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균의 이슈 한국사 - 둘만 모여도 의견이 갈리는 현대사 쟁점
박태균 지음 / 창비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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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박정희 대통령의 성향을 평가하는 것은 절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분명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을 하나의 단어나 하나의 성격으로 규정하려는 것 자체가 기본적으로 몰역사적입니다. 현재 모든 사건과 인물에 대한 평가는 지나치게 평가에만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이 사건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에만 집중되어 있다보니 그 사건이나 인물을 역사적 · 객관적으로 평가하려는 노력들이 줄어들었습니다. 그 원인은 역사가 자꾸 정치화되고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평가를 요구하게 되니까 역사를 역사적으로 있었던 사실 그 자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평가를 중심에 두고 보게 됩니다. 당연히 객관적인 평가는 어려워집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시기에 따라 다르게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시기마다 박정희 대통령의 생각과 정책도 바뀌지만 시대적 상황도 바뀌기 때문입니다. 

쿠데타 직후의 박정희 대통령이 개혁적 성향의 지도자였다면, 1960년대 중반 이후는 경제성장의 리더인 동시에 사회적통제를 강화해나가는 지도자였고, 1970년대 초반 이후에는 사회·경제적 문제를 민주주의적 원칙이 아닌 전체주의적 철권통치로 이끌어갔던 지도자였습니다. - P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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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균 지음 / 창비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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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통령은 한국은행과 한국개발연구원 그리고 대통령의 경제정책을 자문하는 경제과학심의회의 등에 지시합니다. 경제위기를 극복할 방안을 만들라는거죠 그래서 이 기구들이 논의를 합니다. 그때 나왔던 얘기들이 안정화 대책입니다. 안정화 대책의 핵심 중 하나는 정부의 간섭을 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주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시장원리대로 가자는것입니다. 두 번째는 정부의 보조금 등을 줄이면서 시장을 개방하라는것입니다. 왜냐하면 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는 것은 공급이 부족하다는것이고, 공급을 늘리려면 국내 생산을 늘려야 합니다. 그런데 국내 생산을 늘리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공급을 늘리지 못하는 상황에서 해외 수입을 늘리면 공급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냐는 논리였습니다. 이것은 또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이기도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안정화 대책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안정화 대책은 1978년 말부터 1979년 초까지 논쟁이 됩니다. 특히 이 시기는 정치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 P234

1980년의 광주와 관련해서 최근 새로운 주장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미국이 1980년 시민이 아닌 신군부의 손을 들어준 것은 경제적인 문제 때문이었다는 주장이죠. 당시 미국은 북한의 동향이 심상치 않은 상황에서 전국적으로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가 커질 경우 북한이 오관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미 8군 사령관 위컴John A. Wickham. Jr. 의 주장입니다. 하지만 하지만 광주항쟁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한 카치아피카스 George Katsiaficas는 정치적이거나 안보적인 요인보다 경제적 요인이 크다고 주장합니다 - P237

즉 미국정부는 시장 개방과 핵개발 포기를 포함한 많은 요구를 했지만 박정희 정부가 이것을 수용하지 않다가 박정희 사후 신군부가 모든 요구를 수용하기로 하자 시민이 아닌 군사독재를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신군부가 집권한 이후 핵개발은 중지되었고 한국정부는 안정화 대책을 채택했으며 신한은행과 한미은행 같은 재일교포 자본과 미국 자본이 본격적으로 한국에 상륙하게 됩니다. 모든 금융기관이 정부에 의해 장악되어 있던 박정희 시대와는 다른 양상이 나타나는 거죠.

미국정부는 광주민주화운동 직전에 한국의 경제성장에 주목하면서 한국이 시장을 개방할 가능성을 타진했습니다. 그리고 광주민주화운동 직후에 뱅크오브아메리카Bank of America, 쓰리엠3M 같은 기업의 고위 관계자들이 한국을 방문하여 시장 개방을 타진하기도 했습니다. - P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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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균 지음 / 창비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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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 정치 회담) 두번째 회의에서 베트남 문제를 다루면서 베트남을 분단하는 안이 나왔습니다. 남쪽은 자유시장체제, 북쪽은 공산주의체제로 해서 17도선을 중심으로 남북을 가르게 되죠.

