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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얼굴 - 레비나스의 철학 ㅣ 현대의 지성 122
강영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12월
평점 :
전체성은 서양철학의 비밀이다. 플라톤의 이데아가 현상계의 범형이고, 그 제작의 원동력이었던 이래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거쳐 칸트에 이르기까지 이들 철학자들이 한결같이 원했던 것은 개념화된 추상과 표상 아래 세계와 인간을 환원하는 것이었다. 실재와 사유 즉 진리성에 대한 회의가 창궐할 때조차 이러한 기본적인 가정은 변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한 철학체계의 일관성과 개념적 정합성이 관건으로 떠올랐고 그 외의 것은 부수적인 것으로 치부되었다. 이를테면 개념과 정의(horismos, definition)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은 일종의 환각(phantasma, simulacre)으로 아예 철학의 대상에서 배제되었으며(Plato, Aristotle), 일상성(Alltäglichkeit)이란 주제는 <현존재의 가장 가까운 존재양식>으로 인정됨에도 불구하고 본래적인 것이 될 수 없었다(Heidegger). 아우슈비츠와 굴락, 수용소와 대량학살이라는 20세기의 끔찍한 아이콘은 이러한 배제와 통제 그리고 그 배후에 숨은 전체성이라는 이념의 참혹한 결과다.
이 책의 저자 강영안은 레비나스를 이 서양철학의 치부에 과감히 메스를 갖다 댄 인물로 소개한다. <레비나스는 유럽의 전체주의는 유럽 철학 전체가 빚어낸 파국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 전체주의 속에서는 한 개체의 고유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레비나스는, 서양 철학은 대체로 질적 다양성 또는 다원성을 수적 다양성으로 대치하고 이것을 또다시 일원성 또는 단일성으로 환원하는 철학이었다고 본다>(30-1). 이러한 환원은 개체의 고유성 즉 ‘다름(l'altérité)’을 희생시킨다. 개인의 차원에서 다름은 인격의 고유성으로 드러나며, 주체의 참된 자리는 전체성이라는 배제와 환원의 메커니즘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환대와 책임이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주체는 여기서 기반적인 ‘자아’가 아니라 ‘타자’에 매개된 결과다. 다시 말해 레비나스의 철학은 전체성을 떠난 주체가 진정한 주체의 모습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때 타자는 기술적 조작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최대한의 경의를 가지고 대해야 할 윤리적 무한자에 가깝다. 게다가 레비나스는 이 타자를 부자도 권력자도 아니며 <가난한자, 과부, 고아>라고 분명히 못 박는다. <헐벗은 모습으로, 고통 받는 모습으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불의에 의해 짓밟힌 자의 모습으로 타인이 호소할 때 그를 수용하고 받아들이고, 책임지고, 그를 대신해 짐을 지고, 사랑하고 섬기는 가운데 주체의 주체됨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32-3).
이렇게 해서 타자는 고통에 겨운 모습으로 우리 앞에 현현하며 그것을 통해 하나의 지평, 즉 윤리적 지평이 열린다. 타자의 고통스런 얼굴을 대하기 전에 주체는 단지 먹고, 마시고, 즐기는 향유(jouissance)의 존재, 또는 경제적 존재일 뿐이다. 자기의 거주와 향유 안에 고립된 주체는 어떤 윤리적 책임도 느낄 수 없다. 따라서 타자의 얼굴의 현현은 하나의 사건으로 주체를 <침범한다>. 이때 타자의 고통은 곧 주체의 고통이 된다. 윤리적 지평이 환히 드러남으로써 주체를 깨우는 최초의 정서는 레비나스에게 어떤 기쁨이라기보다 고통이다. 이 지점에서 칸트와의 대별점이 세워진다. <타인에 대한 윤리적 책임은 고통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는 데는 레비나스도 동의한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받는 고통이냐 하는 점에서는 칸트와 구별된다. 고통은 법칙에 대한 존경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라 고통 받는 이웃의 호소와 부름에 응답했기 때문에 오는 것이라고 레비나스는 보고 있다>(230). 칸트에게 있어서 도덕법칙은 실천이성의 이념 즉 자유에 기반하고 있다. 이것은 주체의 윤리적 자율성에 방점을 두는 것이다. 하지만 레비나스는 자율성이 윤리의 기반이라고 보지 않는다. 윤리적 기반은 시종일관 ‘고통 받는 이웃의 호소와 부름’에 대한 응답이며, 따라서 타율성이다. 호소와 부름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이 윤리는 자유의 윤리라기보다 그래서 ‘책임의 윤리’가 되는 것이다. <칸트 도덕철학의 핵심명제는 “자유는 책임에 선행한다” 또는 “책임은 자유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레비나스의 핵심 명제는 “책임은 자유에 선행한다” 또는 “자유는 책임에서 나온다”는 것이다>(247).
그러므로 자유는 책임의 윤리 하에 새롭게 해석된다. 레비나스가 자유보다 책임을 강조한 이유는 애초에 서양철학의 전체성에 대한 비판이 있었기 때문이다. 타인의 얼굴을 짓밟고 선 자유는 전쟁과 살육만을 가져온다. 이때 자유는 그 순전한 의미를 잃어버리고 자아의 권력욕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오직 타자의 고통스런 얼굴을 대하고 거기서부터 윤리적 자각을 얻을 때만 이러한 자유의 타락을 방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자유는 전혀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된다. 나의 ‘할 수 있음,’ 나의 ‘힘’에서 나오는 자유가 아니라 타인의 부름에 ‘응답’하고 그의 고통에 ‘반응’하며 타인에게 책임지는 가운데 나의 자유도 그 참된 의미를 얻게 된다>(246).
