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철은 <동아일보>에서 초년생 기자로 있던 1975년에 자유 언론을 주장하다가 해직된 한국 현대사의 산 증인 중 한 명이다. 송건호, 정연주, 김종철 등 해직 기자들은 <동아일보>에 다시는 돌아가지 못했고, <한겨레신문> 창간에 앞장 선 다음에야 기자의 신분과 직장을 되찾을 수 있었다.

민주 정부가 들어선 후에 잠시 언론사 사장을 역임하고 물러나 이제는 재야 원로의 한 사람으로 이 사회 양심의 한 귀퉁이를 떠받치고 있는 김종철이 상당히 야심적인 책을 냈다. <문화의 바다로>(21세기북스 펴냄)라는 시리즈로 총 10권을 기획하고 있는데, 그 중 다섯 권이 나왔다. <당신의 종교는 옳은가>, <교육인가 사육인가>, <글쓰기가 삶을 바꾼다>, <음악, 삶의 소리를 듣다>, <영화, 삶의 풍경을 찍다> 등이다.

책들의 제목만 봐도 드러나듯이, 그는 개인들이 삶의 현장에서 각자의 자아와 밀착되는 의미를 찾아 가꿔나갈 수 있는 형태의 사회를 원한다. 그에게 문화는 토대의 차원에서 온갖 사악함의 원인으로 작동하는 탐욕의 구린내를 일시적으로 덮어줄 상부 구조의 호사가 아니라, 인간적 삶이라는 것이 무엇으로 구성되어야 하는지를 실천 속에서 직접 탐색하면서 의미를 생산하는 활동에 해당한다.

인간적 삶의 의미를 실천 속에서 규정하는 중요한 프레임이자, 그러한 프레임의 확대 재생산에 기여하는 사회 제도로 종교와 교육이 빠질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시리즈의 1권과 2권이 종교와 교육을 각각 다루고 있는 것은 적절한 순서로 보인다. 이 서평은 이 두 권에만 집중한다.

<당신의 종교는 옳은가>

서양 사회에서 오늘날 정치 생활을 위한 일반적인 지혜이자 미덕 중 하나로 간주되는 톨레랑스 또는 관인(寬忍)이라는 가치는 종교와 관련된 분쟁의 역사와 결부되어 있다. 만유의 창조주이자 주재자이며, 전지전능한 유일자로 정형화된 신의 개념은 기독교에 특유한 것으로 모든 종교에 공통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창조주 유일신이라는 관념이 없더라도 모든 종교에는 어떤 형태로든 모종의 교조(敎條) 즉 도그마(dogma)가 있을 것처럼 보인다. 인간이 통제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일들, 천재지변과 같은 커다란 사건에서부터 일상사의 작은 우연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기획이나 예상을 비웃듯이 비켜가버리는 숱한 운수가 어떤 초자연적이거나 신성한 힘에 의해 좌우된다고 보는 믿음이 대부분의 종교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초자연적이거나 신성한 힘에게 강한 꾸지람을 들을 수 있는 행위, 즉 신 또는 하늘로 하여금 진노케 할 수 있는 행위는 모든 종교에서 그만큼 강하게 금지되는 것이 논리적인 귀결이다.


▲ <문화의 바다로-당신의 종교는 옳은가>(김종철 지음, 21세기북스 펴냄). ⓒ21세기북스
각자의 종교 안에서만 생활하면서 다른 종교와 접촉할 필요가 없는 상태가 마냥 지속된다면, 이와 같은 도그마도 나름대로 인간적 삶에 질서를 부여하는 기초로 작용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종교와 접촉이 불가피하게 일어나게 되면 이 부근에서 대단히 심각한 의문이 떠오르게 된다. 예컨대 기독교에서는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도그마가 있는 반면에 불교에서는 물리적인 여유만 있다면 불상을 모셔두고 절을 하는 것이 보통이다. 스스로 기독교도라고 자처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 때문에 불교는 기독교와 공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애당초 종교도 아닌 미신이라고 강변한다. 불교도 가운데서도 조직의 생존과 번영에 목숨을 바치는 것을 자신의 업으로 받아들인 사람이라면 기독교의 교세 확장을 위협으로 느낄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반응은 익숙하지 않은 대상을 곧 악과 동일시하는 셈으로서, 지성의 어떤 부분이 개명되지 못한 상태인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가 된다. 불상이 우상이라서 불교가 미신이라는 논리는 마리아 상이나 십자가가 우상이므로 기독교도 미신이라는 공격에 답변할 수 없는 자가당착을 벗어날 수 없다. 상대에 대한 공격이 곧 자신에게 그대로 돌아온다는 깨달음은 애당초 상대를 공격하게 인도한 이유라는 것이 별로 타당하지 못하다는 반성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다. 그리하여 단순히 불상을 곧 우상으로 혼동한 착각에서 벗어나, 피해야 할 우상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일지를 파고 들어가는 관심으로 연결될 수 있다.

김종철은 <당신의 종교는 옳은가>에서 이런 방향으로 파고들어가는 관심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대신 종교라는 것이 얼마나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지, 그리고 각 종교라는 것이 어떤 역사를 거쳐서 형성된 결과인지를 문외한이라도 쉽게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의 평이한 문장과 길이로 요약해서 소개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특별히 문제가 되는 종교 조직을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기독교가 으뜸일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도 가운데에는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악령에 사로잡힌 것으로 간주하면서, 그들이 생각을 바꿀 때까지 압박하는 것이 신에게서 받은 자신의 사명인 양 여기면서 자부심까지 느끼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 이런 광신도들의 전투성에 의아해하면서도 그들이 부르짖는 "신의 뜻"에 따르지 않았다가는 혹시 횡액을 만나지나 않을까 조금이라도 불안한 사람이라면 기독교의 역사를 간략하게나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세의 십자군 전쟁이 어떤 정치적인 동기에서 출발했는지, 그 과정에서 얼마나 어이없는 학살과 착오들을 저질렀는지, 그런 오류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 기독교를 개혁하려는 운동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개혁 운동의 와중에서 또다시 어떤 참극과 죄악들이 자행되었는지 등의 역사는 곧, 근대 이후 서구의 기독교 사회가 개인 영혼 내면의 문제에 대해 권력이나 외압이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을 받아들이게 된 사연과 같다.

증산교를 창시한 강일순은 일제 경찰에게 의병 활동이라는 의심을 받아 고초를 겪은 적이 있는데, 제자들은 천지개벽을 말하던 스승이 그까짓 경찰쯤 쉽게 꺾어버릴 줄 알았던 모양이다. 슈퍼맨이나 헐크 또는 홍길동을 꿈꿨든지 시라소니나 김두한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스승은 "죽어도 원망을 말고, 곱게 죽는 것이 좋다"는 식이었단다. 이 얘기를 김종철은 별다른 해설 없이 서사적으로 전할 뿐인데, 아마도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전통이 무의식적으로 배어나온 것 같다. 그가 여백으로 처리하는 메시지를 감히 대신해서 엮어 봐도 된다면, 한 가지를 말하고 싶다.

