칙릿(Chick Lit)이란 ‘젊은 여성’을 뜻하는 미국 속어(Slang) ‘칙(Chick)’과 ‘문학(Literature)’의 줄임말 ‘릿(Lit)’이 조합된 용어로 칙북(Chick Book)이라고도 합니다. 1990년대 중반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등장한 일종의 소설장르로, 20대와 30대 미혼여성의 일과 사랑을 주제로 삼은 소설을 말하죠.  

그 원조는 제 독서력을 기준으로 『브리짓 존스의 일기』라고 생각합니다. 출판사에서 일하며 순수함과 꿈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30대의 여성, 유쾌하고 긍정적인 그녀는 독신을 은근히 즐기면서 이상적인 남자를 만나 결혼을 꿈꾸기도 하죠. 일기 형식으로 된 이 소설은 일을 하면서 사랑을 찾는, 더구나 시트콤 형식의 자잘한 웃음과 긍정적인 바이러스가 무궁무진하여 전형적인 미혼녀의 발랄함을 그대로 전해주어 같은 세대의 여성들에게 공감을 이끌어냈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아마도 미혼여성의 일과 사랑을 코믹하게 때로는 가슴 짠하게 풀어낸 덕분이 아닌가 싶어요.

이후로 칙릿의 형태로 나온 소설을 보면 패션에디터의 세계를 생생하게 들려준『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들 수 있는데 작은 도시 출신의 보잘것없는 여성이 누구나 입사하여 일하고 싶어 하는 세계 최고의 패션지 「런웨이」의 편집장 미란다 프리스틀리의 개인 어시스턴트로 일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직장에서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담아 많은 직장 여성들에게 공감을 주었죠. 이 책에서 보면 세계 최고의 직장은 세계 최악의(!) 근무 조건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예요. 미란다 정도의 위치로 올라서기 위해 앤드리아가 보여주는 노력과 일은 그야말로 밤낮이 따로 없으며 하루종일 일, 일, 일을 생각해야 하니까요. 애인에게 버림받을만큼 일을 해야 누구에게나 성공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죠. 그런 걸보면 20~30대 여성들도 성공을 위해 남자 못지않은 열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즈음 드라마로 먼저 알려진 <섹스 앤드 시티>는 그런 경향에 불을 질렀다고 봅니다. 저를 비롯하여 미혼여성이라면 한번쯤은 <섹스 앤드 시티>에 빠져들었을 테니 말예요. 뉴욕에 사는, 절대적으로 평범하지 않은 4명의 여성들이 보여주는 브런치(!) 수다는 우리나라에도 ‘브런치’라는 단어를 유행시킬 정도였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칙릿의 절정을 저는 『쇼퍼홀릭』이라고 말하고 싶네요. 이건 지극히 개인적인 독서력을 보여주는 셈이지만 영국의 평범한 출판사 출신의 브리짓을 거쳐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패션잡지에서 일하는 앤드리아를 알게 되고, 뉴욕의 자유로운 네 여자를 거쳐 ‘쇼퍼홀릭’이라는 신종어를 만들어내며 쇼핑에 빠진 20대 여성들의 대표격이 된 레베카까지, 이 여성들의 공통점이 바로 지나칠 정도로 긍정적이고 코믹하며(앗! 앤드리아는 좀 제외가 되는 듯) 자유로우면서 결국은 일과 사랑, 두 가지를 모두 쟁취하는 현재를 살아가는 20~30대 여성들이 가장 바라는 여성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칙릿 소설은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끼쳐요. 그동안 우울하고 칙칙한(!) 이야기들로 가득했던 우리나라 문학에 어느 날 가볍고 트렌디한 소설들이 등장합니다. 기존의 로맨스소설이라 일컫는 소설들과는 또 다른 소설들이었죠. 그 대표작으로 정이현의 『달콤한 나의 도시』를 들 수 있는데 이른바 현재를 살아가는 20~30대 도시남녀의 지극히 일상적인 사랑과 일을 다룬 소설이었어요. 그 이후 비슷한 류의 소설들이 물밀듯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와 비슷하지만 다른, 패션잡지에 다니는 20대 여성의 일과 사랑을 담은 백영옥의 『스타일』, 한 남자를 애인으로 둔 세 여자의 이야기를 다룬 독특한 소재로 여성들의 공감을 이끌어낸 이홍의 『걸프렌즈』, 이른바 변종 칙릿 소설을 표방하며 ‘섹스 문제와 직장에서의 갈등, 여자 친구들 사이의 질투, 강남 지향의 속물근성, 젊은이들의 세태 풍속도까지 이십대 여성의 일상을 세밀하게 그려낸 칙릿소설의 전형을 따르는 듯싶다가도, 대학을 스트레이트로 졸업하고 꿈도 찾지 못한 채 치열한 경쟁 사회로 내던져진 88만원 세대의 서글픈 현실과 맞물리면서 깊이의 지층을 이루는’ 김민서의 『나의 블랙미니드레스』까지. 이후로 ‘칙릿‘이라는 말도 하나의 유행어가 되어 20~30대 여성의 일과 사랑을 다룬 가벼운 내용의 소설들은 뭐든지 칙릿 소설로 분류되었던 것 같아요. 저부터 그렇게 생각했으니까요.

