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의 보편성?

한 동안 푸대접을 받았던 개념인 자본주의가 부쩍 요란한 조명을 받는 듯 보인다. 2008년 미국을 덮친 금융 위기가 크게 한 몫을 하였을 것이다. 그 탓인지 이곳저곳에서 자본주의를 되돌아보자는 말들이 떠돈다. 그러나 정색을 하고 자본주의의 문제를 헤아려본다고 해서 자본주의에 어떤 큰 탈이 날 것 같은 조짐은 없다. 자본주의를 넘어서자는 말들을 들어보면, 사실은 '자본주의 불패론'을 우아하게 반복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차라리 사정은 반대쪽에 가까울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본주의에 관한 점잖고 진지한 토의가 필요하다는 경고 자체가 이미 사정은 자본주의에 유리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이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잘못을 고발하는 수많은 항의를 듣는다. 그리고 만악의 근원인 자본주의는 가공할 윤리적인 괴물로 격상된다.

또 이 때문에 우리는 역설적으로 안도한다. 그렇게 자본주의가 위력적인 것이라면 우리가 어떻게 상대할 수 있단 말인가. 아니면 우리는 가장 전형적인 기독교 신자처럼 그 사악한 세계를 대하도록 요청받는다. 그 결과 자신의 소박한 개인적 삶 안에서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윤리적 책임과 대면할 필요를 절감하면서 서둘러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결국 우리는 냉소적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거나("어쨌거나 자본주의는 돌아간다") 아니면 나부터 바뀌어야 한다는 강박적인 소명감으로부터 사소한 무엇이든 실천하겠다는 자세를 가다듬는다("결국 문제는 탐욕스러운 우리들 자신이었다"). 이는 지난 몇 년간 아마존닷컴 베스트셀러들이 잘 보여준다. 통제 불가능한 악으로 자본주의를 비난하는 책들과 식단을 짜는 것에서부터 성탄절 쇼핑에 이르기까지 세부적 일상생활의 습관을 바꿈으로써 자본주의에 대적하라는 윤리적 지침서들이 모두 동시에 잘 팔린다.

결국 자본주의의 위기라는 것은 매체가 만들어낸 신기루 같은 스캔들처럼 보인다. 우리 시대의 자본주의가 자신의 위기를 이처럼 용케 피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엄밀한 뜻에서 위기는 더 이상 지금과 같은 세계가 불가능해지는 지점을 가리킨다. 그렇기 때문에 위기는 당연시했던 모든 것을 혼란스럽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이제 자본주의 위기는 정반대로 '현상'한다. 그것은 어떤 조처로도 능가할 수 없는 힘으로서 혹은 너무나 유약하여 어디에서도 무너뜨릴 수 있는 무엇으로 보이게 된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는 다양한 원근법을 통해 현상하는 환상으로, 즉 부재하는 무엇이 재주를 부리는 윤리적 악몽으로 군림한다.


▲ <인지 자본주의>(조정환 지음, 갈무리 펴냄). ⓒ갈무리
조정환의 <인지 자본주의>(갈무리 펴냄)는 대작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이미 이탈리아 자율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로 잘 알려져 있고, 안토니오 네그리를 비롯한 이들의 이론과 정치적 전망을 열정적으로 소개하여 왔다. 나아가 이를 한국에서의 반자본주의적 운동 혹은 코뮤니즘적 이행의 정치로 변환시키고자 왕성하게 활동하여왔다.

이런 사정 속에서 <인지 자본주의>가 각별한 것은 그간의 작업에서 논의되었던 주요 주장을 종합하는 것이면서도 나아가 그가 제3기 자본주의라고 부르는 자본주의를 분석할 수 있는 일반 이론을 구성하려는 야심을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그는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성행한 비판적 지식인들의 이론적 행보와 거리를 둔다.

근대성 비판을 필두로 신자유주의 비판에 이르기까지 또 동아시아론이나 탈식민적인 이론적 민족주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장들이 꼬리를 물고 나타났다. 조정환은 이런 지적 유행과 달리 "자본주의와 그것의 모순과 한계에 대한 관심을 다시 한 번 진지한 관심의 대상으로" 삼을 것을 역설한다. 자본주의에 대하여 사유한다는 것이 보편적인 것에 대하여 사유하는 특별한 방식이라 한다면, 그는 바로 사유하는 지식인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다양하고 차이가 나기 때문에 즉 그 차이나는 개별성을 인식한다는 것은 사유한다는 차원에 끼지도 못한다는 것, 생각한다는 것은 차이나는 현실을 넘어 보편성을 사유하는 것에 있다는 바디우 같은 이의 생각을 떠올려보면 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의 보편성을 사유하려 시도하는 그의 작업을 통해 우리의 곁에도 사유하는 지식인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마르크스의 현대화?

제목인 <인지 자본주의>가 알려주는 것처럼 저자는 제3기 자본주의가 인지 자본주의라고 단언한다. 지금의 자본주의가 인지 노동의 착취를 주요한 특징으로 하는 자본주의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결론이 생산 혹은 노동의 문제 설정을 새로운 방식으로 자본주의 분석의 전면에 놓음으로써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또 이런 문제의식에 설 때 자본주의의 '거대한 전환'을 식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물론 이는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윤수종 옮김, 이학사 펴냄)이 현기증 나는 성공을 거둔 이후에 그리 낯설지 않게 된 생각들이라 할 수 있다. 자본은 더 이상 공장이나 사무실에서의 노동 시간 안에서 이뤄지는 직접적인 활동을 지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길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 따라서 전통적인 산업 노동자의 형상 속에서 자본에 종속된 자의 모습을 찾으려하는 것은 무망하다는 것, 우리가 만들어내는 다양한 집합적인 지적 활동과 사회적인 상호 작용 자체로부터 가치를 얻어내기에 자본은 삶정치적인 권력이 되었다는 것 등 말이다.

그런데 조정환은 이러한 역사적인 소묘를 지지할 수 있는 일종의 자본주의 일반 이론을 구성하고자 한다. 이는 마르크스의 (잉여)가치론을 특정한 역사적 시대(산업 자본주의)에 조응하는 입장으로 간주하고, 이를 변화된 자본주의의 현실에 맞게 수정하는 일로 이어진다. 따라서 그의 작업이 마르크스주의의 현실적인 재구성인지 아니면 마르크스주의로부터의 이탈인지라는 쟁점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는 완고한 '올드'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난감하게 하는 많은 쟁점을 포함하고 있을 뿐 아니라 마르크스의 결정적인 주장들에 대한 심각한 오해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먼저 저자는 가치 법칙을 수정하기 위한 중요한 전제로서 노동의 정체성이 어떻게 역사적으로 변화하여 왔는지 묘사한다. 그것은 전문 노동자에서 대중 노동자에서 인지적 행위자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서술된다. 수도원적 방식을 통해 영혼을 통제 대상으로 삼고 신체를 훈육, 감금, 격리라는 방식을 통해 통제하던 자본이 있다. 이 자본은 1871년과 1917년의 혁명으로 대표되는 노동의 저항에 직면하자 영혼 자체를 착취의 대상으로 삼는 방법을 취하게 되고 이것은 기계화로 나타난다. 다음으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인지적 행위자로서의 노동자가 지배하는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산업 생산은 에테르적인 정보 기계로 대체되고 사회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인지 공장으로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두 번째 단계의 국가였던 케인스주의적, 복지 국가는 대중의 공포에 토대를 둔 '핵국가' 혹은 '신경찰 국가'로 전환한다.

저자는 노동의 정체성이 이와 같이 역사적으로 변천한다는 가정에 근거하여 마르크스의 가치론을 수정해야 할 필요를 도출한다. 그는 마르크스가 생존할 당시 인지 노동 혹은 비물질적 노동이 자본 관계의 주변 혹은 외부에 놓여있는 역사적 조건에 갇혀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나아가 마르크스는 비물질적 활동들이 역사적으로도 포섭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본성적으로도 자본주의에 포섭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그의 생각에 따를 때 마르크스의 논리적 결론은 인지 노동이 지배적으로 되는 역사적 상황에서는 가치 법칙이 소멸하고 말 것이라는 것으로 이르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인지 노동이 상품으로 되고 있으며 또한 잉여 가치를 만들어내는 생산적 노동이 되었다면 이를 어떻게 분석할 것인가. 여기에서 조정환은 비물질 노동에 대한 가치 측정의 문제를 끌어들인다. 알다시피 마르크스에게서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은 자본의 가치 구성과 그것의 경향을 이해하기 위해서나 아니면 잉여 가치의 착취를 설명하기 위해서나 아주 중요한 범주임에 분명하다. 어쨌거나 노동력 상품의 가치는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을 통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것은 잉여 가치의 크기와 그 비율을 판별하기 위한 기준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조정환은 물질 노동에는 적절했을 사회적 필요노동시간 개념이 인지 노동에는 적용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것은 더 임의적이고 명령적이며 외부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생산의 사회적 관계로부터 가치를 규정하는 원리를 찾을 수 없다면 혹은 그가 말하듯이 척도는 이제 명령으로 전환되었다면,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은 자본의 폭력과 강탈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조정되어야 한다는 결론과 손쉽게 만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그가 이제 자본주의는 경제적 사회 구성체라기보다는 정치적 사회 구성체에 가깝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해서 크게 놀랄 일은 아닐 것이다.

