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카와 준페이의 인간의 조건에서 주인공 가지는 만주 광산의 엔지니어였다.

만주국은 유일한 탈출구였다. 많은 좌익 이상주의자들에게 만주국은놀이터였다. 그들은 자신이 아시아 국민들을 개혁하고 근대화하는 것을돕는다는 취지로 철도회사의 연구원이나 고문으로 종사하였다. 식민지라는 모델은 대중의 저항 없이 실험할 수 있다는 대단한 이점이 있었다.
이 때문에 만주국과 대만은 건축가들과 기술자들에게 매우 매력적이었다. 물론 ‘진보적인 사회과학자들을 위한 영역도 있었다.  - P114

일본인 소설가와 수필가들이 만주국으로 몰려와 그 놀랄 만한 근대성,
다롄의 멋진 공원, 국제 도시 하얼빈의 밤 풍광에 관해 마치 기차가 달리는 것 같은 속도로 써댔다. 몇몇 최고의 영화 제작자는 만주 영화스튜디오에서 일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아시아 형제들을 돕고 있는 용감한 일본인 개척자들에 관한 영화를 만들기 위해 최첨단의 시설을 제공받았다. 이예술가들과 작가들 중 많은 이들이 마르크스주의자였다. 그들은 사상적으로 반자본주의이자 반서구주의 성향을 띠고 있었다. 범아시아주의는 그들의 이상주의적 감정에 호소했다 그들은 사회주의에서 민족 사회주의로 브랜드를 바꾸기만 하면 됐다 - P114

일본의 고집스러운 반체제 인사들에게는 또 다른 선택이 있었다. 그것은 약간 무력적인 탄압과도 관계가 있었지만, 대개는 친구나 가족들의 압력, 또는 반대 때문에 생기는 옅은 고립감이 더 그런 선택을 하도록 했다.
그 선택은 바로 ‘전향‘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공산주의 작가였던 고바야시 다키지 같은 이는 정치적 신념의 포기를 거부하고 1933년에고문으로 감옥에서 죽었다.
그러나 이런 잔혹함은 그리 흔히 전개되지는 않았다. 1930년대 초 정치적 이유로 감옥에 간 거의 모든 좌익 인사들은 고문당하지 않기 위해 공산주의를 포기하고 ‘전향했다‘ - 말하자면 그들은 마르크스주의를 다시선동하지 않겠다고 서약했다. 그들은 경찰의 협박으로 스파이 활동을 하거나 이웃들에게 ‘빨갱이‘라고 비난받긴 했어도 서약을 하면 대부분이 풀려났고 더 이상곤경에 처하지 않았다. -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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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사변 1931 => 상하이 사변 => 윤봉길 의거 1932년 4월29일 => 송호정전협정 1932년 5월 5일 => 이누카이 총리 암살 5.15 사건 =>장졔스 임시정부 지원 => 김원봉 남경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설립 => 이육사 1기생 1932년

만주사변 당시의 수상인 와카쓰키 레이지로 중국과의 화해는정책을 펴길 바란 정당 정치가였다. 그는 공포 상태에 빠졌다. 관동군은일본을 전쟁으로 몰아가고 있었으나 군사 행동은 총리의 관할 밖의 일이기 때문에 관동군의 소행에 대해 그는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었다. 내각에서 육군대신과 해군대신은 민간인에 불과한 총리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군대의 최고사령관인 천황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었다. - P107

이누카이는 그의 전임자처럼 이 모든 일에 무능한 방관자였다. 천황이관여해주기를 탄원했으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일본 군대가 상하이에서 폭동을 일으키는 것을 막으려고 한 번 더 시도를 했으나이에 반감을 품고 해군 장교들이 일으킨 쿠데타 때 암살되었다. 그 이후일본은 ‘국가 통합‘ 내각이 통치하였다. 1932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을통치한 14명의 총리 중에서 민간인은 단지 4명뿐이었다. 이것은 이시하라 간지 같은 책략가뿐만 아니라 그의 계획에 공모한 도쿄의 군 최고위층의 목적이기도 했다. 만주와 상하이에서 일어난 ‘사변‘ 이후 육군대신과해군대신은 남작 작위를 받았다. - P108

1928년에 관동군이 지방 군벌인 장쭤린의 열차를 폭파함으로써시기 상조였던 모의가 실패했다. 이시하라는 중국군에게 그 책임을 돌리고 일본군이 지배권을 잡는 구실을 만들길 바랐다. 그러나 그 일은 끝내실현되지 않았다. 그런 무질서한 행동에 겁먹은 히로히토 천황은 총리를사임시켰고 그 사건은 불문에 붙여졌다.
1931년엔 좀더 조직적으로 일이 이루어졌다. 9월 18일 밤 선양 근처의철도 옆에서 일본군이 폭탄을 투하하였다. 남만주철도 재산에 실질적인피해는 아무것도 없었고 기차도 여전히 정시에 달리고 있었지만, 이 사건을 선양의 중국군이 ‘사보타주한 것이라고 비난하며 중국군을 공격할 좋은 구실로 삼았다.
여기 - P106

