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 알랭 드 보통의 유쾌한 철학 에세이
알랭 드 보통 지음, 정명진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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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서 이 책의 광고를 보았을 때,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떤 책인지 알지 못한 채, 책제목만 보고 웃음을 지은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 작위적인 판단이지만, 슬픔도 때에 따라선 기쁨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긍정 때문이었다. 또한 소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재미있게 읽은 나로서는 알랭 드 보통의 저서에 무작정 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은 철학에세이다. 딱딱하고 어려운 철학에 좀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다리 역할을 해주고 있는 이 책은 소크라테스, 에피쿠로스, 세네카, 몽테뉴, 쇼펜하우어, 니체를 이야기하며 우리에게 어떤 위로를 안겨주려 하고 있다. 위로가 되었는지 아닌지는 책을 끝까지 읽어보고 독자가 판단하겠지만, 쇼펜하우어와 니체 편에 실린 글들이 나에게는 깊은 여운을 안겨 주었다.

모든 삶은 다 힘겹다. 그리고 그들 중 몇 명을 완성된 삶으로 승화시키는 것은 고통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달려있다. 모든 고통은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말해주는 희미한 신호다. 그런 고통도 말하는 사람의 정신력과 현명함의 정도에 따라 좋은 결과를 낳기도 하고 나쁜 결과를 낳기도 한다.

고민은 정신적 공황 상태를 야기할 수도 있지만 문제의 본질을 정확하게 분석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불공평에 대한 인식은 살인으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경제 이론 분야에 선구적인 업적을 낳게 할 수도 있다. 부러움 또한 비통한 마음을 부르기도 하지만 라이벌과의 경쟁심을 자극해 걸작을 탄생하게도 한다. -본문 중에서

이상은 <곤경에 대한 위안 - 니체 편>에 실린 글의 일부다. 도덕 교과서처럼 정답인 말이 열거되어 있는 듯 한데, 실제 생활에서 우리가 어떤 고민에 부딪칠 때마다 우리는 이미 정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방황한다. 역경에 처할 때마다 위기를 기회로 삼을 수 있어야 하고, 그렇게 시행착오를 반복하면서 우리는 성장할 것이다.

사랑은 상상 가능한 가장 커다란 행복을 우리에게 약속하지 않고는 우리로 하여금 종을 번식하도록 유혹할 수 없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거부를 당한데 따르는 상처가 너무 깊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사랑을 받아들이는데 수반되는 숭고함을 무시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런 심한 고통이 뭔가 이상하다고 되뇌이며 고통은 더욱 복잡하게 악화시켜서는 곤란하다. 그런 일을 당하고도 만약에 충격을 받지 않는다면 비정상일 것이다. -본문 중에서

이상은 <상심한 마음을 위한 위안 - 쇼펜하우어 편>에 실린 글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거부를 당했다면, 단지 인연이 아니었다고만 생각하면 된다. 저자는 '둘의 결합이 이뤄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그 사람과 인연을 맺어서는 균형 잡힌 아이를 낳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와 맥락을 같이 하는 이야기다.

사랑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므로 상대방과 마음이 같지 않을 경우에는 확실한 '거부'가 중요하다. 막연한 기대를 갖지 않게 하는 것이 서로에게 좋고, 거부를 당했을 때도 상대나 스스로를 원망하기보다는 무엇보다 생각의 다름을 인정하고, 어디에선가 다른 인연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낙관해보자. 당장의 슬픔을 추스르는 길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자기계발이 가장 나을 듯 하다.

몽테뉴는 첫 장부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소중한 존재"라고 역설하고 있는데, 알랭 드 보통의 유쾌한 철학 에세이 <젋은 베르테르의 기쁨>은 호젓한 철학의 오솔길로 우리를 안내한다. 스스로를 돌아보며 사색을 즐길 시간을 제공해 주는 쉽고, 재미있는 철학서의 등장이 마냥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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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친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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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으로 미루어 보아 짐작할 수 있듯, <키친>에는 부엌을 끔찍이도 좋아하는 주인공 사쿠라이 미카게가 등장한다. 저자는 짧고 간결한 어조로 시종일관 앙증맞은 문장을 구사하기에 여념이 없다. 맛있는 소설이라고 이야기하면 좋을까. 어쨌든 도입부의 <키친>은 청량감을 안겨주며 마음을 들뜨게 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할머니와 함께 살던 미카게는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다나베 유이치를 만나게 된다. 꽃을 좋아하던 할머니가 일주일에 두 번 들르는 꽃집의 아르바이트생이 유이치였고, 친절한 청년 이야기를 자주 들었던 미카게는 쌀쌀한 인상의 그를 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보게 되었다. 미카게는 자신보다 더 슬퍼하는 유이치의 모습에서 혹시 할머니의 애인은 아닌가 하고 우스운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큰 집에 덜렁 혼자 남게 된 미카게에게 유이치는 당분간 어머니에게 동의를 구하여 함께 지내자고 제안을 해오고, 미카게는 그런 유이치를 쿨하게 보는 동시에 믿음직스러워 한다.