권력의 사회학 혹은 정치경제학 비판

그런데 이런 식의 추론은 실은 생소한 것도 낯선 것도 아니라 할 수 있다. 서로 다른 모습을 한 채 마르크스 이전이나 이후에나 이런 방식으로 자본주의를 표상하려는 자본주의 비판의 기획은 있어 왔다. 잉여 가치가 축출되고 있다고 분개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불평등이든 아니면 빈곤이든 탈취이든 자본의 범죄를 고발하는 사람은 언제든지 있다. 그런 주장을 위해서는 약간의 양심과 도덕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마르크스주의에서 사정은 다르다. 노동 가치, 가치 법칙, 상품과 화폐의 양극성 같은 것을 부정한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이런 개념이 부정될 때, 다른 모든 개념들 역시 위기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주의는 그 토대부터 허물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런 처지에 놓인다면 마르크스주의는 흔하디흔한 도덕적 자본주의 비판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가치론을 역사유물론을 지탱하는 최소한의 공리로 고수하는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가치론을 위협하는 흐름들은 줄곧 쏟아져 나왔다.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흐름은 단연 포스트구조주의를 경유하여 등장한 가치론 없는 자본주의론, 간단히 말하자면 화폐라는 기호적 코드의 세계로서의 자본주의론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가치론을 화폐론으로 환원하고, 나아가 다시 화폐론을 노동에 관한 상징 이론으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화폐란 무엇인가. 이런 물음에 대해 그들은 간단히 상품의 언어이자 상징이라고 답한다. 따라서 화폐는 상품의 내적 모순의 표현이 아니라 상품을 표상하는 기호가 된다. 따라서 교환이 생산을 지배하게 되고 가치는 오직 화폐의 코드를 읽으면 알 수 있는 언어학적 게임의 효과인 것처럼 보이게 된다. 이러한 입장이 상품 없는 화폐의 세계를 가정한다면 이와 대조를 이루는 또 하나의 입장은 화폐 없는 상품을 가정하는 주장이다.

이 역시 가치론 없는 자본주의론을 구성한다. 교환이 생산을 규정한다는 앞의 주장에 반해 이들은 생산이 교환을 결정한다는 입장에 선다. 이들은 생산의 기술적 성격에 의해 가치가 결정된다는 입장을 취한다. 이는 리카도 유의 고전 경제학의 전통을 쇄신하여 자본주의에 접근하는 경제학자들이나 새로운 산업 혁명, 기술 혁명을 역설하는 사회학자들이 흔히 취하는 입장이다.

이들에게서 상품은 곧장 투명한 경제적 관계로 나타나게 된다. 이들에게서 상품이란 화폐로의 전화라는 도약이나 시련을 겪지 않은 채 곧장 이윤으로서 전유되는 것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입장은 생산의 기술적 조건에 대한 이해에 근거하여 사회를 하나의 거대한 공장, 생산 기계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따라서 상품과 화폐의 모순에 근거한 자본의 착취적 성격은 분배에서의 문제로 대신 된다.

따라서 이들은 임금, 이윤, 지대의 관계를 특별히 강조한다. 이 때문에 이들은 분배를 둘러싼 투쟁 속에서 계급 투쟁을 발견한다. 그 때의 계급이란 물론 마르크스적인 의미에서의 계급이라기보다는 서로 다른 소득의 원천을 갖는 사회 집단으로서의 계급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물론 이미 눈치를 챘겠지만 조정환의 인지 자본주의론은 이러한 가치론 없는 자본주의론이 가진 특성을 모두 공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본은 이제 직접적인 명령이 되었으며 경제적 과정에서의 착취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생각, 자본은 이제 지대 수취자가 되어 명령하는 권력으로서 작동한다는 주장은 화폐 없는 상품을 주장하는 입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이는 어쩌면 예정된 귀결인지도 모른다. 그가 노동 혹은 생산으로부터 자본의 존재론을 재구성한다고 하였을 때, 그것은 이미 구체적 필요노동과 추상적 노동의 모순, 그리고 이와 동일한 것인 상품과 화폐의 모순을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용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의 측면에 대한 강조가 아무리 중요할지라도 그것이 노동의 사회적 분업에 따른 노동의 사회화, 즉 노동의 노동력 상품으로의 전화를 통한 가치화를 피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노동의 정체성에 대한 관심이 노동의 상품적인 성격을 희생하는 것을 통해 이뤄지는 한 그것은 착취에 대한 이론이라기보다는 폭력이나 착복을 통해 자신의 힘을 행사하는 자본이라는 주장에 이르고 만다.

한편, 상품과 화폐의 양극성에 대한 무시에서 비롯된 또 하나의 편향인 상품 없는 화폐론 역시 명령으로서의 자본이라는 입장을 통해 고스란히 나타난다. 상품에 토대를 두지 않는 화폐란 결국 순수한 강제로 보일 수밖에 없다. 어떤 노동 생산물이 가치를 가지게 되는 것이 임의적, 외연적, 외부적이라면 그것은 결국 화폐를 사회적인 코드와 유사한 것으로 환원하는 일일 수밖에 없다. 이를 통해 자본은 다시 경제적인 착취를 통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으로서 이해된다. 결국 이럴 경우에 우리는 가치론을 수정하거나 폐기하는 인지 자본주의론이라는 것이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이라는 기획을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권력의 사회학'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인상을 떨치기 어렵게 된다.

자본의 보편성

견딜 수 없고 또 혐오스러운 현실을 우연스러운 변덕에 따른 것으로 귀착시키지 않고 그리하여 이 문제를 일으킨 몇몇 물신화된 형상들(그것은 마이크로소프트일 수도 있고, 조지 소로스일 수도 있으며 혹은 월스트리트일수도 있을 것이다)을 규탄하는 것에 머물지 않기 위하여, 자본주의의 일반적 원리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은 분명 가치 있는 일이다. 그렇지만 문제는 그러한 보편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쟁점이라 할 수 있다.

보편성을 이해하는 한 가지 방편은 그것은 숨겨진 본질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에 따를 때 보편성은 현상의 배후 속에서 언제나 변화무쌍하고 화려한 현상의 둔갑을 결정하는 불변적인 본질로서 작용할 것이다. 그렇다면 보편성은 사이비 신학이 되어버린 채 모든 역사적인 변화를 거부하는 몽매로 전락할 것이다. 이런 시점 속에서 어쨌거나 모든 변화는 단순히 속임수에 불과하고 역사는 본질을 기만하기 위한 환영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러나 보편성을 이해하는 또 다른 방식 역시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입장은 모든 경험적인 사실에서 나타나는 변화로부터 곧장 보편성을 끌어내는 것이다. 이것은 보편성을 모든 경험적 현상들을 매개하는 일반적인 원리로부터 찾으려 하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담론적인 산물은 미래학이라 할 수 있다. 미래학은 현상과 본질 사이에 좁힐 수 없는 거리를 강조하는 앞의 주장과는 대조적으로 현상은 곧 본질이라는 입장으로 나아간다.

미래학은 현상과 본질의 차이는 허위일 뿐이고 본질이란 현상들을 매개하는 언어의 산물에 불과하다고 강변한다. 그렇기에 본질이라는 깊이의 효과는 순전히 착각이며 지금 여기에 우리가 식별할 수 있는 현상을 조직하는 원리 자체로부터 이후 혹은 미래를 인식할 수 있는 법칙을 발견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알다시피 구조주의와 그 이후의 지적 유행으로부터 우리의 지적인 공적으로 성토할 수 있게 된 것은 본질주의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역사로부터 초연한 영구적인 본질을 강조하는 것보다 더 간단히 무시당하는 생각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인지 자본주의>에서 발견할 수 있는 위험 역시 이러한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자본의 새로운 보편성을 식별해야 한다는 초조감으로부터 미래학으로 전락할 위험에 빠져드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모든 변화가 전연 새로운 것이라는 것, 그리고 이로부터 '거대한 전환'을 가능케 한 결정적인 변화가 무엇인지를 규정해야 한다는 발상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자본주의 비판을 위해 필요한 보편성을 오인하는 조건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자본주의는 보편적이다. 그것은 숨겨진 본질이라는 점에서 그러한 것도 아니려니와 미래학적인 의미에서 스스로의 일반적인 특성을 끊임없이 갱신한다는 그런 뜻에서도 아닐 것이다. 새로운 자본주의의 등장 혹은 자본 없는 자본주의를 역설하여 온 수많은 경영, 경제 담론들이 주된 논거로 삼아온 지식 정보 경제 담론과 인지 자본주의론이 다른 주장일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본의 보편성에 대한 인식을 통해서 오직 가능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한국 사회에 불었던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 열풍이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무언가를 남겨주었는지는 셈을 해봐야 하겠지만, 최소한 출판계에는 베스트셀러의 조건으로 '하버드 대학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남긴 것 같다.

다양한 서적들이 하버드 브랜드를 앞세우거나 하버드의 필자를 내세워 출판되고 있는 즈음, 최근 출간된 <하버드 경제학>(최지희 옮김, 에쎄 펴냄)은 수많은 하버드 책 중에서 가장 '하버드적'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책은 아예 하버드의 수업 내용을 그대로 옮겨 놓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하버드 출판 기획이라고 할 수 있겠다.