가장 눈에 띄게 바뀐 점은 세력 균형의 변화였다. 1932년까지 권력은왕실, 관료, 군대, 의회에 분배되어 있었다. 의회는 항상 가장 약한 고리였으나 1920년대 정당 내각을 통해 그 힘을 키워왔다. 정당 내각이 끝나게되면서 일본 정치는 왕실의 신하들을 비롯해 육군과 해군 장교 그리고 관료가 하나가 되어 이끌어 갔으며, 종종 이 광신도적 부하들은 정당정치인들에게 그 결정을 강요했다.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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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노사쿠조는) 일본이 미국식 민주주의를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고 믿지는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을 즐겨 인용했다. 일본이 진정한 강대국으로 경쟁할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입헌정부와 그가 말하는 ‘인간 중심의 민주주의‘
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기독교인과 달리, 그는 러시아와의 전쟁을 전적으로 찬성하였다. 그의 관점에서, 러시아는 봉건영주였고, 일본은 조선과 만주의 당연한 주인이었다. 

하지만 국민들에게 나라를 위해 전쟁에 나가 기꺼이 목숨을 바쳐야 한다고 요구하려면, 자신들이 통치받는 방식에 대해서도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후대에 미화하거나 혐오하여 기억하는 "다이쇼 데모크라시"라고 알려진 것의 기초를 형성하는 사상이다. - P87

바이마르 공화국은 히틀러가 붕괴시켰다. 히틀러의 폭풍 군대의 잔인성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자체로 취약성을 지닌 바이마르 제도를 옹호할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극히 소수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공산주의자들과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서로 싸우기에 바빠서 나치의 위협을 제대로감지할 수가 없었다. 일본에서도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옹호하는 세력이역부족이었다.

1916년에 자유주의 사상가 요시노 사쿠조는 대다수 일본 지식인들이보통선거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기술하였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선거권을 혐오했다. 바이마르 제도에 환멸을 느낀 많은 독일 지식인들처럼, 일본 지식인들은 민주주의 정치를 천박하고 수준이 낮으며, 이기적이고 부패한 것으로 보았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급진적 반자유주의로 다른 한편으로는 병리적인 내향적 성찰로 이어졌다. 이 두 가지가 초래한결과는 서로 달랐다.

20세기 초 막대한 영향을 미친 일본 철학자는 니시다 기타로다. 불교 사상뿐만 아니라 독일관념론에도 깊이 몰두하였던 그는 새롭고유일무이한 일본식 사유 방식을 체계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일본성의 정수를 찾으려는 이러한 시도는 독일 이상주의의 일본판이었다. - P90

문부성에서 1937년에 발간한 "고쿠타이의 본의(국체의 근본)"라는 제목의 악명 높은 출판물은 일본인들에게 그들의 ‘소아‘를 ‘포기하고, 그들 존재의 근원을 "천황에게서 찾으라고" 말하였다. 일본인들은 순수한 정신을 가졌다는 면에서 다른 모든 민족보다 우월하고 "본성이 서양 국가의 시민들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독소적인 내용인 이 문서는 천황이라는 객체에 용해된 일본인이라는 주체에 대해서 니시다적 관점에서 천박하게 정리한 문서였다. - P91

기타에게 혁명적 폭력은 정치적이라기보다 종교적이며, 개인적이고 정신적인 자유주의가 표출된 행동이었다. 그는 극우단체들의 회원들과 접촉했고 천황을 종교적 총통으로서 인식하는 국가 사회주의를 주장하는정치 팸플릿을 저술했다. 그는 부패한 소수 지배자와 관료, 은행가, 산업가들에 의해서 국가가 잘못된 방향으로 포획당해왔다고 주장했다. 소수지배자들은 모호한 문구의 메이지 헌법으로 천황의 정치 권력을 제한함으로써 일본 국민들을 속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민의 천황‘에게 절대 권력을 부여하는 쿠데타를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개인은 천황과 국가에 자기를 동일시함으로써 자유롭게 된다고 했다. 국가는 유기적 조직체이며 ‘대아포괄적 자아‘라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개인 주체인 ‘소아 흡수한다는 것이다. 제국의 저편에는자아가 신이 되는 열반이 있다고 했다. - P93