한데, 이런 칙릿 소설은 가볍다는 이유만으로 문학적이지 못하는 비판을 그동안 받아왔습니다. 저부터도 사실은 드라마 같은 소설로 치부하며 그냥 기분전환용 소설로 생각했었죠. 이유가 뭘까? 20~30대 미혼녀들의 현실적인 이야기를 다루었다고는 하지만 사실, 위에 언급된 책들에 나오는 직업이나 이상형의 남자 혹은 명품 이야기 등등은 대한민국의 지극히 평범한 여성으로서는 너무나 동떨어진 이야기라서 그런 게 아닐까, 현실적이라지만 너무나 비현실적이라는 스토리들! 어쩌면 이건 나만의 착각일까요?

그러거나 말거나,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합니다. 어느 세대나 남녀를 불문하고 각자의 스트레스가 있겠지만 현실을 살아가는 20~30대의 미혼 여성들 역시 그 피곤함은 말할 수 없이 많을 것이다. 그래서 가끔은 드라마에 홀릭하듯 나와 비슷하면서 다른 인생을 펼치는 여주인공들의 삶에 빠지는 것이 아닐까. 문학적인 것을 떠나서 말이죠. 암튼 그런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소설이 바로 이런 칙릿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볍든 비현실적이든 간에 일단은 말이 통하면 된다?! 공감하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성공한 거다?! 

그러니 지루한 일상이 싫증나면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칙릿'이라 일컫는 소설을 한번 읽어보세요. 어쩌면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지도 몰라요. 꿈을 꿀 수도 있을 테고, 어느 쪽으로든 자신감을 가질 수도 있을 거예요.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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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제임스 설터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우선, 첫 번째 결론부터 말하자면 독특했다. 내용보다는 문체가 그러했다. 원서가 그러한 건지 번역이 그러한 건지 나로서는 정확하게는 알 수 없었지만 이전에 박상미 역의 줌파 라히리의 소설을 읽어본 적이 있는지라 번역이 독특한 게 아니라 작가의 문체가 그러하다는 것으로 짐작했다. 책을 읽기 전에 대화체가 많은 듯한 문장들을 대충 보며 단편집이라 쉽게 생각했다. 또 남녀의 치정, 배신을 다룬 소설들이라 해서 가볍게 읽을 수 있을 거라고도 생각했다. 한데, 이런! 읽는 게 쉽지 않았다. 처음엔 잠자리에서 읽어 그런 줄 알았다. 졸리니까 문장이 잘 안 들어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데 멀쩡한 정신으로 앉아 읽어도 문체가 독특했다. 다 읽고도 이해가 힘들었다. 다시 돌아갔다. 결국 단편 하나마다 두 번씩 읽음으로써 이해를 했다나. 아, 나의 독서력(力)이 이렇다니!-.-

암튼, 그건 그렇고 나의 두 번째 결론은 매우 흥미로웠다는 거다. 부부의 배신을 다룬 단편이나 소설을 한두 권 읽은 것도 아니지만 이 짧은 단편에 이토록 노골적이면서, 이토록 간결하게, 또 이토록 놀라운 결말을 보여주다닛! 한 편씩 읽을 때마다 다 읽은 후엔 잠시 헉! 하곤 멈춤 상태에 있게 된다. 그리고 이건 뭐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나. 특히 표제작인 「어젯밤」이 그랬다. 마지막의 반전 아닌 반전은 소름이 솟을 정도(그러니까 남자도 잘 만나야 된다니깐. 총각이든 유부남이든.-.-; ).  또한 작가는 여느 소설들처럼 세세하게 설명을 곁들여주지 않는다. 다만 대화 속의 의미를 독자로 하여금 깨달을 수 있게 해준다. 