흥미롭게도 책의 저자는 푸른 눈의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가 아니라, 베이징 태생의 중국인 저널리스트다. 저자 천진은 2007년 가을 학기부터 하버드 대학의 경제학 수업을 청강할 당시의 노트 필기를 거의 그대로 묶어 <하버드 경제학>을 펴냈다. 서문에서 밝히듯이 문체부터 노트 필기 상태를 유지하고, 데이터 등도 모두 노트 내용을 수정하지 않았다고 하니 가히 책의 부제와 같이 '실제 하버드대 경제학과 수업 지상 중계'라 할 만하다.

2


▲ <하버드 경제학>(천진 지음, 최지희 옮김, 에쎄 펴냄). ⓒ에쎄
책은 크게 정규 경제학 수업과 하버드 대학에서 비정기적으로 열린 특강으로 나눌 수 있다. 하버드 학부 경제학 수업인 그레고리 맨큐의 <경제학 원론>과 로런스 서머스의 <세계화의 문제점과 역할, 정책 결정> 그리고 마틴 펠드스타인의 <미국 경제 정책>이 책의 전반부인 1장에서 3장까지 배치되어 있다. 4장 <국제 경제학>에 이어 5장에서 <가정과 일의 경제학>을 소개하고, 정규 수업이 아닌 6장 '경제 핫이슈 분석'에서는 경제 현안에 관한 명사들의 특강 내용을 모아 놓았다.

사실 <하버드 경제학>은 읽기에 만만한 책은 아니다. 학부 수업이라고는 하지만 경제학을 전공하지 않은 독자들이 읽기에는 소개되는 경제 용어 자체가 낯설고, 논의를 전개하는 과정이 친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책의 추천 글을 쓴 중국세계경제학회 회장 위융딩 역시 이 책은 경제학 입문서가 아니라 이미 입문한 사람들을 위해 쓴 책이라고 밝히고 있다.

나 역시 학부 때 몇몇 경제학 과목을 수강한 이후로는 사실상 경제학과는 담을 쌓고 살았고, 현재의 대학원 전공은 법학이니 경제학에는 문외한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낯선 경제학 용어나 들어본 바 없는 분석 모델을 접하면서도 <하버드 경제학>은 아주 흥미롭게 읽혔다. 그것은 학부 경제학 수업임에도 현실 경제를 직접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하는 책에 등장하는 하버드 경제학자들의 수고 덕분이었다.

3

이를테면, <미국 경제 정책>의 협력 교수인 로버트 로런스는 미국의 대외 무역 때문에 미국 내 소득의 양극화가 심화되는 것인가를 경제 모델과 실제 현실과의 관계를 오가며 설명한다.

그는 무역과 임금의 관계를 직접 설명하는 이론으로 스톨퍼-새뮤얼슨 정리(Theory of the Stolper-Samuelson Effect)를 소개하며 한 상품의 가격이 상승하면 그 상품을 생산하는 데 집중적으로 투입되는 생산 요소(노동)의 실제 가격(예를 들면 임금)이 상승하고 나머지 다른 생산 요소의 실제 가격은 하락한다고 분석한다.

이어서, 자유 무역 자체가 소득의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주요 원인인지를 분석하며 학자들의 논의를 소개하는데, 무역이 소득 양극화에 끼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고 보는 폴 크루그먼과 무역이 소득 양극화에 끼치는 영향이 20퍼센트, 그러니까 적다고 논증하는 로런스 클라인의 주장을 동시에 제시한다.

수업에서 로런스가 어느 한 쪽의 손을 들어주지는 않는 것으로 보이지만, 무역으로 발생한 실업과 소득 불균형은 재정 정책으로 소득 재분배를 통한 조정이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미국의 자유 무역으로 자동차 공장이 문을 닫게 된다면 자동차 공장 노동자들에게 재취업 교육을 하여 일자리를 찾게 하는 등의 보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후, 로런스의 지적은 무역 정책에 대한 의사결정의 과정에서 힘의 균형이 한쪽으로 쏠려있는 현실에 이른다. 즉, 질 좋은 상품을 수입하는 것이 유익할지라도 생산자(기업) 입장에서는 위협이 되는데, 그러한 위협을 느끼는 생산자는 흩어져 있는 소비자들에 비해 집중되어 있어 의회에 손쉽게 압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로런스는 마지막으로 미국의 진실을 한 가지 전달한다. 즉, 미국의 무역 정책을 움직이는 곳은 의회이지 대통령이나 정부 기관이 아니라는 것이다. 의회에서 생산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람은 (소비자의 대변자와 같은) 경쟁 상대가 없기 때문에 자신의 이익을 바로 관철할 수 있다.

한편, 2008년 금융 위기로 출발한 미국의 경제 위기가 심화되는 가운데 하버드에서도 다양한 토론이 벌어졌다. 책의 6장에서는 금융 위기와 환경 문제, 당시 새롭게 출발한 오바마 정부의 경제 정책과 세계은행의 개혁 문제 등 다양한 토론이 소개된다. 그 중 금융 위기를 주제로 한 심포지엄에 참여했던 맨큐의 말은 흥미롭다.

하버드 대학과 예일 대학에 소속된 최고의 경제학자를 대상으로 "만약 1930년대에 살고 있다면, 당시의 경제 상황을 분석해 대공황을 예측할 수 있는지" 여부를 물었다. 경제학들은 모두 대공황을 예측할 수 없었다고 대답했다. 이어서 현대 경제 이론과 계산 방법, 그리고 최고 성능의 컴퓨터와 여러 예측 모형과 같은 계산 도구를 사용해 당시 데이터를 분석해보라고도 했는데, 역시 아무도 대공황을 예측하지 못했다.

맨큐는 "여러분이 내게 앞으로 경제 대공황이 올 것을 예측할 수 있는지 묻는다면 나는 예측할 수 없다고 대답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폴 크루그먼이 그의 저서 <경제학의 향연>(김이수 옮김, 부키 펴냄)에서 경제 정책이 현실을 제대로 진단하지 못하고 경제 상황을 전혀 개선하지 못한다는 점을 강조했던 점은 이 책에서 소개한 맨큐의 발언과 일맥상통하다.

4

<하버드 경제학>은 하버드의 학부 경제학 수업을 소개하고는 있지만, 그 저변에는 미국의 대외 경제 정책을 탐구하고자 하는 저자 혹은 중국 지식계의 관심사를 깔고 있다. 책의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세계화, 국제 경제학, 무역 부문의 논의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또 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세계화>와 <미국 경제 정책> 강의 부분을 담당한 로런스 서머스와 마틴 펠드스타인은 전·현직 미국 최고 경제 관료 출신이다. (명목상 아직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의 한 저널리스트는 미국의 주류 경제학을 배우는 것에서 무언가를 시작하고 있는 것인데, 중국이 미래를 치밀하게 준비하는 한 단면을 보는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산수화를 보는 시간은 나무를 만나러 가는 것만큼이나 행복했다."

강판권이 <미술관에 사는 나무들>(효형출판 펴냄)의 서문에 쓴 문장이다. 이 문장 속에서 '산수화'와 '나무'의 위치를 바꿔 넣으면 곧 내 이야기가 될 정도로 나는 나무와 꽃을 좋아한다. 만약 다시 대학을 갈 수 있다면 주저 없이 임학과나 원예학과를 선택할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서평을 의뢰받았을 때 단 1초도 머뭇거리지 않고 무조건 쓰겠다고 했다.

어차피 읽어볼 책이었는데 서평을 쓰게 되면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내 전공과 관련된 그림에 대한 내용이라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특히 공자도(孔子圖)를 연구하고 있는 나는 강판권의 또 다른 책인 <공자가 사랑한 나무, 장자가 사랑한 나무>(민음사 펴냄)와 <은행나무>(문학동네 펴냄)를 흥미롭게 읽었다.

그 후 <미술관에 사는 나무들>로 이어진 독서는 강판권의 <어느 인문학자의 나무 세기>(지성사 펴냄), <나무열전>(글항아리 펴냄), <중국을 낳은 뽕나무>(글항아리 펴냄), <역사와 문화로 읽는 나무 사전>까지 계속되었다. <차 한 잔에 담은 중국의 역사>(지호 펴냄)와 <최치원 젓나무로 다시 태어나다>(계명대학교출판부 펴냄) 등 몇 권은 시간이 짧은 관계로 아직 읽지 못하였다.

이 서평을 쓰고 나서도 책읽기는 계속 될 것이다.

나무에게 배우는 지혜


▲ <미술관에 사는 나무들>(강판권 지음, 효형출판 펴냄). ⓒ효형출판
강판권의 책을 '모조리' 읽겠다고 결심한 것은 내가 나무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좋아하는 나무라도 책을 읽는 동안 그 의미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한 권만 읽는 것으로 그쳤을 것이다. 나는 그의 시선을 통해 나무의 인문학적 의미를 발견하고 심한 충격을 받았다.

나무와 꽃을 무척 잘 안다고 자부했던 나였음에도 불구하고 강판권의 책을 읽기 전까지는 나무를 통해 인문학적인 접근이 가능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나무를 통해 공자나 맹자, 노자나 장자 등의 성인(聖人)의 가르침에 가 닿는다. 그런 그가 그림에 관한 책을 쓰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모든 것을 나무로 보려는 나의 '미친 짓' 덕분에 나무가 등장하는 그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산수화에 대한 관심이 일었다. 나는 한국과 중국, 일본 그리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그림을 나무로 읽기 시작했다. 나무의 눈으로 그림을 보니, 그림 속은 온통 나무로 가득했다. 그동안 멀게 느껴졌던 그림이 사실은 내 삶과 늘 같이했음을 깨달았다."

