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 검색의 원리

궁극적으로 여기에서 알고리즘이 어떻게 결과를 계산하는지는부차적인 문제고, 정말 중요한 혁신은 페이지와 브린이 인간의 통찰과지식을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냈다는 점이다. 이 경우에는 어떤페이지가 관련성 높은 정보를 담고 있는지에 대한 사람들의 주관적인평가에 인간의 통찰과 지식이 담겨 있었고, 이것이 기계의 핵심 업무(검색 결과를 관련성 높은 순서대로 보여주는 것)를 향상시키는 데 사용되었다. 브린과 페이지는 1998년에 펴낸 "대규모 하이퍼텍스트 웹 검색엔진의 해부 The Anatomy of a large-Scale Hypertextual Web Search Engine"라는제목의 논문을 다음과 같이 시작했다. "이 논문에서 우리는 구글이라는 것을 선보이려 하는데, 이것은 하이퍼텍스트 안에 있는 구조를 주 - P520

검색된 페이지들 중에서 더 많은 링크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 (더 많은 클릭을 받는 것이 무엇인지) 를 토대로 우선순위를 매긴다는 것이 그들의 아이디어였다. ‘신석기‘라는 검색 단어에 대해 어떤 페이지들이 제시되어야 하는지를 임의적인 규칙을 적용해 정하기보다 얼마나 많은 링크가 그 페이지로 들어오게끔 물려 있는지를 (더 많은 클릭을 받는 것이 무엇인지를) 토대로 순위를 매긴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더 인기 있는 페이지가 더 높은 순위에 랭킹될 것이다. 

하지만 왜 여기에서 멈추어야 하는가? 만약 어떤 페이지가 우선순위가 높은 또 다른 페이지로부터 들어오는 링크를 가지고 있다면 그 페이지의 관련성에 대해 더 좋은 지표가 될 것이다. 

이 아이디어를 담기 위해 브린과 페이지는 재귀적인 알고리즘을 만들었다. 모든 페이지가 순위를 가지고 있는데, 이 순위는 어느 페이지가 순위가 높은 다른 페이지들로부터 유입 링크가 많은지에 따라 결정된다("재귀적recursive"이라는 말은 각 페이지의 순위가 다른 모든 페이지의 순위에 달려 있다는 의미다.
수백만 개의 웹사이트가 있으므로 이를 계산하는 것은 사소한 일이아니었지만 1990년이면 이미 충분히 가능했다. - P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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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균의 이슈 한국사 - 둘만 모여도 의견이 갈리는 현대사 쟁점
박태균 지음 / 창비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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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성의 세가지 구성요소
- 네이션빌딩, 산업화 그리고 민주화
- 한번에 끝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정통성은 약효를 잃게 마련입니다.
개혁보다는 기득권의 부정부패가 기승을 부리게 되니까요. 그 결과 왕조교체가 일어납니다.
현대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건국과 산업화 그리고 민주화가 서로 상호작용을 하면서 정통성이 형성됩니다. 대한민국의 역사가 그런과정을 잘 보여주죠.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상호작용이 삐끗하기 시작하면 그동안 쌓아놓았던 정통성이 조금씩 침식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건국‘의 과정에서 쌓아왔던 네이션빌딩의 과정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더이상 대한민국이 나의 나라가 아닌 것이죠. 그렇게 되면 정통성에 문제가 생깁니다. 그렇기 때문에어느 국가든 국가 유지를 위해서는 민주화와 산업화의 과정이 서로 결합되는 과정에서 네이션빌딩을 계속 해나가야 합니다.
최근에 세월호 사건이 있지 않았습니까? 이런 사건들 역시 네이션빌딩에 문제를 일으킵니다. 지금도 사고 직후 어느 부모님의 인터뷰가 기억납니다. "저는 이제 더이상 대한민국 국민이 아닙니다." 국가가 자신들을 구해주지 못했죠.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구성원들은 국가 성원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네이션빌딩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 P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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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균의 이슈 한국사 - 둘만 모여도 의견이 갈리는 현대사 쟁점
박태균 지음 / 창비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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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박정희 대통령의 성향을 평가하는 것은 절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분명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을 하나의 단어나 하나의 성격으로 규정하려는 것 자체가 기본적으로 몰역사적입니다. 현재 모든 사건과 인물에 대한 평가는 지나치게 평가에만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이 사건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에만 집중되어 있다보니 그 사건이나 인물을 역사적 · 객관적으로 평가하려는 노력들이 줄어들었습니다. 그 원인은 역사가 자꾸 정치화되고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평가를 요구하게 되니까 역사를 역사적으로 있었던 사실 그 자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평가를 중심에 두고 보게 됩니다. 당연히 객관적인 평가는 어려워집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시기에 따라 다르게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시기마다 박정희 대통령의 생각과 정책도 바뀌지만 시대적 상황도 바뀌기 때문입니다. 