모두 10편의 단편을 담고 있는 『어젯밤』은 부부의 일상을 배경으로 은근슬쩍 방해자를 집어넣어 삶을 흔들어 놓기도 하고(아내의 생일날 들통난 남편의 배신(포기), 딸같은 젊은 여자에게 빠진 한 남자의 어이없는 결말(귀고리).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옛여인의 변한 모습에 실망하며 돌아서는 남자(플라자호텔)와 여자 친구 셋이서 나누는 대화(뉴욕의 밤))평범하다 못해 내 주변에서도 한번쯤은 일어났을 법한 이야기들을 한다. 읽다가 보면 꼭 누군가에게 '이런 일이 있었는데 말이야' 하고 이야기 하는 걸 듣는 기분이다. 그래서 공감이 가기도 하고 욕이 나오기도 하고 어이 없기도 하다. 대부분의 글이 치정, 배신의 이야기를 담았지만 작가가 풀어내는, 조금은 놀라운 인간관계들을 알고 나면 세상 사는 게 좀 더 쉬워질지도 모르겠다(어떤 식으로? 그건 각자 나름의 결론으로~^^).  

제임스 설터는 나름 굉장히 유명한 작가라는데 이 소설집으로 처음 만났다. 간결한 문체가 어색했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그 맛이 좋았다. 해서, 이 책을 읽을 생각이라면 지레 겁먹고 집어던지지말고 이해가 안 되면 꼭 한번 다시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씹으면 씹을수록 단물이 빠지는 게 아니라 씹을수록 단맛이 강해져 마침내 책을 덮었을 땐 옮긴이의 흥분된 마음을 백프로 공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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훔, 코앞에 어린이날 나두고 이런 글 올려봐야 별 소용 없겠으나 그래도 뭐, 어린이날만 선물하나? 싶어 그냥 어린이책 몇 권 올려봅니다. 이 책들은 초등 3, 4학년에 다니는 제 조카들에게 꼭 선물해주고 싶은 책들이에요. 고모의 감수가 들어간 생각을 던져주는 책들! 아래와 같습니다.  

 

김남중 작가의 단편집이다. 모두 네 편의 단편이 들어 있는 『미소의 여왕』 우리가 늘상 생각해오듯 '그리하여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와 같은 동화적 결말을 보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네 편의 단편이 돋보이는 것은 아이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는 점이다. 미소의 여왕에 뽑혀 세상에 태어나 제일 많은 칭찬을 받아 행복해하는 아이에게 닥친 할머니의 안타까운 소식, 길거리 농구시합을 위해 아이들이 예순네 살의 할아버지와 농구팀을 결성한 사연, 밤마다 울어대는 고양이에게 총을 쏘아 얻게 된 조금 섬뜩한 교훈, 새엄마와 친엄마 사이에서 갈등하는 아이의 심리 상태를 다룬 이야기까지 기존의 동화들과는 다른 '너라면 어쩔 거야?' 하는 질문을 아이에게 던져주는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어른인 나도 읽는 내내 내가 이 아이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는데…  조카에게 꼭 읽혀서 답변을 들어보고 싶다나. 

 

이 상상력 가득한 유쾌한 책은 칸델라라는 아이가 첩보원이 되어 '위'에서 떨어진 꾸겨진 종이에 적힌 미션을 수행하는 이야기를 다뤘다. 재미있는 문체가 웃음을 유발하고 독특한 그림은 호기심을 당긴다. 더불어 아이들다운 상상력이 더해 읽을 수록 흥미진진해진다. 또 중간중간 나오는 첩보원 신분증 만들기(울 조카가 꽤 좋아할 것 같은!), 변장을 하는 아이디어들, 스파이가 가져야 할 물건들 목록 등은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분명 내 조카는 이 책을 읽고 그대로 한번씩 놀이를 해보려고 할 테니 조카와 재미있게 첩보원 놀이를 할 일만 남았다. 난 어떤 스파이를 해볼까나? 