그렇게 이 책이 쓰이게 되었다. 다른 책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미술관에 사는 나무들>에서는 나무에 대한 정보 못지않게 나무를 통해 배워야 할 삶의 철학이 담겨 있다. 나무를 통해 도(道)에 이른다.

조선 초기에 안평대군의 꿈 얘기를 듣고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를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꿈'과 '망상'에 대해 얘기한다. '꿈'은 언제나 현실에 뿌리박고 있어야 하며 현실에 뿌리 내리지 않은 꿈은 '망상'이라는 것이다. 도연명(陶淵明, 365~427년)의 '도화원기'를 바탕으로 한 <몽유도원도>에는 복사나무가 등장한다. 복사나무는 '언제나 꿈꾸는 자와 함께 등장하는' 나무였다.

복사꽃이 핀 도원은 별천지이면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이상세계를 상징하는 장소가 되었다. 그렇다면, 안평대군이 꿈꾼 이상 세계는 어떤 곳이었을까. 그가 꾼 꿈속에는 어떤 욕망이 들어 있었을까. 미술 작품을 두고 그 작품의 제작 배경과 의미를 묻는 과정은 미술사에서도 똑같이 고민하는 과제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고민 위에 "중국 원산의 복사나무는 서왕모도, 곤륜도, 시월동도, 선인도, 설도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진대에는 조도, 중도, 만도 등 품종의 분화도 나타났다. 복사나무의 색깔도 송대 무명씨의 <벽도도>처럼 흰색도 있다. 무명씨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벽도는 꽃들이 첩첩으로 쌓여 있는 만첩벽도다. 만개한 벽도는 홑꽃보다 풍성한 느낌을 준다" 등의 설명이 추가되면 그림속의 나무에 대한 정보가 명료해지면서 자칫 사변적으로 흐를 수 있는 그림에 대한 이해가 뚜렷해진다. 스물여덟 개의 글은 모두 이런 과정을 거쳐 독자들의 가슴에 뿌리를 내린다.

강판권은 꽃만 좋아하고 꽃이 피기까지의 긴 과정을 잊어버리는 조급함에 대해서도 일갈을 잊지 않는다.

"꽃만 즐기는 것은 과정 없이 결과만 즐기는 것과 같다. 꽃이 피지 않아도 나무를 사랑할 줄 알아야 꽃을 좋아할 자격이 있다."

강판권이 이 책에서 얘기하고 싶었던 내용이 바로 이런 가르침이 아니었을까. 그가 '나무를 스승으로 삼는 이유는 노력한 만큼 얻는 법을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삶에 절대적인 가치를 두고 치열하게 살기 때문'이다. 벼랑 끝에 선 소나무가 살아남는 것은 자신을 바로잡고 있기 때문이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움직일 수 있는 융통성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도 누구나 소나무처럼 벼랑에 설 때가 있다. 그 때 사람에서 필요한 것이 '시중지도(時中之道)', 때에 맞게 처신하는 것이다. 역시 나무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다.

생태적인 교육법, 격물치지

대학에서 나무에 대해 가르치고 있는 강판권의 교육 방식은 성리학자들이 즐겼던 '격물치지(格物致知)'다. "살구꽃이 피면 학생들을 데리고 교실을 나서 야외 수업을 하면서" "살구나무 밑에서 공자의 사상을 얘기하는 것"이다. 생태적인 공부법은 그가 학생들을 교육하는 방법으로 활용하기 이전에 이미 스스로가 실천하고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나는 인근 공원의 벽오동을 만날 때마다 안아본다. 벽오동을 안고 하늘을 올려다보면 하늘이 더 푸르러 보인다. 나는 공원에서 벽오동 모습을 관찰하기 위해 자주 사진을 찍는다. 나의 소박한 꿈은 일 년 동안 이곳에 머물면서 벽오동의 삶을 관찰하는 것이다. 같은 장소에서 한 그루의 삶을 관찰하는 여유를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일 년 동안 한 그루의 나무만 바라보면서 살면 한 존재를 마음에 온전히 심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나무는 자신이 뿌리내린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한계 속에서도 사람보다 훨씬 오래 산다. 이런 나무 앞에서 사람만이 최고이고 "만물의 영장"이라는 발상 자체는 "오만의 극치"다. "생명체에는 등급이 없다." 저자가 직접 만져보고 안아보고 관찰한 나무에게서 배운 결론이다.

이 책은 미술사를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나무에 대한 깊은 이해를 길러줄 것이고, 나무를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그림에 대해 친근감을 느끼게 해 줄 것이다. 현재의 삶이 고통스러운 사람은 이 책을 통해 "매화처럼 누군가를 반하게 만들려면 고통을 감내해야만 한다"는 것을 배울 것이다. 살아가는 방법을 찾고 있는 사람은 "나무의 삶"을 통해 최고의 행복이 무엇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좋은 글을 읽어나가는 도중에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림에 대한 정보가 좀 더 상세했으면 하는 점이다. 그림이 어떤 재질에 어느 정도 크기로 만들어졌는가 하는 점은 그림을 그린 화가나 보는 사람에게 매우 중요하다. 간혹 편집상의 오류에서 발생한 오자도 눈에 거슬린다. 2쇄 때는 바로잡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가장 감동받았던 구절을 소개하면서 글을 끝마치겠다.

"나무는 그 자체로 길이다. 수십, 수백 년 동안 한곳에 머물면서도 길을 만드는 게 나무다. 나무는 억지로 길을 만들지 않는다. 미련스럽게 한곳에 머물러 있는 내공이 곧 길이 된다. 이곳저곳에서 찾는다고 길을 찾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나무처럼 자신의 자리가 곧 길이라는 것만 깨달으면 길이 보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History, His-story?

게르드 브란튼베르크의 <이갈리아의 딸들>(노옥재·엄연수·윤자영·이현정 옮김, 황금가지 펴냄)은 여성이 사회를 지배하고, 여성이 남성들보다 더 많은 특권을 누리는 그런 사회에서 남성들이 어떻게 살아왔고 어떤 방식으로 저항하는지를 그렸던 소설이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 중 맨움해방주의자인 노총각 올모스는 맨움 종속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맨움들은 무수한 저항을 했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맨움이 권력을 쥐었던 사회가 있었지. 문제는 우리가 모권제 사회에 살기 때문에 그런 저항이나 가부장적 사회에 대해서 들은 바가 없다는 거야. 역사가들은 그런 것들에 대해선 아무것도 쓰지 않지. 역사가들은 움들이니까. 인류학자들 또한 아무것도 쓰지 않지. 인류학자들도 움들이니까. 그게 이유야. (…) 만일 우리가 전 시대에 살았던 맨움에 대해 알고 싶다면 보통 주석을 보거나 행간을 읽어야 해." (227~228쪽)

그러고 보니 누가 한 말인지 정확히 기억나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란 남자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것에 지나지 않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다. 일종의 말장난이었는데, history를 발음이 같은 he-story로 읽은 것이다. 올모스의 말에서 맨움을 여성으로, 움을 남성으로 바꿔 읽으면 딱 이 얘기다. 역사(history)는 남자들의 이야기(his story)일 뿐이다!

그래서 남성 사가들에 의해 행간에 가려지고 왜곡됐던 여성의 역사를 다시 써야 한다는, her-story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으며, 실제로 여성의 신화를 발굴해내고, 역사적 인물들을 재조명하는 등의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정현백과 김정안의 <처음 읽는 여성의 역사>(동녘 펴냄)도 그러한 작업의 결과물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여성들의 공헌은 수유와 베 짜기뿐이다?


▲ <처음 읽는 여성의 역사>(정현백·김정안 지음, 동녘 펴냄). ⓒ동녘
프로이트는 여성이 인류 역사에 공헌한 것이라고는 수유와 베 짜기 밖에 없었다고 단언했다. 여성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수수께끼"를 끝까지 풀지 못했던 그는 무슨 근거로 그렇게 단정을 지었을까?

그러고 보면, 철학자들 중에서도 은연중이든 노골적이든 여성에 대한 편견이나 혐오를 갖고 있던 사람들이 적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여성은 불완전한 남자였고, 칸트에게 있어서는 이성을 적절히 발휘할 수 없는 감정적인 존재였으며, 헤겔에게는 공동체의 아이러니였다. 쇼펜하우어는 여성을 혐오했던 철학자로 유명하다.

정말 그런가? 프로이트에 따르면, 여성들은 "정상적인" 발달의 길을 따른다고 해도 초자아를 제대로 형성시킬 수 없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열등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정상적인" 발달의 길에서 벗어난 여자들은 불감증이 되거나, 히스테리 환자가 되거나, 미친 여자가 된다. 열등한 채로 살거나 미치거나. 여성들이 택할 수 있는 길은 이 두 가지인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회가 그만큼 여성들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남성 중심적인 사회는 여성들을 타자화함으로써만 유지된다. 그런 사회에서 여성들은 열등한 존재로 남아 있어야만 "정상"인 것으로 간주된다. 여기에 불만을 갖는 여자들은 미친년들이거나 마녀다. 여성들의 히스테리는 어찌 보면 몸으로 드러난 무의식적 저항의 표시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모든 여성들이 현실에 순응하거나, 미쳐버리거나, 이 두 가지 선택지에만 놓여 있었던 건 아니다. <처음 읽는 여성의 역사>는 두 가지 길 중 어느 한쪽이 아니라, 그 길들 사이에서 살았던 여성들의 삶을 보여준다.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의 삶의 조건과 그 안에서 살았던 여성들의 실상을 추적하여 세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여성 억압의 기원을 정확하게 추적해 낼 수 있을까? 엥겔스가 말하는 "여성들의 세계사적 패배"는 과거에 실제로 있었던 사건인가? 그 이전의 사회상을 발굴해낼 수 있다면 페미니스트들이 꿈꾸는 사회를 좀 더 설득력 있게 그려낼 수 있을까?

