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의 3대 대첩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3대 대첩은 각각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 대첩(1592), 진주 목사 김시민의 진주성 전투(1592), 권율 장군의 행주 대첩(1593)이죠. - <세계사보다 더 재미있는 최진기의 전쟁사 2>, 최진기 지음 - 밀리의 서재https://millie.page.link/PAA8EX2z88mPVZu18반면 일본은 우리와 달리 일반적으로 벽제관 전투(1593), 칠천량 해전(1597), 울산성 전투(1597)를 임진왜란의 3대 전투로 꼽습니다. - <세계사보다 더 재미있는 최진기의 전쟁사 2>, 최진기 지음 - 밀리의 서재https://millie.page.link/n61JzkN6xga3pUW28
국가에 대항하는 습지
습지는 부와 도시를 산출했지만 이후 1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국가는 등장하지 않았다. 습지에서의 활기차고 다양한 생계 활동은 밭을 갈아 경작하는 농업 경관과 달리, 국가 형성에 유리하게 작용하지 않았다. 큰 강의 삼각주 지역이 초기 국가 형성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의혹을 확인하는 데는 나일강의 삼각주가 그 비교 사례를 제공한다. 초기 이집트 국가들은 삼각주에서 떨어진 강의 상류 지역에서 생겨났다. 삼각주 지역에는 이미 인구가 많았고 생계 자원이 풍부했지만 그것들이 국가 형성의 토대가 되지는 않았다. 그렇기는커녕, 삼각주 지역은 국가에 적대적이고 저항적인 지역으로 인식되었다. - P175
황허강을 따라 형성된 초기 국가들의 중심 역시, 유사하게, 끊임없이 변화하며 요동치는 삼각주 지역이 아니라 상류 지역에 있었다. 서곡농사이긴 했지만, 메소포타미아 국가들에서 밀과 보리가 중요했듯, 중국의 국가 형성 핵에서도 경작은 생존에 필수적이었다. 중국의 국가 건설 프로젝트는 복잡하고 다양한 황허강 삼각주와 그 사이에 있는 양쪽의 언덕진 땅덩이들의 야만 지역들)은 제쳐둔 채, 경작가능한 풍요로운 풍적토 지대 한 곳에서 또 다른 곳으로 폴짝폴짝 건너뛰었다고 할수 있다. - P176
농경민의 승리 이유는 ?- 번식률의 차이- 생산성이나 위험도의 차이가 아니라
신석기 곡물 복합체가 궁극적으로 세계를 지배하게 된 것은 도무스의 역학적 상황으로는 도무지 예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기까지 주의 깊게 읽은 독자라면 농경 문명의 부상에 당황했을 뿐 아니라 신석기시대 경작민이 대면했던 병원체들을 고려할 때, 이 새로운 형태의 농경 생활이 번성하는 것은 고사하고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궁금해 할 것이다.이에 대한 짧은 답은, 내가 알기엔, 정착생활 그 자체다. 정착생활을하는 농경민은 수렵·채집민에 비하면 전반적으로 건강상태가 불량하고 유아사망률과 모성사망률maternal mortality 이 높았음에도 전례 없이 번식률이 높았다. 곧 전례 없이 높았던 사망률을 보상하고 남을 만큼 인구 재생산율이 높았던 것이다. - P158
수렵채집민은 자녀 터울을 대략 4년씩 두는데, 이 4년 터울을 맞추기 위해서는 젖떼기를 늦추거나, 낙태를 유도하거나, 혹은 영아를 방치하거나 살해하는 방식을 취했다. 수렵채집민은 더욱이 대체로 기름기가 적고 단백질이 풍부한 식단을 유지하면서도 격렬한 신체 활동을 한 만큼 사춘기가 더디게 왔고, 배란은 덜 규칙적이었으며,폐경기는 일찍 왔다. 정착생활의 농경민에게는 이와는 대조적으로, 자녀 터울이 적더라도 이동 수렵 채집민보다 그 부담이 적었다. 그리고 뒤에서 다시 살펴보겠지만, 자녀는 농경에 동원할 수 있는 노동력이 되는 만큼 그 가치는 더욱 컸다. 정착생활로 초경이 빨라졌고, 곡물 식단으로 유아의 젖떼기가 이유식에 의존해 더 빨리 이루어질 수 있었으며,탄수화물이 풍부한 식단으로 여성의 배란이 촉진되었고 가임 기간이늘어났다. - P159
지연된 보상이론의 허구- 농경민의 인내심과 수렵인의 충동성 대비의 허구- 뵘바베르크의 우회이론- 마시멜로 실험
사회진화론자들 사이에서 한동안 선호되었던 이론적 경향은 농경을 문명의 중대한 도약으로 묘사하는 것이었는데, 농경이 ‘지연된 보상 delayed-return‘ 활동이었기 때문이다." 경작민이란, 지연된 보상 이론 - P96
