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량원군, 현종과 대각국사 의천의 공통점은?

헌정왕후는 귀양 가는 왕욱을 집 앞에서 전송한 직후 문 앞 버드나무 가지를 붙잡고 대량원군을 출산했다. 그리고 출산 직후 헌정왕후는 사망한다. 성종은 사생아가 된 대량원군을 품에 안아 기른다.
이런 불행한 성장 과정에 있던 외조카였지만 천추태후에게는 걸림돌일 뿐이었다. 천추태후는 대량원군을 절로 보내 승려가 되게 했다. 고려시대에 왕자들이 승려가 되는 것은 잉여 권력을 처리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대량원군은 왕씨 성을 가진 유일한 왕자였다. 이미 유교적 정치 이념을 신봉하는 관료 세력은 대량원군을 다음 왕위 계승자로 옹립하고자 움직였다. - <하룻밤에 읽는 고려사 >, 최용범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3jKz9ha7bASLThg58

송으로 가는 험한 길을 택했던 승려는 문종의 넷째 아들이자 당시 왕위에 있던 선종의 동생인
의천義天(1055~1101)이다. - <하룻밤에 읽는 고려사 >, 최용범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L5ZY2UKWpDZRCWc19


(최충헌응) 왕자로서 승려가 된 소군 홍기, 홍추, 홍규 등 6명을 궐내에 있으면 정사에 간여한다고 왕에게 아뢰어 사찰로 돌아가게 했다. 또한 왕이 총애하는 승려 운미와 존도를 내쫓았다. 이들은 대부분이 조정 관료와 백성의 원성을 듣는 자들이었으므로 이전의 정적 제거와는 달리 정치적 명분도 있었다. - <하룻밤에 읽는 고려사 >, 최용범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3sXKWM3LiqHrqdV2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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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4-01-30 07: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젠 고려사도 좀 더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학과 비공개
- 출사를 목적으로 한 유가 집단은 공자부터.

구재 학당의 학생들은 처음에는 최시중 공도로 불리다 최충이 ‘문헌’이란 시호를 얻자 문헌공도文憲公徒라 불렸다. 문헌공도는 고려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켜 명문대가의 자제부터 시골 선비까지 앞다투어 찾아와 입학하려 했다. 그 결과 개경에는 문헌공도 외에도 11개 사학이 설치되어 이를 12도라 불렀다. 그중 최충의 문헌공도가 가장 융성한 것은 당연했다. 당시 과거를 주관하던 지공거는 합격한 급제자를 문하에 두어 일종의 파벌을 형성했는데, 이 사학 12도의 운영자 대부분이
지공거를 역임한 이들이었다. - <하룻밤에 읽는 고려사 >, 최용범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1e7gQ4j39aYsctRC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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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털 사이트들도 자꾸 알고리즘을 진화시킵니다. 그런 반복은 오히려 마케팅일 가능성이 많으니 피하게 만드는 새로운 알고리즘을 설정하게 되는 것이죠. 알고리즘은 포털 사이트의 최고 비밀이며, 일정한 주기로 바꿔야 하는 아주 중요한 보안 사항입니다. 이 알고리즘이 외부에 노출되면 갖가지 마케팅 툴들이 이에 맞춰서 세팅되기 때문에, 일반 유저들이 검색을 하면 상단에는 마케팅의 부산물들만 노출되는 결과가 나오게 되거든요. 그래서 큐레이션의 알고리즘을 감출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되면 ‘도대체 무슨 근거로, 누가, 왜 그렇게 큐레이션했나’에 대한 의심을 끊임없이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것이 포털 사이트들의 ‘음모론’, ‘조작론’이 끊임없이 제기되는 이유입니다. - <GPT 제너레이션>, 이시한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93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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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송나라는 1125년 북부에서 남부로 밀려난 후 상업이 본래 활발했던 남부의 영향을 받았고, 이전의 대다수 왕조보다 상업에 더욱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전 왕조들은 유교 전통에 따라 상인을 천시했다(〈지도 10.5〉). 북방의 경쟁자였던 만주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와 충돌하는 비용을 대기 위해 송나라는 상업에서 조세를 거둘 방안을 모색했다. 그 결과 외국 교역자들에게 새로운 항구를 개방하고 화폐 공급량을 늘려 외국과의 교역을 장려했다. 시장 활동이 경제의 구석구석까지 침투하자 일부 농민들도 전문화했고, 농법과 관개 기술이 개선되었다.

<빅 히스토리>, 데이비드 크리스천 외 2인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BsE734PxG2D96EHX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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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 무함마드가 상인이었기에 무슬림 세계는 다른 농경 문명보다 상업에 우호적이었고, 정부는 대개 거래를 지원하고 수익을 얻었다 - <빅 히스토리>, 데이비드 크리스천 외 2인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nCbQNtPWfdauVeLD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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