1장 <여성 억압의 기원을 찾아서>에서는 이런 물음을 안고 원시·고대 사회 여성들의 삶을 추적한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모권제 사회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모권제 사회가 의미하는 바가 앞서 말한 소설의 배경이 되는 '이갈리아'와 같은 사회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런 사회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저자의 견해이다.

물론 사회에서 여성들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어머니를 중심으로 가계가 구성되는 모계제 사회는 존재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사회에서 남성들이 역사 이래 여성들이 받아왔던 것과 같은 정도의 억압을 받지는 않았고, 모계제 사회라 하더라도 오늘의 시각에서 보자면 여성들에게 불리한 측면이 있었다고 한다.

중세를 거쳐 근대로 넘어오면 여성 이미지에 대한 왜곡과 평가 절하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특히 기독교의 영향으로 여성의 이미지는 성녀 아니면 마녀라는 식으로 이분화 되었다. 그러나 이런 억압적인 분위기에서도 제 목소리를 내거나 저항적인 움직임을 보인 여성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저자는 당시 시대적 제약 안에서도 여러 활동을 했던 여성들을 차례로 보여준다.

물론 오늘의 시각에서 보자면, 그 여성들이 과연 여성주의적 의식을 갖고 있었는가에 대해 긍정적으로 대답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시대적 한계에 의한 것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주류 역사에는 가려졌지만 중세의 이단 운동, 근대 태동기 시민운동에 기여한 여성들이 존재했다. 저자들이 발굴해 낸 그 여성들은 시대적 한계 안에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 했던 사람들이고 한계를 극복해보려 했던 사람들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History, Her-Story!

"지식이란 객관적이고 공평무사한 것이 아니다. 지식은 언제나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하여, 그리고 권력을 위하여 봉사하는 것이다." (<현재의 역사가 미셸 푸코>(사라 밀스 지음, 임경규 옮김, 앨피 펴냄), 156쪽)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인간이라는 개념 자체가 권력-지식 연계에 의해 유통되는 담론의 산물임을 폭로한 바 있다. 끊임없는 판단과 검사를 통해 인간 행동의 객관화, 자료화가 달성되며, 인간 자체에 관한 어떤 이미지가 형성되었으며 이것이 여러 인간 과학의 탄생에 크게 기여했다는 것이 푸코의 주장이다.

또 <광기의 역사>에서는 이성중심주의 자체가 하나의 특정한 담론 체계로서 다른 담론 체계를 비정상적이고 열등한 것으로 억압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성의 시대에 들어서서 비로소 이성과 비이성이 질적으로 명쾌하게 차별화되었으며, 이성의 우위 앞에서 광기(또는 이성에게 불가해한 것으로 여겨지는 모든 것들)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보편적 이성의 이념은 그 자체가 특정한 시대의 권력-지식 연계에 의해 만들어진 효과이며, 이성과 비이성의 구별은 구별이 이루어진 당시 사회의 지배 블록을 축으로 형성된 담론 형식의 결과로 간주되어야 한다.

앞에서 인용한 <이갈리아의 딸들>의 올모스 역시 푸코의 견해와 유사한 말을 했다.

"우리가 우리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거의 없고, 움들이 우리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아주 많이 쓰여 있지. 그런데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에 대해서는 무엇을 써야 할까? 우리 자신의 저항도 잊히지 않을 거라 어떻게 보장하지? 우리가 뭔가를 쓸지라도, 사람들에게 전달되고 보존될 수 있을 거라 어떻게 보장해? 이전 시대에도 맨움들이 그들의 연대기를 썼지만 출판되지는 않았어. 무엇을 출판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도 움이고,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 결정하는 것도 움이지. 역사는 움들이 쓰니까." (233쪽)

여성 운동의 결과이든, 사회의 필요에 따른 것이든, 오늘날 여성들의 지위나 상황은 과거의 여성들에 비해 한결 나아진 것이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법적 평등이 보장되어 있고, 사회 곳곳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도 눈에 띄게 줄었다. 그렇다면 과연 오늘날의 사회를 "남성이 지배하는 가부장적 사회"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 규정할 수 없다면, 페미니즘은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된 것이 아닌가? 보편적 여성의 문제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과연 있는가? 인종, 계급, 연령, 지역, 종교 등 여성들 내부에도 다양한 차이가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이 여전히 의미가 있는 이유는 <처음 읽는 여성의 역사>에서도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사회 구조나 지식 체계 등이 여전히 남성 중심적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남성 중심적인 의미 체계 안에서 여성성에 대한 담론이 만들어지고 유통된다. 오늘날 페미니스트들은 남성 중심적인 의미 체계 그 자체를 문제 삼는다.

여성사를 발굴하는 작업이 갖는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여성사를 발굴하는 작업은 남성 중심적인 편견 속에서 여성성에 대한 관념이나 실제 여성들의 삶이 어떻게 왜곡되고 평가 절하되어 왔는지를 드러내주는 작업이다. 그리고 이것은 남성 중심적인 의미 체계를 변형시키기 위한 첫 걸음이기도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글은 '프레시안 books' 30호(2011년 3월 11일), 31호(2011년 3월 18일)에 실린 엄기호 교육 공동체 '벗' 편집위원과 안성열 플래닛 대표가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와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를 놓고 한 차례씩 주고받은 논쟁에 대한 논평입니다.

(☞관련 기사 : 엄기호('복지'가 족발이야? 밥만 먹여주면 다야? 희망은?), 안성열(그것이 왜 '정치'가 아닌지 아직도 모르나?)

1

사회학자 엄기호는 애니메이션 <미래 소년 코난>의 '건국 신화'를 거론하면서 토니 주트의 마지막 책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김일년 옮김, 플래닛 펴냄)에 대한 서평을 시작한다. 그에 따르면 신자유주의 질서가 서서히 퇴조해가고 있는 지금 우리 모두는 '복지주의자'가 되어버렸다. 그러므로 현 시점에서 요구되는 것은 성장의 결과를 공정하게 배분하라는 사회민주주의적 요구가 아니라, 전면적이고 근본적인 정치의 재구성이다.

마치 코난이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듯이, 우리는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을 고민해야 한다. 이것이 엄기호의 문제의식이다. 그래서 그는 토니 주트의 마지막 책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 "사회민주주의는 이상적인 미래상을 제시하지 않는다. 또한 사회민주주의는 이상적인 과거를 제시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손에 쥘 수 있는 대안들 가운데 이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226쪽)는 결론에 동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엄기호는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사회주의자들뿐만이 아니다. 토니 주트는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를 젊은이들을 위해서 썼다고 한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주트는 한국어판 제목으로 말하자면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고 촉구하였지만, 젊은이들이 결국 '도로' 사회민주주의에 불과한 그의 당부에 그리 귀를 기울일 것 같지는 않다.

이와 같은 전폭적이고 강렬한 비판에 대해 반론이 나오지 않을 리 없다. 플레닛 대표 안성열은 자신이 발행인으로 등재되어 있는 책을 직접 옹호하고자 나섰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엄기호의 서평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고 고백하며, 더 발전적인 논의를 위해 그의 정치적 입장에 대해 더 따져 묻기로 결정했다. 엄기호의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푸른숲 펴냄)을 꺼내든 것이다. 우리는 그 옹호와 반박의 내용을 "그것이 왜 '정치'가 아닌지 아직도 모르나?"에서 확인할 수 있다.

토니 주트의 책, 그리고 20대 비명문대 학생들의 목소리를 엄기호가 담아낸 책을 전장(戰場)으로 삼아, 예의 '사회주의 대 사회민주주의 논쟁'이 다시금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비록 엄기호는 본인의 서평의 목적은 사회주의를 고리타분한 것으로 몰아붙이는 게 아니라 "사회주의이건, 사회민주주의건 그것을 재생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돌아보아야한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의 화살이 어디를 겨누고 있는지는 명백하다. 그러한 엄기호의 입장에 대해 안성열은 "(엄기호가 말하는) "정치적 상상력"은 그가 <미래 소년 코난>에서 이상적인 정치 공동체를 목격했듯이 만화적 상상력에 가까운 몽상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이것은 '사회주의'에 대한 '사회민주주의'의 전형적인 대응 방식이기도 하다.