 

빛을 그린 화가 클로드 모네에 관한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은 그동안 여러 출판사에서 꾸준하게 예술가 이야기로 나오고 있다. 이번에 출간한 모네의 그림이야기는 모네가 직접 가꾼 지베르니 정원에 사는 요정들의 안내에 따라 작품을 감상하는 독특한 방식을 취하고 있어 아이들이 좀 더 쉽고 재미있게 그림과 모네의 작품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준다. 그림의 탄생 배경이나 모네만의 작업방식, 그림과 관련한 일화까지 담겨 있어 그림 좋아하는 어른인 나도 이 책 한 권 읽으면 모네에 대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것 같다. 요즘 그림보다는 만화 그리기에 올인하고 있는 조카에게 꼭 읽혀보고 싶은 책. 만화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이 그림책은 『영원히 사는 법』과 함께 그림책을 보는 순간 빠져들었던 책이다. 화려한 색감과 판타지를 연상케하는 그림들. 마치 그림책 속으로 빨려들어갈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도서관에서 <영원히 사는 법>이란 책을 찾기 위해 도서관 구석구석을 살피며 패러디한 책제목을 읽는 재미를 주었던 『영원히 사는 법』과 같이 어떤 철학적 메시지를 던져주는 책은 아이를 위한 책이지만 어른들도 푹 빠져 들여다보게 만드는 책이다. 『태양을 향한 탑』은 환경의 소중함과 인간의 열정을 보여주는 역작이란다. 오래 전에 사라진 파란 하늘과 태양을 보기 위해 하늘로 하늘로 쌓아올리는 건축물들은 『영원히 사는 법』에서 책 제목을 보여주듯 쌓이고 쌓이는 건축물 곳곳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세계의 건축물들이 자리 잡고 있다. 그 디테일한 그림들을 살펴보는 재미와 도대체 어쩌다가 태양과 빛이 들어오지 않았을까 고민을 하다가 보면 자연스레 환경 문제와 연결이 지어진다. 암튼, 그 모든 것을 떠나서라도 이 책은 그림을 보는 재미만으로도 한참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책이다. 『영원히 사는 법』과 함께 보자마자 눈독을 들인 조카의 안목. 아이들도 책을 볼 줄 아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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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10-05-04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두 땡투하고 장바구니로 쓱 ㅎ
저희 조카랑 또래군요 이힛

readersu 2010-05-06 11:28   좋아요 0 | URL
앗! 글쿤요^^ 조카랑 잘 놀아주셨어요? 어린이날에?ㅎㅎ
 

 
이 책은 정말이지 소개를 안 할 수가 없다. 좋아하는 두 작가의 추천이 나란히 있고, 또 오래 전에 원서로 이 책을 읽은 친구가 이렇게 훌륭한(!) 책이 왜! 아직도! 우리나라에 출간되지 않았냐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었던 책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들 강추 강추 강강추 하는 책이 어제 드디어 도착했다.

그리고 스~을쩍, 책을 넘겼는데
이런 문장이 나온다.

"(…)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여름날 약국으로 이어지는 큰길로 들어서기 전 마지막 구간의 가시덤불에서 야생 라즈베리가 송알송알 알이 맺힐 때나, 매일 아침 하루도 빠짐없이 약국으로 차를 몰았다. 은퇴한 지금도 그는 여전히 일찍 일어나 예전에 그런 아침을 얼마나 좋아했던가 떠올렸다. 마치 세상이 혼자만의 비밀인 듯이, 발밑에서 타이어가 부드럽게 구르고 햇살이 이른 아침 안개를 가르고 모습을 드러내는 동안, 오른쪽으로는 만(灣)이, 그다음엔 키 크고 늘씬한 소나무들이 잠시 보였다. 코끝을 간질이던 솔숲 향기와 소금기 짙은 공기, 그리고 겨울이면 공기에서 묻어나는 냄새를 그는 얼마나 좋아했던가. 그래서 그는 언제나 창문을 열고 운전을 하곤 했다,"

이 글을 읽고 나니 에드워드 호퍼의 아래 그림들이 생각난다. 



