리품들을 무상으로 거두어들인 지배계급에 대한 복수는 상당히 음모적으로 진행된다. 폭탄을 들고 대사관으로 향하거나, 하이젝킹한 여객기를 무역 센타에 번제하는 식이 아니다. 이들이 일차적으로 목표로 하는 복수의 대상은 가족이다. 어째서? 지배계급이 착취의 현장을 떠나 자신의 비겁한 몸을 누이는 공간, 칼에 묻은 피를 닦고 길게 휴식을 취하는 공간이 가족이기 때문이다. 이 공간에서 지배계급은 팽팽한 적대의식을 풀고 일순간 자신의 허점들을 마음 놓고 드러낸다. 지배계급의 가장 약한 고리는 러시아가 아니라 바로 그들의 일상이라는 것을 수상한 식모들은 알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전략 또한 테러리즘과는 거리가 멀다. <군인들처럼 총칼로 죽이는 보복을 말하는 게 아냐. 그건 유치한 방법이야. 뭣 하러 그렇게 간단하게 끝내지? 저속하다고. 우린 서서히 상대방이 말라 죽을 때까지 복수의 칼을 들이밀자고>(170). 섬뜩한 말을 거침없이 뱉어낸다.

마찬가지로 신경호가 만난 수상한 식모의 마지막 세대인 강순애도 그렇다. 온 몸이 돌로 굳어 가면서도 복수의 결기만큼은 거두지 않는다. 그녀가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은 신경호로 하여금 호랑아낙과 수상한 식모들에 대한 이야기를 쓰게 하는 것이다. 신경호가 맨 처음 안 사실은 강순애로 인해 자신이 비만이 되었다는 것이다. 강순애가 어린 신경호의 귀에 쥐를 집어넣고 식모들의 모임에서 약초를 받아 먹인 이후로 그는 사이다에 설탕을 타 마셔야 당분에 대한 욕구를 만족 시킬 수 있을 정도가 된 것이다. 다시 말해 강순애가 노린 복수의 대상이 신경호의 가족이었다는 것. 너무나 달콤한 복수의 레서피(recipe)다. 그러니 피해자의 입을 통해 피해 사실을 진술 받는 이 여인에게 신경호는 단지 굿판에 쓰이는 빙의 식물과 같다. 이것을 알면서도 신경호는 멈추지 않는다. 아무도 믿지 않는 이야기들을 조금씩 기록해가면서 그녀의 일상이 되어 가는 것이다. 강순애가 꼼짝없이 누워 있는 지하방에서 천정에 매달린 식칼이 천천히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말이다. 그녀가 죽는 마지막 날에 그는 그녀의 목에 꽂힌 칼을 뽑아내야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신경호는 한 부르주아 가정의 철모르고 순진한 비만아일 뿐이다. 그는 죄가 없다. <“정말이라니까. 난 나쁜 놈이 아냐.” 나는 울대를 부들부들 떨고 울음을 삼키며 말했다. 내가 내뱉었던 말 중에서 최악의 선택이었다. 차라리 나는 동지로서의 날렵한 미소를 보내며 그 칼을 뽑았어야 했다>(234). 지하방 가득 핏물이 튄다. 피가 어찌나 많이 솟아나는지 <입 속으로 계속 피가 꾸역꾸역 흘러들> 정도다(235).

소설은 두 가지 방향의 수상한 출구를 열어 보인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정작 해결되어야 지점 쪽으로 출구가 열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첫 번째로 지목할 수 있는 출구는 마지막 장이다. 그런데 마지막 장은 이 소설의 엉뚱한 발상이 일상을 교란하는 지점이 되고 만다. 독자들은 이 장에 이르기까지 소설이 신경호의 시점에서 씌어졌다고 믿고 있었지만 그렇지 않다. <그리고 나는 앞서 읽으신 대로 수상한 식모들에 대해서 알게 되었답니다>(311). ‘물’이라는 정체불명의 여인이 신경호와 꽤 오랫동안 정사의 나날을 보내고 난 뒤에 하는 말이다. 소설의 시점이 혼란스러워진다. 이 소설적 장난의 효과는 간단하다. 이야기에 대한 독자의 객관적 거리를 박탈하는 것이다. 서사의 환상성이 실재를 에워싼다. 이 소설을 당선작으로 결정한 어느 심사위원의 말처럼 옆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수상’해 지는 시점이다.