어떤 정형화된 대립 구도를 가진 논쟁은 시작되는 것 자체가 이미 실패라고 볼 수 있다. 논쟁에 참여하는 양자 모두 이미 충분히 검증된 '정답'과 '오답'을 모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칸트가 말한 이율배반처럼, 둘 다 옳고 동시에 둘 다 틀린 추상적인 원리가 충돌할 때, 우리의 지성은 갈 곳을 잃고 표류하고 만다. 이렇게 굳어버린 논쟁들의 역사는 비극으로, 희극으로, 그리고 끝없이 되풀이되는 부조리극으로 반복된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한 권, 혹은 두 권의 책을 가지고 있다. 우선 서평의 대상이 된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가 있고, 또 안성열이 끄집어낸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도 함께 논의해 보아야 한다. 이것은 분명히 다른 전장에서 펼쳐지는 같은 싸움이다. 하지만 그 지리적 특수성과 보편성에 힘입어 우리는 이 싸움의 갈피를 잡아볼 수 있을 것이다.

2


▲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토니 주트 지음, 김일년 옮김, 플래닛 펴냄). ⓒ플래닛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에 대한 엄기호의 독해를 '오독'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온당한 일이 아닐 테지만, 그가 특정한 편향성을 지니고 텍스트에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확인 가능하다. 엄기호의 사회민주주의 비판이 이미 거의 완전한 형태로 토니 주트의 논의 속에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토니 주트가 무분별하게 68 세대를 비판하고 사회민주주의를 선택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토니 주트 혹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새로운 공동체'를 모색하지 않는다는 엄기호의 비판을 기억하는 독자라면, 책을 펼치자마자 우선 당혹스러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당장 19쪽, 즉 서문의 페이지가 고작 세 장 넘어간 지점에 등장하는 다음 문장 때문이다.

"요컨대, 강력한 국가와 개입주의적 정부가 필요하다는 데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국가를 다시 생각해보려는 자는 아무도 없다." (19쪽, 강조는 인용자)

여기서 '국가를 다시 생각한다'는 말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이 책의 최종적인 결론에서 토니 주트는 '현실 속에 존재하는 선택지' 중 하나로 사회민주주의의 가치를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뉘앙스와 함께) 긍정한다. 하지만 그 역시 엄기호가 말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것과 그것이 현재의 언어적/정치적 질서를 뛰어넘는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해답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질문을 던지기라도 해야 해답을 찾을 것 아닌가? 우리는 변화에 대해 논의하는 방법을 재발견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혁명'이라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소리를 되풀이하지 않으면서, 우리 자신을 위해 현재와는 아주 다른 질서를 상상하는 방법을 되찾아야 한다. 우리는 바람직한 목표와 용납할 수 없는 수단을 우리 선배들보다는 더 잘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156쪽)

토니 주트에 대한 엄기호의 비판은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다. 안성열이 지적한 바와 같이 토니 주트는 68 세대의 일원으로 성장하였고 그 빛과 그림자를 모두 목격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주목적이 자유주의적 정책 내에서 상대적으로 괜찮은 급진적 선택을 지지하려는 투표자들을 설득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입장을 취한다고 해도 문제될 것은 없다. 하지만 오늘날의 상황에서 그런 말들은 헛소리에 불과하다"(146쪽)고 비판하는 것은, "실제로 독일의 젊은 급진주의자 세대를 숨 막히게 만들고 그들을 "제도권 정치 바깥"으로 몰려가게 만든 것은 교육 정책부터 시작해서 외교, 공중 여가 정책 그리고 불미스런 과거사 문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별반 다르지 않았던 두 정당의 정책적 유사성"(58쪽) 때문이었다는 문제의식을 확고하게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책의 결론에서 토니 주트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그나마 최선의 해답은 사회민주주의'라는 결론을 내린다. 사회민주주의가 기독교민주주의 정당, 즉 보수주의 정당과 "모든 면에서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우리는 이것이 아닌 저것을 택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토니 주트의 이 책에 대한 엄기호의 독해가 공정하다고, 혹은 편향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토니 주트 역시 독자를 혼란에 빠뜨리기는 마찬가지이다. "우리 자신을 위해 현재와는 아주 다른 질서를 상상"해야 한다면서, "오늘날 우리가 손에 쥘 수 있는 대안들 가운데 이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는 이유로 사회민주주의를 옹호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바로 여기서 적극적인 독해, 능동적인 해석, 창조적인 서평이 요구된다. 왜 이 죽어가는 역사학자는 자신이 비판한 체제를 그 체제의 쌍생아의 해법으로 인정하고 권유할 수밖에 없는가? 하지만 엄기호는 텍스트의 심층으로 들어가 그 자체와 씨름하는 대신, 예의 '사회주의 대 사회민주주의' 논쟁의 구도 속으로 그것을 끌고 들어가 버렸다. 안성열의 반론은 바로 그러한 선택에 필연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는 결과물이다.

3

비단 '사회주의 대 사회민주주의' 뿐 아니라, 어떤 것이건 이미 만들어진 이율배반적 논쟁의 구도가 도입되면 그 순간 실제 논의 자체는 급격하게 소외되어버린다. 사람들은 상대방의 글을 읽지 않고 비판하고, 논쟁의 핵심이 되는 텍스트에 대해서도 꼼꼼한 독해를 하지 않고 내지른다.

먼저 안성열의 비판을 펼쳐보자. 그는 엄기호가 토니 주트의 대의를 오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안성열에 따르면 엄기호는 신자유주의 시대와 함께 "국가"가 파괴되었다고 믿고 있지만, 토니 주트의 책에 따르면 파괴된 것은 국가가 아닌 개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글의 대의를 완전히 오판한다. 엄기호는 "꼬장꼬장한 사회민주주의자/공동체주의자인 주트가 보기에 신자유주의에 의해 파괴된 것은 다름 아니라 '나라'이다"라는 말로 책의 대의를 전달하는데, 토니 주트에 의하면 신자유주의에 의해 파괴된 것은 국가가 아니라 개인들의 삶이기 때문이다.

가해자를 피해자로 둔갑시킨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국가를 파괴했다는 이야기는 이 책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반대로 이 책은 신자유주의를 주창하고 받아들인 국가와 정부 아래에서 개인들의 삶이 얼마나 만신창이가 되었는지를 고발하고 있다. 하지만 국가 자체는 건재했고, 오히려 개인에 대한 국가의 통제는 더욱 강화되었다. 토니 주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지만 엄기호가 '나라'라는 단어로 작은따옴표를 이용해 지시한 것은 폭력을 합법적으로 행사하는 유일한 권력 집단인 정부 혹은 국가가 아니다. 엄기호가 토니 주트의 책에서 읽어내는 '나라'는 곧 사회이면서 공동체이며 삶의 형식 혹은 양태를 뜻하는 것이다.

토니 주트의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에 대한 서평의 서두에서 뜬금없이 <미래 소년 코난>과 건국의 이야기를 한 것은 이 책이 다름 아니라 '나라'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꼬장꼬장한 사회민주주의자/공동체주의자인 주트가 보기에 신자유주의에 의해 파괴된 것은 다름 아니라 '나라'이다.

이때의 나라란 단지 시장을 통제하고 불평등을 조정하는 기구로서의 '국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마거릿 대처가 "사회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남자와 여자, 개인만이 있을 뿐이다"고 선언했을 때 사망 신고를 받은 것은 바로 이 시대 인식과 공간을 공유한 동시대인 동료들의 정치 공동체인 '나라'다.

엄기호의 서평에서, 안성열이 인용한 문장의 바로 아래에 "이때의 나라란 (…) '국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문장이 직접 등장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안성열은 엄기호가 '개인 대 국가'의 대립쌍 중 '국가'가 파괴되었다고 말하고 있다고 단정 짓고 그것을 전제로 하여 논의를 진행한다. 불행하게도 그와 같은 독해는 독자뿐 아니라 토니 주트에게도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이다.

토니 주트 본인이 "근대적 삶을 진정으로 구별 짓게 하는 것은 그 무엇에도 구속받지 않는 개인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다. 더 정확히 말해 19세기에 기원을 둔 부르주아 사회 혹은 시민 사회"(216쪽)라면서 그 시민 사회의 상징물인 철도를 논하고, "마거릿 대처가 절대로 열차를 타지 않으려 하지 했던 것이 단지 우연만은 아니"(217쪽)라고 의미심장한 여운을 남길 때, 우리는 엄기호에 대한 안성열의 비판이 어떤 '프레임'을 가지고 출발하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가장 강력하고 '유용'한 조정 기구인 국가에 대한 통제권을 회복하기 위해 개인들은 공공에 대한 관심을 회복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 토니 주트의 논점이며 그 지점까지는 엄기호 역시 동의하고 있다. 다만 차이는 그 참여의 형태가 무엇이어야 하냐는 것이다. 토니 주트는 문제도 많았고 완벽하지 않지만 지금까지 현실 속에서 검증된 바 있는 사회민주주의를 선택한다. 반면 엄기호는 '좋은 옛 것'보다는 '위험한 새 것'을 선택한다. 양자 모두 신자유주의에 의해 '국가'가 파괴되었다는 말은 하지 않고 있다.