강일순의 저런 태도는 예수가 붙잡혀 가는 장면에서 보인 태도와 너무나 닮았다. 사실, 죽음이나 고초가 다가올 때 저항하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사례들은 종교의 역사에서 예수 이전에도 대단히 많다. 특정 종교 조직과 별 상관이 없었던 소크라테스도 죽음 앞에서 비정상적이랄 만큼 태연한 모습을 보였고, 디오게네스, 에픽테투스, 토머스 모어, 그리고 20세기 초 프랑스의 시몬 베유 등등, 통상 철학자로 분류되는 사람들, 이외에 보다 정상적인 사람들 가운데에도 저세상 가기와 이웃집 놀러가기가 마치 단어 하나 차이일 뿐인 것인 양 살다간 이는 매우 많다. 강일순이나 예수나 소크라테스가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는 물론이고, 무엇을 위해 저항을 포기했는지에 관해서도 나는 남보다 더 잘 알 수 있는 입장이 전혀 아니다. 하지만 지금 언급한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와 "무엇을 위해"에 관한 실존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방향이 아니라면 어떤 경전도 어떤 도그마도 어떤 신학도 종교로서는 손색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불교, 기독교, 힌두교, 이슬람, 유교, 도교, 그리고 동학, 증산교, 원불교 등의 역사에 관한 간략한 섭렵으로 구성된 이 책의 제1부를 읽다보면, 독자의 마음 안에 이와 같은 고찰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를 수 있기를 바란다. 이어서 제2부에서는 무신론 및 불가지론과 관련된 매우 심각한 질문들이 제기되는데, 여기서도 저자는 이런 질문들에 관해 자신의 견해를 파고들어가 밝히는 전략보다는 독자들에게 생각할 주제를 던지는 데서 그치는 자제력을 발휘한다. 다만 무신론과 불가지론이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중요한 분별을 강조하는 동시에, 리처드 도킨스 등의 무신론은 "신이 있는 종교"에 대해서만 비판의 효력을 가질 뿐 불교나 도교 등 "신이 없는 종교"에는 효력이 없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그러나 "누군가 망상에 시달리면 정신이상이라고 한다. 다수가 망상에 시달리면 종교라고 한다"는 로버트 퍼시그의 도발적인 발언은 신이 있는 종교에 속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망상에 시달리지 않는다면 해당하지 않을 것이고, 신이 없는 종교에 속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망상에 시달리고 있다면 해당한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종교라는 허울 아래서 망상에 시달리고 있는 사례들이 적지 않게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무신론 자체가 하나의 교조로 굳어져서 자유로운 사고를 가로막는 경우도 적지 않게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망상이 아닌 형태의 종교적 믿음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과학적 합리성의 본질과 한계를 뚜렷이 인식하고 그 한계 바깥에 위치하는 영역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인간적 삶의 의미가 생동할 수 있을지 등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보다 창발적인 방향의 탐구가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탐구는 종교, 철학, 과학, 역사 등과 내면적으로는 당연히 긴밀하게 연관되지만, 동시에 그러한 영역 구분을 초월한 지평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한국의 지성은 여태까지 이러한 방향의 행보를 거의 내딛지 못했다는 것이 내 관찰이다. 김종철의 이 책이 한국 사회의 일반적 지성으로 하여금 보다 창조적인 방향으로 기수를 돌리는 데 조그만 자극제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교육인가 사육인가>

한국의 교육이 문제라는 한탄은 이제는 이미 하나의 유행어로 정착된 정도이다. 하지만 한국 교육의 어떤 점이 문제인지를 묻게 되면 사회적인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개인적인 차원에서라도 어느 정도로 정리된 견해를 갖춘 사람도 찾아보기 어렵다. "입시 위주", "경쟁 체제", "공교육 붕괴" 따위 무성한 상투어들은 전체 국면 가운데 어떤 특정한 문제점을 가리키는 용어로서는 정확도가 크게 미흡한 구호에 불과하기 때문에, 구체적인 대안의 발굴로 이어갈 수 있는 추동력을 거의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 <문화의 바다로-교육인가 사육인가>(김종철 지음, 21세기북스 펴냄). ⓒ21세기북스
김종철은 한국 교육의 문제에 관해서 저런 식의 상투어들에 의존하지 않는 차원에서 대단히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저런 상투어들에 의존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그가 명시하지는 않지만, 여기서도 다시 저자를 대신해서 그 이유를 잠시 생각해 본다. 교육의 목적과 관련해서 기본적인 바탕으로 누구나 인정하고 시작해야 할 것으로 보이는 점들을 두 가지만 열거해보기로 한다.

우선 교육은 출세의 방편인가? 도덕주의자들은 혹시 그러면 안 된다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나는 청소년들이 출세를 원하는 게 전혀 잘못일 수 없다고 생각하며, 따라서 자라나는 후세에 대한 교육은 학생들에게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실력과 더불어 남들이 인정해 주지 않을 때 서러움을 극복하고 더욱 정진하는 성숙하고 건강한 영혼을 배양하는 데 목적을 둬야 한다고 믿는다. 이렇다고 할 때, 세상에 기여하는 실력이 무엇인지가 진짜로 따져봐야 할 질문으로 대두하게 되는데, 이는 어떻게 따지더라도 표준적인 답이 나올 수는 없고 결국 각 개인이 자신의 기질이나 취향 그리고 처지 등 다양한 요소들 사이에 나름대로 균형을 잡으면서 스스로 찾아야 할 일로 남는다.

한 젊은이가 어떤 방면으로 인생의 행로를 잡든지, 그 방면에서 선배들이 축적해 놓은 기예를 익히는 것은 필요하고 유용한 일이다. 교육은 이런 것들을 전수하는 기능을 수행하지만, 이것이 교육의 전부일 수는 없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스스로 개척해 들어가는 도전 정신, 그리고 그러한 도전의 경로에서 쉽게 좌절하지 않는 인내와 열정, 허황된 목표를 추구하지 않도록 자신의 기획을 이치에 따라 점검할 수 있는 분별력, 나아가 이치에 맞는 일이라면 전인미답의 경지라도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 선량한 확신 등이 전수되어야 한다. 특정 분야에서 조예를 쌓아, 그 일 자체에서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수준이 되면 사회적 인정이라는 동기가 없더라도 추구를 계속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분야라 할지라도 입문 과정의 초보자에 해당하는 청소년들에게는 사회적 인정이라는 동기가 없다면 힘들고 어려운 훈련을 이겨낼 추동력이 부족할 것이다.

둘째, 소위 인성 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학생들에게 강요되고 있는 프로그램들은 인성을 배양하는 데 성공할 수가 없다. 위에서 종교에 관해 말할 때 간접적으로 암시했듯이, 도덕, 양심, 가치 등은 내면의 영역에 속하는 일이기 때문에 외부에서 주입되는 순간 인성 배양이라는 목표를 배반하고 따돌림의 위협에 굴종해서 집단적 편견을 억지로 흡수하는 뒤틀린 인간성을 생산해낼 뿐이다. 이렇게 억압된 심성은 잠재의식 밑으로 숨어들어 응축된 울분으로 말미암아 느닷없는 상황에서 폭발할 가능성이 상존한다. 교육 당국의 제한된 상상력 안에서 획정된 "바른 생활"의 기준을 주입하는 방식으로는 인성이 배양될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어떤 주어진 과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도중에, 그 과제를 해결하려면 기성의 어떤 권위에게서 도움을 받아야 하는지, 다른 사람들의 선례를 참고한 다음에도 남는 매듭은 자기 스스로 풀어내야 한다는 깨달음, 그리고 그것을 실제로 풀기 위해 상상의 지평을 확장해 나가는 등의 궁구야말로 인성의 싹이 터서 건강하고도 씩씩하게 성장해 나갈 수 있는 가장 좋은 환경이다. 그러므로 전인 교육이라는 환상을 빨리 버리고, 하나를 하더라도 학생의 자아와 그 일의 본령이 긴밀하게 접촉할 수 있도록 노작(勞作)과 실습 중심의 교육이 초등 과정에서부터 이뤄져야 하며, 싫어도 들어야 하는 필수 과목을 없애거나 수를 줄이고 선택 과목 체제로 개편해서 선택에 따른 결과에 스스로 책임지도록 하는 것이 인성을 기를 수 있는 최선의 길이다.

<교육인가 사육인가>라는 제목을 통해 김종철이 전하려고 하는 사육 아닌 교육의 형상을 내 나름대로 그려본다면 지금까지 말한 바와 같다. 하지만 종교의 경우에 그랬듯이 교육에 관해서도 저자는 불립문자의 미덕을 지킨다. 그리하여 자기가 옳다고 믿는 바를 명시해서 주장하는 대신에 다양한 사례들을 소개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생각해 볼 거리를 제공하는 데서 그친다. 다양한 사례들을 소개하는 전략에 따라 이 책은 핀란드, 미국, 프랑스, 독일, 영국, 일본의 교육 방식을 예시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김종철은 다른 나라의 사례를 참고할 때 한국의 논객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함정 하나를 잊지 않고 지적한다. 그것은 바로 "엄친아"식 사고방식이다. 자식 잘 되기를 바라는 엄마가 자식을 훈계할 때 자신의 온갖 기대들을 투사시켜, 사사건건 "엄마 친구 아들"을 들먹인다면 자식에게 상처와 좌절을 심어주기 십상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 내부의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는 척하면서 "선진국은 이렇다더라"는 식으로 시기심과 열등감이 결합된 환상을 준거로 사용하게 되면 실천적인 동력은 전혀 없는 말장난과 자기 비하만이 남게 된다.

