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토우의 재발견
- 민족주의에 대한 새로운 해석. 자본주의 발흥에서 프로테스탄티즘을 대체하는 새로운 정신
- 군부 지도자에 대한 새로운 평가. ˝새로운 지도력은 지식인-상인-군인의 연합˝이 되어야 한다. 젊고 농촌 출신이 바람직하고 전통적인 지배계급이 아니어야 한다 등등. 군대조직은 저개발국가에서 특권적 지위에 있지 않은 가난한 농촌 출신의 능력있는 젊은이들이 지도적 지위로 가는 유일한 길.



저개발국가들이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이 식민지적인 경험으로 형성된 사회간접자본이며, 이것이 도약할 수 있는 조건을 형성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강력한 민족주의를 형성시켰다는 것 역시 로스토우가 지적하고 있는 저개발국 또는 제3세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외부의 침입이 민족주의 태동하였지만, 그것이 후진국 근대화의 힘을 추동할 수 있는 최고의 동력으로 작동할 수 있다고 파악하였다. 

식민지의 경험뿐만 아니라 피부색으로 인한 열등감‘으로 인한 민족주의가 만연하고 있다는 분석은 저개발지역을 체험하거나 분석한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인식이지만,
로스토우의 분석이 가지는 특징은 이러한 민족주의가 자본주의의 이윤 동기 못지않게 저개발국가에서 경제개발계획을 실행할 수 있는 동력이 된다는 점을 지적했다는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경제개발계획의 이론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것의 하나가 정부의 계획에 대한 국민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들고 있다. 즉, 국민적 통합성을 중시하는 것이다. 로스토우는 민족주의에서 유발되어 국민적 단합에 기반을 둔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민국가확립이 경제개발계획의 실행에서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특히 그의 경제성장 단계론 중에서 선행조건 충족의 단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민족주의는 자본주의적인 이윤동기에 못지않은 원동력을 만들어 낼 수 있으며, 국민적 통합성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동력을 경제개발계획으로 적극적으로 전환해야 한다. 이러한 민족주의의 이용은 다른 한편으로 민족주의를 이용하려고 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음모에 대한 대응이며, 민족주의가 적대화되지않도록 근대화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방안이었다. 
- P149

따라서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이 1950년대에 제3세계에 대하여 부정적 - 경제 개발의 수행을 통한 선진국화가 불가능하다는 것과 제3세계의 민족주의가 미국에 적대적인 성향으로 발전할 것 - 으로 평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비판하면서, 

오히려 부정적으로 평가되었던 민족주의가 제3세계를 적극적으로 세계자본주의 체제 내로 흡수할 수 있는 동력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즉, 제3세계의 민족주의는 이들 국가들이 쉽게 공산화될 수 없도록 하는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무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실제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했던 유고나 중국, 그리고 북한은 공산주의 혁명 이후 소련 중심의 세계 공산주의 체제에 반대하는 경향을 보였다. - P150

이러한 사회개혁에 대한 주장과 관련하여 눈에 띄는 것이 후진국 내의 지배세력을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즉, 전근대적인 생산관계와 연결되지 않은, 그리고 해당 지역에서 가장 근대화된 기구와 관련이 있는 계급이나 계층을 새로운 사회지배 엘리트로 등장시키는 사회개혁이 경제개발원조의 가장 중요한 조건의 하나로 제시되었다. 

이들 새로운 정치지도력은 젊고, 농촌 출신이 바람직하며, 이들은 전근대적인 경제관계에서 벗어나 있는 인물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지도력은 지식인-상인-군인의 연합이 되어야한다고 설정하였다. 그럴 때 이들이 전근대적인 생산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사회개혁을 수행하면서 근대적 산업화에 더욱 매진할 수 있는 조건들을 만들수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지도력의 창출에서 군대조직, 또는 군인이 차지하는 중요성이 특히 강조되었다. 실제로 당시 군대조직은 저개발국가에서 특권적 지위에 있지 않은 가난한 농촌 출신의 능력있는 젊은이들이 지도적 지위로 가는 유일한 길이었으며, 저개발국에서 군대는 기술적이고 행정적인 부분을 연마할 수 있는 많은 기회를 제공하고 있었다. 또한 로스토우는 1950년대를 통해 등장한 군부정권의 군사 엘리트들은 공산주의적인 성향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고있다는 점을 주목하였다. -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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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브라이트, 평화봉사단이 아주 오래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1961년에 시작된 프로그램이구나.


사회개혁을 위한 계획의 일환으로서 1950년대 미국은 교육 원조와 교환 프로그램 등을 통해 저개발지역에 긍정적인 미국관을 심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1960년대에 들어와 더욱 강화되었다. 특히 1961년의 ‘풀브라이트 헤이즈 Fulbright-Hays 법안‘ 의 성립으로 미국 정부의 문화적 노력이 하나의 법안으로 통합되었다. 이 법안으로 새로운 교환계획, 미국의 책과 정기간행물의 번역, 미문화원의 활동에 대한 지원, 국제학술대회에 대한 지원, 해외의 미국학에 대한 지원 등이 강화되었다.