 

그리고 나의 느낌은 이런 것,
오래 전  마크 스트랜드의 『빈방의 빛』을 읽었을 때의 느낌 그대로...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들여다보면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어느 여름 작은 도시 역 광장의 일요일 아침, 해는 아직 떠오르지 않았지만 여명은 밝아오고, 조용한 거리엔 부지런한 몇 사람들만 오고갈 뿐이며 도로엔 지나다니는 차조차도 거의 없다. 아침의 맑은 공기는 내 코를 자극하고, 그 상큼함에 올려다 본 하늘은 더없이 높다. 그리고 살랑거리며 부는 시원한 바람은 기분 좋은 하루의 시작을 전해준다. 

“사람들은 잠들어 있다. 길거리에는 차도 다니지 않는다. 부동(不動)과 정적(靜寂)의 몽상적인 조화로 마술적인 순간은 길게 늘어나고, 그 앞에 선 우리는 특별히 허락된 목격자들이다.” 

「오전 7시」, 「이른 일요일 아침」, 「펜실베이니아의 새벽」, 「서클 극장」, 「사차선 도로」 등 그의 그림엔 도로가 있지만 지나다니는 차가 없고, 도시의 아침은 밝았지만 사람이라곤 보이지 않고 조용하다. 내가 어린 시절의 고향이 떠올랐던 것도 아마, 그런 까닭일 게다." 

『올리브 키터리지』의 앞 부분에 잠깐 소개된 일상을 보며 언젠가 나도 비슷한 감상을 느꼈던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주변의 배경과 시대와 인물은 다르되 에드워드 호퍼나 『올리브 키터리지』의 약사 헨리나 빵집 딸내미였던 나나, 소도시의 아침 풍경을 그릴 때는 비슷한 느낌을 가지는 것 같다.  

어쩐지 이 책, 
내 맘에 쏙 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 누구의 추천을 떠나서 첫 문장부터 저런 식으로 나를 사로잡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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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10-04-30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좋으네요.

readersu 2010-05-03 10:20   좋아요 0 | URL
넵! 어느 것 하나 빼버릴 게 없을 만큼 모두?!^^
 
 전출처 : readersu > 나도 알고 당신도 알고 우리 모두가 '아는' 작가, 천명관 낭독회

오래 전에 집에 놀러 오던 ‘아는’ 동생이 엘리베이터 안에서 천명관 작가를 만났다며 이곳에 사는가보다고 했다. 그래? 하는 놀라움보다는 마침 그의 첫 작품 『고래』를 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여서 아, 그 소설, 정말 재미있었는데! 딴소리를 했다지. 사실, 그땐 작가들에게 관심이 없었기에 천명관 작가가 아니라 김훈 선생이 옆집에 사신다 했어도 시큰둥했을 것이다(정말?) 아무튼 재미있다는 친구들의 강력 추천에 의해 『고래』를 읽고 그 느낌이 너무나 새롭고 놀라워서 오래오래 기억에 남았는데, 정말 오래(!) 기다린 셈이다. 그의 장편을!

알라딘에서 있었던 천명관 작가의 낭독회였다. 지난 번 <상수이리카페>를 한번 다녀간 덕분에 길을 헤매지 않고 잘 도착했다. 저녁을 먹지 않아 빵과 우유를 먹으며 허기를 달래고 있으니 작가가 도착했다. 아주 잘생기신 외모와 멋진 목소리(^0^), 그보다 초큼 덜 잘생긴 장 모 과장의 사회로 낭독회가 진행되었다.

신간인 『고령화 가족』은 작가로서 한번쯤은 짚고 넘어가고 싶었던 가족 이야기였단다. 이전에 발표한 소설집 『유쾌한 하녀 마리사』를 읽은 독자들이 『고래』와 비교하며 천명관이 왜 이러나, 그랬을 수도 있었을 테지만 작가로서는 다양한 실험을 시도해보고 싶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론 성과가 별로 없었고 『고래』를 읽은 독자들이 실망했던 것 같다고 했다. 『유쾌한 하녀 마리사』의 경우는 연극으로도 만들었단다. 연극의 제목은 <참치>였는데, 연극 역시 별반응은 없었단다(갑자기 왜 제목이 <참치>였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이야길 했는데 못 들은 것일까??).

