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자와 죽은 자 2
제라르 모르디야 지음, 정혜용 옮김 / 현대문학 / 2006년 10월
절판


"개혁이라는 말은 고용주와 우리에게 동일한 의미를 띠는 말이 아닙니다. 경영인들, 자유주의자들, 어용 노조들에게 개혁이라는 말은 단 한 가지, 그들의 은행 구좌의 돈을 불리겠다는 의미를 띨 뿐입니다! 우리에게 그것은 쫓겨나고, 용도폐기 처분의 대상이 되고, 사용 불능이라는 판정을 받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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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제단 - 개정판
심윤경 지음 / 문이당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유교문화가 점점 사라져 가고 있는 마당에 아직도 종손이라는 굴레로 고통 받는 이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단정학이 움직이는 것 같은 몸짓으로 제례를 올리는 할아버지를 비롯하여 자신의 뜻대로 살 수 없음을 비관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은 상룡의 아버지, 사랑 없는 결혼으로 불행한 삶을 마친 해월당 어머니, 상룡의 생모, 아들을 낳지 못한 죄로 집에서 쫓겨난 달시룻댁과 그녀의 딸 정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모두 피해자들이다.

상룡의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정해준 배필과 결혼하고 싶지는 않았다. 취직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면서 상룡을 낳았다. 그러다 별안간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뜻을 따르기로 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해월당 어머니와 다시 혼례를 치른다. 물론 상룡의 생모는 거액의 돈을 챙기고서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어주었다. 아마도 상룡의 생모가 아버지에게 이별을 고했을 것이다. 모진 생모를 잊지 못하는 아버지가 불쌍할 따름이다.

아버지는 행복하지 않았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상룡의 생모 때문에 그렇다고 할아버지를 거역할 수도 없어 자살을 택한다. 그러니 해월당 어머니는 무슨 죄로 자식도 없이 조씨 문중에서 한평생을 보내야 하는가.

상룡도 불행한 건 마찬가지였다. 적자 아닌 적자로 살아야 하는 삶이 온전할 리 없다. 완고한 할아버지와 함께 사는 일이 녹록치 않음은 자명한 사실.

"개뿔 잘난 것도 하나 없는 내가 그나마 내세울 것이라고는 유서 깊은 가문의 종손이라는 것뿐이었다. 이 좁은 마을에서 할아버지의 재력을 배경 삼아, 효계당의 종손이라는 이유로 어딜 가나 특별대우를 받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결국 나는 안락한 고치 속에서 앙앙불락하는 살결 고운 누에에 불과했다." (111쪽)

제대 후 복학한 상룡은 휑뎅그렁한 종가에서 그럭저럭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정실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정실은 어머니와 함께 종가의 살림을 맡아 도와주는 부엌데기다. 효계당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는 그 역할이 더 커진 셈이다. 다리가 온전치 못한 데다 뚱뚱하고 못생기고 그야말로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박색이었다.

정실은 유년 시절부터 옥돌 같이 수려한 외모를 가진 상룡을 흠모하고 있었으나 상룡은 반대였다. 학교 아이들이 둘이 한 집에 산다는 이유로 놀림이라도 하면 매우 불쾌해 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일까.

"못생기고 뚱뚱한 보리문디 가스나한테 느껴지는 사랑의 감정도 예쁜 여자한테 느끼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나에게 사랑은 하나였고 그건 정실을 향했다. 그도안 자존심 때문에 인정하지 않았을 뿐, 나는 정실에게 질투와 독점욕, 응석 부리고 확인하고 싶은 마음 등의 일상적인 연애 감정을 모두 느꼈다. 그리고 언제나 한결같이 우직하게 돌아오는 사랑과 믿음의 메아리는 끝없이 목말라 하고 두려워하며 의심하는, 내 상처입은 마음에 더할 나위 없는 치료제가 되어 주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불신과 배반, 유기와 경멸에 절어 살아왔던 나는 흔히 연애에 동반되는 감정의 줄다리기를 견뎌 낼 심적인 여유를 가지지 못했다. 근본을 밑바닥까지 알면서도 무조건적이고 전폭적인, 무모하고 맹목적이라 할 수 있는 애정과 신뢰를 보내주는 사람,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건 정실뿐이었다." (172쪽)


친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지 못한 상룡은 언제나 정에 굶주려 있었다. 그런 상룡에게 정실의 사랑은 어머니의 사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결국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정실은 아이를 가지게 되었고 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상룡은 할아버지에게 사실을 이야기했다. 예상대로 할아버지는 노발대발하며 정실을 쫓아내 버렸다.

