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화 하는 일본 - 동아시아 ‘문명의 충돌’ 1천년사
요나하 준 지음, 최종길 옮김 / 페이퍼로드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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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사회의 양면성
- 승자의 성장
- 패자의 몰락
- 폴라니의 19세기 초 영국 서술을 떠올리게 만든다

저는 학생들에게 "지금의 중국을 알고 싶으면 메이지 일본을 조사하라"고합니다(역으로 "메이지 일본을 모르겠으면 지금의 중국을 보라"고도 합니다).
해안지역을 중심으로 경이적인 경제발전의 활기가 전해지는 반면 도시 저변층의 비참한 실태도 종종 보도됩니다. 그렇지만 그 비참함에도 불구하고 농촌에 남아있기보다 유민공길을 선택한다는 기사를 볼 때 "결국 중국은 풍요롭게 될까, 가난한 채로 있을까, 중국인은 정말로 행복해지고 있는 것일까, 이전보다 불행해진 것일까. 전혀 알 수가 없다"는 인상을 가진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저 자신이 중국 연구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잘 알지 못합니다. - P138


그러나 메이지의 경쟁사회가 에도의 촌락사회와 비교하여 가지고 있던 양면성, 즉 객사의 위험성을 증가시킴과 동시에 입신출세의 영광도 열어주는 이런 종류의 무정부적이기까지 한 ‘자유‘의 양면성을 생각하면 "아마 지금의중국도 그와 같을 것이다"라고 납득합니다. - P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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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화 하는 일본 - 동아시아 ‘문명의 충돌’ 1천년사
요나하 준 지음, 최종길 옮김 / 페이퍼로드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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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유신과 재에도화 운동(=복고주의 또는 낭만주의 운동)

실제로 메이지유신은 그 직후부터 ‘에도시대로 되돌아가자‘는 반동에 직면합니다. 이것은 불만에 찬 사무라이들의 반란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최근 30년 사이에 축적된 일본근대사 연구에서는 이른바 ‘자유민권운동역시 메이지 정부의 자유경쟁 정책에 대한 불만과 부자유스러웠지만 안정된 사회였던 에도시대로의 회귀 요망(전문용어로는 모랄 이코노미)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 P134

말하자면 그들 봉기한 민중들이 싸운 것은 정치적인 권리나 신분의 평등을 요구한 근대 서양적인 ‘시민혁명‘이 아니었습니다. 유동성이 높은 경쟁 일변도의 사회에서 빈민봉기나 종교반란이라는 형태로 자주 반복된 근세중국풍의 ‘왕조 혁명‘이었던 것입니다.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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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하 준 지음, 최종길 옮김 / 페이퍼로드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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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화=서양화
- 일본의 때늦은 서양화
- 중국 조선의 서양화에 대한 낮은 열망 = 늦어진 서양화

다이라 씨 정권을 미나모토 씨가 쳐부수고,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고다이고 천황의 발목을 잡아 최종적으로는 에도시대라는 궁극적인 ‘반 중국화‘ 체제를 만들어낸 것으로 언젠가는 실행해야 할 ‘중국화‘의 시대를 1000년 가까이 지연시킨 만큼 일본인은 ‘서양화‘를 위해 사회체계를 변화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와 역사의 필연인 ‘중국화‘의 시기를 맞출 수 있었습니다.

그에 비해 중국이나 한국)은 그 옛날에 ‘중국화‘를 끝냈기 때문에 19세기가 되어도 왜 지금 서양화 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서양화의 매력이란 무엇인가요? 신분이 자유로운 것? 멋대로 장사를 할 수있는 것? 그런 것은 송나라 때 이미 달성했습니다(역으로 ‘남녀평등‘이나 ‘참정권의 평등‘은 이 시기의 서양에서도 거의 달성되지 않았으며 ‘왕권의 폐지‘
도 일부 나라에 한정됩니다).

혹은 의회제 민주주의라는 의미에서의 ‘선거‘는 분명히 중국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일본에서도 이권 보장이나 외모 중시의 투표로 당선자가결정된다고 비판받는 선거라는 제도가 그렇게나 매력적인 걸까요? 일반인이 아닌, 지성과 인덕을 겸비한 영재를 엄정하고 공평한 시험을 통해 정치가로 선발하는 과거 역시 일종의 ‘선거‘라고 한다면(나이토 고난은 실제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과 근대 서구형의 ‘선거‘를 비교했을 때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부족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 P130

