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통일을 둘러싼 미 영 프의 다른 입장부시는 몰타 회담 뒤 귀국길에 브뤼셀에 들러 나토 정상회의를 가졌다. 부시는 독일 통일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천명하고, 나토의 틀 내에서 통일 독일이라는 원칙을 분명히 했다. 미국은 유럽 동맹국들이 우려하는 통일 독일을 나토 내에서 제어하겠다며 달랜 것이다. - <지정학의 포로들> 중에서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11564독일 통일 10개항이 발표된 지 열흘 뒤 열린 서유럽 정상회의에서 대처는 콜에게 거친 언사를 퍼부었다. 대처는 정상들과의 만찬에서 “우리는 독일을 두 번이나 패전시켰는데, 이제 그들이 돌아왔다”고 말했다. 대처는 독일 통일이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니 영국은 적대적인 입장을 취해서는 안 된다는 외교보좌진 및 외무부 쪽의 의견도 억눌렀다. 대처는 외교 당국자들에게 독일 통일은 “현재 의제에 있지 않다”고 훈령했다. - <지정학의 포로들> 중에서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11564미테랑은 독일 통일이 멈출 수 없는 대세라고 인식했다. 그는 임박한 독일 통일의 조건을 강구하는 데 집중했다. 통일 독일을 유럽통합 틀 속에 가둬서 제어하자는 것이었다. 독일 통일 뒤 유럽연합이 단일통화 유로를 채택하며 유럽통합을 가속화한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 <지정학의 포로들> 중에서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11564
러시아 지정학의 딜레마소련은 2차대전 과정에서 점령한 동유럽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을 뿐이었다. 동유럽을 자신의 손에서 놓는다면, 서유럽 열강세력이 그 통로를 따라 러시아를 침략할 것으로 우려했다. 소련에게 동유럽은 자신들의 장악 여부에 따라 완충지대나 침략통로로 성격이 극명히 갈렸다. 소련에게 동유럽 국가들의 친소 위성국가화는 필연이었다. 하지만 이는 미국 등 서방에게 소련의 팽창에 대한 우려와 불안을 부추겼다. 서방의 대소련 봉쇄정책을 불렀다. 무엇보다도, 동유럽 국가 내에서 반소반공세력을 키웠다. 동유럽의 위성국가 자체가 소련 체제에 부담이 됐다. 이는 러시아 지정학의 영원한 딜레마였다. 러시아는 안보와 생존을 위해 영토 팽창을 해야 했으나, 이 팽창은 러시아에 저항하는 세력을 영내에서 키워 제국의 유지에 막대한 부담이 됐다. - < 지정학의 포로들, 정의길 지음 > 중에서
대한항공 항공기 격추소련은 대한항공 민간여객기를 미국의 정찰기로 오인해 격추시켰다. 앞서 미국 정찰기 RC-135기가 이 지역에 출현해 소련 영공을 침범하고는 소련의 대륙간탄도미사일 실험을 정찰한 바 있었다. 소련 전투기 SU-15는 대한항공기를 한 시간 전부터 추적하던 RC-135기로 오인했다. 전투기 조종사는 목표물을 ‘시각적으로’ 관측했다고 보고했고, 결국 격추까지 감행했다. - < 지정학의 포로들, 정의길 지음 > 중에서
러시아의 전체주의는 필연적이다?러시아의 영토 팽창은 외침을 막는 지형적 장벽과 전략적 종심을 확보하는 과정이었다. 영토 팽창은 외부세력의 침략을 무력화하는 전략적 종심을 제공했으나, 막대한 체제 유지 비용을 요구했다. 정복한 지역에서 이민족들을 단속하는 데도 비용이 들었고, 확장된 제국을 유지하는 비용도 증가됐다. 제국을 유지하기 위한 팽창이 오히려 제국에 부담을 주는 딜레마에 빠졌다. 차르 시대 이래 러시아는 제국의 성립과 유지에서 전체주의로 흐를 수밖에 없었다. 소련의 공산주의 체제 역시 그 일환이다. - < 지정학의 포로들, 정의길 지음 > 중에서
아프간 사태의 시작, 개혁정부와 보수 부족의 충돌보수적인 이슬람교도인 지방의 부족세력과 그 권력자들에게 인민민주당이 추진하는 과격한 마르크스주의 개혁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이슬람과 그 규율을 부정하는 신성모독과 불경이었다. 타라키 정권은 이슬람을 국교로 삼거나 사회의 지배적인 규율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슬람식 대부 제도를 폐지하고, 신부 지참금을 금지하고, 혼인의 자유를 선포했다. 특히 부족 원로와 이슬람 율사들이 통제하던 토지를 몰수했다. 전통적으로 자치를 유지하던 아프간의 지방 부족세력들은 격렬히 반발했다. 인민민주당 내에도 사회주의로의 점진적인 이행을 주장하는 반대파가 있었다. 안팎의 반대에 직면하자, 타라키 정권은 반대세력들을 제어하는 공포정치를 펼쳤다. 1979년에 접어들면서, 이슬람 성직자 등 약 1만 2,000명을 정치범으로 감옥에 가뒀다. 그리고 수용소의 벽 뒤에서 조직적인 처형이 자행됐다. - < 지정학의 포로들, 정의길 지음 >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