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의 의심

헝가리에서 독일군이 예상 밖의 끈질긴 저항을 하는 통에 소련군은 오스트리아 빈으로 향하는 진격을 늦춰야 했다. 소련이 보기에 더 걱정스러운 부분은 양 전선 사이의 사상자 숫자 차이였다. 보통 소련군은 하루에 독일군 800명을 죽였지만, 서부전선에서는 독일군 전사자가 60명만 나왔다. 독일군 약 2500명이 동부전선에서 매일같이 “실종”된 반면, 서부전선에서는 그 10분의 1만 실종됐다. 일리야 예렌부르크의 경멸스러운 표현에 의하면 독일군은 “미친듯이 집요하게” 미군에 항복하려고 한 반면, 러시아인들에게는 최후의 순간까지 저항을 계속했다.7

1945 중에서


독일군이 미군의 패튼 장군과 영국군의 몽고메리 장군에게 무더기로 항복하는 것은 어떤 뒷거래의 증거일지도 몰랐다. 서방연합군은 나치에 더 관대하게 대한 대가로 원래 예정보다 더 동쪽에서 소련군을 만나게 될지도 몰랐다. 만약 서방연합국이 히틀러를 적대시하는 나치 장군들과 동맹을 맺는다면 소련을 적으로 돌릴지도 몰랐다. 스탈린 자신이 1939년 히틀러의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은 사실은 그의 의심만 부추겼다. 스탈린은 다른 정치인들도 자기만큼이나 냉소적이리라고 단정했다

1945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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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 정국의 요동과 상류층


미하이 국왕은 루마니아의 “미니 총통”이던 독재자 이온 안토네스쿠를 축출한 1944년 8월 23일의 쿠데타를 조직한 당사자이기도 했다. 이 호헨촐레른 가문의 왕족은 나치당이 지원하는 안토네스쿠 일파를 축출하기 위해 루마니아에서 가장 잘 조직된 저항조직인 공산당 지하세력에 의존해야 했다. 소련군이 저항 없이 루마니아에 입성하자 위스너는 소련의 점령을 우려하는 친서방 정치인들의 입지를 높여주려 했다.

1945 중에서


러시아인들을 두려워하는 루마니아 상류층은 미국인 후원자를 찾느라 분주했다. 이들은 거의 공짜나 다름없이, 그저 미국의 외교적 보호를 받는다는 뜻으로 성조기가 장식된 플래카드를 내거는 조건만으로도 미국인들에게 저택을 빌려줬다. 자가용이 러시아인의 손에 넘어가느니 차라리 미국 외교관에게 무기한 빌려주기도 했다.

1945 중에서

“도시의 모든 게 잠잠했다. 몇몇 루마니아 상류층과 이야기해보니 대부분 예상보다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지금이 좌파 이념 쪽으로 서서히 바뀌는 시대이고, 새로운 시대에 큰 탈 없이 적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28

이 상류층 사람들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과 이후의 의회민주주의 시대에도, 로맨스와 음모로 가득한, 수많은 불륜과 화려한 군복으로 유명한 카롤 2세의 왕정 독재 시대에도 잘 나갔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파시스트 철위대(1927년 루마니아에서 시작된 민족주의, 반공주의, 반유대주의 성격의 정치 운동과 정당을 가리키는 이름-옮긴이) 세력의 통치에 적응했고, 1944년 가을 소련군의 등장에도 적응했다. 이들은 또 다른 정부의 변화도 버텨낼 수 있다고 믿었다.

1945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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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이 전형적인 서구 정치인들과 별 차이가 없다는 루스벨트의 전제는 근본적으로 잘못됐다. ‘영도자’는 조지 워싱턴보다는 정복자 티무르나 이반 뇌제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스탈린은 대중여론에 반응하지 않았다. 스탈린에게는 미국식 “정치적 다원주의”나 “헌법상의 견제와 균형 원칙” 따위는 무의미했다. 스탈린은 러시아 차르의 전통적 방식으로 나라를 통치했다. 비밀주의와 잔인한 권력, 국가권력의 집중이 그것이다. 스탈린이 선호하는 차르는 서구화주의자인 표트르 대제 같은 인물이 아니었다. 사석에서 스승이라고 표현한 이반 뇌제 같은 민족주의자였다.41 전쟁 초반에 스탈린은 영화감독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에게 이 15세기 전제군주에 대한 영화를 만들게 하면서 주인공이 외부의 적을 물리치고 내부의 불만을 제압하는 데 초점을 맞출 것을 강조하게 했다. 이반은 비밀경찰 오프리치니나에 의존해 강대한 국가를 건설하면서 골치 아픈 귀족계층을 박살내는 절대군주로 묘사됐다.

