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오카 신이치의 글을 읽노라면 마치 무라카미 하루키 유의 소설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내가 들고 있는 것이 소설책이었던가?
일인칭 서술, 곳곳마다 등장하는 유럽과 미국의 미술관이나 대학에 대한 구체적이다 못해 정밀하기까지 한 묘사, 그리고 대상과 주제에 깊이 배어있는 예술적 서정성은 웬만한 과학자나 과학저술가들의 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무엇이다. 흔히 근대 과학은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해 대상과의 거리 두기를 전제한다고 하지만, 저자는 고정된 시야를 거부한다.
<나무고 쪼개도 알 수 없는 세상>(김소연 옮김, 은행나무 펴냄)에는 수많은 이미지들이 등장한다. 그것은 그가 이 책에서 우리에게 제기하는 일관된 주제가 시야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가령 저자는 파울 랑게르한스가 췌장 조직에서 훗날 그의 이름을 따서 '랑게르한스섬'이라 불리게 된 조직을 발견하게 되는 과정을 서술하면서 시야에 대한 논의를 끌어들인다.
|
▲ <나누고 쪼개도 알 수 없는 세상>(후쿠오카 신이치 지음, 김소연 옮김, 은행나무 펴냄). ⓒ은행나무 |
국내에서 <10의 제곱수들(Powers of ten)>(민음사 펴냄)이라는 제목의 책으로도 소개되었던 찰스와 레이 임스 부부의 실험적인 영화는 10의 n승이라는 크기의 위계를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수준들(level)을 실감나게 표현한다. 영상은 화창한 날 잔디 위에 누워있는 남녀에서 처음 시작하지만, 이내 카메라가 하늘로 솟구치면서 마을, 도시, 대륙, 지구, 태양계까지 확장된다.
별들이 반짝이는 깊은 우주의 심연에까지 올라갔던 시야는 카메라가 줌인하면서 곤두박질쳐서 다시 잔디밭 위의 남녀에게로 돌아온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시야는 몸속으로 파고들어 장기, 조직, 세포 그리고 유전자의 분자 수준까지 내려간다. 저자만큼이나 감수성이 풍부했던 랑게르한스는 10-6 수준에서 현미경으로 검정깨처럼 췌장 조직에 산재하는 세포의 집합체를 발견해서 그것을 섬이라고 묘사했다. 그러나 그는 기능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고 림프절의 일종일 것이라는 잘못된 추측을 했다. 랑게르한스섬이 인슐린을 생산해내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에 당뇨병과 관련된다는 사실이 밝혀지기까지는 50년이 걸렸다.
그런데 곧이어 후쿠오카는 임스 부부가 극적으로 보여준 시야에 사실은 트릭이 숨어있었다고 폭로한다. 임스의 영상은 해상도를 높여 대상을 확대하면 시야가 점차 어두워진다는 지극히 단순한 진실을 감추고 모든 수준에서 똑같이 밝고 정확한 시야가 가능한 것처럼 멋진 장면들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세포 조직을 40배로 관찰하다가 배율을 400배로 높이면 시야는 100분의 1로 줄어들고 밝기도 마찬가지로 줄어든다.
이것은 부분과 전체 사이의 본질적 긴장이다. 과학이든 예술이든 우리는 세상에 대한 시야를 얻으려고 부단히 노력하며 양자 사이에서 끝없이 요동하지만 우리 역시 10의 제곱수들 속에 갇힌 존재이기 때문이다. 랑게르한스섬은 미시적인 관찰을 통해 발견되었지만 그것이 당뇨병과 관련된 맥락은 그보다 훨씬 거시적인 관점을 요구한다. 그것은 "당뇨병이 기아 상태에 적응되어 있는 인간이란 생물이 갑자기 풍족한 생활을 누리면서 얻은 질병"이며 "부족과 결핍에 적응되어온 우리 생리 체계는 과잉 상태에 충분히 대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생물학자인 저자는 또 하나의 이미지를 통해 전작인 <생물과 무생물 사이>(김소연 옮김, 은행나무 펴냄) 이래 계속 우리에게 하려던 이야기, 즉 부분과 전체의 경계란 사실은 허구라는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두 장의 사진이 한 세트를 이루는 와타나베 고의 작품 <Border and Sight>는 멕시코와 미국의 국경을 양편에서 촬영한 것이다. 사진작가인 그는 이 양편의 시야를 얻기 위해 고작 몇 걸음만 옳기면 되었지만, 국경이라는 경계의 아이러니 때문에 엄청난 거리를 돌아서야 겨우 몇 미터 건너편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 대목도 우리가 부분에 얼마나 속박되어 있고 전체의 한 단편을 보기 위해 들여야 하는 수고로움이 애처로울 정도라는 것을 시사한다.