또 한 가지의 출구는 호랑아낙과 수상한 식모들의 이야기 배후에서 천천히 진행되는 신경호 가족들의 이야기다. 만약 작가가 (그럴 리는 만무하지만) 리얼리즘에 대한 예우를 갖추었다면 가족들 각자가 좀 더 멀쩡한 인격들이었을 것이다. 하긴 애초부터 작가는 사실성이나 역사성에는 관심이 없다. 다만 그것의 ‘전복’이 관심사일 것이다.

하여간 이들 가족 구성원들은 일종의 조용한 패닉상태에서 생활을 해 나간다. 할아버지는 예전의 식모에 대한 추억과 욕망 때문에 그림을 그리면서 며느리를 누드모델로 이용하고, 아버지는 하녀 시물레이션 게임에 빠져 있다. 형은 실성한 채 몇 년 간 헤매고, 천재로 태어난 동생은 가족들을 <쓰레기들>이라고 말한다. 결국 수상한 식모에 의해 거덜이 난 가족 중 하나인 것이다. 이들이 그나마 정상성을 되찾는 건 강순애가 죽은 후다. 그렇다고 이들이 완전히 멀쩡해지기는 어려운 것 같다. 시간이 지난 후에도 아버지는 다시 사기를 당하고 어머니는 할아버지의 유언장에만 관심이 있으며, 동생은 평범한 모범생이 되었다. 직장을 얻은 신경호도 무기력하기는 마찬가지다.

작가는 이 수상한 가족을 패닉상태에서 구출할 생각이 전혀 없다. 차라리 그는 멍청하고, 수선스러우며, 텅 빈 머리를 가진, 안쓰럽기까지 한 이 가족이 바로 당신들의 가족이라고 말하고 있다. 마침내 출구는 없다. 아리아드네의 실이 인도한 곳은 출구가 아니라 바로 미로의 중심인 것이다. 작가는 우리더러 거기서 살덩이가 문드러질 때까지 지지고 볶으면서 사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는 것을 태연하게 말한다. 쥐들에게나 농락당하면서 말이다. 웃음이 뚝, 그친다. 무슨 쥐똥 씹은 듯한 기분이 든다. 소설은 성공한 샘이다. - Noma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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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얼굴 - 레비나스의 철학 현대의 지성 122
강영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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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성은 서양철학의 비밀이다. 플라톤의 이데아가 현상계의 범형이고, 그 제작의 원동력이었던 이래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거쳐 칸트에 이르기까지 이들 철학자들이 한결같이 원했던 것은 개념화된 추상과 표상 아래 세계와 인간을 환원하는 것이었다. 실재와 사유 즉 진리성에 대한 회의가 창궐할 때조차 이러한 기본적인 가정은 변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한 철학체계의 일관성과 개념적 정합성이 관건으로 떠올랐고 그 외의 것은 부수적인 것으로 치부되었다. 이를테면 개념과 정의(horismos, definition)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은 일종의 환각(phantasma, simulacre)으로 아예 철학의 대상에서 배제되었으며(Plato, Aristotle), 일상성(Alltäglichkeit)이란 주제는 <현존재의 가장 가까운 존재양식>으로 인정됨에도 불구하고 본래적인 것이 될 수 없었다(Heidegger). 아우슈비츠와 굴락, 수용소와 대량학살이라는 20세기의 끔찍한 아이콘은 이러한 배제와 통제 그리고 그 배후에 숨은 전체성이라는 이념의 참혹한 결과다.


이 책의 저자 강영안은 레비나스를 이 서양철학의 치부에 과감히 메스를 갖다 댄 인물로 소개한다. <레비나스는 유럽의 전체주의는 유럽 철학 전체가 빚어낸 파국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 전체주의 속에서는 한 개체의 고유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레비나스는, 서양 철학은 대체로 질적 다양성 또는 다원성을 수적 다양성으로 대치하고 이것을 또다시 일원성 또는 단일성으로 환원하는 철학이었다고 본다>(30-1). 이러한 환원은 개체의 고유성 즉 ‘다름(l'altérité)’을 희생시킨다. 개인의 차원에서 다름은 인격의 고유성으로 드러나며, 주체의 참된 자리는 전체성이라는 배제와 환원의 메커니즘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환대와 책임이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주체는 여기서 기반적인 ‘자아’가 아니라 ‘타자’에 매개된 결과다. 다시 말해 레비나스의 철학은 전체성을 떠난 주체가 진정한 주체의 모습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때 타자는 기술적 조작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최대한의 경의를 가지고 대해야 할 윤리적 무한자에 가깝다. 게다가 레비나스는 이 타자를 부자도 권력자도 아니며 <가난한자, 과부, 고아>라고 분명히 못 박는다. <헐벗은 모습으로, 고통 받는 모습으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불의에 의해 짓밟힌 자의 모습으로 타인이 호소할 때 그를 수용하고 받아들이고, 책임지고, 그를 대신해 짐을 지고, 사랑하고 섬기는 가운데 주체의 주체됨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32-3).