안성열이 엄기호의 서평을 불성실하게 읽었다고 비판하는 것은 이 시점에서, 그것 역시 불성실한 비판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대체 왜 이와 같이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오독이 강한 확신과 함께 등장할 수 있느냐이다. 물론 필자는 이미 그 이유를 이 글의 도입에서 제시했다. 엄기호와 안성열 모두 다시 한 번 '사회주의 대 사회민주주의' 논쟁의 대리전을 치르고 있기 때문이다. 개별적인 필자의 지적 능력이나 성실성이 아니라, 애초에 그 구도가 도입되었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4


▲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엄기호 지음, 푸른숲 펴냄). ⓒ푸른숲
한국의 담론 지형에서 '사회주의 대 사회민주주의' 논쟁은 대략 다음과 같은 형태로 진행된다. '사회주의자'들은 우리에게 주어진 정치적인 구조 자체를 바꾸어야 진정한 변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제도권 내에서 수행되는 것뿐 아니라 지금까지 그렇게 인식되지 않았던 요소들이야말로 '정치'의 본질을 형성한다고 주장한다. 사회주의자들의 시각에서 보자면 고전적인 주제들, 가령 지역 갈등이나 노동 문제 등보다도 어쩌면 섹슈얼리티와 젠더, 정체성 문제, 문화적인 차이와 다양성을 존중하는 새로운 주제들이 더 중요할 수 있다.

반면 '사회민주주의자'들은 68 혁명 이후 이른바 '신좌파'의 도래와는 무관하게, 사실 정치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일차적으로 경제적 자원의 공정한 배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 안성열의 표현을 빌자면 "생존"이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삶"을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하거나 해로울 수도 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그러므로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으로 자원을 배분하는 도구인 국가 권력을 획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믿으며, 그것을 위한 실천 과정에서 집중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정치'의 일부로 거론되는 현상을 그다지 적극적으로 환영하지 않는다.

이것은 간략한 스케치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 개별적인 사람, 집단, 조직 내에서 벌어지는 이데올로기적 움직임은 이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양하다. 어찌되었건 이와 같은 추상적인 구도가 실제의 논의에 도움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종의 '가족 유사성'을 지니지만, 각자의 머릿속에서 서로 합의되지 않은 채 개별적인 화자의 사고방식을 지배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논쟁 참여자들은 비슷한 듯하지만 서로 소통될 수 없는 각자의 방언을 이야기하며 평행선을 긋게 된다.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에서 엄기호가 청년들의 정치적 무관심에 대해 내놓은 서술을 살펴보자. 그는 젊은이들이 냉소적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그들이 '냉소적임에도 불구하고'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들은 언제 정치적으로 움직이는가? 정치가 사기라는 것을 잘 아는 이들이 정치적으로 움직일 때는 정치가 오락이 되거나 혹은 정치가 오락을 방해할 때이다"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91쪽)

엄기호에게 청년들이 "시민으로서가 아니라 게이머로서 정치에 참여"(같은 책, 93쪽)하는 것은 결코 탈정치화가 아니다. 오히려 민주주의와 정치를 도덕화한 기존 세대가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정치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같은 구절을 읽은 후 안성열은 엄기호가 "20대를 정치적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능동적인 주체로 보지 않고 재미가 있으면 반응하고 재미가 없으면 반응하지 않는 지극히 수동적인 입장에서 정치를 소비하는 수용자로 이해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그는 애초에 오락적인 요소들을 '정치'의 일부로 바라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현상을 놓고 엄기호는 젊은이들이 오락을 통해 정치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 안성열은 기존의 '정치'가 오락을 이용해 젊은이들을 '끌어들이고' 있을 뿐이라고 본다. 당연히 논의는 평행선을 그을 수밖에 없다. 각자는 자신의 위치에서 상대방을 '무책임한 사회주의자', '고리타분한 사회민주주의자'로 간주하며 흐지부지되어가는 논쟁을 마무리 짓게 되는 것이다.

필자는 지금 두 사람이 시쳇말로 '병림픽'을 벌이고 있다는 식의 비난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 대 사회민주주의'라는 형이상학적 구도가 정치적인 판단과 논쟁에 도입되면서 야기하는 막대한 혼돈에 대해 기술하고자 할 따름이다. 이와 같은 형이상학적 이분법이 무서운 이유는, 앞서도 잠깐 이야기했지만, 그것이 특정한 형태로 추출되어 객관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두의 머릿속에 있는 구도는 각자의 방식으로 전부 다르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실질적인 논의를 방해하고 우리의 판단을 마비시킨다.

우리는 발터 벤야민의 표현을 빌려, '사회주의 대 사회민주주의'처럼 해결될 수 없는 논쟁으로 정치적 논의가 빨려 들어가고 실종되어버리는 현상들을 '정치의 철학화'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정치의 철학화'로 우리는 지난 시대에 만연했던 빨갱이 사냥을 떠올릴 수 있다. 냉전 질서 속에서 한반도의 평화를 이룩하기 위한, 또 고속 성장에 걸 맞는 공정한 분배를 이루기 위한 실질적인 논의들을, '빨갱이냐 아니냐' 혹은 '공산주의자냐 민주주의자냐' 같은 유사 철학적 구도가 권력의 총칼을 빌어 휩쓸어버린 그것들 말이다.

무상 급식 논쟁, 복지 논쟁에 이르기까지 그 여파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공짜 밥을 주는 것은 공산주의, 빨갱이다'라는 선언이 등장하는 순간 교육과 복지와 우리의 다음 세대를 둘러싼 정치적 결단은 모두 가장 부정적인 의미에서 '철학화'된다. 올바른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한 채 힘의 논리에 의해 휘둘리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같은 현상을 '사회주의 대 사회민주주의'의 논쟁 구도 속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진중권은 합당론에 대해 강경한 반대 입장을 보이는 진보신당 지지자들을 한껏 조롱하지만,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조기숙이 트위터로 "당신의 주장은 국민의 명령과 같다"고 말하자 히스테리컬하게 반발한다. 그는 진보신당 잔류파들 혹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진보정당의 아우라를 가지고 싶지만, 그것을 국민의 명령과 같은 포스트-노무현 시대의 정치 운동에 빼앗기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민주당을 뺀 모든 정당들이 합쳐서 '유럽식 사회민주주의 정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기표는 진중권과 조기숙 혹은 문성근 모두가 공유하고 있지만, 각자의 속내와 셈법은 전혀 다르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사회주의자'들을 규정한 채 몰아세우며, 자신은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사회민주주의자'의 스탠스를 점유한 채, 정치적 세력을 확보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철학화' 되어버린 정치 속에서는 더 이상의 이성적, 상식적 논의가 불가능하다. 토니 주트의 책을 둘러싼 두 서평자의 논쟁 역시 그 사례 중 하나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5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가? '정치의 철학화'에 어떻게 맞설 것인가? 막연한 질문에 대한 해답 혹은 그 실마리를 구하기 위해 우리는 다시 토니 주트의 책으로 돌아가 볼 필요가 있다.

토니 주트에 따르면 68 혁명과 신보수주의 운동은 모두 같은 시대의 산물이다. "젊은 급진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절대 그런 식으로 묘사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사실상 그들의 감정은 사적 자유에 대한 열광과 공적 구속에 대한 짜증으로 확실히 나뉘어 있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새로 등장한 우파 역시 이와 똑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98쪽)이라는 서술을 곱씹어보자.

이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토니 주트는 신좌파 운동이 지니고 있는 개인주의적, 주관주의적 경향성을 비판하고 있으므로, 이 문장은 '신좌파=네오콘'이라는 식으로 이해될 소지가 다분하다. 하지만 전혀 다른 방향에 서 있는 두 집단이 동일한 감정을 느낀다면 그것은 차라리 그 시대의 분위기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비단 젊은이들 뿐 아니라 수많은 이들이 1960년대의 집산주의적 복지국가에 대해 반발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 "중산층 시민단체들은 공격적이고 무차별적인 방식으로 진행되는 철거 사업에 반대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90쪽)하였고, "사회민주주의자들이 확고하게 정권을 잡고 있었던 스웨덴에서도 공영 주택, 사회 복지, 그리고 공공 의료 정책에 수반되는 무지막지한 획일성"(90쪽)이 젊은이들을 숨 막히게 하고 있었다.

그에 대한 반발로 신좌파 운동이 기존의 사회민주주의를 내부로부터 허물어가는 가운데, 오스트리아 출신의 망명 철학자들의 사고방식이 시카고 대학과 관련된 영미권 경제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사회와 국가에 대한 전반적인 분위기를 뒤바꿔버린다. 신보수주의 운동, 이른바 네오콘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토니 주트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말하자면 70년대 중반부터 이후 30년간 이어진 보수주의의 승리와 그로 인한 근본적인 변화들은 필연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것은 일종의 지적 혁명이 낳은 결과였다. 대략 10년 남짓한 짧은 기간 동안, 공적 담론의 지배적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104쪽)

보수주의자들은 정책을 둘러싼 논쟁의 장을 정치와 경제가 아닌 문화의 영역으로 돌림으로써 승리를 거두었다고 토니 주트는 설명한다. 그러나 신보수주의는 단지 철학적 차원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신고전학파 경제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치며 결과적으로 향후 30여 년을 지배하는 정치 담론으로 변모하게 된다. '정치의 철학화'가 아닌 '철학의 정치화'를 이루어낸 것이다.

토니 주트 혹은 그의 대변인으로서의 안성열은 68 혁명이 이루어낸 '철학의 정치화'를 그다지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는 듯하다. 하지만 국가 권력의 점유 등과는 무관하게, 21세기를 살아가는 누군가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길거리에서 집단 구타를 당해도 경찰이 묵인하지 않는 세상이 온 이유는 신좌파적인 철학이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정치화하였기 때문이다.