기타 잇키는 자신의 아버지가 신봉했던 자유주의에서 멀리 떨어져 나왔다. 살아야 하는 신성한 이유, 더 중요한 것으로서 죽어야 하는 신성한명분을 제시하고 있었다. 기타의 사상은 특히 군대의 청년 장교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가난한 시골 출신이었으며, 기타 잇키처럼국가가 부패하게 되고 질이 저하된 것은 도시의 자본주의 협잡꾼들 때문이라고 비난하였다. 이 청년장교들은 과격한 이상주의에 불타 1936년2월, 천황에게 절대 권력을 부여하고, 고쿠타이(국제) 배신자들과 부패 관료들을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데타가 진압되고 기타는 배후자로 체포되었다. 만일 쿠데타가 성공했다면 그는 아마 정무장관쯤 되었을 것이다. 그는 다른 16명과 함께 처형되었다.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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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가타가 구상한 새로운 질서의 주요한 축 중 하나인 천황숭배는 신토의 신의 탄생에 기원하는 일본 문화의 바탕으로서, 일본 정신에 내재한, 고대로부터의 의무로 나타난다. 이것은 빌헬름 시대의 독일의 고딕적고안만큼이나 각색된 사실이다. 낭만주의적인 중세 독일의 성처럼 과거에서 요소를 빌려온 것이며, 메이지 시대에 진화된 천황숭배는 야마가타의 징집제 군대만큼이나 근대적인 산물이다. 그 이전에는 일본에서 결코최고의 신으로 천황을 숭배하지 않았다. 에도시대 말기까지 천황은 교토에 거주하며, 문화를 육성해왔고, 일본 관습과 정신의 영적 보호자였다.
당시 신토는 국가 종교나 국가적 우상이 아니었고, 일본 탄생의 신들, 다산, 자연의 축복, 절기의 축제, 애니미즘적 의례의 집합이었다.
고치대 - P65

군대의 최고통수권자이자 신으로서 추앙받는 황제라는 생각은 일본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가 종족의 아버지라는 생각 - 국가적
‘종족‘이라는 바로 그 생각은 19세기 중반 미토학의 국수적 교리와섞인 근대 독일풍의 인종국가론과 유사하다. 문명개화에 대한 야마가타의 권위주의적인 대응을 단순히 근대화 또는 서구화를 막기 위한 것으로만 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 역시 아이디어를 서양에서 빌려왔다. 그런데 그 아이디어들이 우연히도 매우 비자유주의적인 것들이었다. 그가구상한 교육을 통해 만들어진 일본의 모습은 후쿠자와의 이상과는 거리가 있었다. 일본의 군대식 훈련은 막사에서만이 아니라 학교에서도 이루어졌으며, 회의하는 개인주의자들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이 약화되도록 잘 훈련된 순응주의자들을 양성하였다.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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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과두지배 집단은 반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길을 선택했다. 이런 선택은 과두지배층이 원로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정치적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의 개념은 매우 생소한 것이었다. 그들도 헌법과 정치적 대표의 제도가 현대 국가가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조건임은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에 이슬람 국가들이 직면하고 있는 유사한 문제를 풀기 위해 당시 일본은 고심해야 했다. 근대화를 진행하면서 동시에고대의 전통을 유지하기 원했다. 이것은 독일의 이념과 일본의 신화를 접목하여 달성되었다. 독재자들은 군사 훈련, 신화적 군주제, 혈통과 고향에 근거한 국가관의 선전을 공유했다. - P62

새로운 국가의 질서를 세우는 데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인물은 비스마르크적 매너를 갖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나 이노우에 가오루 같은 사교 댄서가 아니라, 이토의 오랜 동료로서 무장인 야마가타 아리토모였다. 그는국가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두 가지로서 군대와 교육을 중시했다. 그에게있어 교육은 충성심, 기율, 복종을 가르치고, ‘이기적인‘ 개인주의를 갖지않도록 양성하는 것이었다. - P62

1873년부터 건장한 일본인 남성은 3년간 군대에서, 그리고 4년간 예비역으로 복무해야 했다. 그들 대부분에게그것은 서구화의 첫 경험이었다. 그들은 서구식 제복을 입고, 서구식 막사에서 살았으며, 서구식 군대의 기술을 배웠다. 대다수가 읽고 쓰는 법도 배웠다. 그들이 읽는 내용의 대부분은 민족주의 선전물이었다. 후쿠자와의 학교나 자유토론회 외에는 군대가 메이지 시대의 일본 젊은이들이근대를 경험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 P64

천황의 군대는 정치와는 거리를 두었다. 그들은 천황의 정책에 의심을품지 않았고, 심지어 그에 대한 개인적 의견도 말하지 않았다. 야마가타의 목적은 군대에서 정치의 영향력을 제거하는 것이었고, 천황의 의지를군대보다 더 높은 영역으로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그는 이것이 폭동을 예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과정의 결함은 50년 후에 명백히 드러났다. 반대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군인의 유일한 의무가 신성한 군주에 대해서만 있었으므로,
천황의 의지를 묵살하는 민간 정치가에 반대하는 반역은 합법적인 것이었다. 이것은 1936년에 열렬한 파시즘 신봉자인 젊은 장교들이 황권에대한 충성심을 보여주기 위해 내각 관료들을 살해한 사건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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