그렇게 분단이 되었지만 제네바에서 열강들과 남북 베트남은 분단 후 2년 내에 통일을 위한 총선거를 치르도록 결정하였습니다. 그런데 2넌 후 미국이 지원하는 남베트남 정부가 이 결정을 거부했습니다. 남북총선거 대신 남쪽에서만 선거를 실시했습니다. 그것도 매우 심각한 부정선거였습니다. 

그래서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내전으로서의 게릴라 전쟁이 시작됩니다. 부패하고 외세에 의존하는 남베트남 정부에 반대하는 남베트남 사람들의 투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1956년부터 시작된 이 전쟁을, 1954년까지 계속된 독립전쟁에 이은 제2차 베트남전쟁이라고합니다. 이러한 상황을 본다면 북한의 침략에 의해 시작된 한국전쟁과는 자못 그 성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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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균 지음 / 창비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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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LL을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들

그런데 이 귀중한 기본합의서를 두고 대한민국은 국회의 동의를 거쳐 대통령이 비준하는 절차를 밟지 않았다. 1992년 2월17일 기본합의서에 노태우 대통령이 서명하고 국무총리와 모든 국무위원이 부서해 대통령령으로 관보에 싣는 걸로 공식 절차를 마무리했다. 결과적으로 기본합의서에 법적 구속력을 부여하지 않은 것이다. 이는 북쪽이 조선노동당 중앙위 6기19차 전원회의(1991년 12월24일)와 중앙인민위원회·최고인민회의상설회의 연합회의(1991년 12월26일)를 거쳐 김일성 주석의 비준을 마친 사실과 극적으로 대비된다.

대한민국이 남북 정상회담 합의(6·15 공동선언, 10·4 정상선언, 4·27 판문점선언, 9·19 평양공동선언)를 국회 동의를 거쳐 비준하지 않는(또는 ‘못하는’) ‘악습’의 선례다. 정권교체 때마다 대북정책의 승계·단절을 둘러싼 논란과 ‘남남갈등’ 격화의 불쏘시개 구실을 하는 중대한 ‘입법 미비’ 상황의 지속이다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25777.html#cb

NLL을 누가 그었든 간에 북한 측에서는 그 선을 승인한 적이 없을니다. 북한은 1970년대 초반까지 아무 말이 없었고 NLL은 자연스레 바다 위의 군사분계선이 되었던 거죠 그런데 1970년대 초부터 북한이 갑자기 이전을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NLL이 문제가 되었죠 사실 1970년대 초부터 북한이 NLL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는지는 지금도 의문입니다. 1900년대 말부터 계속퀸 안보위기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1972년 이후 남북관계가 악화되었기 때문인지 그 이유는 분명치 않습니다. 아니면 북한의 해군이 어느정도 군사력을 갖추는 것이 1970년대 초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한편 1991년에 NLL에 대한 합의가 있긴 했습니다. NLL을 직접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1991년 노태우 정부 시절에 이뤄진 남북기본합의서에그와 관련된 조항이 있습니다. 제11조에 보면 남과 북의 불가침 경제선과 구역은 1953년 7월 27일자 군사 정전에 관한 협정에 규정된 군사분계선과 지금까지 쌍방이 관찰하여온 구역으로 한다."라는 규정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지금까지 쌍방이 관찰하여온 구역‘에는 NLL도 포함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남북기본합의서가 우리 국회에서 통과되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즉 무효가 된 것이죠 사실 지금도 북한과 NLL 문제로 다툼 때는 남북기본합의서 이야기를 하면 됩니다. 북한 쪽에서도 인정한 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게 남쪽에서는 유효하지 않기 ㄷ대문에 사실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 P162

2007년의 10.4 공동선언에도 NLL 관련 부분이 있습니다. 그때 남북한은 서해에 평화구역과 공동어로구역을 설치하기로 합의했습니다. 공동어로구역을 보면 NLL 주변으로 합의되어 있습니다. 곧 북한 쪽에서 NLL을 인정했다고 보면 되는 거죠. 그런데 이명박 정부가 10.4 공동선인을 무효화시켰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실 1991년의 남북기본합의서와 2007년의 10.4 공동선언을 다시 살려낸다면 NLL이 더이상 문제될 이유가 없습니다.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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