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가난한 발바닥의 기록
김훈 지음 / 푸른숲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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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자신들에게 불리하고, 불쾌한 대상에 '개'를 붙이길 좋아한다. 뭐.. '개 같은 X'라든가, '개 같은 XX'라든가. 그러면서 자기 위안과, 분풀이를 한다. 또 이완 정반대로 진짜 '개'라는 존재에게서 위로를 받기도 하며, 어떤 사람은 자식 못지 않은 사랑을 주기도 받기도 한다. '개'는 인간에게 있어서 아이러니한 존재이다. 그럼 여기에서 전자의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우우우 울음소리는 저 깊은 곳에서 나오며, 자신의 발로 직접 디뎌 생을 배워 나가는 '개'에게도 같은 취급을 할 수 있겠는지 말이다. 뭐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났기게 개의 컹컹거리는 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고, 개는 개로 태어났기에 블라블라 떠들어대는 인간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적어도 김훈의 사색적이고 인간적인 '개'에겐 왠지 부끄러운 일 같다.

작가는 사람을 배려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다. 개의 시선조차 인간에게 맞춰 있으며, 작가의 '개'는 인간의 냄새와 선뜻 이해되지는 않는 인간을 가여히 여기며 개답지 않게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댐공사로 고향을 물속에 남겨두고 떠나는 주인할머니의 딱딱한 등에 한없이 시선을 고정하고, 가난하고 바다냄새를 품고 사는 주인아저씨에겐 칠흑같은 어둠 속 바다 친구가 되어주고, 아이들에겐 보디가드를 자청하며, 아들을 잃은 어머니와 아빠를 잃은 아이들에겐 기꺼이 위로의 노래를 불러주는 개라면 어느 인간보다도 더 인간적이지 않은가. 이보다 더 인간적인 '개'는 만나보기 쉽지 않을 것이다.

또한 '개'는 개로써의 삶도 충실히 살아간다. 자신의 발과 수염, 코로 세상과 소통하고 항상 사람을 이해하려는 '개'의 태도는 사색적이다 못해 그만의 철학까지 느낄 수 있으니 '개'에서 슬픔과 안쓰러움이 느껴지는 것은 그가 '개'로 태어났기 때문일까.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 언제나 컹컹거리고, 땅을 디뎌 몸으로 세상을 배워나가는 '개'에게 응원을 보내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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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부르는 숲
빌 브라이슨 지음, 홍은택 옮김 / 동아일보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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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좋아한다. 그 나무들이 많이 살고 있는 숲은 당연 좋다. 공기 맑고, 풀이 있고, 바람이 있고, 온갖 동물이 있고, 사실 마지막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임을 알고 있다. 반달곰 지킴이들이 아무리 지리산에 반달곰을 방생시켜도 눈이 띄지 않고, 찾아 보기 힘든 것이 현실이지 않은가. 이건 우리나라 산 생태 문제이고, 그럼 저 광활한 미국땅은 어떨까? 내 호기심에 발동이 걸린 것과 유사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놈이 있으니, 바로 표지의 바보곰이다. 이 곰이 나를 이끌었다.

빌 브라이슨이 그의 친구 스티븐 카츠와 애팔래치아를 종주한다. 맨 처음엔 '뭐 그게 대수겠어? 그냥 산을 종주한 것 뿐이잖아?'라고 아주 간단하고 성의 없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 '애팔래치아'의 길이를 알게 되었을 땐 이미 나의 눈은 브라이슨과 카츠에 대한 존경의 눈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애팔래치아는 우리나라의 백두대간과 비슷한 의미를 가졌다. 우라나라 등줄기 백두대간도 감히 종주를 하겠다는 어설픈 말조차 꺼내기 쉽지 않은데 우리나라의 몇 십배의 면적을 가진 미국의 애팔래치아를 종주했다는 인간들이 있으니, 백두대간, 애팔래치아에 담긴 의미는 제치더라도 그 산길를 걷는다는 것 자체에 경의를 표할 수 밖에 없다.

일단 여행 파트너인 브라이슨과 카츠의 불협조화(?)에 웃음이 인다. 꼼꼼한 성격의 브라이슨. 산중에서 혹시 곰을 만나면 혼자보단 둘이 낫겠다 싶어 여행 파트너를 급구하던 차에 카츠가 그에게 전화를 했던 것이다. 책의 초반부에선 '만일 나라면 좀 더 기다려 다른 친구와 떠났을 텐데'라는 브라이슨을 향한 동정의 마음을 종종  품었다. 그만큼 카츠는 여행 파트너로썬 제격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비온 뒤에 땅이 더 굳어진다고 했던가. 여행의 시간이 차곡차곡 쌓일 수록 그 둘의 관계와 우정이 부러웠던 이가 비단 나뿐이었을까 싶다.

