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식모들 - 제1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박진규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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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0kg의 고등학생 신경호는 쥐에 대한 환상에 시달린다. 소설은 이 환상으로부터 시작해서 다른 환상을 거치고 마침내 환상으로 끝난다. 갈 데까지 가는 것이다. 작가도 말했듯이 신경호의 비만은 자본주의의 상징이고(너무나 순진한 상징이다) 쥐들은 이 밀림에 기생하는 저항의 오브제다. 풍요와 환락을 위해  제 몸집을 불려 온 수 백년간의 환상이 쥐들에 의해 갉아 먹힌다. 거부된 환상 또는 ‘수상한 식모들’이 쥐들의 틈바구니에서 기생한다. 아니 순진하고 독실한 부르주아 가정의 먼지 낀 책장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주인집 남편을 꼬드겨 내고 아이들의 귀에 쥐들을 우겨 넣는다. 그런데 이 식모들은 사실 우리의 단군께서 설화 속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면서 일찌감치 퇴장시켜 버린 그 참을성 없고 모자란 호랑이의 후예들이다. 황당무계하다. 근데 소설에서 황당무계함이 문제가 될 리가 없다. 차라리 어수룩하게 환상의 겉옷을 걸치고 소설인양 하는 게 문제다. 작가 박진규는 소설의 이런 ‘막가는’ 생리를 잘 알고 있다.

이야기로 돌아가자. 호랑이의 후예들은 ‘호랑아낙’이라 불리며, 이들이 다소 경박하게 일신한 그룹이 ‘수상한 식모들’이다. 이들은 단군신화에서부터 동항농민전쟁을 거쳐 광주무장봉기와 현재에 이르기까지 명맥을 유지한다. 그런데 그냥 멀뚱하니 역사를 지켜보는 축들은 아니다. 이들이 역사에 개입하는 방식은 복수다. 역사 속에서 소진되거나 이용당해온 혁명들, 그리고 그 찬란한 전리품들을 무상으로 거두어들인 지배계급에 대한 복수는 상당히 음모적으로 진행된다. 폭탄을 들고 대사관으로 향하거나, 하이젝킹한 여객기를 무역 센타에 번제하는 식이 아니다. 이들이 일차적으로 목표로 하는 복수의 대상은 가족이다. 어째서? 지배계급이 착취의 현장을 떠나 자신의 비겁한 몸을 누이는 공간, 칼에 묻은 피를 닦고 길게 휴식을 취하는 공간이 가족이기 때문이다. 이 공간에서 지배계급은 팽팽한 적대의식을 풀고 일순간 자신의 허점들을 마음 놓고 드러낸다. 지배계급의 가장 약한 고리는 러시아가 아니라 바로 그들의 일상이라는 것을 수상한 식모들은 알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전략 또한 테러리즘과는 거리가 멀다. <군인들처럼 총칼로 죽이는 보복을 말하는 게 아냐. 그건 유치한 방법이야. 뭣 하러 그렇게 간단하게 끝내지? 저속하다고. 우린 서서히 상대방이 말라 죽을 때까지 복수의 칼을 들이밀자고>(170). 섬뜩한 말을 거침없이 뱉어낸다.

마찬가지로 신경호가 만난 수상한 식모의 마지막 세대인 강순애도 그렇다. 온 몸이 돌로 굳어 가면서도 복수의 결기만큼은 거두지 않는다. 그녀가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은 신경호로 하여금 호랑아낙과 수상한 식모들에 대한 이야기를 쓰게 하는 것이다. 신경호가 맨 처음 안 사실은 강순애로 인해 자신이 비만이 되었다는 것이다. 강순애가 어린 신경호의 귀에 쥐를 집어넣고 식모들의 모임에서 약초를 받아 먹인 이후로 그는 사이다에 설탕을 타 마셔야 당분에 대한 욕구를 만족 시킬 수 있을 정도가 된 것이다. 다시 말해 강순애가 노린 복수의 대상이 신경호의 가족이었다는 것. 너무나 달콤한 복수의 레서피(recipe)다. 그러니 피해자의 입을 통해 피해 사실을 진술 받는 이 여인에게 신경호는 단지 굿판에 쓰이는 빙의 식물과 같다. 이것을 알면서도 신경호는 멈추지 않는다. 아무도 믿지 않는 이야기들을 조금씩 기록해가면서 그녀의 일상이 되어 가는 것이다. 강순애가 꼼짝없이 누워 있는 지하방에서 천정에 매달린 식칼이 천천히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말이다. 그녀가 죽는 마지막 날에 그는 그녀의 목에 꽂힌 칼을 뽑아내야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신경호는 한 부르주아 가정의 철모르고 순진한 비만아일 뿐이다. 그는 죄가 없다. <“정말이라니까. 난 나쁜 놈이 아냐.” 나는 울대를 부들부들 떨고 울음을 삼키며 말했다. 내가 내뱉었던 말 중에서 최악의 선택이었다. 차라리 나는 동지로서의 날렵한 미소를 보내며 그 칼을 뽑았어야 했다>(234). 지하방 가득 핏물이 튄다. 피가 어찌나 많이 솟아나는지 <입 속으로 계속 피가 꾸역꾸역 흘러들> 정도다(235).