일본인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중국화‘를 마침내 감행할 즈음에 발생한 거대한 변화에 휩쓸려 들어가 그때 ‘서양화‘도 함께 완수할 수 있었지만 중국인이나 한국인은 일찍이 ‘중국화‘를 달성한만큼 ‘서양화의 시점을 놓쳐버리는 모양새가 되었다‘는 것이, 동양 ·서양의 문제와는 또 별개로 한·중·일의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정말로 평등한 역사인식입니다(宮崎博史, 「日本史認識のパラダイム轉換のために」). -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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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하 준 지음, 최종길 옮김 / 페이퍼로드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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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무사=공무원
- 중국 조선의 시험에 따른 공무원 채용
- 일본의 신분으로 세습되는 공무원

인구비율로 보았을 때 막부 말기의 시점에서 성인 무사는 일본 전체 인구의 1%를 조금 상회하는 정도였지만 청나라 말의 관료는 중국 전체 인구의 0.001%라는 추계가 있습니다(渡部浩, 『近世日本) 근세의 무사란 것은 즉 다이묘 가마다 끌어안고 있는 지방공무원(어떤 경우에는 국가공무원)이기 때문에 이웃나라를 기준으로 생각하면 실로 100배에 이르는 ‘쓸모없는 공무원‘을 끌어안고 있었던 셈입니다.

더구나 과거시험이 있던 중국과 달리 일본의 무사는 세습이기 때문에 실력에 의해 등용된 자가 아니며, 나아가 무가사회 내부에서도 가격마다 신분차이가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는 ‘무원칙 승진‘이랄까 ‘태어나면서 보스‘ 밖에 존재하지 않습니다(예외적으로 발탁 등용이나 명문가에 양자로 들어가서 가격을 높여서 성공한 소수의 예가 있긴 합니다만). 이러한 의미에서 중국사에서 당나라까지의 귀족정치가 일본에서는 메이지 직전까지 계속되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무사들의 특권과 봉록(급여)을 없애는 ‘질록처분‘(1876)이란 이렇게 남아도는 무사들의 일시 해고정책이며, 그 후계를 과거 고등문관시험) 합격자로 채워갔기 때문에 마침내 메이지시대에 일본은 송나라를 따라잡은 것입니다. 

나아가 다이묘의 영지였던 ‘번‘을 폐지하고 새로 영역과 경계 등을 조정해 ‘현‘을 설치한 폐번치현 (1871)으로 다이묘를 실각시킨이후, 지역은 ‘대대손손 지역의 지배자‘가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중앙에서 파견되어 온 지사가 행정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일본도 ‘봉건제‘를 그만두고 중국풍의 ‘군현제‘로 변경한 것입니다(지사직을 지역마다의 선거로뽑는 현재의 제도는 전후의 민주화에 따른 것입니다).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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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의 출발
- 차남 이하의 낮은 지위
- 근세 도시의 기능
- 악당의 출현 지역

우선은 농가의 시선에서 생각해봅시다. 몇 번이나 이름을 이야기한 하야미 아키라의 학설 가운데 세계적으로 알려진 ‘근면혁명론‘이 있습니다.

앞에서 논한 것처럼 생산 증대로 거둔 분량이 자신에게 남는다면 당연히 농민들은 더욱 열심히 농사를 지어서 더욱 부유해지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에도시대를 통한 농촌 내의 변화를 살펴보면, 인구가 증가하고 있는데 소와 말의 수가 줄어든 경우가 있습니다. 즉 근세일본의 식량증산이나 경제발전은(예를 들어 소와 말처럼) 생산성이 높은 기술에 투자하여 달성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전에 소나 말을 이용한 것까지도 인간이 더욱 노력하여 일하는,‘투하 노동력‘의 증대에 의하여 달성된 것은 아닐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야미는 이 발견을 비교사적으로 부연하여 공장노동과 같은 제도적 혁신에 의한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고 효율적인 노동방식을 가능하게 하는 신기술을 속속 도입하는 투하자본량의 증가로 지탱된 근대 유럽의 산업혁명 Industrial Revolution 에 비유해, 근세 일본의 경제발전을 근면혁명Industrious Revolution 이라고 명명했습니다. - P108

삼남, 차남들은 은 재미가 없습니다. 살아있다고 한들 어차피 식객처럼 형님의 가사일돕기를 하고 형수나 조카(집안을 계승할 아들)에게 얼마간 멸시당하면서 먹여주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할 인생이기 때문에 장래에 대한 희망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에 꽃 한 번 피우고 죽어볼까라는 기분이 듭니다.

이러한 무리들을 워킹푸어로 몰아넣어 (즉, 죽여 ) 사회의 안정을 유지한것이 에도나 오사카라는 거대도시였습니다. 그런데 도시가 없었기 때문에불평분자의 억제가 불가능해지고 과잉인구가 일방적으로 체류하는 지역이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서일본. 따라서 유신의 첫발은 사츠마, 죠슈, 도사, 히젠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이 하야미 아키라의 해석입니다 -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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