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서사와 4000년의 시간 격차


식물을 재배하고 정착생활을했던 공동체가 등장했다는 최초의 증거는 대략 1만 2000년 전에야 나타난다. 그때까지는 즉 지구에 처음 등장한 이후 지금까지 95퍼센트에해당하는 시간 동안 인류는 수렵·채집 생활을 하면서 이동이 자유롭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상대적으로 평등한 소규모 군집을 이루고 살았다. 

하지만 국가 형태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는 작지만 계층화되어있고 세금을 징수했으며 성벽에 둘러싸여 있던 최초의 국가들이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유역에 기원전 3100년에야 우후죽순 등장하기시작했다는 사실이 더욱 눈에 띌 것이다. 

그러니까 처음으로 식물을 길들여 작물을 재배하고 정착생활을 시작한 뒤 4000년도 더 지나고서야국가가 등장한 것이다. 이렇게 커다란 시간 간격이 있었다는 사실은 국가 형태를 자연적인 것으로 설명하려는 이론가들에게는 문제가 된다.

그들은 각기 국가 형성을 위한 기술적 요건과 연구학적 요건을 의미하는 작물 재배와 정착생활이 일단 성립되고 나면 정치 질서의 논리적이고 가장 효율적인 단위로서 국가/제국이 즉각 등장한다고 상정하기 때문이다 - P28

표준서사의 중심축은 정착생활과 그 뒤에 이어지는 소유, 도시, 문명 성립의 기본 선결 조건으로서 곡물을 길들였다는 데 있다. 수렵과 채집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려면 언제든 이동가능하고 널리 분산되어 있는 생활 형태가 요구되는 만큼 정착생활은 말할 것도 없이 불가능했다고 하는 것이 아직까지 흔하게 받아들여지는 추정이다. 

하지만 정착생활은 곡물과 가축을 길들이기 훨씬이전에 시작되었으며, 때로는 곡물 재배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곡물 재배가 아예 없었던 환경에서 계속되기도 했다. 또한, 농경국가와 비슷한 어떤 것이 등장하기 한참 전에 길들인 곡물과 가축이 이미 알려져 있었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확실한 사실이다. 

최근에 발견된 증거에 기초하면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즉 곡물 재배 및 가축사육과 이 둘에 기초한 최초의 농경제 사이에는 대략 4000년의 격차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분명한 것은 우리 조상들이 신석기혁명을 향해서나 초기 국가들의 품을 향해 돌진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 P74

길들인 곡물과 동물이 최초로 등장하는 시기와 초기 문명과 결부된 농경-목축 사회들의 합체가 이루어진 시기 사이에는 4000년이라는 놀라울 만큼 큰 시간 격차가 있으며, 우리는 이 격차에 주목해야 한다. 

역사에서 고전적 농경사회의 구성 요소가 모두 마련되었으나 서로 결합되지 못하고 있던 이례적 기간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하다. ‘문명의 진보‘라는 표준서사에서는 일단 길들인 곡물과 가축을 이용할 수 있게 되면 거의 자동적으로 그리고 신속하게 완전히 형성된 농경사회가 발생한다는 가정을 기정사실인 양 전제하고 있다. 

하지만 어떤 새로운 기술이 도입될 때는 으레 사람들이 망설이고 주저하는 터라, 새로운 생계활동이 일상으로 정착하기까지는 1000년 정도의 시간이 걸릴 수도 있었을 거라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대략 160세대에 해당하는 4000년은 온갖 꼬인 것을 다 풀어내는 데 필요한 것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이다. -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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