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동경제위원회 아래 수출진흥분과위원회가 설립된 1959년부터 박정희정부의 1차계획 수립까지 수출 진흥의 주된 목적은 수입에 필요한 외환의 확보였으나, 계획의수정을 계기로 수출을 통해 공업 발전, 나아가 경제성장을 도모하는 대외지향적 전략이 출현하였다. 대외지향적 성장전략의 성립을 계기로 정책의 시장친화성(市場親和性)이 증대하였는데, 대표적인 시장친화적 정책으로 1964년의 환율 현실화와 1965년 예금금리 현실화를 들 수 있다. 후자는 앞서 언급하였다. 

제10장에서 언급하였듯이, 1950년대에는 외환의 공정환율을 시장가격보다 훨씬 낮게 책정하여 유엔군 대여금의 달러 상환액을 높이려는 동시에 수입대체산업에 원자재 등을 저렴하게 공급하고자 했다. 민주당정부는 환율을 현실화하면서 단일화하였는데, 박정희정부는 이승만 정부와 같은 입장에서 1963년 복수환율제를 회복하였다.  - P508

인플레이션의 격화 속에서 공정환율과 실세환율의 격차가 확대되자 수입과 외환 가수요가 증가하여 국제수지를 더욱 압박하였다.
수입은 폭리를 낳았고 수출 의욕은 저해되었다. 따라서 수출의 증대와 외환 사정의 개선을 위해서는 환율 현실화가 필수적이었다. 

외환이 고갈되자, 정부는 미국의 대외 안정을 도모하라는 권고를 수용하여 63년 12월 환율을 130원에서 180원으로 인상하고 641년 5월에는 다시 255원으로 인상하여 실세에 접근시킨 다음 품목별 · 용도별로 다르게 적용된 환율제를 단일화하였다. 64년 환율 현실화의 단행과 단일변동환율제의 채택으로 수입 대체 공업화로부터 수출 공업화로에 정책 접전하는 본격화되었다 - P508

IMF(국제통화기금)의 권고에 따라 인플레이션을 수반하지 않으면서 내자 동원을 증대하기 위한 방안으로서, 저평가된 금리를 시장가격에 맞추어 현실화하고자 예금금리를 1961년 50%, 65년 다시 76% 인상하여 저축의 확대를 도모하였다(부표 5). 

금리가 물가상승률보다 높아지자, 62년 국민소득의 0.8%에 불과하던 국민저축률이 63년 7.0%로 올라가고 1차 계획기인 1962~6년간 평균 6.1%에 달하였고, 2차계획기인 1967~71년간에는예상치인 11.6%를 초과하는 13.1%를 달성하였다. 특히, 1965~9년간 시중은행의 예금은연평균 72% 상승하였고 저축성 예금의 구성이 3~4할의 수준에서 6~7할의 수준으로 상승하였다. 

금리 현실화는 사금융을 제도금융권으로 흡수함으로써 금융발전에 이바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투자재원의 내부 조달도를 높임으로써 자력성장 기반을 구축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였다 금리 현실화 이후 대출금리도 인상되었기 때문에 기업은 금리가 상대적으로 낮은 외제를 시설 자금에 충당하고 금융기관의 대출을 주로 운전자금에 충당하였다 - P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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