序詩


      

       간이식당에서 저녁을 사 먹었습니다

      

       늦고 헐한 저녁이 옵니다


       낯선 바람이 부는 거리는 미끄럽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당신이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사방에서 새 소리 번쩍이며 흘러내리고


       어두워 가며 몸 뒤트는 풀밭,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


       키 큰 미루나무 사이로 잎잎히 춤춥니다



                                   <이성복>

 

 

늦고 헐한 저녁..

낯선 바람 부는 미끄러운 거리..

당신이 나를 알아볼 때까지..

정처..없음..


정처 없다는 시인의 표현은 너무도 파장이 커서..

한동안 나는 얼마나 아득하게 정처 없었던가 ..


하지만..

늦고 헐한 저녁을 더 어둡게 할 당신..

미끄러운 거리를 조심히 걷고 있는 나를 기어코 넘어지게 할 당신..

그저 정처 없도록.. 알아보지 말기를...

그저 당신.. 나에게 정처 없는 그리움으로 남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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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즈 - 따뜻한 연대를 꿈꾸며]


서른 즈음이란 나이는 아무래도 심리적으로 어떤 경계선임에는 분명하다.

적어도 여자에게는.

난 서른에 오년 넘게 사귀어온 남자친구에게 선포했다.

“서른이 되면 뭔가 달라지길 원해.

그래서 구체적으로 계획을 좀 세워야 겠는데..

널 포함해야 할지, 널 빼고 세워야할지 헷갈리고 있어.

니가 함께 한다는 전제하에 내 앞날에 대한 계획을 세울 건지.

아님 나 혼자 따로이 계획을 세워야할지가 말야.

그러니 이제 결정해줘. 결혼을 할지. 아님 헤어질지.“

그건 결혼을 꼭 해야겠다는 마음은 아니었다.

(이걸 프로포즈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꼭 있다-_-)

단지 이제부터는 부모의 그늘에서가 아닌

내가 결정하고 내가 행동하는 내 삶을 살고 싶다는

그래서 조금씩 달라지기를 바라는 나름대로의 결단 비슷한..

영화 ‘싱글즈’의 주인공들은 열아홉에 부모의 집을 나오는 게 꿈이었다니

난 덜 떨어져도 아주 많이 덜 떨어진 아이였던 셈이다.

(물론 나도 독립에의 꿈은 열아홉부터 꾸었지만)


난 그래서 결혼을 했고(-_-;;)

몇 년이 지나면 마흔이 된다.

“마흔이 지나면 뭔가 성취했을까? 아님 말고..”라는 주인공의 마지막 독백은..

그러므로 지금 나에게 또다시 유효하다.


일과 사랑.. 그 둘 중 하나를 성취했다고 해서

인생이 단순하게 해피한 건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고,

남편과 아이가 생겨 싱글은 분명 벗어났지만..

심리적으로는 우리 모두 언제까지나 싱글이므로..


나와 함께 인생의 한 철을 함께 보내는 나의 여자친구들..

그리고 흔치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마초 성분을 거의 뺀 착한 남자들..

그들과의 따듯한 연대 속에서 삶은 언제까지나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을 알게 된 지금..


그러므로 파이팅이다.

혼자서 아이를 낳아 키울 결심을 하는 동미와

횡재 비슷한 남자를 포기하고 동미의 곁에 남기로 한 나난,

그들이 해피하고 안전하게 살기엔 많은 장애가 눈에 보듯 선하지만..

그래도 무조건 전폭적으로 파이팅이다..

그들과 우리들 모두에게 건투를 빌고 싶게끔 만드는

‘싱글즈’는 아주 착하고 따듯한 영화였다.


참. 배우얘기를 빼놓을 수 없겠다.

나난역의 장진영 참 예쁘고 자연스러워서

초반엔 장진영에 의한 장진영을 위한 장진영의 영화군 했었다..

그렇지만 역시 화사함은 좀 떨어졌지만

너무 자연스러운 동미역의 엄정화 역시

제 역할을 아주 정확하게 해내었던 것 같다.

이범수도 적역을 맡았다고 볼 수는 없으나

오버하지 않고 흐름을 제대로 탄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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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나 2004-08-15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리적으로는 우리 모두 언제까지나 싱글이므로....

rainy 2004-08-16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싱글이란 말은.. 지금 보니..
참 외롭고, 두려운 마음을 갖게 하네..
그 말은.. 인간은 결국은 아무리 용을써도.. 혼자라는 말이구나..
 



