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길 떠나는 아이 반달문고 13
임정자 지음, 지혜라 그림 / 문학동네 / 200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물이, 길 떠나는 아이>라는 책은 제목 자체가 영화장르로 치자면 로드 무비(road movie)적인 요소가 포함된 성장 동화의 이미지를 풍기는 작품이다. 아이가 재미있게 읽은 <무지무지 힘이 세고 대단히 똑똑하고 아주아주 용감한 당글공주>라는 작품을 쓴 임정자씨의 작품이라 이번에는 어떤 이야기를 펼쳐보일지 기대를 하고 보았다. 한 여자아이가 선녀의 실수로 인해 떨어져 나간 자신의 영혼의 일부분을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해 세상을 떠돌아다닌다는 옛이야기 형식 속에 사람이 성장하면서 자신에게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하늘나라의 옷 짓는 선녀가 자기 재간만 믿고 정성이 부족하여 솔기가 터진 아기 옷을 짓는다. 터진 옷 솔기를 통해 세상 독이 스며들면 아기는 평생 떠돌며 살아야 할 운명인 것을 잊었던 모양이다. 삼신은 아기를 잘 돌봐 줄 사람이다 싶어 아기를 세상에 내려 보내지만 처음부터 세상의 독(毒)으로부터 완전한 보호를 받지 못한 아기의 운명은 가시밭길을 가야 하는 것으로 정해진 모양이다. 삼신님께 '못나도 좋으니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점지해 달라고 치성을 드렸던 아주머니는 물동이 안에 든 아기를 보고는 얼굴을 일그러뜨린다. 작가는 아기가 생겼을 때 '이왕이면 아들'을 바라고, '꼭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우리나라의 뿌리 깊은 남아 선호 사상을 들추어내고자 한 모양이다.

"어라, 계집애잖아! 이왕 보내 주실 거면 고추 하나 달아서 보내 주시지, 야박하게 계집애가 다 뭐람."

말은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내고 아프게 하는 힘을 지녔다. 무심코 내뱉는 말 한마디가 깊은 상처를 내고 가슴 깊이 파고들어 영혼을 잠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아주머니의 말은 독이 되어 아이의 영혼의 한 조각을 분리시고 만다. 그것이 바로 물동이 속에 함께 들어 있던 '구렁이'로 이 둘은 원래 하나였어야 하거늘 떨어져 나와 있으니 둘은 함께 있으되 완전한 하나와는 다른 불완전한 모습이다. 아기는 물동이에서 태어났다하여 '물이'라 이름 지어진다. 물이는 동무 구렁이와 함께 지낼 뿐 바깥에 나서는 것 자체를 꺼려하니 부모 된 입장에서는 근심스럽고 답답한 노릇일 수밖에 없다. 커서 이제 제 밥벌이는 하고 앞가림을 해야 할 터인데 맨날 구렁이만 싸고돌면서 놀기만 하니 어찌 밉지 않겠는가.

"여기 있는 책들을 똑같이 베껴 쓰거라. 한 글자도 빠뜨리거나 틀리면 안 되느니라."

마을을 떠나 어머니가 가라고 한 글자를 가르쳐 주는 집주인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벌어먹고 살 수는 있을거라며, 오로지 자신이 쓰는 것에만 신경을 쓸 것을 강요한다. 학생들에게 오로지 공부만 가르치는 우리나라의 주입식 교육현실을 보는 듯 하다. 그 집을 나서서 동행하게 된 사내아이는 '내 판단에 의하면~'을 관용구처럼 사용하는, 자칭 재주가 많은 녀석이다. 물이와 함께 길을 떠나게 된 이 재주 많은 사내아이는 애초부터 물이가 들고 있는 소쿠리에 관심을 가지고 접근한 존재이다. 구렁이가 떠나 있는 동안 물이가 의지하는 존재이나 뒤에 하는 행동들을 보더라도 그다지 믿을만한 대상은 아닌 것 같다.

개인적으로 빈 소쿠리 속의 있지도 않은 금은보화에 욕심을 품고 물이와 동행하며 살펴준다는 설정은 개연성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같이 다니면서 그 덕 볼 생각은 하고 훔쳐서 달아날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는 것이 아닌가. 붉은 구슬의 정체를 발설한 재주 많은 아이에게는 아무런 해도 없다는 것 또한 미진한 구석이 남는 부분이다. 재주 많은 아이로 인해 구미호 가족이 참변을 당하고 그로 인해 또 다른 곳에서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인데도 물이를 떠난 뒤로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 것에 의아해 할 수 밖에 없었다. 물이는 그저 모든 것이 자기 탓이라 슬퍼할 뿐이고... 옛이야기의 형식은 빌었으되 권선징악의 구도는 차용하지 않았다고 하기에는 바느질을 소홀히 한 벌을 받게 된 하늘 선녀의 고행이 걸린다.

쥐가 들끓는 마을에 들어간 구렁이와 물이가 겪는 상황들은 이야기의 진행이 느려지게 만드는 감이 있다. 어릴 때부터 끔찍이 여기던 동무 구렁이가 행여 다칠까 싶어 쥐잡이꾼들의 말에 두려움에 떨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우유부단함을 보여주는 물이가 답답했다. 그러나 어쩌면 그 답답함은 바로 나 자신을 향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매사에 자신감을 가지지 못하고 선택의 기로에서 서성이며 불안해하는 나 역시 세상의 독, 말의 독에 의해 영혼의 조각이 떨어져 나간 상처를 지닌 존재로 아직 그 조각과 합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물이는 구렁이의 옷을 짓기 위해 필요했던 마지막 머리카락 한 올을 자신의 것으로 채워 마침내 구렁이가 자기 자리를 찾아가게 해준다. 구렁이는 사라졌지만 가슴 속이 꽉 찬 물이는 그제야 환하게 웃으며 세상을 향해 첫발을 내딛는다. 작가의 말처럼 우리들 모두는-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춘 사람조차도- 부족한 것이 한 부분은 있기 마련이다. 세상에 태어나 상처받고, 때로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서로가 상대의 부족한 부분을 조금씩 채워주며 살아간다. 내면의 성장에 좀 더 무게를 실자면 다른 사람에게 상처는 덜 주고 부족한 것은 많이 채워주는 사람이 되는 것일게다.

- 로드무비 (road movie) 주인공이 이곳저곳 옮겨 다니는 과정에서 인생관이 변한다든지 성장하는 모습을 그린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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