1945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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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장기적인 정치 문제였다. 즉 어느 나라 군대가 어느 지역을 점령하고, 유럽 국경은 어떻게 되며, 누가 어디를 통제하느냐가 중요했다. 스탈린은 서방연합국이 사상자가 너무 많이 발생한다는 이유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2년이나 늦춘 걸 강하게 비판했다. 1942년 8월 처칠은 모스크바를 방문한 자리에서 영불 해협을 건너는 상륙작전 시 영국이 치를 대규모 인명손실을 거론했다. 스탈린은 소련군은 매일같이 1만 명을 잃는다면서 비꼬듯이 말했다.

“위험 부담 없이 전쟁을 치를 순 없죠.”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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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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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짧은 소련사 - 러시아혁명부터 페레스트로이카까지, 순식간에 사라진 사회주의 실험의 역사적 현장
실라 피츠패트릭 지음, 안종희 옮김, 허승철 감수 / 롤러코스터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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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고급문화의 기원, 발전 그리고 몰락

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 1930년대는 놀랍고 흥분되는 성장의 시기였다. 희망에 찬 모험(‘자연을 정복하고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해’ 외딴 지역으로 떠났다)과 보잘것없는 삶을 개선하려는 집단적 목표의식이 있었다. 이 목적의식과 보잘것없는 삶에 대한 거부는 문학과 예술에 반영되었다. 작가들은 ‘인간 영혼의 엔지니어’라고 불렸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예술 이론으로 권장됐다. 이것은 흔히 지저분하고 혼란스러운 현재에 밝게 빛나는 미래 모습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의미했다. 방법론적으로는 대중들이 쉽게 인식하는 전통적 형식을 이용하고 전위적 기벽을 피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창의적인 예술가와 일반적인 지식인에게 문화혁명 이후의 새로운 기준은 장단점이 있었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방법에 관한 경고성 지침은 단점이 됐지만, 글과 그림에 대한 보수가 관대해지고 혁명 이후 잘 알려지지 않은 특권과 사회적 지위가 주어진 것은 장점이었다. 1930년대 중반, 이것은 채찍이기보다는 당근처럼 보였다. 스탈린은 고급문화와 고등교육의 개선을 통해 개인적인 위신을 세웠고 이것은 소련 말기까지 소련의 특징으로 남았다. - <아주 짧은 소련사>, 실라 피츠패트릭 저/안종희 역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Fr9FfQSoW9C5ARQa7

이 모든 혼란을 거친 후 우리의 이야기가 시작된 브레즈네프 시대의 소련이 도래했다. 당시의 소련은 복지국가였고, 비교적 가난했지만 상당히 평등했다. 모든 사람이 교육받고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전쟁 전 시기에 있었던 상향(또는 하향) 이동의 큰 기회는 사라졌다. 고급문화가 대중에게 보급되었다. - <아주 짧은 소련사>, 실라 피츠패트릭 저/안종희 역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KqeS7guSikojbxRu7

지식인들이 특히 심한 타격을 받았다. 경제적으로 가난해졌을 뿐만 아니라 ‘두꺼운’ 잡지와 같이 삶을 지탱해주던 주요 매체가 붕괴했기 때문이었다. 지식인들과 소비에트 국가가 높은 가치를 부여한 교육과 고급문화는 후세대에게는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후세대들은 미국 문화를 빠르게 습득하고 벼락부자가 되는 방법을 찾았다 - <아주 짧은 소련사>, 실라 피츠패트릭 저/안종희 역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f3qW7qkghhQq7RqS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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