[히 러브스 미 - he loves me, he loves me not]



<히 러브스 미>라는 행복한 제목과 우리의 아멜리에 ‘오드리토투’의 깜찍한 미소..

또한 시기도 적절하게 발렌타인데이에 즈음하여 개봉되었으니

이 영화를 달콤한 영화로 오해한 것은 내 탓만은 아니다.


영화는 사랑에 빠진 아름다운 미술학도 안젤리끄의 일상을 따라간다.

그 일상에 그녀가 사랑하는 의사 루이의 모습이 함께 보여짐은 당연하다.

그녀는 그의 생일에 맞춰 꽃을 선물하기도 하고, 직접그린 그의 초상화를 선물하기도 한다.

또 함께 파티에 참석하기도 하고, 둘이서만 떠나는  플로랑스행을 계획하기도 한다.

공원에서 행복하게 미소 지으며 루이를 그리고 있는 안젤리끄를 보여주고

바로 다음 샷에서 즐겁게 뛰노는 루이를 보여주기도 하니까

둘은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연인들이 분명하다.

그 커플의 문제는 안젤리끄가 사랑하는 루이에게 아내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안젤리끄에게 그 사실은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지만..

루이에게는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더구나 그의 아내는 임신중이니까.


영화를 보기 시작한 후 이,삼십분쯤이 지나고 나자

나는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뭐야? 오드리 토투의 사랑스런 매력을 이용해

그저 별로 특이할 것도 없는 남녀의 사랑, 불륜의 갈등을 보여주겠다는 거야?

그러기엔 뭔가 잠깐씩 고개가 갸우뚱 해지면서 슬슬 혹시 하는 의심이 시작되었고

나의 습관이랄까 고집에 의해 영화를 보기 전에는 되도록

영화에 관한 것을 접하지 않으려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언뜻 언뜻 눈에, 귀에 보였던 ‘반전’, ‘엽기’ 뭐 이런 단어들이 떠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설마’가 ‘사람잡는다’고..

로맨틱 코미디 인줄로만 알고 보기 시작했던 이 영화는

미스테리 스릴러에 오히려 가까워가고 있었던 거다.

그 때서야 비로소 아 그렇구나.. 하게 되는

이 영화의 영어제목 <히 러브스 미, 히 러브스 미 낫>...


어린 시절.. 누구든 한두 번쯤은 해보았을 놀이..

나뭇잎을 하나 씩 뜯어내며 읊었던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처럼

영화는 앞부분에서 “사랑한다”를 보여주고

뒷부분에서 “사랑하지 않는다”를 설명한다.

그래서 영화 앞부분에서 깜찍했던 그녀는..

영화 뒷부분에서는 끔찍한 그녀가 되어 버리고 만다.


사랑은 그런 것일 거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면.. 나는 사랑스런 사람이 되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난 아무것도 아닌 것..

잔인한 평가지만 오히려 끔찍해 질 수 도 있다는..

그래서 영화를 다 본 후의 느낌은.. 뭐랄까.. 어쩔 수없이 씁쓸할 수밖에는..



p.s

안젤리끄 역을 맡은 오드리 토투는..이 영화에서조차 너무도 매력적이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영화의 느낌은 전혀 달랐을 듯..

주의! 매력적인 상대라고 해서 함부로 꽃을 바치지 말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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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간도 - 오랜만이야.. 홍콩느와르.. 근데 너 많이 달라졌구나..]


나에겐 <영웅본색> <첩혈쌍웅>로 기억이 시작되는 홍콩느와르.

사랑하는 사람의 가슴 아픈 죽음을 보여주는 비장미, 

목숨을 걸고서 지켜야하는 의리와 우정,

소나기처럼 퍼부어대는 무제한 화력의 화끈한 총싸움,

꼭 착한 사람 한 둘은 희생되어야 하고, 모두를 구해내는 대표영웅은 늘 있고..


그 오바라고 밖에는 할 수 없는 여러 요소들 때문에 결코 아주 좋아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씸플하고 속 시원하게 가슴과 코끝 찡하게 하는 뭔가가 있기에

내겐 좀 애매하긴 해도 나름대로의 애정을 받았던 홍콩 느와르..


오랜만에 본 홍콩 느와르는 좀 성숙해 졌다고 할까?

비장미는 그대로지만 과장하지 않고 생략하는 법을 배운 것 같다고 할까?


영화 [무간도]는 두 남자의 이야기다.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서로 다른..