이제 집은 더 휑뎅그렁하게 되었다. 아무리 애원해도 할아버지는 막무가내였다. 정실과 함께 도망할 수 없었던 무기력한 자신이, 경제력 없는 학생 신분이 상룡을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정실을 내쫓음으로써 소설은 파국 국면에 접어든다. 상룡이 해석하던 옛편지들은 문중의 누가 될 것이라 여겨 할아버지는 이것들을 태우기 시작했고 마침내 이를 제지하던 상룡과 몸부림이 일어나자 삽시간에 불은 효계당의 기둥을 모조리 불기둥으로 만들어버리며 소설은 막을 내린다.

효계당이 사라짐으로써 종가의 도를 이어가야 하는 명분도 사라지게 되었다. 상룡은 정실을 찾을 수 있을까. 소설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정실이다. 어머니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자신에게 따뜻한 눈길을 보내주지 않았다. 결혼은 물론이고 박복하게 태어난 신세를 한탄하며 행복하다고만은 할 수 없는 인생만이 펼쳐질 줄 알았는데 뜻밖에 상룡의 사랑을 받고 보니 아무리 생각해도 정실은 꿈인 듯싶다.

명분에 휘둘려 살기에 우리의 삶은 너무나 짧다. 자신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삶, 자신이 주체가 되는 삶을 영위하고픈 게 인간의 본능이라는 걸 다시금 일깨워주는 소설이다. 다수의 관심에서 비껴가기 쉬울 소재로 좋은 소설을 쓸 수 있다니 저자의 능력이 새삼 놀랍다. 저자의 소설마다 굵직한 여운이 아로 새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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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2-25 1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TV특집극으로 보았습니다.
혈통과 가문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더군요.


연잎차 2006-12-26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자는 독자를 실망시키지 않더군요^^
 
늦어도 11월에는
한스 에리히 노삭 지음, 김창활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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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바람이 일렁이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차 생각뿐이다. 따뜻하게 데운 우유도 좋고, 향기로운 커피도 좋다. 찻잔의 온기를 느끼면서 음미하는 것이 무엇이 되었든, 그 순간에 우리는 짧은 행복을 경험하게 된다.

알랭 드 보통은 그의 소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서 '성숙한 사랑은 첫눈에 반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늦어도 11월에는>의 주인공 마리안네는 처음 만난 베르톨트와 성숙한 사랑에 빠지고 만다.

첫눈에 빠져도 성숙한 사랑일 수 있다

결국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을 느끼는 찰나의 순간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 첫눈에 반해서 서서히 만들어지는 것이 사랑이다.

마리안네는 남편 회사가 주관하는 문학상 시상식장에서 수상자인 베르톨트를 만나게 되었다. 처음 그를 본 순간 대부분의 연인이 그렇듯 마리안네는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것은 베르톨트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두 사람이 서로를 발견하는 순간, 주위는 캄캄해지고 상대가 자리하고 있는 곳만이 오직 환하게 빛나는 기이한 경험을 이들도 하게 된다.

베르톨트는 마리안네에게 다가와 다짜고짜 "당신과 함께라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이야기한다.

