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 - 파르티아 - 로마

동서 실크로드의 길목을 장악한 파르티아는 유라시아 대상의 중간 기착지이자 거래소의 역할을 했으며 로마 제국으로 향하는 고가의 비단에 막대한 세금을 부과하여 수익을 올렸다. 파르티아는 중국으로부터 비단과 진주를 들여오고, 인도로부터는 철을 들여왔다. 그런 다음 중국과 인도에서 들여온 비단과 진주, 철 등을 로마로 수출하고, 중국에는 향신료, 향수, 과일, 질 좋은 피혁 등을 보내면서 동서 간 교역의 중간자로서 번영을 만끽했다 - <인류 본사>, 이희수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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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타이트, 카데시

히타이트의 정복활동은 기원전 1300년경 남으로 이집트 국경까지 뻗쳤고 기원전 1274년에 결국 오늘날 시리아의 카데시(Kadesh)에서 이집트와 충돌했다. 이를 ‘카데시 전투(Battle of Kadesh)’라고 하는데, 이후 하투실리 3세(HattuŞili III, 재위 기원전 1267~기원전 1237)의 딸과 이집트의 람세스 2세가 결혼을 하면서 두 나라는 공식적으로 전쟁 대신 평화를 택했다. - <인류 본사>, 이희수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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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소포타미아 대 이집트

파라오가 태양신의 아들로서 자신을 신과 동일시하던 이집트 문명과는 달리, 메소포타미아의 왕은 철저히 신의 대리를 자처했다. - <인류 본사>, 이희수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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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방된 지리적 특성상 빈번한 정치체제의 교체와 상시적으로 노출된 생존의 위협으로 메소포타미아 지역 사람들은 임기응변적인 태도와 실리적 성향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이는 파라오를 중심으로 영생과 내세의 삶을 강조하던 이집트와 달리 현세를 중시하는 종교관이 발달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 <인류 본사>, 이희수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18dPRy5fWnQUKpy2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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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부카드네자르 와 키루스2세

신바빌로니아는 나보폴라사르의 아들 네부카드네자르 2세(Nebuchadnezzar II, 재위 기원전 605~기원전 562) 때 전성기를 맞이했다 - <인류 본사>, 이희수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5dPFvuJ6Z22A6Atd7

무엇보다 기원전 587년 팔레스타인 지역을 다스리던 유다 왕국(Kingdom of Judah, 기원전 930~기원전 587)의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유대인들을 바빌론으로 끌고 와 노역시킨 왕으로 유명하다. 유대인들이 바빌론에 잡혀있던 이 시기(기원전 587~기원전 538)를 ‘바빌론 유수(Babylonian captivity)’라고 한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 때 수도 바빌론은 옛 명성을 되찾았고 교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 <인류 본사>, 이희수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hbLbaGJ918avAzU88

그러나 폭압과 차별을 앞세운 신바빌로니아의 운명은 오래가지 못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사망하고 단 20여 년 만인 기원전 539년에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한 키루스 2세에 의해 정복되고 말았다 - <인류 본사>, 이희수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d1pjXz3hG3jESWzA8


키루스 2세의 바빌론 함락으로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 치하에 들어갔고, 마르두크 신전이나 공중정원 같은 신바빌로니아 문명의 정수들도 파괴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다만 키루스 2세는 50여 년 전에 바빌론으로 끌려와 노역하던 유대인들의 귀환을 허용함으로써 성경이나 유럽 역사서에 성인으로 기록되는 영광을 얻었다 - <인류 본사>, 이희수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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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구르는 중국이 아니다. 1949년 이후 중국 공산당이 강제 점령하여 중국 땅에 편입시킨 뒤 지금껏 지배하고 있다. 중국은 위구르 지역을 새롭게 빼앗은 땅이라 해서 신장(新彊)이라 부른다. 그러나 위구르 사람들은 자신의 땅을 투르키스탄으로 부른다. ‘튀르크 인들의 땅’이라는 의미다. - <이희수 교수의 이슬람>, 이희수 지음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WSJqy3U36tUc1m1i9

그러나 위구르 인들 대부분은 새로운 세상을 찾아 서쪽으로 이동하여 후일 셀주크 터키와 오스만 터키 제국을 건설한다. 중앙아시아 서쪽 옛 땅에 뿌리를 내린 위구르 사람들이 지금의 동투르키스탄(신장)에 살고 있는 위구르 인들이다. 동투르키스탄의 위구르 인들은 20세기까지도 엄연한 독립 국가를 이루었다.
1759년부터 동투르키스탄 일대를 장악한 청나라와 전쟁을 벌여 승리한 야쿱 베이는 1864년에 카슈가르 국가를 건국했다. 카슈가르 국가는 오스만 제국은 물론, 러시아와 영국을 상대로 화려한 외교를 펼치면서 중앙아시아의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카슈가르의 운명은 얼마 가지 못했다. 러시아의 남하 위협에 영국이 청나라 편을 들어주면서 카슈가르는 다시 중국의 땅이 되었다. 1844년 중국은 이 지역을 ‘튀르크 인들의 땅’인 투르키스탄이 아니라 ‘새로운 강역’인 신장(新彊)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 <이희수 교수의 이슬람>, 이희수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4197375

중국에 대한 저항을 계속한 위구르 인들은 1933년과 1944년 두 차례에 걸쳐 독립을 쟁취하는 데 성공했다. 1933~1934년 사이에 동투르키스탄 이슬람 공화국, 1944~1949년 사이에는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이 각각 건설되었다. 그렇지만 거대한 중국의 집요한 공격에 결국 위구르 인들의 저항은 한계에 부닥쳤다. 1949년 중국 공산당이 개입된 것으로 보이는 비행기 폭파 테러로 대통령을 포함한 동투르키스탄 정부 지도자들이 한꺼번에 희생되면서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은 중국에 귀속되고 말았다.


동시에 투르키스탄 서쪽은 일찌감치 러시아의 영토가 되면서 수천 년간 그 땅의 주인으로 살아온 튀르크 민족들은 뿔뿔이 흩어져 강대국의 분열과 동화 정책 속에 암흑의 시기를 살아야 했다.


1990년 구소련이 붕괴되자 1991년을 기점으로 서투르키스탄의 튀르크 족들은 각각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으로 독립을 쟁취했지만,

중국 치하의 위구르 인들만은 55개 소수 민족의 하나로 아직도 고통 속에 살고 있다. - <이희수 교수의 이슬람>, 이희수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4197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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