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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언젠가 모 저자를 만나 '책을 열심히 읽었더니 어느날 그 어렵고 지루하기만 하던 셰익스피어가 재미있더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그 저자가 내게 '그렇다면 이젠 고전의 세계로 빠져보세요.' 라며 말을 해주었다. 난 나이가 들도록 베스트셀러 외엔 제대로 읽은 책이 없기에 과연 내가 셰익스피어의 책을 읽었다고 고전의 세계로 빠져들 수 있을까? 의문을 가졌었다.
내게 『위대한 개츠비』도 그런 책 중에 한 권이었다. 동 시대를 살고 있는 작가가 아닌 담에야 내겐 모두 고전(!) 작가로 통했으니 말이다. 우연히 영화를 보고 책을 읽었다. 고전(!)들을 읽는 나의 테크닉이다. 근데 의외로 재미있었다. 재미있다니! 그러나 그 뿐이었다. 내게 F.스콧 피츠제럴드는 『위대한 개츠비』로 끝났다. 그래서 이 소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도 처음에 나왔을 때 관심이 없었다. 고전에 입문하라는 칭찬 아닌 칭찬을 듣고도 여전히 나는 고전을 읽기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해서 영화로 인하여 온라인 서점에 책들이(!) 눈에 띄기 시작하자 그제야 서서히 어, 뭐지? 하는 관심을 가졌다.
한 마디로 읽지 않았으면 정말! 후회할 뻔 했다는 이야기다.
이 책은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단편들마다 독특한 소재를 선보인다. 표제작인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와 같은 '뻥치는' 소설이 있는가 하면 「리츠 칼튼 호텔만 한 다이아몬드」같은 환상적인 소설도 있다. 또 「행복의 잔해」처럼 읽고 나면 인생에 대해 깨달음을 얻게 하는 소설도 있으며, 나른한 미국의 한 마을 풍경과 함께 '잭슨 스트리트의 당구장'에서 마음 맞는 무리들과 당구나 칠 젤리빈이 저절로 떠올려지는 나른한 「젤리빈」의 이야기도 독특했다. 이 소설집엔 이런 다양한 작품들이 선을 보이고 있는데 각 단편들마다 각기 다른 소재로 쓰여 그 재미를 더해준다.
그 재미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 하나가 '플래퍼'라 불리는 '재즈시대'를 대표하는 매혹적인 젊은 여성들의 등장이다. 젤리빈의 낸시, 적갈색 마녀 캐럴라인, 「낙타 엉덩이」의 베티가 그들이다. 그녀들은 우리 근대의 '신여성'에 속하는 인물들이다. 당돌하면서 순진하고 보수적인 관습을 싫어하고 한순간 고꾸라질지언정 자신의 삶에서 나름대로 정열을 불태우는 신여성말이다. 피츠제럴드의 단편엔 그런 신여성들이 등장한다.
나머지 하나의 공통점은 바로 삶이다. 인간의 평생, 세월이 들어 있다. 벤자민 버튼은 거꾸로 살아온 삶이지만 나름대로 한순간을 맘껏 즐기며 살았고, 「오, 적갈색 머리카락의 마녀」의 멀린은 평생을 한 여자에 대한 환상 속에 살다가 뒷통수 맞아 자신이 평생 바보였음을 깨닫는다. 또 「행복한 잔해」의 록산과 해리처럼 "쓰디쓴 악감이 아니라 동정을, 환멸이 아니라 오로지 아픔을 남겨 놓은" 삶도 있었다. 짧은 단편에 한 사람의 인생을 싣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피츠제럴드의 단편 속 삶은 치열하다가 쓸쓸해지다가 재빠르게 지나간다. 마흔의 멀린이 느끼는 세월에서 우린 그걸 엿볼 수 있다. "신나는 젊은 시절의 롤러코스터와는 딴판이다."
피츠제럴드의 삶 역시 그러했다고 한다. '재즈시대'에 필요한 모든 요소들을 누리며 살았지만 그걸 즐기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고 '돈' 을 벌기 위해 소설 쓰야만 하는 삶이었단다. 한 작가의 작품들이 '돈'때문에 쓰여졌다는 것은 독자로서 썩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의 작품들이 이렇게 훌륭히 남아 후세의 독자들에게 추앙을 받고 있다면 '돈'때문에 어절 수 없이 했던 그의 작품 활동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문득 도스토옙스키가 떠오른다. 그 역시 돈 때문에 작품을 쓰지 않았던가?
아무래도 피츠제럴드에게 빠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나도 이제 서서히 고전(!)의 대열에 들어서는 것인가?그렇다면 피츠제럴드 덕분이다. 이제 시간내서 브래드 피트를 만나봐야겠다.
덧) 뒷편엔 작가의 각 작품에 대한 코멘이 들어 있다. 작가가 자신이 쓴 작품에 대해 코멘을 다는 것이 무척 신선했다. 우리 작가들도 이런 재미난 코멘을 달면 흥미로울 것 같은 예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