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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 불었던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 열풍이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무언가를 남겨주었는지는 셈을 해봐야 하겠지만, 최소한 출판계에는 베스트셀러의 조건으로 '하버드 대학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남긴 것 같다.
다양한 서적들이 하버드 브랜드를 앞세우거나 하버드의 필자를 내세워 출판되고 있는 즈음, 최근 출간된 <하버드 경제학>(최지희 옮김, 에쎄 펴냄)은 수많은 하버드 책 중에서 가장 '하버드적'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책은 아예 하버드의 수업 내용을 그대로 옮겨 놓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하버드 출판 기획이라고 할 수 있겠다.
흥미롭게도 책의 저자는 푸른 눈의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가 아니라, 베이징 태생의 중국인 저널리스트다. 저자 천진은 2007년 가을 학기부터 하버드 대학의 경제학 수업을 청강할 당시의 노트 필기를 거의 그대로 묶어 <하버드 경제학>을 펴냈다. 서문에서 밝히듯이 문체부터 노트 필기 상태를 유지하고, 데이터 등도 모두 노트 내용을 수정하지 않았다고 하니 가히 책의 부제와 같이 '실제 하버드대 경제학과 수업 지상 중계'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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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버드 경제학>(천진 지음, 최지희 옮김, 에쎄 펴냄). ⓒ에쎄 |
책은 크게 정규 경제학 수업과 하버드 대학에서 비정기적으로 열린 특강으로 나눌 수 있다. 하버드 학부 경제학 수업인 그레고리 맨큐의 <경제학 원론>과 로런스 서머스의 <세계화의 문제점과 역할, 정책 결정> 그리고 마틴 펠드스타인의 <미국 경제 정책>이 책의 전반부인 1장에서 3장까지 배치되어 있다. 4장 <국제 경제학>에 이어 5장에서 <가정과 일의 경제학>을 소개하고, 정규 수업이 아닌 6장 '경제 핫이슈 분석'에서는 경제 현안에 관한 명사들의 특강 내용을 모아 놓았다.
사실 <하버드 경제학>은 읽기에 만만한 책은 아니다. 학부 수업이라고는 하지만 경제학을 전공하지 않은 독자들이 읽기에는 소개되는 경제 용어 자체가 낯설고, 논의를 전개하는 과정이 친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책의 추천 글을 쓴 중국세계경제학회 회장 위융딩 역시 이 책은 경제학 입문서가 아니라 이미 입문한 사람들을 위해 쓴 책이라고 밝히고 있다.
나 역시 학부 때 몇몇 경제학 과목을 수강한 이후로는 사실상 경제학과는 담을 쌓고 살았고, 현재의 대학원 전공은 법학이니 경제학에는 문외한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낯선 경제학 용어나 들어본 바 없는 분석 모델을 접하면서도 <하버드 경제학>은 아주 흥미롭게 읽혔다. 그것은 학부 경제학 수업임에도 현실 경제를 직접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하는 책에 등장하는 하버드 경제학자들의 수고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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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테면, <미국 경제 정책>의 협력 교수인 로버트 로런스는 미국의 대외 무역 때문에 미국 내 소득의 양극화가 심화되는 것인가를 경제 모델과 실제 현실과의 관계를 오가며 설명한다.
그는 무역과 임금의 관계를 직접 설명하는 이론으로 스톨퍼-새뮤얼슨 정리(Theory of the Stolper-Samuelson Effect)를 소개하며 한 상품의 가격이 상승하면 그 상품을 생산하는 데 집중적으로 투입되는 생산 요소(노동)의 실제 가격(예를 들면 임금)이 상승하고 나머지 다른 생산 요소의 실제 가격은 하락한다고 분석한다.
이어서, 자유 무역 자체가 소득의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주요 원인인지를 분석하며 학자들의 논의를 소개하는데, 무역이 소득 양극화에 끼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고 보는 폴 크루그먼과 무역이 소득 양극화에 끼치는 영향이 20퍼센트, 그러니까 적다고 논증하는 로런스 클라인의 주장을 동시에 제시한다.
수업에서 로런스가 어느 한 쪽의 손을 들어주지는 않는 것으로 보이지만, 무역으로 발생한 실업과 소득 불균형은 재정 정책으로 소득 재분배를 통한 조정이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미국의 자유 무역으로 자동차 공장이 문을 닫게 된다면 자동차 공장 노동자들에게 재취업 교육을 하여 일자리를 찾게 하는 등의 보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후, 로런스의 지적은 무역 정책에 대한 의사결정의 과정에서 힘의 균형이 한쪽으로 쏠려있는 현실에 이른다. 즉, 질 좋은 상품을 수입하는 것이 유익할지라도 생산자(기업) 입장에서는 위협이 되는데, 그러한 위협을 느끼는 생산자는 흩어져 있는 소비자들에 비해 집중되어 있어 의회에 손쉽게 압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로런스는 마지막으로 미국의 진실을 한 가지 전달한다. 즉, 미국의 무역 정책을 움직이는 곳은 의회이지 대통령이나 정부 기관이 아니라는 것이다. 의회에서 생산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람은 (소비자의 대변자와 같은) 경쟁 상대가 없기 때문에 자신의 이익을 바로 관철할 수 있다.
한편, 2008년 금융 위기로 출발한 미국의 경제 위기가 심화되는 가운데 하버드에서도 다양한 토론이 벌어졌다. 책의 6장에서는 금융 위기와 환경 문제, 당시 새롭게 출발한 오바마 정부의 경제 정책과 세계은행의 개혁 문제 등 다양한 토론이 소개된다. 그 중 금융 위기를 주제로 한 심포지엄에 참여했던 맨큐의 말은 흥미롭다.
하버드 대학과 예일 대학에 소속된 최고의 경제학자를 대상으로 "만약 1930년대에 살고 있다면, 당시의 경제 상황을 분석해 대공황을 예측할 수 있는지" 여부를 물었다. 경제학들은 모두 대공황을 예측할 수 없었다고 대답했다. 이어서 현대 경제 이론과 계산 방법, 그리고 최고 성능의 컴퓨터와 여러 예측 모형과 같은 계산 도구를 사용해 당시 데이터를 분석해보라고도 했는데, 역시 아무도 대공황을 예측하지 못했다.
맨큐는 "여러분이 내게 앞으로 경제 대공황이 올 것을 예측할 수 있는지 묻는다면 나는 예측할 수 없다고 대답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폴 크루그먼이 그의 저서 <경제학의 향연>(김이수 옮김, 부키 펴냄)에서 경제 정책이 현실을 제대로 진단하지 못하고 경제 상황을 전혀 개선하지 못한다는 점을 강조했던 점은 이 책에서 소개한 맨큐의 발언과 일맥상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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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경제학>은 하버드의 학부 경제학 수업을 소개하고는 있지만, 그 저변에는 미국의 대외 경제 정책을 탐구하고자 하는 저자 혹은 중국 지식계의 관심사를 깔고 있다. 책의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세계화, 국제 경제학, 무역 부문의 논의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또 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세계화>와 <미국 경제 정책> 강의 부분을 담당한 로런스 서머스와 마틴 펠드스타인은 전·현직 미국 최고 경제 관료 출신이다. (명목상 아직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의 한 저널리스트는 미국의 주류 경제학을 배우는 것에서 무언가를 시작하고 있는 것인데, 중국이 미래를 치밀하게 준비하는 한 단면을 보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