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옥에서, 고고학자처럼 - 이명원의 한국문학 탐사
이명원 지음 / 새움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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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의 글을 읽고 술술 잘 읽힌다면 그것은 글쓴이와 문장호흡이 일치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내게 이명원의 책이 그랬다. <연옥에서 고고학자처럼>은 작가와 작품에 대한 평론집이다. 나는 '평론집'이라고 하면 으레 건조하고 딱딱해서 재미가 없었다. 그러나 <연옥에서 고고학자처럼>은 예외였다. 평소 관심을 가지고 있던 작가들과 주목하지 못했던 작가들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책을 펼쳤다. 

공선옥 - 하야우중 : 슬픔이 거기 있었다

하야우중. 장마비가 내리는 여름밤의 한복판에서, 나는 공선옥의 소설이 자꾸만 '슬픔의 공명통'처럼 느껴졌다. 제 안의 슬픔을 공명시킴으로써, 타인의 슬픔까지를 공명시키는 그런 울림통 말이다. 그리고 인간이 역사 속에서 겪어 나가야 하는 슬픔과 고통의 그 끈질김과 장엄함 앞에서, 글쓰기란 오히려 사소하고 부차적인 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회한이 이상하게도 내 가슴을 치곤 하는 것이었다. - 본문 중에서

‘내 아버지는 평생 동안 많은 양의 술을 드셨고, 그것은 고스란히 어머니의 눈물이 되었다.’서문에서 만날 수 있는 첫 구절이다. 이 문장 하나로 책을 주저 없이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독자도 있을지 모른다. 명명할 수 없는 슬픔이 배어있는 문장이다. 저자가 어린 시절부터 아릿하게 간직해온 슬픔을 한 문장에 농축시켜 놓은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공선옥은 모든 예술은 그곳에 슬픔이 있어야 한다고 피력했다. ‘슬프지 않은 사람의 작품은 예술이 아니고, 명실상부하게 슬픈 사람이 명실상부하게 슬픈 작품을 탄생시키고 그런 작품이야말로 진정한 예술’이라고.

공선옥의 소설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은 최하층민의 등장이다. 그것은 빈곤이나 가난에 주목한다는 의미다. 실제로 구로동에서 4년 간 일했던 이력이 있는 공선옥은 '풍경으로서의 가난'이 아니라 '체험으로서의 가난'을 독자들에게 각인시켜주고 싶었던 것이다.

나혜석 - 나혜석과 근대이행기의 여성적 자의식

당시는 봉건시대로 나혜석의 신 사고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시대였다. 시대를 앞서가는 지식인은 그래서 고독한 것이다. 사랑했던 연인을 잃고서 그 추억을 감당하지 못해 청혼하는 김우영을 6년 동안 기다리게 한 나혜석은 조건부로 청혼을 받아들인다. 일생동안 지금처럼 자신을 사랑해주고, 그림 그리는 일을 방해하지 말 것이며,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 따로 살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결혼을 했지만, 결혼생활은 평탄하지 못했다. 한 사람의 아내로서가 아니라 예술가 자신으로서의 삶을 추구했기 때문이었다.

… 나혜석의 문학사적 의의는 근대이행기의 여성 자의식의 그 복잡한 상처를, 현실에서의 자기 희생을 통한 과격한 실천을 온몸으로 밀고 나감으로써 극복하고자 했던, 정신적 밀도의 치열함에서 찾아야 할 듯하다. 그 치열성 덕분인지, 나혜석은 오늘날 여성해방의 선구적인 지식인으로 기억되고 있는 것이며, 여전히 짜디짜게 문학사의 대하를 향해 흐르고 있는 것이다. - 본문 중에서

신교육을 받았고 몇 년에 걸쳐 더 넓은 세상을 여행했기에 나혜석은 우리나라 여성이 얼마나 불평등하게 살고 있는지 체감하게 되었다. 스스로 타계하려고 노력했으나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건 그녀의 신사고를 따라갈 수 없는 개화되지 못한 사회였다. 불운하게 생을 마감하게 되었지만 위에 언급된 바와 같이 우리 문학사 속에서 그는 면면히 흐르고 있다. 

<연옥에서 고고학자처럼>을 통해 독자들은 시대의 흐름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일제 시대부터 4.19 혁명을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궤적을 뚫어볼 수 있게끔 다양한 작가들이 소개되어 있다. 문학을 통해 시대를 읽고, 작가를 통해 당시의 현실을 인식하게 된다. 작가와 작품에 대한 해설이 곁들여진 이 책은 종합선물세트와도 같다. 부드러운 평론집을 기다린 독자들이 있다면 갈증을 해소하기에 충분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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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인 6색 21세기를 바꾸는 상상력 인터뷰 특강 시리즈 2
한겨레출판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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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독자다 보니 한겨레에 글을 썼던 저자들의 이름이 친근하다. 서울이나 수도권 지역에 산다면 이런 강연에 직접 참석해서 현장의 생생한 분위기도 한번 느껴보고 싶지만, 책을 통해서라도 강연 내용을 들을 수 있어 기쁘다. 현장감 있는 표현을 위해 애쓴 편집자의 노력, 그 흔적들이 책의 곳곳에서 묻어났다.

6인 6색, 말 그대로 나름의 빛깔을 가진 6명의 강연자가 자신의 생각을 청중들에게 들려주었는데 평소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이야기들에 귀가 더 쫑긋해짐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비야, 홍세화, 한홍구의 강연이 봄냄새를 담은 바람을 타고 전해졌다.

한비야 - 고통을 나누는 상상력

어린 조카나 친구 아들딸한테 세계지도를 많이 선물한다는 긴급구호활동가 한비야는 아이들의 꿈과 상상력을 키우기 위해 세계지도는 좋은 선물이라 했다. 어린 시절부터 시야를 넓혀주는 의미가 있지 않을까, 세계화는 멀리 있지 않은 것이라고.