미카게는 나이에 걸맞는 주름과 고르지 못한 치열을 가진 유이치의 어머니 에리코에게서 인간다운 매력을 느끼는데, 사실 에리코는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였다. 에리코는 아내가 죽은 후 더 이상 아무도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아 여자가 되기로 결심했는데, 성형수술로 닮지 않은 두 부자의 얼굴을 저자는 부처님처럼 반짝이게 보인다고 묘사하고 있다.

알지 못하는 사람과의 아침 식사 장면을 신기하게 느끼면서도 미카게는 평온함과 따뜻함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시작된 더부살이 생활에서 미카게는 아마도 그들을 또 다른 가족으로 느꼈을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에리코는 타인에 의해 살해당하고 언제인가 미카게가 느꼈던 상실이 고스란히 유이치에게 전해져오게 된다. 한동안 방황을 하던 유이치는 결국 미카게와 재회하게 되는 것으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 사랑하면서도 서로의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친구같은 관계를 유지하는 사랑이 투명하게 빛나는 봄빛처럼 싱그러웠다.

조연들의 활동도 빛났는데, 미카게의 옛사랑 소타로는 공원을 아주 좋아하고, 식물을 사랑하는 남자라 멋있었다. 반면, 유이치를 좋아하는 오쿠노는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목메고 있어 딱해 보였지만, 어긋나는 게 사랑이라는 이름의, 환상의 물매가 아니었던가.

그럼에도 어렵게 사랑을 이루기도 하고, 그럴 수 없기도 한,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한없이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키친>은 단숨에 읽어낼 수 있는 분량의 책이면서도 지루하지 않고, 다시 읽어보아도 여전히 유쾌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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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학자
배수아 지음 / 열림원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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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라고는 하나, 그의 전작 <에세이스트의 책상>과 같이 에세이적인 느낌이 강했던 <독학자>는 기꺼이 마음 속 깊은 곳까지 와 닿았다. 대학에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어 대학을 떠나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생각했던 것보다 낭만적이었던, 혹은 실망으로 마음이 불편할 때도 있었던 학부 시절을 떠올려 보기도 했다.

<이전에 나는 대학에서 진정한 의미의 모든 진화가 이루어지리라고 기대했었다. 정신과 지성의 진화 말이다. 그 곳에서는 밤이나 낮이나 토론이 이루어지고, 그들은 읽은 것을 서로 나누고 그들이 아니면 성취할 수 없었던 사유를 교환하고 서로에게 서로는 좋은 토론자가 되어주며, 그곳은 천박하고 상업적인 것과 일정 연봉의 직업을 구하려는 실리적인 목적에서 벗어난 영역으로, 오직 정신만을 위하는 정신, 그 자체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일 것으로 기대했었다.> - 본문 중에서

이상은 주인공이 이전에 기대했던 대학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대학은 그의 기대와는 달랐으므로 주인공은 '훗날 대학을 떠난 후에 유일하게 그리워할 장소로 도서관 개가식 열람실'을 일컫게 될 것이라 믿었고, '산책하는 기분으로 서가를 다니면서 마음에 드는 책을 뽑아 들고 읽다가 창 밖을 바라보는 일'따위를 즐겨했던 것을 회상하게 될 것이었다.

정신적인 고양을 위해 주인공에게 더없이 큰 영향을 끼친 두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S와 P교수다. 그들의 공통점은 '학문의 즐거움'을 아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S는 '문학적이면서도 절제되고, 지적인 힘에 머리가 멍해질 정도'의 번역 문장을 가지고 있는 영문학도였다. S는 '단순히 생활의 편리나 의사소통을 위해 구사되는 언어가 아니라, 마치 음악이나 미술처럼 표현을 위해서 그들 스스로가 언제나 발언을 바라고 있는 듯이 보이는 선택된 문장'을 가지고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래서 촌스럽고 비만하며 세련되지 못해 첫눈에 반할 수 없는 외모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이 S와 친구가 될 수 있는 충분한 이유다.

또한 주인공은 P교수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의 얼굴은 그대로 아직 내가 만나보지 않은 어떤 세계, 아직 읽지 않은 한 권의 책이었으며 그것은 내가 일순간이나마 느꼈던, 인간의 얼굴과 인격에 드리운 시간에 대한 생애 최초의 긍정적인 인상이었다.> - 본문 중에서

어떤 사람의 존재 자체가 세계가 될 수 있다니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다. 한 번의 만남 이후, P교수의 죽음으로 인해 다시 그를 만나게 될 수 없지만, P교수에게 보낸 편지들을 시작으로 주인공은 마침내 "읽을 수는 있으나, 쓸 수는 없는 스무 살"에서 해방된다.