이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받을 미리 준비해두었다가 씨를 뿌리고 그런 다음 김을 매고 작물을 돌보면서 그것이 자라나 그의 희망대로 수확할 식량을 생산해낼 때까지 기다려야 하므로, 질적으로 새로운 인간이다. 하지만 여기서 잘못된 것은 내가 보기에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은 농경민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수렵채집민에 대한 묘사다.이 주장에서는 합의된 대비를 통해 수렵채집민은 앞날을 생각하지않고 충동에 따라 즉흥적으로 살아가면서 운 좋게 사냥감을 발견하게나 나무나 수풀에서 따 먹을 만한 뭔가 좋은 것을 찾아내길 (즉각적 보상 immediate return‘을 바라면서 경관을 헤집고 다니는 존재라고 암시한다. 이것은 전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 P97
표준서사와 4000년의 시간 격차
식물을 재배하고 정착생활을했던 공동체가 등장했다는 최초의 증거는 대략 1만 2000년 전에야 나타난다. 그때까지는 즉 지구에 처음 등장한 이후 지금까지 95퍼센트에해당하는 시간 동안 인류는 수렵·채집 생활을 하면서 이동이 자유롭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상대적으로 평등한 소규모 군집을 이루고 살았다. 하지만 국가 형태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는 작지만 계층화되어있고 세금을 징수했으며 성벽에 둘러싸여 있던 최초의 국가들이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유역에 기원전 3100년에야 우후죽순 등장하기시작했다는 사실이 더욱 눈에 띌 것이다. 그러니까 처음으로 식물을 길들여 작물을 재배하고 정착생활을 시작한 뒤 4000년도 더 지나고서야국가가 등장한 것이다. 이렇게 커다란 시간 간격이 있었다는 사실은 국가 형태를 자연적인 것으로 설명하려는 이론가들에게는 문제가 된다.그들은 각기 국가 형성을 위한 기술적 요건과 연구학적 요건을 의미하는 작물 재배와 정착생활이 일단 성립되고 나면 정치 질서의 논리적이고 가장 효율적인 단위로서 국가/제국이 즉각 등장한다고 상정하기 때문이다 - P28
표준서사의 중심축은 정착생활과 그 뒤에 이어지는 소유, 도시, 문명 성립의 기본 선결 조건으로서 곡물을 길들였다는 데 있다. 수렵과 채집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려면 언제든 이동가능하고 널리 분산되어 있는 생활 형태가 요구되는 만큼 정착생활은 말할 것도 없이 불가능했다고 하는 것이 아직까지 흔하게 받아들여지는 추정이다. 하지만 정착생활은 곡물과 가축을 길들이기 훨씬이전에 시작되었으며, 때로는 곡물 재배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곡물 재배가 아예 없었던 환경에서 계속되기도 했다. 또한, 농경국가와 비슷한 어떤 것이 등장하기 한참 전에 길들인 곡물과 가축이 이미 알려져 있었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확실한 사실이다. 최근에 발견된 증거에 기초하면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즉 곡물 재배 및 가축사육과 이 둘에 기초한 최초의 농경제 사이에는 대략 4000년의 격차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분명한 것은 우리 조상들이 신석기혁명을 향해서나 초기 국가들의 품을 향해 돌진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 P74
길들인 곡물과 동물이 최초로 등장하는 시기와 초기 문명과 결부된 농경-목축 사회들의 합체가 이루어진 시기 사이에는 4000년이라는 놀라울 만큼 큰 시간 격차가 있으며, 우리는 이 격차에 주목해야 한다. 역사에서 고전적 농경사회의 구성 요소가 모두 마련되었으나 서로 결합되지 못하고 있던 이례적 기간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하다. ‘문명의 진보‘라는 표준서사에서는 일단 길들인 곡물과 가축을 이용할 수 있게 되면 거의 자동적으로 그리고 신속하게 완전히 형성된 농경사회가 발생한다는 가정을 기정사실인 양 전제하고 있다. 하지만 어떤 새로운 기술이 도입될 때는 으레 사람들이 망설이고 주저하는 터라, 새로운 생계활동이 일상으로 정착하기까지는 1000년 정도의 시간이 걸릴 수도 있었을 거라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대략 160세대에 해당하는 4000년은 온갖 꼬인 것을 다 풀어내는 데 필요한 것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이다. - P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