다른 나라의 사례들을 살펴보는 와중에서 김종철의 시선이 머무르는 대목은 역시 학생 개개인의 자주성을 길러주는 교육이어야 창의력의 계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창조성의 본령은 기성의 전통이나 관습이나 권위의 한계를 새로이 확장한다는 데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창조적인 사유나 업적이란 부모나 선생이나 정부의 인증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방식으로는 생성될 수가 없다. 세종이든, 베토벤이든, 링컨이든, 반 고흐든, 문익환이든, 빌 게이츠든, 어떤 일에든 창조적인 족적을 남긴 사람이란 곧 남들의 오해와 멸시를 강한 신념을 뚫고 나가, 결국에 가서는 자신을 모멸했던 사람들조차 그 창조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도록 상황을 주도한 사람들이다. 즉, 새로운 길을 개척한다는 일은 단순히 익숙한 길과 새로운 길이라는 두 개의 떡 중에 새로운 길을 선택하는 일이 아니고, 길이 아니라고 여겨지던 것을 길로 여기도록 사람들의 사유 프레임 자체를 바꾸는 성격을 내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주성의 함양은 아주 어릴 때부터 권장될수록 효과가 크고, 여기에는 무엇을 가르치느냐는 차원뿐만 아니라 어떻게 가르칠 것이냐는 차원도 똑같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특히 한국 사회의 경우 가정과 학교와 군대와 직장과 정치와 종교에서 권위주의와 교조주의의 풍습이 아직도 지배적이기 때문에, 학교 문화의 민주화라는 과제는 정치사회의 민주화라는 과제와 불가분리로 상호 얽혀있다.

한국의 종교와 교육을 이야기하는 책들을 김종철이 민주주의와 자유를 강조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정치의 질이란 사회 전반의 문화적 수준을 반영하는 것인데, 문화의 주체인 개인들이 정치권력에 순응하는 태도로 일관한다면 문화적 창조력이 메말라서 정치가 야만으로 전락하고, 다시 그러한 야만에 개인이 순응하는 악순환에 빠지는 것이다. 개인들이 주권을 자각하여 자주적으로 사고할 수 있어야 문화에 생동감이 넘치게 되고, 정치에서도 야만을 몰아낼 수 있는 공동체적 역량이 조직화될 수 있다. 김종철의 <문화의 바다로> 시리즈는 전체적으로 이러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데, 이는 현재 한국 사회에서 희망의 소재를 확인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리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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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아빠가 이 세상에서 얻은 유일한 진리이며 때 묻지 않은 존재란다."

"아빠가 엄마와 결혼한 이유는 오로지 아빠만을 생각하는 엄마의 그 해맑은 눈동자에서 '조국'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빠는 그렇게 마음을 담는 법을 연출하면 되는 거야."

츠카 코우헤이(김봉웅)의 이름을 처음 접했던 것은 내가 막 연극 학교에 들어가 연극 공부를 시작할 무렵이었다. 공부를 마치고 극작가로 데뷔한 후 대학로에 나온 다음에도 그 이름은 지인들의 입을 통해서 일본 연극을 얘기할 때마다 심심찮게 들을 수 있었다.

그 말을 종합하자면 그는 한마디로 '독특한' 연출가였다. 그래서 나는 그의 연극을 한 번도 본 적 없으면서도 그저 막연하게 현대판 데라야마 슈지쯤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데라야마 슈지는 한 세대 전 일본에서 활동한 전방위 예술가였다.


▲ <딸에게 들려주는 조국>(츠카 코우헤이(김봉웅) 지음, 김은정 옮김, 이상북스 펴냄). ⓒ이상북스
일본에서는 1990년대 초에 나왔다가 츠카 코우헤이 사후에 한국어로 번역돼 출간된 <딸에게 들려주는 조국>(김은정 옮김, 이상북스 펴냄)은 내가 그렇게 그에 대해 막연히 품고 있던 인상을 한꺼번에 바꿔놓았다. 이 책의 홍보 카피는 "경계인으로 살아온 한 천재 연출가의 삶, 그리고 뜨거운 사랑"으로 '연극'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내게는 자신이 지극하게 사랑하는 딸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알려주는 자상한 아버지의 편지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는 일본인과 한국인의 정체성 사이에서 고민했던 이양지, 유미리, 최양일, 정의신 같은 예술가들이 흔히 그러하듯 우리가 선입견처럼 품고 있는 재일 한국인의 모습에서 많이 비켜나 있는 인물이다. 필명을 일본 이름으로 썼던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다른 재일 동포처럼 일본에 적대적인 원한을 품고 있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일본에 귀화해서 한국인의 얼굴을 한 전형적인 일본인으로 살아가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재일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기대지 않고 살아왔고 생활과 문화적인 면에서는 자신을 일본인으로 여겼는가 하면 한국말도 배우지 않았으며 오랜 고민 끝에 딸의 국적은 일본으로 바꿀 정도였다. 승부의 세계에선 이기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으며 인간을 계급 투쟁을 하는 존재로 파악했고 그런 투쟁 본능이 진보를 이끌어온다고 믿었다. 그러면서도 인간에 대한 신뢰와 변하지 않는 따뜻한 마음의 소중함을 온몸으로 껴안았던 사람이다.

나는 그에게서 남과 북 그 어디에도 갇히지 않은 채 스스로 경계인의 삶을 자처했던 재독 역사학자 송두율이나 중국에 살면서 '국경'과 '경계'에 대한 다양한 질문들을 제기하고 있는 재중 동포 3세 감독인 장률, 그리고 세계 시민으로서의 가치관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영혼이 자유로운 언론인이자 작가인 고종석의 모습을 겹쳐보게 된다.

넉넉한 품과 열려있는 사고를 소유하고 있는 예술가. 그가 바로 약관 24세에 연극계에 데뷔해 수많은 후배 연출가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며 1970~80년대 일본 연극 붐을 이끌었고 1985년 한국으로 건너와 자신의 작품 <아타미 살인 사건>을 원작으로 한 연극 <뜨거운 바다>를 올려 국내 관객들과 연극 관계자들을 뒤집어지게 만든 장본인, 츠카 코우헤이다.

그가 딸에게 쓴 편지를 묶은 이 책에는 눈여겨볼 대목들이 많다. 사적인 글을 쓸 때처럼 쓱쓱 써내려간 듯 보이지만 읽는 도중 몇 번이나 연필을 들어 밑줄을 긋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켰던 부분들이 많았다. 몇 장면만 인용해본다.

병원에서 너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빠는 엄마에게 이렇게 선언했다.

"이 아이가 커서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하는 날까지 잠시 맡아두는 거라고. 그때까지 키우는 역할을 맡은 거라고 생각해. 아무튼 맹목적인 사랑은 좋지 않아."

(…)

너는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될까? 엄마와 아빠가 결혼한 게 스무 살 때였으니까, 너도 스무 살에 결혼을 한다고 하면 너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앞으로 16년이네.

어쩐지 쓸쓸해진다. 그러나 네 인생이야. 네가 원하는 대로 살면 돼. 아빠는 항상 곁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너와 엄마만은 꼭 지켜줄 거야' 중)

아빠 같은 사람들은 스스로 원해서 한국인으로 태어난 게 아니다. 태어나 보니 한국인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죄가 되어야 한다면, 그 세상이 잘못된 것이겠지.

아빠가 이 책을 세상에 내놓아 혹시 네가 어깨를 못 펴고 다니게 되는 건 아닌지 또 걱정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아빠보다 너보다 더 괴로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걸 생각해 주렴. ('아빠는 비열하고 어리석은 아이였다' 중)

"하지만 우리도 참 난처한 존재들이군. 일본에서는 한국인라고 차별당하고, 한국에 오면 재일 한국인이라고 괴롭힘 당하고. 우리는 대체 어디로 가면 좋은 거야?"

(…)

"그건 그렇고, 인간이란 참 슬픈 존재로군. 누군가를 차별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인가 봐." ('너는 아빠를 자랑스럽게 생각해줄까' 중)

미나코야. 아빠는 네가 무럭무럭 자라주길 기원하고 있다. 그리고 타인의 아픔이나 슬픔을 아는 사람이 되어 주었으면 한다. 네가 상처받는 여인이 되었으면 한다. 막상 네가 상처받은 모습을 보면 아빠는 미쳐버릴 것처럼 괴로울 거야. 네게 상처 준 사람들을 안다면 다 죽여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지도 몰라. 하지만 그때 아빠는 마음속으로 계속 "내일은 너를 위해 있다"고 외칠 거야. 그러니까 미나코도 상처받는다 해도 마지막에는 '내일은 꼭 좋은 일이 있을 거야'라고 생각해주기 바란다. ('네가 상처받는 여인이 되었으면 좋겠다' 중)

이 책 곳곳에는 그간 우리가 굳게 믿어왔던 화석화된 근대적 개념인 '민족'이나 '국가' 같은 낡은 관념을 허물고 초월한 사람에게만 존재하는, 한 사람의 진실한 인간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그의 자유의지가 뜨겁게 녹아있다.