대학과 사회에 실망하고 모든 것을 버린 채, ‘영혼의 자유’를 위해 대학을 떠난 후 주인공은 스스로가 규정한 대학을 마흔 즈음에 졸업하리라고 낮은 음성으로 읖조리고 있다.

<마흔 살까지는 생계를 위해서 필요한 돈을 버는 이외의 시간은 오직 혼자서 책을 읽으며 공부할 것이다. ... 그러다 이윽고 마흔 살이 되면, 그때 나는 스스로 만든 대학을 졸업할 것이다. 그때 나는 지금보다 훨씬 자유롭고 선명한 존재가 되어 있을 것임을, 나는 의심하지 않겠다.> - 본문 중에서

책의 말미에 '인생은 내가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그 스스로를 표현할 것이므로 이 산책이 끝날 때까지는 인간이 무엇을 말하더라도 너무 이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라는 글은 우리가 평생 배움의 자세로 살아야 하는 이유를 극명하게 제시해 주고 있다.

<독학자>를 읽으며 일부 독자들은 마치 자신의 이야기인양 기꺼워하며 친근함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며, 또한 다수의 독자들에게 학문이라는 것이 대학 내에서만 가능한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뜨려 새로운 인식의 틀을 경험하는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독학자>는 의미있는 소설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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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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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야 할 책은 차고 넘친다. 당장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 보더라도 먼저 읽어야 할 책의 순위를 정하기가 힘들다. 매번 괜찮은 선택을 했다고 자부할 수 없지만 그래도 책을 보는 안목이 점점 나아지겠거니 낙관하면서 책을 구입한다.

 1할 2푼 5리의 승률이라니... 그것의 의미도 모르면서 책을 읽는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었다. 소외 받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야구에 문외한인 내가 읽기에 다소 무리일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을 접고, 한동안 이 책을 잊고 지내다 어느 순간 이 책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이 책 통해 야구를 조금이나마 알게 될 것 같다는 막연한 기대감을 갖고 책을 펼쳤다.

그런데 책을 다 읽은 지금도 통산 방어율 3.17이 뭔지, 3할 8푼 7리가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좋다. 야구는 소재일 뿐, 정작 말하고 싶은 것은 야구가 아니었으므로...

이 책에는 유년시절의 기억들을 술술 풀어내며 소소한 일상을 가볍게 담아내고 있는 듯싶더니... 중·고교, 대학 시절을 지나 취직을 하면서부터 점점 인생이 고달퍼지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처음에는 낄낄거리며 웃다가 마지막으로 갈수록 마음이 무거워지는 책이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아는 게 많아지고, 그러다 보니 걱정거리가 많아지고...

'알고 보면 인생의 모든 날은 휴일'이라는데 우리에게는 너무나 먼 일처럼 느껴진다. 마치 '지기 위해 태어난 팀'이 급기야 해체된 것처럼... 서글픈 경험을 간직하고 있을 법한 사람들에게 진한 감동으로 다가올 책이었다.

삼미 슈퍼스타즈는 결코 패배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는' 용기 있는 사람이었고, 바로 진정한 승리자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 무슨 역설인가. 진정한 승리자가 되는 건 더 어려운 일 같다. 내 주위에도 기인이 한 명 있다. 그 친구는 대학을 졸업하고 일자리를 얻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생각할 것이다. 부모가 부자여서 굳이 밥벌이를 하지 않아도 되는 부유층일 것이라고…. 그런데 사실은 아니다. 평범한 농사꾼 아버지를 두었을 뿐이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의 시간을 저당 잡혀 하루 중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직장에, 또는 생업에 바치기 싫은 것뿐이었다.

가난하게 살더라도 인생의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행복의 지수는 달라질 수 있다고 믿으며,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이 행복의 지름길이라 여기는 그런 친구였다. 그 친구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얼마 간의 시간동안 나는 참으로 신선한 기분이 들었고, 그렇게 생각하며 지낼 수 있는 친구가 한 없이 부러웠다.

지나 온 삶을 돌아보게 하고, 지금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이 책은 과거 어느 때가 아닌, 특별한 시기를 보내고 있는 지금에 만나서 더욱 울림이 깊었던 책으로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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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의 풍경 - 잃어버린 헌법을 위한 변론
김두식 지음 / 교양인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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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신문의 지면 광고를 통해 <헌법의 풍경>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시 김두식 교수의 책이 출간되었다고 하니 반갑기는 하였어도 딱딱하고 재미없는, 어려운 법학 용어만이 나열된 책이 아닐까 차일피일 미루다 읽은 책이었다.