이 말이 가져온 파장이 그리 클 줄은 아무도 몰랐다. 오늘 처음 본 사람에게 어찌 그런 말을 건넬 수 있을까? 그 짧은 순간에 한 사람을 얼마나 알게 되었다고 그러는 걸까. 베르톨트의 행동은 일견 너무 성급하고 앞뒤 구분 못하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길로 두 사람은 마리안네의 집으로 가서 짐을 챙겨 떠난다. 물론 마음속에 동요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재벌 마나님으로 평온한 일상을 보내고 있던 귀부인이 자식과 남편을 두고 유랑자와도 같은 작가와 떠날 생각을 하다니, 그것도 오늘 오후에 처음 본 남자와 그럴 것이라고는 자신도 이전에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멀리 떨어져 살면서 쉽게 만날 수도 없는 이 모든 것을 그들은 필연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나는 달랐다. 내가 떠나는 것은 필연이 아니었다. 나는 예전처럼 그럭저럭 지낼 수도 있었다. 나를 이곳 대합실까지 데려온 것은 그의 말 한마디였다. 내가 여기까지 온 이유를 알게 되면 아마 사람들은 어이 없어하며 웃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한마디 때문에 나는 이 대합실에 앉아 있었다. 그는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물론 그 순간 그는 분명 사랑에 빠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건 다른 얘기다. 그런 말 때문에 집을 나오는 사람은 없다.(120쪽)

기다리는 사랑, 그 기다림의 끝은

그렇게 베르톨트를 따라나선 마리안네는 그와 두 달간을 함께 보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왔는데 정작 잘한 일인지 회의가 드는 건 왜일까. 베르톨트는 무엇이든 혼자서 해결하는 쪽이었다. 마리안네의 어떤 도움도 필요치 않았다.

베르톨트는 창작의 산고를 겪고 있었고, 마리안네는 그의 고통을 덜어줄 어떤 일도 할 수 없었으며 스스로를 그의 짐으로 여기게 되었다. 생각 끝에 마리안네는 마침 이곳으로 여행을 온 시아버지를 따라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베르톨트를 위해서였다.

이목을 중시하던 남편은 마리안네를 군소리 없이 맞아들였고, 시아버지 역시 마리안네를 따뜻하게 대해준다. 현실에서는 참 일어나기 힘든 일처럼 보였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시간은 예정대로 흘러갔고 베르톨트가 쓰고 있던 희곡이 초연되는 11월이 되었다.

11월이 되자 마리안네는 시나브로 베르톨트의 전화를 기다리게 되었다. 11월 이후에 그들은 폭스바겐을 타고 여행을 하기로 했었다.

그래서일까. 마리안네는 하필이면 마리안네가 살고 있는 도시에서 베르톨트의 희곡이 초연된다는 사실에 마음이 설레었다.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베르톨트이기를 기대했고, 번번이 다른 사람의 전화라는 사실에 실망하고 있었다.

마침내 공연 첫날, 베르톨트는 마리안네를 찾아왔다. 미리 약속한 것도 아닌데 한 사람은 기다리고 한 사람은 찾아왔다. 마리안네는 당연하다는 듯 베르톨트가 몰고 온 폭스바겐을 타고 떠나지만 얼마 되지 않아 폭스바겐은 다리교각에 부딪쳐 산산조각이 나고 소설도 막을 내린다. 베르톨트는 마리안네가 불러주던 자장가를 허밍으로 부르고 있었고 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마리안네가 정돈된 일상을 버리고 떠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안정된 생활이 주는 권태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평온한 일상 속에서는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기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 마리안네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버렸다.

죽음, 영원한 사랑의 시작

소설의 결말을 보자 익숙한 장면하나가 떠올랐다.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어서 죽음으로 완성한 두 사람, 영화 <엘비라마디간>의 식스틴 중위와 엘비라처럼 마리안네와 베르톨트도 죽음으로 그들의 사랑을 완성했다.

다른 어떤 소설보다 화자의 심리 묘사가 탁월하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누군가의 일기에 담긴 글을 보듯, 마음 속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시간의 흐름을 잊을 정도다. 한스 에리히 노삭의 <늦어도 11월에는>은 찰나의 사랑을 경험하고, 영원한 사랑을 위해 떠난 이들의 이야기다.

역자는 이 책을 읽고 '연애소설도 이쯤 되면 이건 예술이구나'하는 감탄을 했다고 한다. 아마 독자들도 비슷한 기분을 경험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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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잎차 2006-12-18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이퍼에 있던 걸 리뷰로 옮겨 왔습니다.