그의 연극 <뜨거운 바다>에서 도쿄에서 온 강 형사가 자신이 호감을 느꼈던 서울의 여 형사 김지숙에게 "김 형사님, 조국이란 당신의 아름다움입니다. 애국심이란 당신을 사랑스럽게 생각하는 의지입니다"라고 털어놓았듯이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그는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서 갈무리하듯 딸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미나코야, 틀림없이 조국이란 너의 그 아름다움이다. 엄마의 변함없이 한결 같은 상냥함이다. 아빠가 엄마를 사랑스럽게 생각하는 그 뜨거움 속에, 나라가 있다. 두 사람이 너를 무엇보다 소중히 생각하는 눈길 속에, 조국은 있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사랑스럽게 생각하는 강한 의지가 있다면,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

츠카 코우헤이는 2010년 1월 1일 병상에서 남긴 유언에서 "돌아보면 부끄러움이 많은 인생을 살았다"고 고백하고 있지만 부끄러움이 없는 인간은 일본인이든 한국인이든 쓰레기라고 경멸할 만큼 그 누구보다도 더 '부끄러움'이 무엇인지를 자각하고 실천했던 예술가였다.

먼저 가는 자는 뒤에 남는 자에게 괴로움을 끼쳐서는 안 된다는 신조로 자신이 죽은 후에도 일체의 의식을 사양하고 다만 유골은 사랑하는 딸의 손으로 한국과 일본 사이 대한해협에 뿌려달라고 부탁했던 이 아름다운 남자를 나는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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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난 4월 29일 발행된 '프레시안 books' 37호에 실린 선대인 김광수경제연구소 부소장의 반론에 대한 홍헌호 시민경제사회연구소 연구위원의 재반론입니다. 애초 이 논쟁은 4월 22일 발행된 '프레시안 books' 36호에 실린 홍헌호 연구위원의 <프리라이더>, <세금 혁명> 서평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관련 기사 : 홍헌호('문국현 오류'를 극복해야 진보가 산다!), 선대인("세금 혁명을 해야 대한민국이 산다!")

나는 지난 22일 '프레시안 books'에 선대인 김광수경제연구소 부소장의 책 <프리라이더>, <세금 혁명>(더팩트 펴냄)에 대한 서평을 썼다. 이에 대해 선대인 부소장이 29일 역시 "세금 혁명을 해야 대한민국이 산다!"라는 제목으로 반론문을 실었다. 이 글은 그의 반론에 대한 재반론이다.

선대인 부소장의 책에 대해서는 진보 진영 내부에서 응원하는 쪽과 우려하는 쪽으로 나뉘는 것 같다. 전자는 그의 파이팅에 주목한다. 반면 후자는 그의 '50조/50조' 전략이 지나치게 단선적이고 비현실적이어서 오히려 위험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단선적이고 비현실적인 대안, 위험하다


▲ <세금 혁명>(선대인 지음, 더팩트 펴냄). ⓒ더팩트
단선적이고 비현실적인 대안이 위험하다는 것은 노무현 정부 때 일부 부동산 전문가들이 생생히 보여 주었다. 당시 일부 부동산 전문가들은 부동산 보유세만 인상하면 모든 게 해결된다고 주장했다. 분양가 상한제는 시장 친화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거부했고, 금융 대출 규제에는 관심도 없었다. 결국 이들에 많이 의존했던 노무현 정부는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주식 투자자들의 격언 중에 이런 말이 있다.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마라." 정책도 마찬가지다. 현실성 있는 여러 정책들을 융단 폭격식으로 투하해야 역기능을 최소화하면서 순기능을 최대화할 수 있다.

선대인 부소장이 "생산 경제 부문에 대한 세금을 줄이고 자산 경제 부문에 대한 세금을 늘려가야 한다"(<프리라이더>, 110쪽)고 주장한 부분도 우려되는 대목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1965년과 2007년 사이 회원국들의 GDP 대비 소득세 부담률은 7.0%에서 9.4%로 상승했고, 법인세 부담률은 2.2%에서 3.9%로 상승했다. 사회보장세 부담률도 4.6%에서 9.1%로 상승했으며, 소비세 부담률은 9.6%에서 10.9%로 상승했다. 반면 자산 관련세 부담률은 1.9% 수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 OECD 회원국들의 GDP 대비 세목별 부담률(1965~2007년). ⓒOECD

물론 선대인 부소장의 의도대로 자산 관련세 세수를 대폭 늘릴 수 있고, 토건 관련 정부 예산을 대폭 줄일 수 있다면 큰 문제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비현실적인 대안에 그칠 경우 노무현 정부 때의 부동산 보유세 만능론자들처럼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될 수 있다.

나는 선대인 부소장의 선의를 의심하지 않으며, 개혁에 대한 열정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너무나도 중요한 부분에서 의견이 갈려서 반론형 서평이 불가피했음을 밝혀둔다. 아래 본론은 독자들이 되도록 편하게 읽도록 하기 위해 대화문으로 풀어 보았다.

토지 보상비의 많은 부분은 정부 예산과 무관하다

선대인 : 토지 보상금은 매년 국토해양부가 집계해 발표하고 있다. 지장물 보상비를 포함한 토지 보상비는 2006년 29.9조 원, 2007년 25.2조 원, 2008년 22.5조 원, 2009년 34.8조 원 등으로 매년 22조~35조 원 수준에 이른다. 정부에서 공식 발표한 토건 예산과 토지 보상금만 합쳐도 매년 68조~81조 원 규모가 되는 것이다.

홍헌호 : 재정 전문가들은 바로 알아차렸겠지만, 25조 원 내외의 토지 보상비가 정부 예산(중앙·지방 정부의 예산)에 그대로 반영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공사)나 SH공사 등 공기업은 수많은 주택 단지와 산업 단지를 조성하면서 토지 보상을 한다. 그러나 토지 보상비 중 정부 예산에 반영되는 액수는 비전문가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적다.

판교 신도시 개발을 예로 들어보자. 거액의 토지 보상이 이루어졌지만 그 과정에서 정부 예산은 거의 들어가지 않았다. 토지 보상금은 고스란히 주택, 상가, 사무실 등을 분양할 때 분양가에 반영되었다. 엄청난 개발 이익이 발생하는 신도시 등을 건설하고 토지 보상을 하면서 그 비용을 예산으로 충당할 만큼 정부와 지자체가 그렇게 바보스럽지 않다.

물론 공기업 중 일부가 철도, 도로, 댐을 건설하기 위해 토지 보상을 할 때 국가 예산이 들어가는 경우는 있다. 그러나 그것도 이들의 여러 사업 중 일부분일 뿐이다.

한국수자원공사를 예로 들어보자. 4대강 사업이 추진되기 전인 2008년 말 이사회 의결을 거친 2009년도 한국수자원공사 예산서에 따르면, 한국수자원공사의 총사업비는 3조2580억 원이었고, 이 중 투자 사업비가 1조6810억 원, 관리 사업비가 1조4338억 원이었다. 정부 지원금은 얼마였을까. 4416억 원이었다. 이 중 대부분은 댐 건설비 명목으로 지원되었다.

수공의 사업비 1조6810억 원은 필자가 서평에서 소개한 공공 부문 건설 투자액 45~50조 원에 산입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중 정부 예산과 관련되는 것은 4416억 원 뿐이다.

한국도로공사는 어떨까. 이들은 2010년 정부로부터 1조728억 원의 출자금을 받고, 2조9787억 원의 통행료를 징수했다. 그리고 3조4억 원을 들여 고속도로를 건설하고, 3624억 원을 들여 도로를 개량했으며, 2849억 원을 들여 고정자산을 취득했다. 이 공사의 경우에도 3조4000억 원 이상이 공공 부문 건설 투자액 45~50조 원에 산입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중에서 정부 예산과 관련되는 것은 1조1000억 원 정도뿐이었다.