경찰 신분으로 조직의 삶을 사는 남자 양조위.

조직 신분으로 경찰의 삶을 사는 남자 유덕화.

이 경우.. 뒤바뀐 운명이라 해야 하는 걸까?

이들의 운명 자체가 바뀐 채 살아가야 하는 바로 그것이라 해야 할까?


18세의 나이에 그 뒤바뀜이 시작되었다면

어디서부터가 진짜이고 어디까지가 가짜인지.. 혼란스러움은 당연하리라..

유덕화의 연인이 쓴 소설 속 남자주인공처럼

진짜 착한 사람인지 아닌지는.. 누구도, 자신조차도  알 수 없게 되어버리는..


살이 빠지면서 기름기도 함께 빠진 듯 샤프해진 유덕화의 절도 있는 연기도 좋았고

언제 어떤 모습으로 있건 나에겐 사려 깊게만 보이는 양조위의 허무한 눈빛도 좋았다..


그들은.. 그저..

처음부터 가고 싶어 하지 않았으나 갈 수밖에 없었던 다른 길에서

원하는 삶 속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으나

돌아갈 수 없었던 가엾은 남자들일 뿐이었고

그런 상태가 바로 무간지옥이 아니겠냐고 감독은 말하고 싶은 것이리라 싶다..


P.S

우리 삶도..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없고,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없을 때,

결코 지옥보다 낫다고 말 할 수 없는 것이겠으나..

그래도 우리는 원하는 삶의 모습으로 가고자 하는 방향, 그걸 잃지 않고,

그곳으로 갈수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기에..

하루를 사는 동안에도 지옥과 천국을 여러 번 넘나들 게 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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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크리스마스 - 정갈한 슬픔의 힘]


난 정갈한 슬픔이 지니고 있는 힘을 믿는다.

착한 슬픔은 다른 어떤 감정보다 내게 결정적으로 힘이 된다.

슬픔이 지나가면서 마음속의 불순물들을 가라앉혀 주었을 때..

나는 다시 숨쉴 수 있게 되고

착한 바램을 품을 수 있는 마음이 되어지는 것이다.


살면서 분노하게 될 때나 용기를 잃고 비겁해져 갈 때

마른 꽃줄기가 물을 빨아들이듯 한차례 슬픔이 지나가고 나면

건조해져 바스라질 것 같은 일상은 다시금 촉촉한 물기를 머금게 되고

내게는 고요하고 정직한 평화로움이 온다..


TV에서 해주는 [8월의 크리스마스]를 봤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는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도 없이 슬퍼하고 젖어들기에 바빴던 것 같고.

두 번째 봤을 때는 정원과 다림의 감정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느껴졌던 것 같다.

설명할 수 없는 안타까움에 몇 날을 잠 못 이루기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세 번째...


내가 텔레비전을 켰을 때는 이미 영화는 시작되어 있었고

사랑의 예감으로 눈부시게 설레이는 다림의 대사가 시작되고 있었다.

“아저씨는 왜 나만 보면 웃어요?”

그 때부터 나는 처치곤란 할 정도로 울수 밖에는 없었다.

설레이면 설레이는 것이 슬퍼서.. 안타까우면 안타까운 것이 슬퍼서..

또 예쁘면 너무 예쁜 것이 슬퍼서..

어쩌면 나는 요즘 내내 울 수 있는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많은 걸 담고 있었고

그것들은 고스란히 내게로 스며들고 있다. 지금도 계속...

서로에게로 우산을 조금 더 기울이려는 두 사람.

정원이 해준 얘기를 혼자 곱씹으며 미소 짓던 다림.

불이 꺼진 사진관에 돌을 던지던 다림의 마음.

다림에게 쓴 편지를 전하지 않았던 정원의 마음.

그녀가 일하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고만 있던 안타까움.

영정사진을 다시 찍으러온 할머니의 마음과

자신의 영정사진을 찍던 그의 모습..

비디오 작동법을 적어 내려가는 정원의 눈길과 그 마음까지...


이제부터 [8월의 크리스마스]는 내가 나에게 주는 선물이 될 것이다.

내 마음속에 자꾸 불순물이 끼어들어 내 자신을 잃어버릴 것만 같을 때...

그 불순물들을 가라앉히고 고요해지고 싶을 때...

[어린왕자]를 책상서랍 맨 위 칸에 늘 손이 닿게 놓아두듯...

나는 내게 주는 선물로 [8월의 크리스마스]를 다시 볼 것이다..


2002 06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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