브라이슨과 카츠의 종주를 따라 걷다보면 카츠의 별난 성격에 킥킥 웃지 않을 수 없다. 항상 카츠가 브라이슨보다 뒤떨어져서 걸었기에 둘의 산행은 철저히 자신만의 산행이었지 싶다. 끝이 보이지 않는 숲길을 걷다 어느새 한 봉우리에 올라서면, 다시 내려와 다른 봉우리를 향해 걷고 이러한 산행의 시간이 몇 시간, 몇날,며칠을 지속되어, 다시 숲이 아닌 세상으로 나오는 것을 반복한다. 브라이슨은 자신이 다시 세상으로 들어섰을 때 사람들의 편리한 교통생활 방식에 의문을 가지며, 걷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가 없음을 실감하기도 한다. 또한 아직 누구도 정확히 그 길이를 알 수 없는 길고 긴 애팔래치아 산맥에 길을 낸 사람들에게 존경의 뜻을 표하는 것도 잊지 않고 있다. 산행가 브라이슨의 냉철한 눈에 애팔래치아의 이런저런 모습이 다 드러나며, 그것에 덧붙여 애팔래치아의 역사적 사실과 의미를 부여함은 물론이다. 이러한 브라이슨의 냉철하고 분석적인, 또한 감상적인 감성이 적절히 혼합되어 책 읽는 재미를 한껏 높여준다.

책을 손에서 내려놓았을 땐 어느새 모르게 산행을 끝마쳤 때의 뿌듯함과 벅참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순간 거창하진 않지만 동네의 야산이라도 한번 올라가 볼까하는 어줍지 않은 마음까지 잠시 품게 되니 이를 실행에 옮기게 된다면 웬만한 요가 수련책보다 운동이 되는 책이 아닐까 싶다. 바보곰은 아니지만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우리를 숲으로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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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05-11-26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주의 마이리뷰 당선 축하드려요^^ 잘 읽었습니다..

글샘 2005-11-27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애팔래치아라면 모르겠지만, 한국의 대도시 산들은 너무 인간의 발에 짓밟히고 있는 것 같아 마음 아픕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집에서 죽치고 있답니다.^^

Yellowpencil 2005-11-28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인사 감사합니다^^
좋은 리뷰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당선이 되어서 무지 쑥스럽습니다;;
 
멍청씨 부부 이야기 시공주니어 문고 2단계 1
로알드 달 지음, 퀸틴 블레이크 그림 / 시공주니어 / 199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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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알드 달의 작품은 재미있다. 신선하고, 상상력의 끝은 어딘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전혀 새롭다. 그런 그의 최고의 작품으론 단연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요즘 팀 버튼이 자신의 최고 파트너 조니 뎁을 앞세워 영화화했을 정도로 '찰리와 초콜릿 공장'은 자타공인 범상치 않은 팀 버튼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한 작품이다. 팀 버튼이 로알드 달의 작품을 원작으로 영화를 만들었다는 사실에 어느 누가 더 기이하고, 상상력이 풍부한지를 말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이긴 하나, 그만큼 로알드 달의 작품엔 뭔가 기이하고, 신나고, 기발한 아이디어가 버젓이 있음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멍청씨 부부 이야기'도 작가의 기발한 아이디어를 벗어난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우선 밝히고 싶은 것은 그 정도가 약할 뿐이라는 것이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했던가. 앞에서 말한 작품보단 그 놀라움이 덜 한 것은 인정 할 수 밖에 없다. 또한 이야기 내내 피할 수 없었던 생각 중 하나는 멍청씨와 우리나라 전래동화 인물인 '누구'가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바로 '놀부'씨! 둘의 심술보중 누구의 심술보가 더 고약하다고 말한다면 두 인물이 서운함의 심술을 부릴 정도로 둘은 너무나도 비슷하다. 또한 둘의 공통점이 하나 더 있으니, 바로 부창부수. 고약한 남편에 못지 않은 악처. 배고파 구걸하러 온 흥부 부인의 뺨에 한치의 망설임 없이 밥주걱을 내려쳤던 놀부 마누라는 저리가라 할 정도로 멍청씨 부인의 못된 생각, 또 그것을 바로 실행에 옮기는 그녀의 재빠름은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 다만 두 부부의 차이점이 있다면 멍청씨 부부는 서로를 골탕먹이는 장난과 특이한 식성을 가졌다는 것 정도이다. 멍청씨 부부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바로 '새파이'이니 특이함에 있어서는 멍청씨 부부의 승리라 하겠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이야기는 공통적인 같다. 권선징악! 착하게 살면 복을 받을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다 아는 것처럼 놀부는 제비가 던져준 박씨의 박에서 튀어나온 도깨비들에게 혼쭐이 나고 곧 자신의 잘못을 뉘우쳐 흥부와 우애있게 살아 간다. 하지만 서양인인 작가는 아이들에게 좀 더 무섭고, 가차없이 말해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가장 좋아하는 음식의 재료를 구하기 위해 새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버리다 영리한 원숭이와 새들에게 복수를 당해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방법으로 없어지니 말이다. 아이들에게 어중간한 느낌은 주기 싫었나 싶을 정도로 아주 명료하게 말이다. 사실 멍청씨는 고약한 심보와 더불어 무례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이 세상엔 이런 인물은 아마 있지 않을거야'라는 희망을 갖고 싶을 정도이다.