따라서 선대인 부소장처럼 25조 원 내외의 토지 보상비가 정부 예산에 25조 원 그대로 반영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또 공공 부문 건설 투자비 46조 원(2008년)이 전부 다 정부 예산에 46조 원 그대로 반영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선대인 부소장은 반론문에서 "정부에서 공식 발표한 토건 예산과 토지 보상금만 합쳐도 매년 68조~81조 원 규모"가 될 것이라 주장하며, 매년 68조~81조 원 전부가 중앙·지방 정부 예산에 반영되는 것처럼 주장했다. 전혀 근거 없는 주장이다. 나는 공공 부문 토건 투자비 42조 원과 토지 보상비 25조 원, 도합 67조 원 중 60% 정도가 예산에 반영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토건 투자비 42조 원은 46조 원의 건설 투자비에서 4조 원 이상의 건설형 산업 설비를 제외한 액수다.)

67조 원 중 60% 정도가 예산에 반영되어 있다면 그 액수는 얼마인가. 40조 원이다. 이 중 20%를 절감한다면 8조 원의 예산 절감 효과가 있고, 선대인 부소장의 의도대로 30%를 절감한다면 12조 원의 예산 절감 효과가 있을 것이다.

물론 보다 더 정확한 수치를 산출해 내려면 300개에 달하는 공공 기관 전부에 대한 정밀한 조사 작업을 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 공공 기관들이 대부분 세부적인 사업 내역을 충실히 공개하지 않고 있어서 연구에 어려움이 많다. 선대인 부소장이 개정판을 낸다면 그 부분을 충실히 연구해서 수정, 보완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설비 투자를 감축하자? 설득력 없다!

선대인 : 내가 언급하는 하드웨어형 토건 사업은 건설에 더해 각종 기계 설비류 등과 불필요한 토건 사업 과정에서 발생하는 예산 사업을 모두 포함하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기계 설비류는 일반기계/ 전기기계 및 장치/ 전자통신기기/ 컴퓨터 및 사무용 기기/ 정밀기기/ 수송 장비 등을 포괄하는 것으로 한 해 공공 부문 투자액이 약 20조~30조 원에 이른다.

홍헌호 : 한국은행은 투자를 크게 설비 투자와 건설 투자로 나누고, 설비 투자를 일컬어 기계류와 수송 장비를 취득하는 행위라 정의하고 있다. 선대인 부소장이 말하는 "일반기계/ 전기기계 및 장치/ 전자통신기기/ 컴퓨터 및 사무용 기기/ 정밀기기/ 수송 장비 등"은 한국은행이 집계하는 설비 투자에 포함된다.

설비 투자를 감축하자고 하면 국민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대부분 고개를 가로저을 것이다. 경제적 효율성 측면에서 설비 투자는 건설 투자나 복지 지출에 비해 우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보 진영은 정부로 하여금 설비 투자를 보다 더 효율적인 부분에 하도록 요구해야지 그 규모를 감축하라고 요구해서는 안 된다.

건설 투자 중 건설형 산업 설비 투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통계청에 따르면 건설형 산업설비는 하수·폐수 종말처리장, 쓰레기 소각장, 발전소 시설, 송유관·가스관, 유류·가스 저장 시설, 산업 생산 시설 등을 포함한다. 전체 건설 투자 중 10%가 건설형 산업 설비 투자다. 이것들도 성격상 함부로 감축하기 어렵다.

많은 전문가들이 '토건이 문제'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 '건설이 문제'라는 표현보다는 더 정확한 것이다. 왜냐하면 토건 투자란 건설 투자 중에서 건설형 산업 설비 투자를 제외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또 "한 해 공공 부문 (설비)투자액이 약 20조~30조 원에 이른다"는 선대인 부소장의 주장도 근거 없는 것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08년 우리나라 공공 부문 투자액은 모두 51조 9519억 원이었고, 이 중 건설 투자가 46조 2076억 원, 이외의 투자가 5조 7443억 원이었다. (기타 투자 5조 7443억 원의 대부분은 설비 투자라 추정된다.)

요컨대 공공 부문 설비 투자액 5조 원 이상을 함부로 감축하기 어렵다. 경제적 효율성 측면에서 설비 투자는 건설 투자나 복지 지출에 비해 우월하기 때문이다. 건설 투자액 46조 원 중에서 10%에 해당하는 4.6조 원의 건설형 산업 설비 투자액도 마찬가지다.

부동산세 개편 효과, 20조 원이 아니라 6조 원

선대인 : 부동산 보유세만 해도 미국의 경우 실효세율이 평균 1%가 넘어가지만 국내의 경우 실효세율이 0.1%도 채 안 된다 (…) 나는 부동산 자산 규모에 비해 부동산 보유세율 0.5%는 크게 과도한 것이 아니라고 보므로 취등록세를 지금보다 7조 원 가량 덜 걷는다 하더라도 합쳐서 20조 원 가량은 더 거둘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목표로 하는 실효 보유세율을 미국처럼 1% 이상으로 하지 않고 0.5%로 잡은 것은 이 또한 부동산 가치 하락 등을 염두에 두고 보수적으로 잡은 것이다.

홍헌호 : 먼저 보유세 실효세율을 0.5%로 올리자는 선대인 부소장의 주장이 과하다고 보진 않는다. 문제는 그가 언급한 0.1%라는 수치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이다. 0.1%라는 수치는 도대체 어떻게 나오게 되었을까.

선대인 부소장은 그의 책, <프리라이더>에서 "한국은행 자료에 따르면 국내 주택 보유세의 실효세율은 0.17~0.52%"(78쪽)라고 서술하고, 이 수치는 실거래가의 절반 수준만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계산한 실제 부동산 보유세 부담률은 형편없이 낮게 나타"난다고 말한다. 그래서 나온 게 0.1%라는 수치다.

그러나 필자가 조사해 본 결과 "0.17~0.52%"이라는 수치는 한국은행이 아니라 재정경제부가 발표한 것이었으며, 재정경제부는 "0.17~0.52%"라는 수치를 발표하면서 이것이 '시가 대비 보유세 비율'임을 명확하게 표시하고 있었다. (0.17%는 재산세 실효세율, 0.52%는 종부세 실효세율, 평균은 0.22%, 2006년 기준) 즉 0.1%라는 수치는 저자의 오해가 낳은 가공의 수치였던 셈이다.

2006년 주택 보유세 실효세율이 평균 0.22%였다면 지금은 어느 정도 수준일까. 필자의 추정 결과 0.2% 정도였다. 노무현 정부가 도입한 종합부동산세 등의 영향으로 2008년에는 0.26%까지 올라갔으나 그 이후 현 이명박 정부의 감세 정책의 영향으로 다시 0.2%로 내려앉았다.

주택 보유세 실효세율이 현재 0.2%라면 그것을 어느 정도까지 올려야 할까. 선대인 부소장은 0.5%를 목표로 삼고 있고 필자도 이에 동의하고 있다. 문제는 0.1%에서 0.5%로 올리는 경우와 0.2%에서 0.5% 올리는 경우 그 차이가 엄청나게 크다는 것이다.

선대인 부소장은 주택 보유세 실효세율을 0.1%에서 0.5%로 올릴 경우, 주택 보유세 세수가 5.7조 원에서 32.5조 원으로 늘어나 결과적으로 26.8조 원의 증세가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나 OECD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최근 보유세액은 8.7조 원이고, 재정경제부 자료로부터 추정해 보면 실효세율은 0.2%다.

따라서 OECD와 재정경제부 자료를 근거로 주택 보유세 실효세율을 0.2%에서 0.5%로 올릴 경우 그 세수 증액 효과는 선대인 부소장과 사뭇 달라진다. 현재 8.7조 원(실효세율 0.2%)의 세수가 그것의 2.5배인 21.8조 원(실효세율 0.5%)이 되는 것이고, 따라서 세수 증액 효과는 26.8조 원이 아니라 13.1조 원이 된다.

선대인 부소장은 또 보유세 실효세율을 0.5%로 올리면 "취등록세를 지금보다 7조 원 가량 덜 걷는다 하더라도 합쳐서 20조 원 가량은 더 거둘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20조 원은 6조 원으로 바꿔 써야 옳다. 26.8조 원에서 7조 원을 빼면 약 20조 원이지만, 13.1조 원에서 7조 원을 빼면 약 6조 원이 되기 때문이다.