비로그인 2006-12-18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는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물론 그 순간 그는 분명 사랑에 빠진 사람이었다."
오, 문장이 좋군요. 연잎차님.


연잎차 2006-12-19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찌보면 진부한 소설이기도 하지만, 그 옛날에 쓰였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지요^^
 
저녁은 어떻게 오는가
이후경 지음 / 실천문학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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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소리 없이 내려앉는 어둠처럼 그렇게 소설은 독자들의 마음속에 내려앉는다. 되도록 아픈 삶과는 조우하고 싶지 않은데 어쩐지 소설은 자꾸만 마음을 낮은 쪽으로 침전시키기만 할 뿐 다른 곳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과거순례>의 윤영은 끊임없이 친구 수민과 자신을 비교한다. 모든 면에서 수민보다 뛰어났던 윤영은 어느 순간 친구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불치병에 걸린 친구의 병문안 다녀오면서도 자신에게 결여된 무언가에 대해 회의하며 주인공은 과거순례를 시작한다. 그것은 생존하기 위한 본능 같은 것이었으리라.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들, 하루만 지나면 먼지 앉을 마루를 그다지도 열심히 닦고, 하루만 입어도 더러워질 옷들을 그렇게도 정성껏 빨았다. 뱅글뱅글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으면서도 열심히 앞을 향해 달려 나가고 있다고 굳게 믿은 채. 나는 반들반들한 마루와 눈처럼 흰 내복들과 얌전한 모범생처럼 차곡차곡 잘도 챙겨져 있는 부엌 외에 무엇을 남기고 갈 것인가.

그것들은 내가 죽으면 단 하루 만에 더러워지고 때 타고 흐트러질 것이다. 그러면 나 아닌 또 다른 익명의 여자가 그 일들을 해낼 것이다. … 나는 그렇게 뱅글뱅글 맴돌다 그 누구와도 교환될 수 있는 이름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202~203쪽)


일하는 엄마가 싫었던 까닭에 윤영은 소박하게도 현모양처가 되기를 소망한다. 졸업 후 신문기자가 되어 소설도 쓰며 사회활동을 활발히 하는 수민과는 달리 졸업과 동시에 결혼한 윤영은 살림에 몰두했다. 신기하게도 그처럼 다르게 살면서도 우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

누런 원고지, 여기에 담아낼 수 있는 무수한 인생의 파상, 자신이 직접 살지 않고도 그려낼 수 있는 그 무한한 삶의 가능성 때문에 갈래머리 여고 시절 내내 윤영은 이 누런 원고지를 끼고 살았다. 자신의 삶이 아무리 갇혀 있고 고여 있는 것이었다 할지라도 이 누런 원고지만 있으면 순식간에 그 삶은 광활한 벌판을 자유롭게 떠다니는 바람이 되곤 하였다. 이 누런 원고지가 그녀의 삶에서 사라지는 때부터 윤영의 삶은, 오직 자신이 처해 있는 그 좁은 삶 외의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말았다. …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은, 그 수많은 빈칸들이 그녀를 비웃고 있었다. (197쪽)

학창시절 수민보다 글을 잘 썼던 윤영은 작가가 되기를 포기한 것이 못내 후회가 되었다. 그런 스산한 마음이 일면서도 한편으로는 든든한 남편과 착한 딸이 곁에 있는 것에 만족하며 다시 일상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러나 그런 위안은 다만 착각이었을 뿐이었다. 과거순례가 끝나갈 즈음 남편의 고백으로 윤영은 그간 자신이 살아온 인생이 한낮 허구인 것처럼, 사기인 것처럼 느끼게 된다.

수민의 아들 지환이 바로 남편의 아들이라는 것이었다. 윤영이 딸을 낳았을 때 즈음 취재차 찾아온 수민과 만나게 되었고 그때부터 둘의 만남이 시작되었다고. 남편과 수민은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윤영을 기만했던 것이다.