그는 이 이미지에서 생명 현상에 '부분'이랄 만한 것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는 함의를 이끌어낸다. 어떤 부분이 어떤 기능을 담당한다는 사고방식은 성립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는 코의 이식 수술을 예로 든다. 우리가 코라고 부르는 돌기물은 후각 기능이 핵심이다. 그런데 코는 콧구멍 안의 후각 상피에 연결된 신경섬유와 결합되어 있고 여기에서 나오는 신호들은 뇌의 후각망울로 보내진다. 나아가 후각은 포식자를 인식하고 피하는 기능의 일부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근육과 뼈까지 연결되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외과 의사는 그 뿌리를 찾다가 결국 '몸 전체를 끄집어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시야를 통해서 우리는 코가 공장에서 뚝딱 만들어낼 수 있는 기능성 모듈이 아니라 실제로는 하나의 수정란이 조금씩 모습을 바꾸고 분화해나가면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거기에 존재하는 것은 "부품과 부품의 경계면이 아니라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세포의 명암 변화", 즉 그러데이션뿐이라는 것이다.
유전자에 대해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1953년 왓슨과 크릭이 이중나선이라는 물리적 실체로 DNA를 발견한 이해 유전자는 분리 가능한 실체라는 생각이 퍼져있다, 그런데 유전자의 염기서열은 그것을 해석해서 또 다른 DNA를 복제하고, 단백질을 합성하는 효소나 세포소기관과 분리할 수 없다. DNA 혼자 복제할 수 없기 때문에 어디까지가 유전자이고 어디부터가 다른 메커니즘인지 명확히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우리가 세상을 나누어 볼 수밖에 없는 측면도 함께 제시한다. 그가 제시한 또 다른 이미지, 마하 밴드의 착시는 실제로는 경계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경계면이 있는 것처럼 해석하려는 뇌의 경향성을 보여준다. 그는 진화 생물학적 설명까지 끌어들여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서 불규칙한 배경 속에서 포식자의 모습을 찾아내려는 경향, 즉 관계없는 것들에 인과 관계를 부여하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한다. 세상은 나누지 않으면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대목은 역시 같은 딜레마를 양자물리학에서 추구했던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를 떠올리게 한다. 하이젠베르크는 <부분과 전체>라는 철학적 자서전의 한 장에 "현대 물리학에서 '이해'라는 개념"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볼프강 파울리, 오토 라포르테, 그리고 하이젠베르크가 '도대체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둘러싸고 토론을 벌이던 중 그중 한 명이 "외관상으로 엉클어지고 혼란된 어떤 특수한 상황이 사실은 더 일반적인 것의 특수한 경우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하였을 때, 우리 사고는 안심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많은 것을 하나에 소급하는 것, 즉 환원을 이해했다는 말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공통된 것은 이해란 단순한 인지적 작용에 그치지 않고 우리 존재의 본질적인 한 측면이며 경계 나누기와 환원은 우리가 복잡하고 헝클어진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는 무엇이라는 인식이다.
하이젠베르크가 이런 철학적 물음을 던지면서도 물리학자라는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듯이, 후쿠오카 신이치는 자신이 생명과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라는 사실을 또렷이 인식하고 있으며 자신이 하는 일을 매우 소중하게 여긴다. 곳곳에 "과학자란", "과학자는 이러저러하게 본다" 등의 서술이 등장하며 과학자의 관점이 중요함을 넌지시 비추고, 자신이 하고 있는 연구를 지나치다고 느낄 만치 상세히 서술한다.
그는 사람들의 유형을 지도 의존형과 지도 무시형으로 나누면서 지도 의존형이 자신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면 한 발짝도 가지 못하고 길을 잃고 만다고 말하지만, 정작 자신은 지도에 의존해서 길을 찾으려는 집단에 속해 있음을 분명히 한다. 결국 부분과 전체의 긴장은 계속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