불과 50년 전만 해도 동성애자들이 언젠가 공개적으로 결혼식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주 드문 예외를 제외한다면, 인류의 재생산을 위한 도구가 되라는 사회적 압박을 뿌리치고 여성이 지적인 삶을 살아가는 방법은 오직 수녀 혹은 여승이 되는 것뿐이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이 모습은 '가족'의 가치를 부르짖던 신보수주의자들이 원하던 바도 아니다. 이와 같은 '정치적' 변화는 1960년대부터 일어난 지적 움직임이 정치의 영역에 반영된 결과물이다. 진보적이건 보수적이건, 그 변화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속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민영화가 공적 삶을 얼마나 황폐화시켰는지는 무심결에 내뱉는 새로운 정책 언어에서 빈번히 확인된다. 오늘날 영국의 고등 교육계에서 시장을 메타포로 사용하지 않는 대화는 찾아보기 힘들다. 대학의 학장과 학과장들은 누군가가 이룬 과업의 질을 판단할 때 '산출량(output)'과 '영향(impact)'을 평가하라고 강요받는다. 영국의 정치가들과 공무원들은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는 전통적인 독점 산업들을 포기하는 이유를 대기 위해 애쓰면서 '공급자가 다양화되었다'고 둘러댄다. 2008년 6월 영국 노동연금부 장관은 사회 복지 사업의 민영화 계획을 발표하면서 이를 '복지 전달의 최적화'라는 말로 묘사했다. (122~123쪽)

그렇다면 신좌파 운동은 어떨까? 멀리 갈 것도 없다. "Ill Fares The Land"라는 제목이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고 번역되는 것만 보더라도,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신좌파의 언어가 없이는 새로운 정치를 말하지도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래 제목은 18세기 아일랜드의 시인 올리버 골드스미스의 시에서 따온 것으로, 질병이 퍼지고 죽어가는 대지 위에서 부를 축적하는 사람들과 쌓여가는 시체들의 모습을 묘사하는 장면 중 하나이다.

굳이 한국어로 옮기자면 '죽어가는 대지에서' 정도가 될 수 있겠지만, 출판사는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없다. 저 시구는 한국어의 유산에 속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즉 우리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신좌파의 언어로 제목을 붙인, 하지만 본문에서는 신좌파를 비판하는 책을 읽게 된 것이다.

6

어떤 '끝없는 논쟁'에 끼어드는 것이 과연 현명하거나 유용한 행동일까? 그러한 논쟁의 구도를 도입하거나 끼어드는 것 자체가 잘못된 행동이라고 나는 이미 비판한 바 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에게는 논의의 기반이 되는 텍스트 그 자체가 있다는 것 역시 잊어서는 안 된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역설을 발견할 수 있다.

토니 주트의 '결론'은 사회민주주의이지만, 그의 논의 구도는 전체적으로 볼 때 사회주의의 편에 서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 긴 서평의 결론을 대신하여 그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토니 주트의 논리 구조가 '사회주의 대 사회민주주의' 논쟁에서 사회주의 쪽에 더욱 가깝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크게 세 가지 정도로 제시될 수 있다. 첫째, 앞서 우리가 확인한 바와 같이 그는 '지금까지 상상하지 못했던 정치 질서'를 찾아야 한다는 입장에 선다.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종적으로 사회민주주의를 결론으로 내세우지만, 혁명을 거치지 않으면서도 완전히 새로운 질서를 찾아내고자 하는 그의 열정 자체에는 변함이 없다.

둘째, 신좌파 혹은 네오콘들과 마찬가지로 토니 주트 역시 새로운 언어를 찾아내고 사유 체계를 바꾸어내는 것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 한국에서의 '사회주의 대 사회민주주의' 논쟁의 구도 속에서,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언어란 프로파간다 정도의 중요성만을 지닌다는 것, 혹은 언어를 통한 정치적 변화의 가능성을 논하는 사회주의자들의 어법이 '공상적'인 것으로 치부되곤 한다는 점을 놓고 볼 때, 토니 주트의 무게 추는 (한국의 논의 구도 속에서) 사회주의 쪽으로 쏠린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정치적 변화를 이끌어 내었던 전례들이 있다. 구체제가 비틀거리고 있던 18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가장 중요한 발전이 일어났던 정치 무대는 저항 운동의 현장도, 그 저항 운동을 저지하고자 했던 국가 기구도 아니었다. 중요한 변화는 언어 그 자체에서 시작되었다. 언론인들과 팸플릿 작가들은 체제에 불만을 품은 행정가나 성직자들과 함께 정의나 인민의 권리와 같은 구체제의 언어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결국 이러한 어휘들은 민중 행동의 새로운 표현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절대주의 군주정에 정면으로 맞설 수는 없었지만, 그들은 기존 질서에 대한 반대를 표현하고 상상함으로써, 그리고 '민중'이 믿을 수 있는 대안적인 권위의 원천들을 상정함으로써 절대 군주정의 정당성을 박탈하기 시작했다. 사실상 그들은 근대 정치학을 발명했다. 그리고 이것은 기본적으로 기존의 모든 질서에 대한 언어적 거부를 통해 탄생했다. 프랑스 혁명이 본격적으로 일어났을 때, 이 같은 새로운 정치 언어는 이미 프랑스 전체에 널리 퍼져 있었다. 실제로 혁명가들은 그 언어가 없었다면 자신들이 벌이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표현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것은 말에서 시작되었다. (174~175쪽)

셋째, 한국에서 '사회민주주의'가 논의되는 맥락은, 토니 주트의 논의를 빌려온 후 적용하자면, 일종의 신식민지주의적 사고방식이라고 비판될 여지가 크다. 이것은 그동안 엄기호와 안성열의 논의에서 등장하지 않은 것이므로 조금 더 조심스럽게 소개되어야 한다.

68 혁명은 당시까지의 사회주의적 요구와는 달리 '집산주의'(collectivism)를 거부하고 개인주의적 차원에서 사회 문제에 접근했다. "60년대 세대를 하나로 뭉치게 만든 것은 모두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각자의 필요와 권리"(95쪽)였던 것이다. 그 결과 60년대의 정치는 '정체성'의 정치로 탈바꿈하였고, 공동의 이해관계가 아닌 "사회나 국가에 대한 개인적인 권리들의 총합"(같은 곳)이 정치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신좌파 스스로가 속해 있던 국가, 즉 이른바 '선진국' 내에서의 사정일 뿐이고, 그들은 자신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이 미치지 않는 '타자'들을 향해서는 여전히 집산주의적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토니 주트는 그 점을 흥미롭게 지적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신좌파는 다른 나라에서 벌어지는 문제에 관해서는 여전히 집단적 속성을 높이 평가했다. 그곳에서 신좌파들은 '빈농', '탈식민', '소외 계층(subaltern)' 등과 같은 불명료한 사회적 범주 아래 모여들었다. 하지만 자국에서는 개인적인 것이 대세를 장악하고 있었다. (96쪽)

'한국에서는 유럽식 사회민주주의만으로도 충분히 급진적이다'와 같은 '한국식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목소리는 이와 같은 이중적 시각과 얼마나 다른가? 과연 2011년의 대한민국이 품고 있는 '정치적' 갈등은 '유럽식 사회민주주의'의 도래만으로 해결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단순하고 평면적일까? 정체성의 정치, 언어적 갈등, 대변되지 못해왔고 대변될 수 없는 자들의 목소리를 고려하지 않아도 우리가 겪는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혹은 그러한 '정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를 '철모르는 공상적인 사회주의 동호회 놀이'라고 매도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마치 비행기를 타고 저 높은 상공에서 이곳을 내려다보는 시각, 혹은 저 유럽의 어느 먼 나라에서 대한민국이라는 변방의 민주적 발전 단계를 내다보는 그런 시각의 산물이 아닐까?

환경주의, 여성주의, 젠더의 정치학, 투표율 50%가 말해주는 대의민주주의 내에서 발생하는 정치적 소외, 이른바 '다문화 가정' 및 그 자녀들의 정체성 갈등이 불러올 예견되는 파국, 즉 도농 갈등이 인종 갈등으로, 지방민에 대한 수도권 거주자들의 차별 의식이 가장 지저분한 형태의 인종 차별로 드러날 가능성에 대한 경계 등 그 모든 것을, '한국에서는 유럽식 사회민주주의만으로도 충분히 급진적이다'와 같은 경험적으로 검증될 수 없는 명제 하나로 덮어버리려는 시각은, 토니 주트가 비판한 '68 혁명' 만큼이나 무책임할 뿐더러 오만하며, 일종의 자기 소외 혹은 자기 멸시에 기반을 둔 사고방식이다. '우리 주제에' 무슨 정체성 타령이야, 사회민주주의만 해도 감지덕지지. 이렇게 볼 때, 토니 주트의 사유를 통해 한국에서의 '사회민주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할 것이다.

7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상상'하고, 그것을 언어로 형상화하여 정치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이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하는가? 그 대답은 나나 다른 엄기호 혹은 안성열이 내릴 수 있는 것도, 또한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는 한 권의 책이 제시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는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텍스트'들을 더욱 더 세심하게 읽고 대담하게 해석하여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 책을 놓고 논쟁을 벌인 엄기호, 안성열의 논의를, 나는 다시 한 번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우리가 가진 것이 언어뿐이라면, 우리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윤리적인 행위는 오직 경청하는 것뿐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노력 속에서 '정치'를 바꿀 수 있는 새로운 언어가 나올 가능성도 비로소 발견될 수 있을 것이며, '정치의 철학화'가 아닌 '철학의 정치화'를 모색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여지도 확보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