남편은 그 대가를 수민이 혼자 받는 것 같아 괴롭다는 이야기를 했고, 앞으로 수민이 살 수 있는 3년을 함께 보내고 싶다고 이혼하자고 어렵게 이야기를 꺼냈다. 중학생인 지환이도 자신이 돌봐줘야 할 것 같다고. 며칠 출장을 다녀올 테니 그간 마음 정리를 하라는 말만을 남긴 채 남편은 집을 떠났다. 그렇게 소설은 막을 내렸다.

가혹하다. 현모양처의 대가가 바로 남편과 친구의 배신 따위라니. 인생이 허무하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윤영은 왜 바보 같이 눈치 채지도 못했을까.

그러나 인생은 또 알 수 없는 법. 오히려 그렇게 된 편이 잘된 건지도 모른다. 윤영에게는 아직 펼쳐지지 않은 제2의 인생이 싹트고 있을 게 분명하다. 그동안 잊어버리고 살았던 문학에 대한 열정들이 현모양처의 자리를 대신하여 활화산처럼 불타오를 것이라고 믿는다.

이후경의 소설에는 도처에 슬픔의 그림자가 드리워져있다. <폭설>에는 사랑했던 한 때를 회상하며 죽은 애인을 떠올리는 주인공이 등장하고, 역시 여관을 배경으로 한 <낙원장>에서는 중년의 연인이 등장한다. 각자 고단한 삶을 떠올리며 모진 삶의 굴곡을 지나와 이제 떠나면 그뿐이라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인생의 마지막까지 함께 할 연인들, 그들에게도 일견 사랑이라고 보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모독>에서는 세상을 떠난 이가 화자가 되어 자신의 삶을 들려준다. 그토록 젊은 나이에 너무나 어이없게도 왜 그렇게 죽어야 했는지, 죽은 이가 들려주는 이야기라니 조금은 소름이 돋는다. <바람의 무덤>에서는 늦은 나이에 어렵게 얻은 아이를 잃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바다 바람이 부는 언덕 위에 아이를 묻었는데, 금반지 같은 유채꽃이 피었다는 이야기가 더없이 슬프게 들렸다.

<저녁은 어떻게 오는가>에서 은해는 자살한 어머니의 모습이 결코 잊혀지지 않아 삶이 온통 뒤틀려버렸다. 주인공 역시 낙태를 감행하게 되는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낮달>에서는 노동운동으로 남편을 잃고 힘겹게 삶을 이어가는 미숙이 등장한다. 치매를 앓는 시어머니는 오매불망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며느리는 그런 시어머니에게 화를 내기 보다는 그냥 남편이 살아있기라도 하는 것 마냥 대꾸를 해준다. 그런 엄마를 두고 꼬마 녀석이 “어무이, 니까정 돌았나?”하는데 그만 눈물이 핑 돌았다.

소설 어디에도 녹록한 삶은 없다. 그렇게 힘겨움에도 불구하고 주인공들은 강인한 생명력을 놓지 않는다. 그저 주어지는 삶은 없다는 명제만 남겨놓은 채 소설들은 막을 내리고, 저무는 한 해를 돌아보며 소설처럼 녹록치 않은 삶일지라도 우리는 훌륭히 살아내야 할 것이라는 당위만이 허공 속을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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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의 연애
심윤경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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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윤경의 새 장편소설 <이현의 연애>는 독특하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여자를 혼자서 사랑해도 좋다고 여기는 결혼한 남자가 등장한다. 언젠가 이 여자가 나를 사랑해주었으면 하고 오매불망 바라는 모습이라니, 어찌 보면 세 번 결혼의 경력을 가진 남자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책장을 넘길수록 낭만적인 연애와는 한참 거리가 먼 이야기들이 펼쳐졌다.

주인공 이름이 비슷하다. 이현은 경제 관료로 결혼 생활에 쉽게 권태를 느끼면서도 매번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한 인물로 마흔둘이다. 이진은 막 빙하에서 건져 올린 다갈색 구슬 같은 눈동자를 지닌 매혹적인 여자로 신기하게도 영혼을 기록한다.