이렇게 해서 타자는 고통에 겨운 모습으로 우리 앞에 현현하며 그것을 통해 하나의 지평, 즉 윤리적 지평이 열린다. 타자의 고통스런 얼굴을 대하기 전에 주체는 단지 먹고, 마시고, 즐기는 향유(jouissance)의 존재, 또는 경제적 존재일 뿐이다. 자기의 거주와 향유 안에 고립된 주체는 어떤 윤리적 책임도 느낄 수 없다. 따라서 타자의 얼굴의 현현은 하나의 사건으로 주체를 <침범한다>. 이때 타자의 고통은 곧 주체의 고통이 된다. 윤리적 지평이 환히 드러남으로써 주체를 깨우는 최초의 정서는 레비나스에게 어떤 기쁨이라기보다 고통이다. 이 지점에서 칸트와의 대별점이 세워진다. <타인에 대한 윤리적 책임은 고통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는 데는 레비나스도 동의한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받는 고통이냐 하는 점에서는 칸트와 구별된다. 고통은 법칙에 대한 존경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라 고통 받는 이웃의 호소와 부름에 응답했기 때문에 오는 것이라고 레비나스는 보고 있다>(230). 칸트에게 있어서 도덕법칙은 실천이성의 이념 즉 자유에 기반하고 있다. 이것은 주체의 윤리적 자율성에 방점을 두는 것이다. 하지만 레비나스는 자율성이 윤리의 기반이라고 보지 않는다. 윤리적 기반은 시종일관 ‘고통 받는 이웃의 호소와 부름’에 대한 응답이며, 따라서 타율성이다. 호소와 부름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이 윤리는 자유의 윤리라기보다 그래서 ‘책임의 윤리’가 되는 것이다. <칸트 도덕철학의 핵심명제는 “자유는 책임에 선행한다” 또는 “책임은 자유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레비나스의 핵심 명제는 “책임은 자유에 선행한다” 또는 “자유는 책임에서 나온다”는 것이다>(247).


그러므로 자유는 책임의 윤리 하에 새롭게 해석된다. 레비나스가 자유보다 책임을 강조한 이유는 애초에 서양철학의 전체성에 대한 비판이 있었기 때문이다. 타인의 얼굴을 짓밟고 선 자유는 전쟁과 살육만을 가져온다. 이때 자유는 그 순전한 의미를 잃어버리고 자아의 권력욕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오직 타자의 고통스런 얼굴을 대하고 거기서부터 윤리적 자각을 얻을 때만 이러한 자유의 타락을 방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자유는 전혀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된다. 나의 ‘할 수 있음,’ 나의 ‘힘’에서 나오는 자유가 아니라 타인의 부름에 ‘응답’하고 그의 고통에 ‘반응’하며 타인에게 책임지는 가운데 나의 자유도 그 참된 의미를 얻게 된다>(246).  


