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와의 단절을 꾀한 이들과 칼 폴라니가 "착근된시장"embedded market이라고 부른 것에 만족한 이들 중 어느전통을 계승하려 하든, 산업 시대의 특징이었던 노동과 자본간의 이해 관계 갈등을 금융 자본이 부상하면서 심대하게 바뀌어 버린 사회 풍경에 투사하는 방식으로는 노동 조합이 초기에 품었던 영감을 오늘날 되살릴 수 없다. 왜냐하면 고용주가 투자자의 선호에 따라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서는 고용주의 힘이 약화되며 따라서 피고용인의 협상력도 실질적으로 줄어들기 때문이다. 금융 시장의 분위기에 따라 경제 활 - P48

 초기 노동조합들의 본보기를 따르고자 한다면 역설적이지만 과거에노동 조합이 발휘한 영향력의 기반이었던 노동력 공급에 대한 협상자라는 지위를 포기해야 한다. 그래야 다른 이들의 기대에 투기하면서 자신이 내세우는 이니셔티브의 가치 상승을 추구하는 프로젝트 담지자라는 조건을 몸에 걸칠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해 초기 노동 조합주의의 지혜를 재발견하는 것은 신용 공급자들이 자신의 평가에 노출된 사람들에게 부과하는 조건을 비판적으로 전유하는 전략을 채택하는 것을 의미한다.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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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성





지은이가 말하는 신자유주의적 조건은 자유주의적 조건과 구별된다. 그는 노동력 상품에 대한 마르크스의 논의에 의지해 ‘자유로운 노동자‘ free laborer 를 자유주의적 조건에서 작동한 주체성 형상으로 제시하고 이 형상이 걸어왔던 정치적 궤적을 스케치한다. 우선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는 거래자로서 이해 관계를 추구하는 개인‘이라는 자유주의적 인간학은 계급과 무관하게 만인이 평등하다고 전제한다. 물론 이는노동에 대한 자본의 착취를 뒷받침하는 하나의 허구이며, 자본은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운동을 개시할 수 있었다. 그런데 노동 운동가들은 이 전제를 단순히 받아들이거나 전적으로 거부하는 대신 계급이라는 집합적 차원에서 전유함으로써 이른바 단체 협상의 기술을 발전시켰다. 이들은 임노동 관계라는 게임에 뛰어들어 더 많은 임금과 더 나은 노동 조건을 얻어 내기 위해 싸웠고, 때로는 더 나아가 자본의 이윤율에 위기를 초래하려 시도했다. 그런 점에서 ‘자유로운 노동자‘라는주체성은 자본주의적 착취를 가능케 하는 전제일 뿐 아니라 이 착취에 맞선 운동가들이 전유해 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계기였다. - P283

신자유주의가 몽펠르렝에 모인 일군의 지식인이 세계의 병리를 진단하고 내놓은 이념적 처방이라면, 금융화는 이 처방을 현실로 옮기는 과정에서 도래한 정치 경제적 프로그램이다. 전자가 만물을 경영하면서 이윤을 극대화하는 자기에 대한 기업가 self-entrepreneur를 전범적 주체로 내세운다면, 후자가 촉진하고 생산하는 주체는 금융 흐름을 유인하기 위해 신용도를 관리하는 포트폴리오 매니저로서 잠재적인 ‘피투자자‘다.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정치의 전망은 이념으로서의 신자유주의가 현실화되는 과정에서 실제로 존재하게 된 피투자자라는 정치적 주체성의 전모를 파악하고, 이 주체성의 레짐에서 가능한 운동 형식을 모색하는 것에 달려 있다. - P287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의 영향을 받았건 경험을 통해 알게되었건 산업화 시대의 노동 계급 운동가들은 임노동이 자신을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착취에 책임이 있는 제도라고 보았다. 하지만 이 운동가들은 모든 임노동자에게 부과된 조건을 단순히 거부하기는커녕 그 조건을 활용해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노동조합의 구성원은 노동력을 판매하는 것 외에는 생계를 마련할 길이 없는 사람들의 공통된 이해 관계와 시련을 자신의 일로 받아들였다. 상이한 부문의 임노동자는 자신들이 하나의 운명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강력한 연합을 구축해 노동 시장에서 자행되는 착취에 도전했다. 노동조합 운동가들은 임노동자를 노동력이라고 불리는 상품 당사자들이 ‘자유롭게‘ 판매 조건을 협상할 수 있는-의 소유자로 표상하는 ‘자유로운 노동자‘라는 지위에 반대했다. 노동조합에 동조했던 이들 중 일부는 마르크스를 따라 이런 ‘자유‘가 노동자에 대한 착취를 정당화하기 위해 자유주의적 법률이 창조한 주관적 구성물 subjective formation일 따름이라고 일축했다. 그렇지만 현실의 노동 운동은-최소한 전략적인 차원에서는 - 자유로운 노동자라는 조건을 노동 계급이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집합적 정체성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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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 개발붐과 와하비즘의 전파