아직 『유쾌한 하녀 마리사』를 읽어보지 못해 그 책이 실망스러웠는지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지만 낭독회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유쾌한 하녀 마리사』를 읽었다는 친구는 ‘어, 재미있어, 괜찮아!’ 라며 읽어보길 권했다. 또 우리만 알고 있는 어떤 공통점 때문에 나도 집에 가면 그 책을 꼭 읽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집에 분명 있을 거라(이상하다 분명 있었는데 말이다) 생각하고선 도착하자마자 책을 찾았는데 어라, 책이 없네! 이건 웬 착각이었을까? 괜한 허탈함이라니…암튼 다시 낭독회로 돌아가서,  

제목을 왜 ‘고령화 가족’이라고 지었는지 물으니 나이 많은 자식이 ‘엄마‘와 살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시도를 해봤단다. 책을 읽은 분들이 작가와 비슷하다고 말들을 하는데 그가 생각하기엔 보통 대부분의 작가들이 어느 작품에서든 본인의 고백들이 조금씩 들어가지만 그는 그럴 만한 글이 없었기에 『고령화 가족』의 오인모라는 캐릭터를 보며 영화제작자라는 점에서 천명관 작가를 투영했던 게 아닌가 싶다고 한다. (참고로 천명관 작가는 여러 영화사에서 총무과장으로 일하다가 시나리오를 썼고, 한번쯤은 들어봤을 영화 <북경반점>이나 <총잡이>가 그의 시나리오였고 그외 시나리오가 많 으나 영화화 되진 못했다고 한다.)

이어 천명관 작가의 낭독이 있었다. 작가들은 왜 하나같이 이토록 멋진 목소리를 가졌는지…가만히 듣고 있으면 귀에 착착 감긴다. 처음으로 읽은 부분은 93~94쪽으로 헤밍웨이를 언급하며 오인모에게도 헤밍웨이의 젊은 날과 같은 시절이 있었을 것이라는 이야길 하며 다시는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음을 한탄(!)하는 장면이었다.

“내게도 아마 헤밍웨이의 젊은 날과 같은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세상은 신비하고 달콤한 희망으로 빛나며 옆에 누워 있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래서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었던 시절…… 하지만 그 상대가 누구였는지, 당신의 감정이 어땠는지는 이제 잘 기억나지 않는다. 중요한 건 그 모든 것이 사라졌다는 것이며 다시는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거였다.” 

『고령화 가족』에 ‘오인모‘가 쓰레기통에서 헤밍웨이 전집을 주워 오는 부분이 있는데 천명관 작가는 사실적이고 화려한 문체를 가진 헤밍웨이를 좋아한단다. 작가의 일거수일투족이 신문에 나올 정도로 유명한 작가이지만 실제는 나약하기 그지없는 작가이기에 두루 감회가 남다른 작가다. 그래서 천명관 작가의 작품에도 등장을 한 셈이다. 천명관 작가는 미국 문학을 좋아한단다. 헛소리가 별로 없고 사실적이며 하드보일드 한 부분들이 그와 맞는 코드라고 생각하기에 그렇단다. 하드보일드라고 말을 하니 하루키가 생각나고 문득 레이먼드 챈들러가 생각난다. 정말 하드보일드 한 사람들이지. 그렇게 두고 보니 천명관 작가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어 사티의 음악에 맞춰(내 아침 알람 음악이기도 한) 46쪽을 낭독했다. 어느 주택에서나 한 부류 정도는 있을 할머니 그룹, 동네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꿰고 앉아 그 어떤 소설가보다도 소설을 잘 쓰시는 할머니들. 어쩌면 이 책에서 제일 코믹한 장면을 연출해준 분들이 아닌가 싶다.

처음 책을 냈을 때 천명관 작가는 본인의 책을 ‘누가‘ 읽을지 궁금했단다. 왜냐하면 작가 주변의 친구들은 전혀 책을 읽을 만한 친구들이 아니었기에 그랬단다. 한데 나중에 들어보니 친구들의 아내들이 책을 읽어 보고 재미있었다며 얘길 해주었다고 한다. 의외였는데 오늘 낭독회에 참석한 독자들을 보니 남자들보다는 여성이 많아 이 또한 생소하기도 하다며 웃었다.