 1961년 이후 미국은 저개발국에 대학생들로 구성된 평화봉사단 peace corps 을 파견하기 시작하였고, 한국에도 많은 평화봉사단원들이 파견되었다. 평화봉사단원은 개개인에 따라 다양한 성향을 보였지만, 평화봉사단의 파견은 저개발 사회의 국민들이 미국을 긍정적으로 인식하도록 만드는 것과 함께 이들의 생활의식의 개혁을 기도한 것이었다. - P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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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61년의 민족주의 발흥


한편, 4.19 혁명으로 인해 미 행정부가 받았던 또다른 충격은 한국에서 민족주의의 엄청난 고양이었다. 2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50년대 후반 미국 내에서 저개발지역 민족주의의 힘에 주목하기 시작했고, 한국에서 민족주의의 고양은 대한정책을 변화시킬 수 있는 중요한 동인이 되었다. 1959년의 콘론보고서는 한국 내부에서 사회주의적 경향의 고양을 통해 새로운 움직임이 대두되고 있음을 경고한 바 있다. 후술할 팔리 Farley 보고서를 비롯한 1961년 초반 이후에 나온 미국의 문서들에서 나타나는 민주당 정부의 위기에 대한 인식 역시 4.19 혁명 이후의 민족주의 고양에 대한 위기의식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 P250

미국은 이승만 정부 붕괴의 한 원인이 민족주의의 발양에 있다고 보았으며, 
민주당 정부 시기의 통일운동, 한미경제협정 반대운동 등 민족주의적인 흐름이 대한민국을 위협하는 주요한 흐름이며, 동시에 한국을 내부적인 위기로 끌고 갈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정면 정부의 등장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한 것은 5·16 쿠데타였다. 미국은5·16 쿠데타를 4.19 혁명에서 발현된 민족주의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였다. 쿠데타 세력의 민족주의적이고 폐쇄적인 요소는 민주당 정부 시절에 이룩된 한미 간의 공조에 균열이 가도록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경제개발을 위한 중요한 동인으로 작동하였다. 

즉, ‘사회주의적이고 미국에 협조적이지 못하다는 점과 함께 민족주의적‘이라는 인식은 미국의 대한정책에 부정적인 요인이 되는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 적극적으로 근대화를 이끌어 갈 수 있는 힘이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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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리의 변화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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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동경제위원회 아래 수출진흥분과위원회가 설립된 1959년부터 박정희정부의 1차계획 수립까지 수출 진흥의 주된 목적은 수입에 필요한 외환의 확보였으나, 계획의수정을 계기로 수출을 통해 공업 발전, 나아가 경제성장을 도모하는 대외지향적 전략이 출현하였다. 대외지향적 성장전략의 성립을 계기로 정책의 시장친화성(市場親和性)이 증대하였는데, 대표적인 시장친화적 정책으로 1964년의 환율 현실화와 1965년 예금금리 현실화를 들 수 있다. 후자는 앞서 언급하였다. 

제10장에서 언급하였듯이, 1950년대에는 외환의 공정환율을 시장가격보다 훨씬 낮게 책정하여 유엔군 대여금의 달러 상환액을 높이려는 동시에 수입대체산업에 원자재 등을 저렴하게 공급하고자 했다. 민주당정부는 환율을 현실화하면서 단일화하였는데, 박정희정부는 이승만 정부와 같은 입장에서 1963년 복수환율제를 회복하였다.  - P508

인플레이션의 격화 속에서 공정환율과 실세환율의 격차가 확대되자 수입과 외환 가수요가 증가하여 국제수지를 더욱 압박하였다.
수입은 폭리를 낳았고 수출 의욕은 저해되었다. 따라서 수출의 증대와 외환 사정의 개선을 위해서는 환율 현실화가 필수적이었다. 

외환이 고갈되자, 정부는 미국의 대외 안정을 도모하라는 권고를 수용하여 63년 12월 환율을 130원에서 180원으로 인상하고 641년 5월에는 다시 255원으로 인상하여 실세에 접근시킨 다음 품목별 · 용도별로 다르게 적용된 환율제를 단일화하였다. 64년 환율 현실화의 단행과 단일변동환율제의 채택으로 수입 대체 공업화로부터 수출 공업화로에 정책 접전하는 본격화되었다 - P508

IMF(국제통화기금)의 권고에 따라 인플레이션을 수반하지 않으면서 내자 동원을 증대하기 위한 방안으로서, 저평가된 금리를 시장가격에 맞추어 현실화하고자 예금금리를 1961년 50%, 65년 다시 76% 인상하여 저축의 확대를 도모하였다(부표 5). 

금리가 물가상승률보다 높아지자, 62년 국민소득의 0.8%에 불과하던 국민저축률이 63년 7.0%로 올라가고 1차 계획기인 1962~6년간 평균 6.1%에 달하였고, 2차계획기인 1967~71년간에는예상치인 11.6%를 초과하는 13.1%를 달성하였다. 특히, 1965~9년간 시중은행의 예금은연평균 72% 상승하였고 저축성 예금의 구성이 3~4할의 수준에서 6~7할의 수준으로 상승하였다. 

금리 현실화는 사금융을 제도금융권으로 흡수함으로써 금융발전에 이바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투자재원의 내부 조달도를 높임으로써 자력성장 기반을 구축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였다 금리 현실화 이후 대출금리도 인상되었기 때문에 기업은 금리가 상대적으로 낮은 외제를 시설 자금에 충당하고 금융기관의 대출을 주로 운전자금에 충당하였다 - P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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