이 책을 보고 있자니 문득 학부 시절, 교양법학을 들었던 기억도 시나브로 몰려왔다. 이 과목을 신청할 때도 책을 읽기 전의 마음처럼 '교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까' 혹은 '학점을 제대로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으로 오랜 시간 망설였던 기억이 난다.

결국 모험하는 기분으로 수강신청을 하게 되었고, 강의 첫 시간 내가 얼마나 부질없는 걱정을 했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이 과목을 신청하지 않았다면, 나는 졸업을 앞둔 마지막 학기를 얼마나 황량하게 보내게 되었을까 아찔한 마음까지 들었다.

말하자면, 매 수업을 들을 때마다 나는 1년에 몇 번 열리지 않는 강연을 듣는 기분으로 수업에 임했다. 법학뿐 아니라 역사, 철학, 여성, 환경 등의 문제에 극도로 결핍되어 있는 학생들에게 그야말로 획기적인 영양제를 놓아준 슈바이처 선생의 강의였던 것이다. 책을 읽으며 다시 은사님을 떠올릴 수 있어 더 반가웠다.

저는 법학과는 전혀 상관없는 학생들에게 교양과목으로 '시민생활과 법'을 가르치는 것이 무척이나 즐거웠습니다. 제대로 된 법학자치고 교양과목 강의를 즐겨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학문적 업적을 쌓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수강 인원도 많아서 출제, 채점 등에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것이 교양 법학입니다. 그런데도 제가 교양 법학 가르치는 걸 그렇게 즐거워했다는 것은, 제가 학자로서의 자질을 갖추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뚜렷한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기껏 3학점짜리 수업으로 학생들에게 법의 기본을 알려준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목표였지만, 제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웃고 떠드는 가운데 적어도 법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만은 분명했습니다. … 졸업 후 시민단체와 일반 직장으로 진출한 학생들로부터 제 수업 덕분에 실무에서 큰 도움을 받고 있다는 메일을 받을 때마다 저는 이류 학자의 삶도 의미 있다는 자부심을 갖게 됩니다. - 본문 중에서

수강 인원이 많아 과제물 점검이나 시험 감독, 채점이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은 막연히 해왔지만, 교양법학이 그런 성질의 과목이었다니 교수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고는 절대 모를 일들이 있었던 것이다.

김두식 교수는 솔직하고 겸손하고 용기있는 사람이었다. 법대에 가게 된 이유부터 책을 좋아한 유년 시절의 기억, 군법무관으로 근무할 때의 일상, 그리고 육아를 하며 아내를 뒷바라지했던 미국에서의 생활 모습에서 명민한 소장 법학자이기 전에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너무도 수려한 모습이 감동으로 다가왔다.

한편 '특권의 내면화'라는 말이 자꾸만 귓전을 맴돌았다. 다음의 인용문에서 그 의미를 헤아려 볼 수 있을 것이다.

가끔 그 옛날의 합격자 인터뷰들을 생각할 때마다 저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기 위해 사법시험을 준비했다던 그 많은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하는 의문을 품게 됩니다. 처음부터 통상 전문가를 꿈꾸는 요즘의 세련된 합격생들은 논외로 치더라도, 지금 법조계 물을 먹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때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위한 삶'을 꿈꾸었던 사람들입니다. 신문 인터뷰를 하며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이야기했던 법조인들만이라도 자기 약속에 충실했다면 시민과 법 사이의 엄청난 괴리 현상이 조금은 완화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사법시험이라는 장벽을 넘어 들어간 곳에서는 '새로운 세계'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새로운 세계는 결코 그들에게 특권을 향유하라고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특권과 특권의식은 가랑비처럼 소리없이 그들의 삶 속에 젖어들었습니다. 새로운 세계의 법과 논리는 그 나름대로 완결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 흐름에 저항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저도, 저의 동료들도 그렇게 서서히 변화해 갔습니다. - 본문 중에서

또한 저자는 서민에게 문턱이 너무 높기만 한 변호사사무실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었는데, 참 가관이었다. 수임료를 내고 법률 서비스를 받으러 온 의뢰인에게 오히려 훈계하려하고 군림하려하는 일부 변호사들의 특권 의식을 어찌하면 좋을까.

법학자로서의 커밍아웃이라고 해야할까. <헌법의 풍경>은 법학 용어를 전혀 모르더라도 읽을 수 있는 책, 법률 귀족의 일그러진 초상을 명쾌하게 짚어주는 책이었으며, 우리 사회의 단면을 엿볼수 있는 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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