사우디는 이슬람권 각국의 지식인과 노동자들을 국내로 끌어들였다. 국내의 개발을 담당할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무슬림형제단 대원 등 이슬람 지식인들이 자국의 탄압을 피하고 일자리를 찾아서 사우디로 왔다. 이집트, 팔레스타인, 레바논, 시리아, 수단, 인도 등 서남아시아에서 대학 졸업장을 가진 젊은이와 지식인, 노동자들이 사우디 등 걸프 지역 왕정 국가로 몰려들었다. 1975년경에는 이런 이민자들의 수가 120만 명에 달했다. 이 중 60.5퍼센트가 아랍 출신이었다. 이 수는 1985년이 되면 515만 명으로 는다 - < 이슬람 전사의 탄생, 정의길 지음 > 중에서

사우디 등에서 돈을 벌어 1970년대 후반부터 귀국한 이들은 본국에서 중산층으로 편입됐다. 사우디 와하비즘의 세례와 물질적 혜택을 누린 이들은 서구화를 지향하던 전 세대 중산층과는 달리 독실한 무슬림의 삶을 영위했다.

사우디도 외국 이민자들의 영향을 받았다. 이집트 등에서 온 이슬람주의 지식인들은 사우디 학계 등지에서 쿠틉 등의 이론에 바탕한 정치적 이슬람을 전파했다. 외국의 이슬람주의 지식인들이 전파하는 정치적 이슬람은 와하비즘 토양과 결합해, 사우디에 지하드주의의 씨를 뿌리기 시작했다.- < 이슬람 전사의 탄생, 정의길 지음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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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중동전쟁과 석유위기

1973년 10월 6일, 이집트는 시리아와 함께 이스라엘을 전면적으로 침공했다. 4차 중동 전쟁이었다. - < 이슬람 전사의 탄생, 정의길 지음 > 중에서

전쟁 와중에, 미국이 이스라엘에 대한 공개적인 군사 지원을 밝혔다. 아랍권은 격앙했다. - < 이슬람 전사의 탄생, 정의길 지음 > 중에서

미국의 이런 조처에 대응해, 대부분 아랍 국가들로 구성된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이 전쟁으로 이미 급등한 유가를 70퍼센트나 인상했다. 19일에 닉슨 행정부가 이스라엘에 대한 22억 달러의 원조를 의회에 요청하자, 리비아가 선두로 미국에 대한 석유 금수를 단행했다. 최대 석유 수출국인 사우디아라비아와 다른 아랍 국가들도 20일, 리비아를 뒤따랐다. 석유 금수는 산유량 감축이 덧붙여지며, 서유럽 국가들과 일본에도 이어졌다. - < 이슬람 전사의 탄생, 정의길 지음 > 중에서

유가는 갑자기 배럴당 3달러에서 무려 네 배인 12달러까지 폭등했다 - < 이슬람 전사의 탄생, 정의길 지음 > 중에서

1969~1974년까지 사우디 정부 예산은 92억 달러였는데, 그 향후 5년 동안은 1,420억 달러로 무려 열다섯 배 가까이 증가했다. - < 이슬람 전사의 탄생, 정의길 지음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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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대전을 이해하려면 지리적 지식이 필요하다
요르단과 이스라엘의 국경이 곧 요단강이다. 팔레스타인 자치구는 요단강 서안 즉 west bank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거점 암만은 요단강 동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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