소설은 두 가지 방향의 수상한 출구를 열어 보인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정작 해결되어야 지점 쪽으로 출구가 열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첫 번째로 지목할 수 있는 출구는 마지막 장이다. 그런데 마지막 장은 이 소설의 엉뚱한 발상이 일상을 교란하는 지점이 되고 만다. 독자들은 이 장에 이르기까지 소설이 신경호의 시점에서 씌어졌다고 믿고 있었지만 그렇지 않다. <그리고 나는 앞서 읽으신 대로 수상한 식모들에 대해서 알게 되었답니다>(311). ‘물’이라는 정체불명의 여인이 신경호와 꽤 오랫동안 정사의 나날을 보내고 난 뒤에 하는 말이다. 소설의 시점이 혼란스러워진다. 이 소설적 장난의 효과는 간단하다. 이야기에 대한 독자의 객관적 거리를 박탈하는 것이다. 서사의 환상성이 실재를 에워싼다. 이 소설을 당선작으로 결정한 어느 심사위원의 말처럼 옆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수상’해 지는 시점이다.

또 한 가지의 출구는 호랑아낙과 수상한 식모들의 이야기 배후에서 천천히 진행되는 신경호 가족들의 이야기다. 만약 작가가 (그럴 리는 만무하지만) 리얼리즘에 대한 예우를 갖추었다면 가족들 각자가 좀 더 멀쩡한 인격들이었을 것이다. 하긴 애초부터 작가는 사실성이나 역사성에는 관심이 없다. 다만 그것의 ‘전복’이 관심사일 것이다.

하여간 이들 가족 구성원들은 일종의 조용한 패닉상태에서 생활을 해 나간다. 할아버지는 예전의 식모에 대한 추억과 욕망 때문에 그림을 그리면서 며느리를 누드모델로 이용하고, 아버지는 하녀 시물레이션 게임에 빠져 있다. 형은 실성한 채 몇 년 간 헤매고, 천재로 태어난 동생은 가족들을 <쓰레기들>이라고 말한다. 결국 수상한 식모에 의해 거덜이 난 가족 중 하나인 것이다. 이들이 그나마 정상성을 되찾는 건 강순애가 죽은 후다. 그렇다고 이들이 완전히 멀쩡해지기는 어려운 것 같다. 시간이 지난 후에도 아버지는 다시 사기를 당하고 어머니는 할아버지의 유언장에만 관심이 있으며, 동생은 평범한 모범생이 되었다. 직장을 얻은 신경호도 무기력하기는 마찬가지다.

작가는 이 수상한 가족을 패닉상태에서 구출할 생각이 전혀 없다. 차라리 그는 멍청하고, 수선스러우며, 텅 빈 머리를 가진, 안쓰럽기까지 한 이 가족이 바로 당신들의 가족이라고 말하고 있다. 마침내 출구는 없다. 아리아드네의 실이 인도한 곳은 출구가 아니라 바로 미로의 중심인 것이다. 작가는 우리더러 거기서 살덩이가 문드러질 때까지 지지고 볶으면서 사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는 것을 태연하게 말한다. 쥐들에게나 농락당하면서 말이다. 웃음이 뚝, 그친다. 무슨 쥐똥 씹은 듯한 기분이 든다. 소설은 성공한 샘이다. - Noma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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