요약과 결론 : '50조/50조'가 아닌 '12조/12조'

요약하며 글을 맺는다. 내가 선대인 부소장의 '50조/50조' 전략에 우려를 표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선적이고 비현실적인 대안이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의 의도대로 자산 관련세를 대폭 늘릴 수 있고, 토건 예산을 대폭 줄일 수 있다면 큰 문제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비현실적인 대안에 그칠 경우 노무현 정부 때의 일부 부동산 보유세 만능론자들처럼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될 수 있다.

선대인 부소장은 토건 예산과 토지 보상비만 합쳐도 매년 68조~81조 원 규모가 된다며, 68조~81조 원 전부가 정부 예산에 반영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전혀 근거 없는 것이다. 나는 공공 부문 토건 투자비 42조 원과 토지 보상비 25조 원, 도합 67조 원 중 60% 정도, 즉 40조 원이 예산에 반영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이 중 20%를 절감한다면 8조 원의 예산 절감 효과가 있고, 30%를 절감한다면 12조 원의 예산 절감 효과가 있다.

선대인 부소장은 또 자신이 언급한 하드웨어형 토건 사업은 "건설에 더해 각종 기계 설비류 등을 (…) 포괄하는 것으로 한 해 공공 부문 (설비)투자액이 약 20조~30조 원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계 들이고 일자리 만드는 설비 투자를 감축하자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진보 진영은 정부로 하여금 설비 투자를 보다 더 효율적인 부분에 하도록 요구해야지 그 규모를 감축하라고 요구해서는 안 된다. 한 해 공공 부문 (설비) 투자액이 약 20조~30조 원에 이른다는 그의 주장 또한 근거가 없는 것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5~6조 원 규모다.

선대인 부소장은 주택 보유세 실효세율을 0.1%에서 0.5%로 올릴 경우, 5.7조 원의 보유세 세수가 32.5조 원이 되어 26.8조 원의 증세가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나 OECD에 따르면 우리나라 최근 보유세 세수는 8.7조 원이고, 재정경제부 자료로부터 추정해 보면 실효세율은 0.2%다. OECD와 재정경제부 자료를 근거로 하여 실효세율을 0.2%에서 0.5%로 올리면 8.7조 원의 보유세 세수가 그것의 2.5배인 21.8조원이 되어 증세 규모는 13.1조 원이 된다.

선대인 부소장은 또 보유세 실효세율을 0.5%로 올리면 "취등록세를 지금보다 7조 원 가량 덜 걷는다 하더라도 합쳐서 20조 원 가량은 더 거둘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20조 원은 6조 원으로 바꿔 써야 옳다. 27조 원에서 7조 원을 빼면 20조 원이지만, 13조 원에서 7조 원을 빼면 6조 원이 되기 때문이다.

선대인 부소장의 1가구 1주택 양도소득세 증세안과 임대소득세 증세안은 아직 그 내용이 구체적이지 않아서 분석하기 곤란하다. 다만 그의 부동산 관련세 개편안(보유세 증세+거래세 감세+양도소득세·임대소득세 증세)으로 10~12조 원 정도의 세수 확보는 가능하리라 본다.

요컨대 필자는 선대인 부소장의 책, <프리라이더>에서 제시된 대안 중 공공 부문 건설 투자, 설비 투자, 토지 보상비 절감을 통해 12조 원, 부동산 관련세 증세를 통해 10~12조 원, 도합 22~24조 원의 재원 확보가 가능하리라 본다. 그가 이 책에서 주장한 100조 원(50조 원+50조 원)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다행스러운 것은, 선대인 부소장이 3월 말에 내놓은 <세금 혁명>이라는 책에서는 야당들과 시민단체의 주장을 받아들여 15조 원 규모의 조세 감면 감축안을 추가했고, 나의 서평에 대한 반론문에서는 10~20조 원의 부자 감세 철회안을 받아들여 이들과의 공유 면적을 넓혀가고 있다는 점이다. 앞으로 그 면적이 더 넓어지기를 기대한다.

덧붙임 : 논쟁이 장기화될 경우 불필요한 감정 대립으로 나아갈 우려가 있다는 주변의 충고를 받아들여 선대인 부소장의 반론에 대한 필자의 재반론은 여기에서 끝내기로 결정하였다. 이 글에 대한 선대인 부소장의 재반론이 있을 경우, 그것에 대한 나의 견해는 논쟁 이외의 방식을 통해 피력할 예정이다.

나는 선대인 부소장의 선의와 개혁에 대한 열정을 의심하지 않는다. 다만 책을 내기 이전에 외부 연구자 초청 토론회 등을 열어서 논쟁이 될 만한 부분을 걸러 내거나 수정하는 과정을 거쳤으면 하는 바람이다. 선대인 부소장이 앞으로 내놓게 될 새로운 책에 대해서도 대중들의 변함없는 사랑이 쏟아지기를 바라며 나의 반론은 여기에서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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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꼭 필요한 물은 아무런 경제적 가치도 없는데, 별로 사용하지도 않는 다이아몬드는 왜 이렇게 비쌀까? 1776년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을 저술하면서 부딪힌 이 딜레마를 '애덤 스미스의 딜레마'라고도 부른다.

아마 애덤 스미스가 오늘날 살았다면, 이런 문제에 그렇게 논리적으로 고민하지는 않아도 좋았을 것 같다. 우리도 1991년 낙동강 페놀 사건 이후로 물을 사 먹는 게 부자, 아니 부자는 아니더라도 중산층의 상식처럼 되었다. '물은 사 먹으면 되잖아?' 이게 한국 중산층의 상식일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될 리가 있나?

세상에 대가 없는 일은 없다. 우리가 마시는 생수를 공급하기 위해 오래된 지하 대수층을 건드리거나 협곡의 생태계를 무너뜨리게 되고, 점점 더 상상치도 못했던 깊은 곳의 태곳적 생태계도 무너뜨리게 된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스스로 '마피아'를 형성하면서, 물 공급 민영화와 함께 신자유주의를 공고히 하고, 동시에 깨끗한 수돗물에 고의로 위협 요소를 준다. 필요하지도 않는 댐이나 보 공사를 은근히 부추기는 사람들은 토건업자와 인근의 토지 소유자만이 아니라 생수 공급자이기도 하다. 물이 더러워지고 수돗물이 지저분해질수록, 생수는 잘 팔리게 되니까.


▲ <생수, 그 치명적 유혹>(피터 H. 글렉 지음, 환경운동연합 옮김, 추수밭 펴냄). ⓒ추수밭
간단해 보이지만 사실은 생각보다 깊숙이 작용하는 이런 자본의 메커니즘을, 드디어 체계적으로 조망한 책이 나왔다. 저자는 수돗물 연구로 일명 '천재상'으로 불리는 '맥아더 펠로우십(MacArthur Prize Fellowship)'을 수상한 피터 글렉이다. 생태학 분야에서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비운의 천재 맥아더를 애석해 하면서 사람들이 만든 이 재단의 후원을 받는 것은, 관련 분야에서 최고의 영예이다. 결국 세계 최고 수준의 물 전문가가 된 피터 글렉은 2010년 <생수, 그 치명적 유혹(Bpttled and Sold)>(환경운동연합 옮김, 추수밭 펴냄)이라는 책을 내놓았다.

그의 조사로 우리가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진짜 충격 그 자체이다. 우리는 가뜩이나 사막화 현상에 대해서 국제연합(UN) 등 세계적 차원에서 어떻게 해야 사태를 악화시키지 않을까 고민하는 중이다. 그런데 다국적 기업 네슬레가 그런 사막의 오아시스에 담긴 물을 생수로 공급해서, 결국 아프리카를 더욱 더 곤란한 상태로 만들어가는 장면은 충격적이다 못해 전율이 흐를 정도였다.

아무 생각 없이 집어 드는 생수 한 병이지만, 과연 플로리다에서 북극의 물을 마시는 게 도덕적으로 옳은 것인가, 혹은 생태적으로 효율적인가, 그런 질문을 해보지 않을 수 없다. 물 민영화와 생수 산업화, 결국 그 대가는 지구의 어느 한 구석에서 누군가 생태적으로 지불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현지에서 피해보는 사람들에게 그 지급금이 가지는 않는다. 여기나 저기나, 가난한 사람의 고통은 배가 된다. 생수 공급이 원활한 일부 국가에서는 수돗물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한 노력에 게을러지게 마련이다. 지금 우리의 모습이 그런 것 아닌가? 생수도 공급하고, 물도 안전해지고? 그렇게 모든 게 이루어지기는 어렵다.