그렇다면 전체성에 균열을 일으키는 이 타자의 이념을 우리는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가? 레비나스는 이것을 ‘무한’(infini)이라고 한다. 이 점에서 레비나스는 서양철학에 대한 비판적 수용자다. 이 무한자의 이념은 서양철학의 주요한 지점마다에서 전체성과 대별되어 은밀히 제시되어 왔기 때문이다. 플라톤과 데카르트 그리고 칸트, 싸르트르, 마르셀에서 유대교에 이르기까지 이 무한자의 이념, 즉 타자 철학과 공명하는 지점이 있다. 플라톤에 있어서 무한자는 바로 ‘선’이다. 그는 선을 ‘존재 너머’에 두었으며, 이성적으로 파악이 불가능한 무한한 대상으로 설정하였다. 또한 데카르트에 있어서도 Cogito를 객관적으로 떠받치는 것은 신, 또는 무한자였다. 칸트의 실천이성에 대한 강조와 이념들 또한 이러한 무한자에 대한 상당한 접근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무한자의 이념은 윤리적 무한자이며 형이상학적 무한자다. 여기에 레비나스가 형이상학과 존재론을 구별짓는 근거가 있다. 다시 말해, 존재론은 타자에 의해 자신의 존재를 문제시하지 않지만, 윤리학으로서의 형이상학은 이 관점에 대한 비판으로 탄생한다는 것이다. 형이상학과 존재론에 대한 이런 특유한 이해는 하이데거의 이해와 대조적이다. <하이데거는 ‘기술적 사유’ 혹은 ‘계산하는 사유’에 바탕을 둔 철학을 ‘형이상학’으로 이해하고 ‘근원적 사유’, 혹은 ‘자각적 사유’를 ‘존재 사유’로 이해한다. 반면 레비나스는 이해와 지배의 틀 안에서 사유하고 행동하는 방식을 ‘존재론’으로 이해하고 나의 지배와 소유의 틀 안으로 환원할 수 없는 타자와의 관계와 그것에 관한 사유를 ‘형이상학’으로 이해한다>(242). 그러므로 하이데거에 있어서는 존재론이 형이상학에 앞서지만 레비나스에게는 형이상학이 존재론에 앞선다.
타자의 얼굴의 현현, 윤리학으로서의 형이상학, 그리고 무한자의 이념은 레비나스 철학의 근간을 이룬다. 그렇다면 레비나스는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무엇을 하려고 한 것인가? 강영안은 레비나스 철학이 <주체성의 변호>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주체성’은 데카르트적 코기토나 하이데거의 현존재와는 물론 다르다. 주체는 레비나스에게 윤리적이며 타율적이다. 그러나 이 윤리적이고 타율적인 측면이 소극적으로 이해되는 것을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윤리적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존재 너머’에 있는 무한자를 가리키는 것이며, 타율적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자율성의 전횡을 비판적으로 교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레비나스는 서양철학의 전체성에 대한 진정한 비판자이면서도 현대 프랑스 철학에서 주요하게 운위되는 주체부정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주체부정에 대한 레비나스의 응답은 반휴머니즘에 대한 반응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인격적 개인의 자유를 타자의 얼굴이라는 일상적 대상을 통해 정당화함으로써 그는 그 자유의 기반을 더 탄탄하게 다지기 때문이다. 자유는 자율성의 이념임과 동시에 타율성, 즉 타자라는 구체적 대상을 존재근거로 채택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레비나스는 주체가 도대체 타자 없이는 존속할 수 없다는 것, 타자 없는 세상은 단지 ‘있음 il y a’의 암흑이며 이때 주체란 단지 고립되어 자연적 요소들에 가뭇없이 침범당하는 필멸의 존재임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의 후기 철학에서 인간의 출산성이 중요하게 거론되는 것은 타자 철학의 사전 작업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타자의 무한성이 출산성을 통해 주체의 영원성이라는 철학 고유의 주제와 맥락을 맞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강영안이 레비나스의 철학을 <주체성의 변호>라고 한 것은 레비나스 철학에 대한 정당한 경의며 규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레비나스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연구서라는 것 외에 이 책이 소중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저자의 레비나스 철학에 대한 상당한 연륜과 애정이다. 저자 자신도 밝히고 있다시피 석사와 박사 논문을 칸트로 썼지만 70년대 초 유학시절부터 강영안은 레비나스에 매료되었었고 당시 생존해 있었던 그의 저서를 읽고 강연을 직접 들었다. 햇수로만 본다면 근 30년 이상 레비나스와 인연을 두고 있었던 셈이다. 남한 사회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동시대의 한 서양철학자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고 꾸준히 연구해 왔다는 것은 사조의 유행에 과도하게 민감하여 갈팡질팡하고, 부실한 말잔치에만 익숙한 연구자들에게 귀감이 될만한 혜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오랫동안의 연구에 힘 입어 저자는 레비나스의 난해한 철학을 놀라울 정도의 평이한 언어로 풀어낸다. 어떤 저자의 문체가 쉽다고 해서 무조건 대단하다거나 어렵다고 해서 덮어 놓고 경시하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독자에게 익숙치 않은 한 서양철학자의 원전을 충실히 해석해서 쉬운 말로 써 나가는 능력은 철학에 대한 오랜 연륜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 점이 또한 이 책이 레비나스 철학을 탐구하는 연구자나 일반 독자들에게 값진 하나의 선물인 이유다.
- Noma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