이어 읽은 부분은 277쪽이다. 에로물을 제작하는 박사장의 이야기다. 오인모가 만든 에로 영화가 마음에 들었는지 한 편 더 계약하자며 박사장이 들려주는 시나리오였다.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이고 좋아하는(!) 부분이라(내가 잘못 들었나??ㅎㅎ) 읽었다고 했다. 박사장의 이야기 다음에는 영화의 에필로그처럼 「그리고 남은 이야기들」이라는 제목으로 인물들의 그 이후 삶을 넣었는데 작가는 이 책의 마지막을 감상적으로 처리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으며 위의 박 사장 이야기는 유머로 넣은 거라 했다.


작품 집필 중에 고충은 없었냐는 질문에 『고래』를 쓸 때는 상상이 많이 들어간 내용이란 쓰기가 쉬웠지만 『고령화 가족』은 너무나 현실적이라 글쓰기가 힘들었다고 했다. 그는 다큐가 아닌 픽션으로 커트 보네거트처럼 작가가 소설 속에 적극적으로 개입을 하는 메타픽션을 좋아한단다. 해서 이번 작품을 쓸 때도 인물들의 창조자로서 너그러운 군주가 되자고 생각을 했더란다.

글을 쓸 때는 제목과 첫문장, 그리고 표지가 떠오르면 글을 쓰기 시작한단다. 표지를 떠올리는 것은 표지가 영화포스터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표지와 첫문장이 떠오르면 문체가 결정되고 인물들이 떠오른단다. 물론 강렬한 것들은 머릿속에 두고 있지만 『고래』를 쓸 때는 결말을 본인도 잘 몰랐었다고 한다. 작품을 떠올릴 때 영화포스터를 생각하듯 표지를 먼저 떠올리지만, 또 영화제작을 한 사람이기도 하지만 천명관 작가는 의외로 영화를 잘 보지 않는단다. 많아야 일 년에 한두 편이란다. 예전에 많이 봐서 그런지 재미가 없다고 했다. 

작가는 소위 말하는 386세대이다. 그가 한국문학을 접한 시기에는 이청준 선생이나 이문열 선생이 활동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당연히 그들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을 거라 생각한단다. 하지만 존 업다이크의 『달려라, 토끼Rabbit, Run』를 스무 살에 읽고 낯선 나라, 낯선 곳 낯선 인간들이었는데도 꼭 자신이 경험한 일처럼, 본인이 살았던 곳처럼 느껴져 존 업다이크에게 빠져들었단다. 읽어보면 어느 소도시 커플들의 ‘찌질한‘ 이야기들이고 사건은 없이 그저 평범하게 흐르는 일상들인데도 빠져들었는데 그때 작가란 모름지기 이런 평범한 일상을 아무렇지도 않게 다루면서 독자에게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단다. 그래서 스토리는 세계 어느 누가 읽어도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을 쓸 생각을 했고 문체와 문장은 한국문학에서 배운 것이라 했다. 앞으로 한국문학도 번역이 많이 되어 세계로 뻗어나가야 하는데 그럴 경우라면 특히 모든 나라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를 다뤄야 한다고 생각한단다.

작가를 만나고 나면 늘 생각하는 거지만 다들 어쩜 그렇게 말들을 잘하는지-.-;; 물론 당연한 일이겠지만 오늘도 그런 생각을 했더랬다. 사인을 한다기에 그때까지만 해도 집에 있을 거라고 당연히 생각했던 『유쾌한 하녀 마리사』를 들고 오지 않은 것을 안타까워하며 『고령화 가족』에만 사인을 받았는데 예전에 같은 건물에 산 적이 있었다는 뜬금없는 생각에 혼자 즐거웠다나. 

 아무튼  『고령화 가족』을 읽으면서 가장 감동 받은 것은 엄마였다. 작가도 책의 마지막 부분에 적었듯이 ‘나도 알고 당신도 알고 우리 모두가 아는‘ 그것! 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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