이렇게 진행되다 보면, 결국 도시의 중산층은 수돗물의 중요성을 망각하므로, 정부는 지표수와 지하수를 지키는 데 필요한 노력을 덜 기울이게 된다. 아주 남의 얘기가 아니다. 자, 여러분 생수병을 한 번 들어보시라. 충분한 정보가 있지 않지만, 과연 이런 지하수가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생태계에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장기적으로 공급이 가능할 것 같아 보이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시길. 책의 후반부에는 서울환경운동연합에서 한국의 현황 및 우리가 나아가야할 방향에 대해서 정리되어 있다.

지난 10년간 생수 산업을 일으키고 물 민영화로 국제 경쟁력을 갖추고 외화를 벌어오자는 얘기가 한국을 지배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결국 물을 빼앗기는 지역의 생태계가 무너지고 가난한 사람들은 수돗물을 비싸게 먹고, 장기적으로는 부자들도 생수 아닌 물을 마실 수 없게 되므로, 강물을 안전하게 지키고 지하수를 보존하자는 또 다른 논리가 있었다.

이 두 개의 힘은 팽팽하지는 않았다. "우리나라는 물 부족 국가"라는 논리와 국가를 등에 업고 한 편에서 일방적으로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그러나 피터 글렉의 이 책을 읽고 물을 공공의 영역에서 안전하게 관리하고 공급해야 한다는 시민이 늘어나게 되면, 우리는 '생수파'와의 10년 이상 지속된 싸움에서 처음으로 승기를 잡을 수 있게 된다. 안전한 물 그리고 상업적이지 않은 물, <국부론> 이후 무너진 상식을 우리가 다시 세울 수 있기를 바란다.

자신의 물만 안전하게 해서는, 우리 자식들이 안전하게 마실 수 있는 물과 안전한 생태계를 물려줄 수가 없다. 귀여운 아기를 생수로 목욕시켜줄 것인가, 아니면 그가 평생 안전하게 있을 자연의 물을 물려줄 것인가, 우리도 선택할 순간이 다가온다. 제주도 물을 서울 사람들이 마시는 상황에서, 온실 기체 대책도 없고, 원자력 발전소 추가 건설을 막을 방법도 없다.

생수는 이제, 경제와 생태의 한가운데를 가르는 핵심 이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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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은 묻지도 않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이놈이 꼭 제 증조부님을 닮았다거든."
"게다가 날 닮은 데가 있어."
"어디?"
M은 강보를 들치고 어린애의 발을 가만히 꺼내어 놓았습니다.
"이놈의 발가락 보게. 꼭 내 발가락 아닌가. 닮았거든……."
M은 열심히, 찬성을 구하듯이 내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얼마나 닮은 곳을 찾아보았기에 발가락 닮은 곳을 찾아내었겠습니까? (김동인의 <발가락이 닮았다> 중)

<발가락이 닮았다>에 등장하는 M만큼 부성 불확실성(paternity uncertainty)으로 번뇌하는 인간 남성을 잘 보여 주는 예가 또 있을까. 젊은 시절의 방탕한 생활로 생식 능력을 잃은 것이 거의 확실시되는 M은 그 사실을 숨기고 결혼에 골인하지만, 아내가 임신을 했다는 소식에 어찌할 바를 모른다. 두 가지 갈래 길에서 만일 M이 "그래, 선택했어!" 하고 외치며 생식 능력을 검사하기로 결정한다면, 아내 뱃속에 있는 자식이 제 자식인지, 외간 남자의 자식인지는 확실해질 것이다.

물론 그와 함께 아내의 간통 여부도 명백히 밝혀질 것이고 말이다. 만일 검사하지 않기로 결정한다면, 지금 당장은 불편한 진실을 대면하지 않아도 될지 모르지만 죽을 때까지 고통스러운 의심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M은 후자를 택했다. "절망을 스스로 사지 않으려, 그리고 번민 가운데서도 끝끝내 일루의 희망을 붙여 두려 온전히 '검사'라는 위험한 벌의 둥지를 건드리지 않기로 한 것이다."

부성 불확실성은 비단 인간 남성만이 짊어진 생물학적 굴레는 아니다. 모름지기 암컷의 체내에서 번식이 이루어지는 생명체라면 그 어떤 수컷도 부성 불확실성의 그늘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1970년대 초 북아메리카 대륙 소택지에서는 수많은 붉은날개지빠귀 M과 그 아내들이 발견되어 학계가 발칵 뒤집히는 일이 벌어졌다.

겨울철 농작물에 해를 끼치는 붉은날개지빠귀의 개체 수를 줄여 볼 요량으로 수컷을 잡아다 정관 절제 수술을 시도했는데(붉은날개지빠귀는 수컷 한 마리가 암컷 여러 마리를 거느리는 일부다처제(polygamy)를 유지하는 탓에 암컷을 많이 거느린 으뜸 수컷부터 수술대에 올랐다), 최첨단 의료 기술이 무색하게도 개체 수는 그다지 줄어들지 않았다. 불임인 수컷의 배우자 암컷들이 다른 변방의 수컷들로부터 멀쩡한 정자를 얻어다 자식을 낳았던 것이다. 물론 인간 남성 M과 달리, 수컷들은 자신의 생식 능력이 바닥이 났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으며, 마찬가지로 암컷들 또한 수컷의 불임 여부와 상관없이 바람을 피워 댔지만 말이다.

인간 세계에서 유전자를 이용한 친자 확인법이 등장하면서 눈초리, 콧날, 귓불, 심지어는 인중과 발가락까지 동원해 가며 제 자식인지 아닌지를 거듭 확인하던 수고로움이 사라지고 머리카락 한 가닥으로 삽시간에 모든 의문을 날려 버릴 수 있게 되었듯이, 분자 생물학적 기법은 새들의 가족 관계 등록부에도, 그리고 더 나아가 새들의 짝짓기 방식에 대한 우리 인간의 사고에도 혁명의 바람을 몰고 왔다.

분자 생물학이 발달하기 전까지는 많은 새들에서 암수 한 쌍이 짝을 맺고 새끼를 낳아 기르는 일부일처제(monogamy)를 채택하고 있다고 여겨졌다. 조류학자 데이비드 랙은 새들의 90퍼센트(%) 정도가 이러한 일부일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주장하기까지 했고 자연 상태에서 관찰, 수집된 정보들은 랙의 주장을 뒷받침해 주는 듯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DNA 검사가 기술적으로 가능해지고 심지어 일상화되자, 대부분의 종이 짝외교미(Extra Pair Copulation, EPC), 즉 혼외정사를 벌인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둥지 내 새끼들과 그 부모 새들의 혈액 샘플을 채취하여 친자 확인을 해 보니, 적어도 새끼 한두 마리는 옆집 아저씨든, 길 건너 사는 아저씨든, 하여간 씨가 다른 자식이었던 것이다(그렇게 해서 생긴 용어가 사회적 일부일처제(social monogamy, 겉으로 보기에 함께 둥지를 짓고 새끼를 기르는 부부 결합)와 사회적 수컷이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조류학이 뿌리부터 뒤흔들린 순간이었다. 동 트기 전부터 쌍안경에, 수첩에, 바리바리 싸 들고 해 떨어질 때까지 새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 조류학자들, 행동 생태학자들이 느꼈을 배신감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듯하다. 도대체 왜 이렇게 다른 결과가 도출되었던 것일까?

그것은 바로 새들의 하룻밤의 정사(情事) 또한 인간과 다를 바 없이 아무도 모르게 은밀한 곳에서, 게다가 눈 깜짝 할 사이에 이루어지는 때문이다. 영역이든 먹을거리든 수컷이 보유한 자원에 기대 새끼를 양육해야만 하는 암컷의 입장에서는 바람을 피웠다 발각되기라도 하는 날에는 모든 것을 잃게 될 위험에 처한다. 배우자로부터 자원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아 새끼들을 성공적으로 길러 내기 위해서는 절대 의혹을 살 만한 상황, 즉 바람피우는 장면을 들켜서는 안 되며, 따라서 신중을 기해 하룻밤의 정사를 벌이는 탓에 아무리 눈치 빠르고 뛰어난 관찰력을 자랑하는 인간 과학자라 할지라도 그 장면을 목격하기가 힘든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마 전 세계 곳곳의 야생에서 새들의 간통 장면을 목격하겠다고 두 눈을 부라리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실패의 쓴잔을 마시고 터덜터덜 숲길을 되돌아 나오는 생물학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시련 따위 상관없이 20여 년간이나 꿋꿋이 새들의 사생활을 캐는 일에 매진하고 있는 여성 학자가 한 명 있으니, 바로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대륙을 종횡무진하며 명금류(참새목의 노래하는 새들)의 행동을 연구하고 있는 동물 행동학자이자 <암컷은 언제나 옳다(Bird Detective)>(정해영 옮김, 이순 펴냄)의 저자인 브리짓 스터치버리이다.