가끔 공공장소의 공원, 버스, 식당 같은 곳에서 '멍청씨' 정도는 아니지만 정말 무례하며, 비상식적인 사람들을 접할 경우가 종종 있다. 교육, 생활환경이 더 윤택해 질 수록 이런 사람들을 더 자주 만나게 되는 것이 우연일까. '멍청씨 부부 이야기'에선 어른의 무례함, 이기심에 징벌을 내렸다. 이는 우연이 아니다. '멍청씨'같은 인물의 어른에게 보고 배운 아이들이 나중의 '멍청씨'가 되는 것이 자명하기에 일단, 작가는 어른들을 야단쳤던 것이다. 결국은 어른을 위한 일침서가 아닐런지. 과연 지금 현재 어른인 자신은 '멍청씨'인지 아님 영리한 원숭이와 새인지를 되새겨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과연 '멍청씨'가  짜부러지기 병에서 완쾌했는지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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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슬리, 루브 시엔느 설경 1878(위) , 브뇌나두에 쌓인 눈(아래)

 

포효하는 어둠 속에도 안온함이 있다.

내 주위를 싸고 있는 단단한 벽의 힘을 느낄 수 있고,

고생하던 시절에 늘 내 뒤를 좇아다니던 그 누추함과

위태로움에서 벗어나 안전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불어라, 불어라. 그대 겨울 바람이여!"

나의 삶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내 얼마되지 않은

재산까지 그대가 날려보내지는 못하리라.

 

조지 기싱 '기싱의 고백'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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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김훈을 알게 된 계기를 말하면 부끄럽지만 그의 글이 아니었다. 그의 글을 한번도 읽어보지 못한 채 어느 잡지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알게 되었으며, 그때는 그다지 흥미도 갖지 못했었다. 그리고 몇년 후 '칼의 노래'로 동인문학상의 수상자로 그를 다시 만났을 때야 잊고 있었던 그가 다시 생각났던 것이다.

김훈에 대한 나의 처녀작은 바로 '칼의 노래'이다. 그리고 또 '칼의 노래'....! 한번으로 끝낼 수 없었던 '칼의 노래'는 그만큼 나에게 강인한 인상을 남겼다. 아마 다시 읽는다 해도 분명 처음 읽는 글같은 신선함과 재미를 느낄 것이 확실하다. 김훈의 글엔 마치 클래식 음악 같은 힘이 내재되어 있는 듯 하다.  몇 백년이 지나도 현시대 사람들의 귀에 새로움과 희열을 안겨주는 클래식 음악처럼, 그의 글에선 지루함을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이 김훈의 힘, 그의 글인 것이다.

이제서야  김훈을 처음 발견한 잡지의 인터뷰 기사를 다시 읽어보니, '개인적인 소원이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세상에는 아무런 요구할 것도 없는데, 문장이 좀 잘 되었으면 좋겠어요. 내 마음에 드는 문장 서너 개만이라도'라고 담백하게 말하는 그가 한없이 부럽고, 그를 우러르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기계를 만지기만 해도 고장이 날까 두렵다는 김훈은 아직도 연필을 깎아서 원고지에 글을 쓴다고 한다.

 

 

<주요작품>


 

 

 

 

 

*그외 읽어 볼 만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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