영혼을 기록하다니 그럼 무당이나 점쟁이 같은 건가. 물론 아니다. 이진이 보는 영혼은 우리와 동시대를 사는 살아있는 영혼인, 생령이라고 했다. 가끔 죽은 영혼도 보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무당과는 다르다.

이현은 여섯 살 때, 아버지를 따라 어느 결혼식에 갔다가 신부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여섯 살짜리도 사랑에 빠질 수 있다는 건 소설이기에 가능한 건가. 이현은 오랫동안 신부를 마음에 담아두었고 마침내 그 순간의 설렘을 이진을 만나고서 다시 느끼게 된다. 신부와 꼭 닮은 이진은 바로 그녀의 딸이었다. 이진이 태어나기 하루 전에 이진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드디어 모험은 시작되었다. 이세공은 빙하에서 솟아오른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지만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했고 딸인 이진에게도 좋은 아버지가 되지 못했다. 그는 실패자였다. 이제 두 번째 도전자로 출발점에 선 이현은 이세 공과는 다른 길을 걸을 생각이었다. 이진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행복을 넘어서는 무한대의 행복을 두 손에 쥐여 주고 싶었다. 약정한 3년의 기간을 넘어 영원에 이르도록 잠재의식 속에 숨겨졌던 오래된 소망에 그의 마음이 뜨거워졌다. 이진의 맑은 두 눈에 기쁨과 사랑이 일렁이는 그 순간, 그의 사랑은 아름다운 완결을 맞이할 것이었다." (45쪽)

경제적으로 독립을 해야 하는 이진에게는 직장생활이 어울리지 않았다. 아이처럼 모든 일에 서툴렀다. 영혼을 기록하는 일 외에 이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진의 외모에 이끌린 남자들은 특이한 능력을 가진 이진의 속내를 듣고는 모두 사라져버렸다. 다행히도 이현에게 그런 것쯤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현은 이진에게 3년간의 계약결혼을 제안했고 마침내 그들은 결혼하게 되었다.

이진의 관심사는 오직 영혼을 기록하는 일 뿐이었다. 남편의 출근을 돕고, 가사일을 하는 일은 부수적인 일이었고 오로지 영혼을 기록하는 작업에만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현은 불평을 늘어놓지 않았다. 이진을 사랑하기에 그저 함께 있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아름다운 이진이 이현을 진실로 사랑하게 되는 것 이진이 이현에게 집착하고 그가 다른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길까봐 불안해하는 것. 어느새 찾아든 사랑을 깨닫지 못하다가, 어느 날 미지의 여인이 걸어온 한 통의 전화로 깨닫게 되는 것. 이진이 질투하고 울고 화내며 그의 해명과 맹세를 요구하는 것. 그의 결혼생활에 대해, 아내에 대해 미궁을 헤매는 것 같은 회의가 느껴질 때마다 그는 가슴 안쪽에서 그 작은 상상 속의 장난감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149쪽)

끝내 이현은 이진의 사랑을 얻을 수 없었다. 마음이 없는 여자처럼 느낄 때마다 힘들었던 이현은 마침내 영혼의 기록이 적힌 공책을 열어보아서는 안 된다는 규칙을 어겼고, 3년이 가까워온 시점에서 이진은 세상을 떠났다.

이 일을 계기로 빠르게 진행된 이진의 죽음은 다소 독자를 허탈하게 만들었다. 기이한 것은 이진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뱃속의 아이를 남겨두고 이진이 죽었다는 점인데, 이 지루한 반복은 계시처럼 계속될 것처럼 보였다.

영혼을 기록한다는 건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이다. 그것 자체로 훌륭한 소설이 된다. 이진의 기록이라는 형식으로 실린 단편들은 저마다 굵직한 주제를 내포하며 <이현의 연애>와는 별개로 독자에게 커다란 감동을 선사한다.

살갗을 에는 추위도 농도 짙은 소설 한 권으로 녹일 수 있다. <이현의 연애>는 삶과 사랑, 허무와 고독에 대한 성찰의 기록이다. 한 해의 끝에서 좋은 소설을 한 권 더 만났다는 생각에 기쁜 마음이다. 독자들에게 의미 있는 겨울 선물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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