▲ <암컷은 언제나 옳다>(브리짓 스터치버리 지음, 정해영 옮김, 이순 펴냄). ⓒ이순
스터치버리는 스스로를 새 탐정(Bird Detective, 원제이기도 하다)이라고 부른다. 불륜의 현장을 검거하기 위해 스리슬쩍 아내나 남편을 미행하고 모텔로 숨어들어 카메라 셔터를 누를 기회를 엿보는 우리네 흥신소 사람들처럼 몰래 새들의 뒤를 쫓으며 간통의 증거란 증거는 죄다 수집한다. 물론 자신의 배우자가 바람을 피운다고 의심하는 아내나 남편으로부터 사실 여부를 확인해 달라는 의뢰를 받은 적은 절대 없지만 말이다.

<암컷은 언제나 옳다>는 그런 저자의 20여 년간의 야생 조류 관찰기 내지는 야생 조류 탐험기를 담은 책이다. 펜실베이니아 북서부에 있는 집 근처 숲의 아카디아딱새에서부터 파나마 열대림에 서식하는 흙색울새에 이르기까지, 저자의 레이더에 걸렸다 하면, 사생활은 물론 요즘 말로 신상이 탈탈 털리고 만다.

새 탐정의 업무는 새들에게 개별적으로 소형 무선 추적 장치와 이름표(개체 인식표)를 달아 주는 것에서 시작된다. 정해진 때에 맞춰 행동 하나하나를 기록하는 것은 물론이고, 특히 외간 새와 하룻밤 만리장성을 쌓으러 몰래 빠져나온다 싶으면, 숲을 헤치며 쏜살같이 달려가 살금살금 뒤를 밟는다. 번식기에도 암컷이 수정을 하는 때가 가까워져 오면, 부부가 함께 있는지, 암컷이나 수컷의 외출이 잦은지, 수컷이 암컷에게 먹이를 얼마나 물어다 주는지, 침입자가 있는지, 침입자가 왔을 때 부부가 함께 방어에 가담하는지 등 새들의 일거수일투족이 감시와 관찰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역시 오랜 시간 동고동락하며 새들의 행동 관찰에 도가 튼 스터치버리에게도 간통 행각은 쉬이 발각이 되질 않는 탓에, 결정적인 증거는 분자 생물학의 도움(DNA 지문 검사법)을 빌리는 때가 많다.

스터치버리는 새 부부의 간통 행각을 발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엄연히 제 짝이 있는 암컷이 도대체 무엇 때문에 바람을 피우는 것인지, 그 이유를 찾는 데에도 주력한다. 물론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실제 연구 결과 총각 수컷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경우 짝외교미의 상대 수컷은 이웃집이거나 주변에 둥지를 틀고 있는, 즉 임자 있는 수컷들로 밝혀졌다(집집마다 복잡한 친자 관계를 일일이 확인하다 보면 분명 맞바람 사례도 발견이 될 것이다.).

또한 암컷이 직접 외간 수컷을 찾아 나서기도 했지만, 바람을 피우러 내 집 담을 몰래 타고 넘어온 외간 수컷을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어쨌든 둥지를 기준으로 그 속에서 난 새끼들과 둥지 소유주인 부모들의 친자 관계를 확인하다 보니, 수컷보다는 암컷의 간통이 먼저 명약관화하게 드러나는 터, 이 책에서는 우선적으로 암컷의 바람과 그 이유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저자는 암컷이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짝외교미를 시도하는 데에는 유전적인 보상이 따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몸집이나 싸움 능력이 좋은, 즉 좋은 형질을 지닌 수컷과 바람을 피운다면 자신의 자식에게도 그러한 형질을 물려주어 후대에서 다른 경쟁자들을 제치고 보다 번성하게 될 것이다(좋은 유전자 가설(good genes hypothesis)이라고 부른다). 또는 자신과 다른 MHC 단백질((Major Histocompatibility Complex, 주조직 적합성 복합체, 면역 반응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세포 표면 단백질)을 지닌 수컷을 찾아 짝짓기를 함으로써 자손으로 하여금 보다 향상된 면역 체계를 갖게 해, 번식 성공에서 암컷이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도 있을 것이다(유전적 적합성 가설(compatible genes hypothesis)).

그렇다면, 암컷의 바람기를 수컷들은 그저 넋 놓고 바라보고만 있을까? 까딱 하면 오쟁이를 져서 제 새끼도 아닌 녀석을 재우고 먹이고 금이야 옥이야 키워 결국에는 얼굴도 모르는 그 녀석 아비의 번식 성공도를 높여 주게 생겼는데, 그걸 가만히 두고 보고만 있을 수컷은 없을 것이다. 마치 두어 시간에 한 번꼴로 아내한테 전화를 걸어 어디에 있는지, 무얼 했는지 꼬치꼬치 캐묻거나 아예 모든 일을 내팽개치고 아내 뒤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는 의처증 남편처럼, 수컷 새들도 암컷을 쫓아다니며 "배우자 지키기(mate guarding)"에 돌입한다. 암컷이 둥지를 떠나 다시 둥지로 되돌아올 때까지 집요하게 쫓아다니며 암컷 근처에 접근하는 수컷이라도 있을라치면 맹공격을 퍼부어 아예 만남 자체를 원천봉쇄하려는 것이다. 교미하는 빈도수를 높여서 암컷 체내에 혹시 있을지도 모를 다른 수컷 정자와의 경쟁에서 양적 우위를 점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사실 이 책의 제목은 원서의 부제처럼(Investigating the Secret Lives of Birds) '새들의 은밀한 사생활' 정도가 적합할 듯싶다. 책 속 어디에서도 스터치버리는 암컷이든 수컷이든 새들의 특정 행동에 대해 옳다거나 그르다느니 하는 가치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단, 환경 오염과 기후 변화를 야기해 야생 서식지를 파괴하고 번식을 교란시켜 새들의 생존에 위협을 가하는 인간이라는 종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만큼은 유일하게 윤리적 잣대를 들이민다. 오랜 동안 야생에서 새들을 관찰하고 기록하며 동물 행동학계에 발을 담가 온 타짜인 저자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업계 불문율인 "자연주의적 오류(naturalistic fallacy, 사실에 관한 명제로부터 가치에 관한 명제를 추론하는 잘못)"를 범할 리는 없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한국어판 제목인 "암컷은 언제나 옳다"는 근본이 없으며, 괴상(乖常)하고, 지나치게 정치적이다.

책에는 짝외교미뿐만 아니라 부모 역할과 자식 양육, 지배 서열 관계, 영역 행동, 협동 양육 등 새들의 행동 생태에 관한 모든 것이 저자의 꼼꼼하고 자상한 관찰과 기록으로 담겨 있다. 드라마로 치자면 저녁 시간대에 온 가족이 둘러앉아 시청할 수 있는 일일 드라마에 가깝다. 새들 가족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일상을 온화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조곤조곤 설명하고 있는 스터치버리의 글을 따라 읽다 보면 어느 새 북아메리카 숲 한가운데 홀로, 포근한 햇살을 받으며 새 둥지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일일 드라마는 좀 심심하고 막장 드라마가 더 좋다, 내지는 새들 가족에서의 피비린내 나는 투쟁과 갈등의 역사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다 하시는 분들은 세계적인 조류학자 더글러스 모크가 쓴 <살아남은 것은 다 이유가 있다(More Than Kin And Less Than Kind)>(정성묵 옮김, 산해 펴냄)를 읽어 보기를 권한다. <카인과 아벨>, <헨젤과 그레텔>, 심지어는 최근 인기리에 종영이 된 드라마 <로열패밀리>보다 몇 배는 더 흥미진진하고 역동적인, 새 가족이 펼쳐 보이는 잔혹한 일상을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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