그렇다면 전체성에 균열을 일으키는 이 타자의 이념을 우리는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가? 레비나스는 이것을 ‘무한’(infini)이라고 한다. 이 점에서 레비나스는 서양철학에 대한 비판적 수용자다. 이 무한자의 이념은 서양철학의 주요한 지점마다에서 전체성과 대별되어 은밀히 제시되어 왔기 때문이다. 플라톤과 데카르트 그리고 칸트, 싸르트르, 마르셀에서 유대교에 이르기까지 이 무한자의 이념, 즉 타자 철학과 공명하는 지점이 있다. 플라톤에 있어서 무한자는 바로 ‘선’이다. 그는 선을 ‘존재 너머’에 두었으며, 이성적으로 파악이 불가능한 무한한 대상으로 설정하였다. 또한 데카르트에 있어서도 Cogito를 객관적으로 떠받치는 것은 신, 또는 무한자였다. 칸트의 실천이성에 대한 강조와 이념들 또한 이러한 무한자에 대한 상당한 접근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무한자의 이념은 윤리적 무한자이며 형이상학적 무한자다. 여기에 레비나스가 형이상학과 존재론을 구별짓는 근거가 있다. 다시 말해, 존재론은 타자에 의해 자신의 존재를 문제시하지 않지만, 윤리학으로서의 형이상학은 이 관점에 대한 비판으로 탄생한다는 것이다. 형이상학과 존재론에 대한 이런 특유한 이해는 하이데거의 이해와 대조적이다. <하이데거는 ‘기술적 사유’ 혹은 ‘계산하는 사유’에 바탕을 둔 철학을 ‘형이상학’으로 이해하고 ‘근원적 사유’, 혹은 ‘자각적 사유’를 ‘존재 사유’로 이해한다. 반면 레비나스는 이해와 지배의 틀 안에서 사유하고 행동하는 방식을 ‘존재론’으로 이해하고 나의 지배와 소유의 틀 안으로 환원할 수 없는 타자와의 관계와 그것에 관한 사유를 ‘형이상학’으로 이해한다>(242). 그러므로 하이데거에 있어서는 존재론이 형이상학에 앞서지만 레비나스에게는 형이상학이 존재론에 앞선다.

타자의 얼굴의 현현, 윤리학으로서의 형이상학, 그리고 무한자의 이념은 레비나스 철학의 근간을 이룬다. 그렇다면 레비나스는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무엇을 하려고 한 것인가? 강영안은 레비나스 철학이 <주체성의 변호>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주체성’은 데카르트적 코기토나 하이데거의 현존재와는 물론 다르다. 주체는 레비나스에게 윤리적이며 타율적이다. 그러나 이 윤리적이고 타율적인 측면이 소극적으로 이해되는 것을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윤리적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존재 너머’에 있는 무한자를 가리키는 것이며, 타율적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자율성의 전횡을 비판적으로 교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레비나스는 서양철학의 전체성에 대한 진정한 비판자이면서도 현대 프랑스 철학에서 주요하게 운위되는 주체부정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주체부정에 대한 레비나스의 응답은 반휴머니즘에 대한 반응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인격적 개인의 자유를 타자의 얼굴이라는 일상적 대상을 통해 정당화함으로써 그는 그 자유의 기반을 더 탄탄하게 다지기 때문이다. 자유는 자율성의 이념임과 동시에 타율성, 즉 타자라는 구체적 대상을 존재근거로 채택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레비나스는 주체가 도대체 타자 없이는 존속할 수 없다는 것, 타자 없는 세상은 단지 ‘있음 il y a’의 암흑이며 이때 주체란 단지 고립되어 자연적 요소들에 가뭇없이 침범당하는 필멸의 존재임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의 후기 철학에서 인간의 출산성이 중요하게 거론되는 것은 타자 철학의 사전 작업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타자의 무한성이 출산성을 통해 주체의 영원성이라는 철학 고유의 주제와 맥락을 맞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강영안이 레비나스의 철학을 <주체성의 변호>라고 한 것은 레비나스 철학에 대한 정당한 경의며 규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레비나스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연구서라는 것 외에 이 책이 소중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저자의 레비나스 철학에 대한 상당한 연륜과 애정이다. 저자 자신도 밝히고 있다시피 석사와 박사 논문을 칸트로 썼지만 70년대 초 유학시절부터 강영안은 레비나스에 매료되었었고 당시 생존해 있었던 그의 저서를 읽고 강연을 직접 들었다. 햇수로만 본다면 근 30년 이상 레비나스와 인연을 두고 있었던 셈이다. 남한 사회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동시대의 한 서양철학자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고 꾸준히 연구해 왔다는 것은 사조의 유행에 과도하게 민감하여 갈팡질팡하고, 부실한 말잔치에만 익숙한 연구자들에게 귀감이 될만한 혜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오랫동안의 연구에 힘 입어 저자는 레비나스의 난해한 철학을 놀라울 정도의 평이한 언어로 풀어낸다. 어떤 저자의 문체가 쉽다고 해서 무조건 대단하다거나 어렵다고 해서 덮어 놓고 경시하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독자에게 익숙치 않은 한 서양철학자의 원전을 충실히 해석해서 쉬운 말로 써 나가는 능력은 철학에 대한 오랜 연륜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 점이 또한 이 책이 레비나스 철학을 탐구하는 연구자나 일반 독자들에게 값진 하나의 선물인 이유다.

  - Noma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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