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 전쟁의 일본 정치에의 영향

"청일전쟁에서 이겼는데 러시아·독일·프랑스가 불만을 표출하자 일본은 중국에 랴오둥반도를 돌려주어야 했다. 이것은 일본이 전쟁에는 강해도 외교가 약했기 때문이다. 정부의 태도가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국민이 피를 흘려 얻은 것을 제멋대로 돌려주었다. 정부의 그런 결정은 국민에게 선거권이 충분히 있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또 "대일본제국헌법에 따르면, 선전과 강화의 권리는 내각 또는 국무대신의 보필을 받는 천황이 행사한다. 그래서 의회에서는 외교에 관한 논의를 별로 하지 않고, 외교에 관한 정부의 결정을 법률과 예산으로 막지도 못한다. 그러나 국민의 의견을 반영하는 수단은 의회밖에 없기 때문에 국민에게 널리 선거권을 갖도록 해서 정부에 압력을 행사하게 해야 한다"라고도생각한 것입니다. 

그렇게 삼국간섭에 대한 강한 불만 속에서 보통선거운동이 시작됐습니다. -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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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과 삼국간섭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시모노세키조약에 따라 청으로부터 요동반도 대만 펑후 제도 등을 할양 받기로 했다. 그런데 이때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하는 러시아 프랑스 독일이 일본에 요동반도 역류에 제동을 걸었다. 결국 삼국의 반대를 못이긴 일본엔 배상금을 추가로 받기로 하고 요동반도를 청에 반환했다. 삼국 간섭은 청일전쟁의 승리의 열광했던 일본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러시아에 대한 분노를 촉발했다. 이후 일본은 러시아를 겨냥해 군비확장을 진행했고 이 같은 일본의 움직임은 훗날 러일전쟁으로 이어진다. 1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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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언급했듯이, 일본은 파리강화회의에서 대단한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파리강화회의에서 채택된 베르사유강화조약의 제156조부터 제158조를 보면 "산둥의 권익은 일본의 것이 된다"라고 규정돼있습니다. 일본의 요구가 전부 반영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파리강화회의에서 일본의 외교가 실패했고 다른 연합국이 일본을 따돌렸다는 것은 상당히 주관적인 해석에 불과합니다. 객관적으로 당시의 일본은 권익을 챙겼습니다. - P265

하지만 때로는 정치·경제 문제보다 의식의 문제 정체성의 문제가 더 큰 상처를 남기기도 합니다. 일본이 파리강화회의에서 느낀 위기감은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자! 그럼 이제 앞에서 언급했던 3·1운동에 대해 다시 이야기해봅시다. 여러분은 세계사 시간에 다음과 같은 설명을 들어보지 않았나요?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 후에 탄생한 국제연맹에 의회의 반대로 참여하지 않았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파리강화회의 기간 중 윌슨 대통령은 미국에 돌아와 먼로주의 사고방식으로 가득한 의회를 향해 "이제부터 탄생하게 될 국제연맹은 의회가 경계할 만한 것이 아니다. 국제연맹은 결코 선전·강화의 권한 등 미국의 주권에 관련된 문제에 대해 미의회의 권한을 저해하려 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국제연맹의 필요성을 설득했습니다.

그러나 미국 의회는 미국이 유럽 제국주의 국가 간의 싸움에 이용당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윌슨의 설득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국제연맹과 보조를 맞추는 윌슨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미국 의회는 윌슨을 비판하기 위해 여론에 호소했습니다. 여기서 돌연 일본과 3·1운동이 등장합니다. 의회는 상당히 선동적으로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윌슨 대통령은 파리강화회의에서 독일이 베르사유강화조약을 받아들이도록 열심히 노력했다. 그러나 그 베르사유강화조약이라는 것은 중국을 희생시켜서 산둥반도에 대한 일본의 요구를 전부 받아들인 부당한 조약이다. - P266

일본은 산둥을 식민지로 지배할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식민 지배라는것은 한국의 3·1운동에서 나타났듯이 상당히 가혹한 것이다. 이처럼가혹한 식민 지배를 중국 본토에까지 시도하려는 일본과 윌슨은 타협했다. 일본을 베르사유강화조약의 조인국으로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대략 이런 주장이었습니다.

미국 의회의 이러한 비판을 듣고 일본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일본의 식민 지배가 가혹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단지 윌슨 대통령을 비판하기 위해 남의 나라인 일본을 비판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이상의 문제에 대해 미국 주재의 일본 해군 무관이 작성한보고서가 오늘날에도 남아 있습니다. 어쨌든 파리강화회의에서 일본은 큰 충격을 받았고, 이것은 감정의 상처가 돼, 깊고 무겁게 남았습니다. 1930년대 이후 그 상처는 다시 모습을 드러냅니다. -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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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1월 윌슨은 미국 의회에서 ‘14개조 평화원칙‘을 발표하며 전후 세계의 이상을 제시했습니다. ‘14개조평화원칙‘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단연 민족자결주의입니다. 그런데 윌슨이 민족자결을 이야기했을 때 염두에 두었던 지역은 상당히 제한된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지요.

윌슨이 염두에 둔 곳은 러시아가 독일과 강화조약(브레스트리토프스크조약)을 맺으며 양도했던 폴란드, 그리고 중립을 침해받은 벨기에, 그외에 루마니아와 세르비아 등이었습니다. 윌슨은 이들 지역에 민족자결이 인정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들 지역이 다시 전쟁의 불씨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영국이나 프랑스 등의 광대한 식민지는 민족자결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윌슨 자신도 ‘이 선언은 권리를 가진 정부의 정당한 요구‘를 무시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 P247

커다란 희망을 품은 지역 중 한 곳이 바로 일본 통치하의 한국이었습니다. 윌슨은 한국에 민족자결의 원칙이 적용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랜싱의 우려는 현실이 됐습니다. 한국에서 독립운동이일어난 것입니다. 1910년,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됐습니다. 그런데당시 한국에서는 윌슨의 의도를 확대 해석하며 독립에 대한 희망을 가졌습니다. - P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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