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의 풍경 - 잃어버린 헌법을 위한 변론
김두식 지음 / 교양인 / 200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몇 해 전 신문의 지면 광고를 통해 <헌법의 풍경>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시 김두식 교수의 책이 출간되었다고 하니 반갑기는 하였어도 딱딱하고 재미없는, 어려운 법학 용어만이 나열된 책이 아닐까 차일피일 미루다 읽은 책이었다.

이 책을 보고 있자니 문득 학부 시절, 교양법학을 들었던 기억도 시나브로 몰려왔다. 이 과목을 신청할 때도 책을 읽기 전의 마음처럼 '교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까' 혹은 '학점을 제대로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으로 오랜 시간 망설였던 기억이 난다.

결국 모험하는 기분으로 수강신청을 하게 되었고, 강의 첫 시간 내가 얼마나 부질없는 걱정을 했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이 과목을 신청하지 않았다면, 나는 졸업을 앞둔 마지막 학기를 얼마나 황량하게 보내게 되었을까 아찔한 마음까지 들었다.

말하자면, 매 수업을 들을 때마다 나는 1년에 몇 번 열리지 않는 강연을 듣는 기분으로 수업에 임했다. 법학뿐 아니라 역사, 철학, 여성, 환경 등의 문제에 극도로 결핍되어 있는 학생들에게 그야말로 획기적인 영양제를 놓아준 슈바이처 선생의 강의였던 것이다. 책을 읽으며 다시 은사님을 떠올릴 수 있어 더 반가웠다.

저는 법학과는 전혀 상관없는 학생들에게 교양과목으로 '시민생활과 법'을 가르치는 것이 무척이나 즐거웠습니다. 제대로 된 법학자치고 교양과목 강의를 즐겨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학문적 업적을 쌓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수강 인원도 많아서 출제, 채점 등에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것이 교양 법학입니다. 그런데도 제가 교양 법학 가르치는 걸 그렇게 즐거워했다는 것은, 제가 학자로서의 자질을 갖추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뚜렷한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기껏 3학점짜리 수업으로 학생들에게 법의 기본을 알려준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목표였지만, 제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웃고 떠드는 가운데 적어도 법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만은 분명했습니다. … 졸업 후 시민단체와 일반 직장으로 진출한 학생들로부터 제 수업 덕분에 실무에서 큰 도움을 받고 있다는 메일을 받을 때마다 저는 이류 학자의 삶도 의미 있다는 자부심을 갖게 됩니다. - 본문 중에서

수강 인원이 많아 과제물 점검이나 시험 감독, 채점이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은 막연히 해왔지만, 교양법학이 그런 성질의 과목이었다니 교수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고는 절대 모를 일들이 있었던 것이다.

김두식 교수는 솔직하고 겸손하고 용기있는 사람이었다. 법대에 가게 된 이유부터 책을 좋아한 유년 시절의 기억, 군법무관으로 근무할 때의 일상, 그리고 육아를 하며 아내를 뒷바라지했던 미국에서의 생활 모습에서 명민한 소장 법학자이기 전에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너무도 수려한 모습이 감동으로 다가왔다.

한편 '특권의 내면화'라는 말이 자꾸만 귓전을 맴돌았다. 다음의 인용문에서 그 의미를 헤아려 볼 수 있을 것이다.

가끔 그 옛날의 합격자 인터뷰들을 생각할 때마다 저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기 위해 사법시험을 준비했다던 그 많은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하는 의문을 품게 됩니다. 처음부터 통상 전문가를 꿈꾸는 요즘의 세련된 합격생들은 논외로 치더라도, 지금 법조계 물을 먹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때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위한 삶'을 꿈꾸었던 사람들입니다. 신문 인터뷰를 하며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이야기했던 법조인들만이라도 자기 약속에 충실했다면 시민과 법 사이의 엄청난 괴리 현상이 조금은 완화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사법시험이라는 장벽을 넘어 들어간 곳에서는 '새로운 세계'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새로운 세계는 결코 그들에게 특권을 향유하라고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특권과 특권의식은 가랑비처럼 소리없이 그들의 삶 속에 젖어들었습니다. 새로운 세계의 법과 논리는 그 나름대로 완결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 흐름에 저항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저도, 저의 동료들도 그렇게 서서히 변화해 갔습니다. - 본문 중에서

또한 저자는 서민에게 문턱이 너무 높기만 한 변호사사무실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었는데, 참 가관이었다. 수임료를 내고 법률 서비스를 받으러 온 의뢰인에게 오히려 훈계하려하고 군림하려하는 일부 변호사들의 특권 의식을 어찌하면 좋을까.

법학자로서의 커밍아웃이라고 해야할까. <헌법의 풍경>은 법학 용어를 전혀 모르더라도 읽을 수 있는 책, 법률 귀족의 일그러진 초상을 명쾌하게 짚어주는 책이었으며, 우리 사회의 단면을 엿볼수 있는 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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