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즈 마블


거짓말처럼 영국인들이 싹 떠나버렸다.
이내 희한한 광경이 벌어졌다. 수백만 명에 달하는 무슬림들이 파키스탄이 있는 서부로 가기 위해 인도의 새 국경선으로 몰려들었다. 마찬가지로 수백만 명의 힌두교도들과 시크교도들이 반대편 국경으로 몰려왔다. 공동체 하나가 이동할 때마다 족히 3만 명은 되는 인간 띠가 길 위에 펼쳐졌다. 열차 칸칸마다 대륙을 교차하는 난민들이 숨 쉴 틈도 없이 빽빽이 들어찼다. 열차들은 사람들을 도시로 토해냈다. 귀환하는 열차 또한 반대 지역으로 향하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 < 지리의 힘, 팀마샬 지음, 김미선 옮김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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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크림반도

중앙아시아에서는 인도를 향해 남하하는 러시아와 식민지 인도를 지키려는 영국 사이에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이 벌어지고 있었다. 1853년 10월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이 벌인 크림전쟁에 오스만 편으로 참전했다 - < 매국노 고종, 박종인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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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제도의 타락
- 조선 전성기의 재정제도와 비교하여 대한제국의 그것은 얼마나 타락했을지 따져보고 싶다.

국가 예산을 집행하는 탁지부는 토지세와 사람에게 부과하는 호세戶稅, 일부 사업 수익만 재원으로 가지게 됐다. - < 매국노 고종, 박종인 > 중에서

내장원은 갑오정부에서 폐지한 무명잡세를 대거 부활시켜 내장원이 징수하도록 했다. 소금에 염세를 부과했고, 포구 여관에도 세금을 부과했고 벌목한 통나무에도 세금을 부과했다. 무명잡세가 부활한 이유는 매우 단순했다.
- < 매국노 고종, 박종인 > 중에서


1905년 조사에 따르면 대한제국 황실 1년 수입은 국고에서 지급하는 165만여 원과 내장원 수입 326만 원을 합한 491만여 원이었다. 내장원 자체 수입이 전체 황실 수입의 66.3%로 국고에서 지급하는 수입보다 더 많다는 뜻이다. 역둔세(각종 공유지에 매기는 토지세)가 62만 원, 인삼세가 200만 원, 광산세가 4만 원, 사금砂金 수입이 60만 원, 합계 326만 원이었다. 탁지부가 관할하는 국고 실수입의 69.6%(1903), 43.9%(1904)에 달하는 규모였다.41 그리고 그 수익은 실질적으로 황제가 임의로 사용할 수 있는 황제 소유였다. - < 매국노 고종, 박종인 > 중에서

제국 건설 2년 뒤인 1899년 8월 24일 황실 재산관리 기구인 내장원을 대폭 확대하고 11월 16일 최측근 이용익을 내장원 수장인 내장원경에 임명했다.37
그때 이용익은 탁지부에서 돈을 찍는 전환국장을 겸하고 있었다. 이용익은 홍삼을 관리하는 삼정감독과 광산을 관리하는 광무감독까지 겸했다. 1900년 탁지부 소속이던 전환국은 황제 직속으로 승격됐다. 그해 말 고종은 이용익을 탁지부 차관급인 협판에 임명했다. 이로써 고종은 이용익을 통해 국가 예산을 맡은 탁지부와 황실 금고 내장원을 함께 장악했다.38 - < 매국노 고종, 박종인 > 중에서


대한제국은 옛 방식 그대로 지방관과 지방 서리들에게 징수를 맡겼다. 이들이 백성으로부터 거둔 세금이 중앙으로 올라올 때까지 많은 부정이 개입됐고 이는 예전 삼정문란 때처럼 심각한 수준이었다. - < 매국노 고종, 박종인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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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헌법, 법가도 법치주의도 아니다

자그마치 ‘한 달 보름’만에 나온 이 법은 ‘자주 독립’을 규정한 1조 뒤로 8조까지 황제의 권리와 황민의 의무로 가득 차 있었다. 지금은 물론 그때 누군가가 봤어도 터무니없는 이 아홉 줄짜리 헌법은 세계적인 놀림감이 됐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외교관은 이렇게 본국에 보고했다.

˝한국은 성문헌법이라는 사치품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문서는 아마도 그 류에 있어서 유례없이 진귀한 것일 겁니다. 군주가 모든 권한을 장악하며 이 헌법 승인 하에 그가 커다란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을 인민에게 이해시키려고 합니다. ‘군주의 권리는 무제한적인 것이다’라고 하고, ‘이 헌법에 거역하는 모든 신민은 모든 시민권을 박탈하고 더 나아가 추방할 것’이라고 협박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현 상태를 알게 된다면 그 어떤 더 훌륭한 마그나카르타도 아무런 소용이 없으며 절대군주의 지배 하에서 이 나라가 현재의 혼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34 - < 매국노 고종, 박종인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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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기싸움의 역할

왕실 근위병 교체 문제를 두고 전 대신이 교체를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자 고종이 이렇게 선언했다. 윤5월 3일(양력 6월 25일)이다.

“작년 6월(양력 8월) 이후 칙령과 재가 사항은 어느 것도 내 의사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두 철회한다.”15

자기 마음대로 근위병조차 못 갈아치우는 데 나온 분통이었지만, 이날로 실질적인 개혁은 끝났다.
일본 외교 기록에 따르면 기 싸움에서 패배한 대신들은 ‘공포 속에 사표를 냈다.’ 고종은 이날로 ‘군국기무처’가 진행해왔던 근대화 작업을 전면 무효화했고 민씨들이 조정으로 복귀했다. 고종 측근 조직인 궁내부는 순수한 민당閔黨, 즉 러시아당과 미국당으로 단결하여 그 세력은 내각을 압도했다.16 - < 매국노 고종, 박종인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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