쿠데타 직후의 박정희 대통령이 개혁적 성향의 지도자였다면, 1960년대 중반 이후는 경제성장의 리더인 동시에 사회적통제를 강화해나가는 지도자였고, 1970년대 초반 이후에는 사회·경제적 문제를 민주주의적 원칙이 아닌 전체주의적 철권통치로 이끌어갔던 지도자였습니다. - P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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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균의 이슈 한국사 - 둘만 모여도 의견이 갈리는 현대사 쟁점
박태균 지음 / 창비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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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통령은 한국은행과 한국개발연구원 그리고 대통령의 경제정책을 자문하는 경제과학심의회의 등에 지시합니다. 경제위기를 극복할 방안을 만들라는거죠 그래서 이 기구들이 논의를 합니다. 그때 나왔던 얘기들이 안정화 대책입니다. 안정화 대책의 핵심 중 하나는 정부의 간섭을 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주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시장원리대로 가자는것입니다. 두 번째는 정부의 보조금 등을 줄이면서 시장을 개방하라는것입니다. 왜냐하면 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는 것은 공급이 부족하다는것이고, 공급을 늘리려면 국내 생산을 늘려야 합니다. 그런데 국내 생산을 늘리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공급을 늘리지 못하는 상황에서 해외 수입을 늘리면 공급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냐는 논리였습니다. 이것은 또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이기도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안정화 대책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안정화 대책은 1978년 말부터 1979년 초까지 논쟁이 됩니다. 특히 이 시기는 정치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 P234

1980년의 광주와 관련해서 최근 새로운 주장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미국이 1980년 시민이 아닌 신군부의 손을 들어준 것은 경제적인 문제 때문이었다는 주장이죠. 당시 미국은 북한의 동향이 심상치 않은 상황에서 전국적으로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가 커질 경우 북한이 오관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미 8군 사령관 위컴John A. Wickham. Jr. 의 주장입니다. 하지만 하지만 광주항쟁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한 카치아피카스 George Katsiaficas는 정치적이거나 안보적인 요인보다 경제적 요인이 크다고 주장합니다 - P237

즉 미국정부는 시장 개방과 핵개발 포기를 포함한 많은 요구를 했지만 박정희 정부가 이것을 수용하지 않다가 박정희 사후 신군부가 모든 요구를 수용하기로 하자 시민이 아닌 군사독재를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신군부가 집권한 이후 핵개발은 중지되었고 한국정부는 안정화 대책을 채택했으며 신한은행과 한미은행 같은 재일교포 자본과 미국 자본이 본격적으로 한국에 상륙하게 됩니다. 모든 금융기관이 정부에 의해 장악되어 있던 박정희 시대와는 다른 양상이 나타나는 거죠.

미국정부는 광주민주화운동 직전에 한국의 경제성장에 주목하면서 한국이 시장을 개방할 가능성을 타진했습니다. 그리고 광주민주화운동 직후에 뱅크오브아메리카Bank of America, 쓰리엠3M 같은 기업의 고위 관계자들이 한국을 방문하여 시장 개방을 타진하기도 했습니다. - P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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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균의 이슈 한국사 - 둘만 모여도 의견이 갈리는 현대사 쟁점
박태균 지음 / 창비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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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 정치 회담) 두번째 회의에서 베트남 문제를 다루면서 베트남을 분단하는 안이 나왔습니다. 남쪽은 자유시장체제, 북쪽은 공산주의체제로 해서 17도선을 중심으로 남북을 가르게 되죠.

그렇게 분단이 되었지만 제네바에서 열강들과 남북 베트남은 분단 후 2년 내에 통일을 위한 총선거를 치르도록 결정하였습니다. 그런데 2넌 후 미국이 지원하는 남베트남 정부가 이 결정을 거부했습니다. 남북총선거 대신 남쪽에서만 선거를 실시했습니다. 그것도 매우 심각한 부정선거였습니다. 

그래서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내전으로서의 게릴라 전쟁이 시작됩니다. 부패하고 외세에 의존하는 남베트남 정부에 반대하는 남베트남 사람들의 투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1956년부터 시작된 이 전쟁을, 1954년까지 계속된 독립전쟁에 이은 제2차 베트남전쟁이라고합니다. 이러한 상황을 본다면 북한의 침략에 의해 시작된 한국전쟁과는 자못 그 성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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