'꿈만 꾸는 사람'과 '꿈을 이루는 사람'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는데, 몇 년 째 같은 꿈을 꾸고 있다면 그것은 꿈만 꾸는 사람이란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작은 일부터 실행에 옮길 수 있어야 좀 더 큰일도 해낼 수 있는 거라고 조언을 건넨다. 긴급구호활동을 하며 느낀 많은 일들을 청중들에게 들려주고 있었는데,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를 참고하면 더 많은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한비야는 '사람의 에너지나 의지는 항아리 안에 담긴 물이 아니라 샘물에 가까운 것' 같다며 매일매일 최선을 다하는 삶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매일매일을 그토록 치열하게 살 수 있다면 좋겠다.

홍세화 - 자아실현의 상상력

물신에 포섭되고 오염되어 존재에 대한 질문은 아예 생각도 못하는 것이 한국 사회의 현실입니다. 이러한 물질주의, 물신 지배에 대한 사회 구성원들의 항체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과 나아가서 사회문화적인 기본 소양이 너무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충격적이었습니다. - 본문 중에서

대학 1학년이 되면서부터 취직 걱정을 해야하는 우리나라의 현실. 이처럼 '자본주의는 생존 앞에 자아실현을 양보할 것을 끊임없이 요구'하지만 여전히 소유만 있고 존재는 없는 한국 사회에 대한 타계책으로 강연자는 자아실현을 이야기한다.

자아실현을 위한 두 가지 조건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이 사회를 지배하는 물신에 저항할 수 있는 튼튼한 가치관을 갖는 것, 둘째는 끊임없는 자기성숙에 대한 모색이다. 홍세화의 글은 욕심 많은 현대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이 되었으리라 짐작이 된다. '자아실현'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우리는 바쁘게 살다 보니 잊고 지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문득 돌아보면 공허한 삶이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는 자기 성숙의 노력을 놓아서는 안될 것이다.

6인 6색, 여섯 사람의 여섯가지 이야기는 우리에게 나름의 울림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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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분투기
정은숙 지음 / 바다출판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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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분투기>는 마음산책의 대표 정은숙이 20년 간 출판 편집자로 살면서 책 한 권이 어떻게 태어나는지 출판 편집에 대한 이야기들을 친절하게 생생한 목소리로 들려주고 있다. 출판 편집자의 길을 어떻게 걷게 되었는지, 편집자는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 편집자의 애로사항은 어떤 것인지, 어떤 편집자가 되어야 하는지 등등 출판 편집 쪽으로 진로를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은 물론, 책을 좋아하는 평범한 사람에게도 유용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었다.

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던 시절, 책은 저자의 몫이 99%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책에 대해 알게 되면서 책 한 권이 탄생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의 수고가 뒤따르는지 막연하게나마 감지할 수 있었는데, 이 책으로 인해 선명해졌다.

출판 편집자가 해야 하는 일이 그렇게 많은 줄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출판사에 근무하는 일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교정 교열부터 제판소, 인쇄소, 제본소 등 제작 현장 다니기, 원고 복사와 그외 숱한 잡무들, 저자와 만나는 일부터 광고문안 표지문안 쓰기, 후배 편집자도 이끌어야 하고 저자 발굴에도 힘써야 하며 책의 홍보 판매에도 신경을 써야 한단다. 디자인에도 남다른 감각을 발휘해야 하는데, 책제목이 중요하듯 표지 디자인이나 책의 구성 등은 내용 못지않게 중요한 부분이었다.

아침에 출근할 때마다 하루의 여러 가지 구상으로 사실 마음의 여유가 없다. 다음날 해야 할 일들을 우선순위에 따라 업무 노트에 적어 넣고 퇴근한 마당에 어찌 마음의 여유가 있을까. 하지만 아침에 막상 출근해서 책상 한 켠에 쌓여 있는 원고 더미를 보면 나는 꿈에 부푼다. 저것들 속에서 반드시 옥과 같은 글들을 찾아내리라는 의지와 희망, 그리고 보내주신 분들의 정성 등등이 향기롭게 묻어나기 때문이다. - 본문 중에서

편집자의 아침 풍경이 한눈에 그려진다. 직업상 많은 원고를 읽고 판단해야 하는 편집자는 '미흡하면 미흡한 대로 진정성이 있고, 씌어졌으면 또 그것들 속에 미진한 점이 드러나게 마련'이라며 원고들에 대해 합당한 예의를 갖추려 노력한다고 했다. 편집자의 일 가운데 50%를 넘는 것이 바로 원고 읽기라고 하는데, 제일 난감한 것은 책으로 내기 힘들다고 판단한 원고가 다른 출판사에서 출간되어 성공하게 되는 경우라고 한다.

왜 그때 알아보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왜 아니 들겠는가. 그러나 그렇다할지라도 원고뿐 아니라 여러 가지 변수가 작용하는 출판 시장에서 꼭 후회할 일만은 아니라고도 했다. 그 경험에서도 배울 것이 있다는 저자의 긍정적인 사고가 돋보인다.

출판 편집의 성공 사례와 실패 사례를 들어가며 이야기하는 저자의 어조는 사뭇 격앙되어 있는 듯하다. 이처럼 일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한 저자를 만나게 될 것이다. 세상에 많은 직업이 존재하지만 출판 편집을 일로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볼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매력적인 직업이다.

세상 모든 일이 나름의 애로 사항이 있겠지만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면 훨씬 부담이 적지 않을까. 저자 자신에게는 이 책으로 말미암아 독자로서 작가로서 편집자로서의 삶을 정립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을 것 같다(저자는 시집을 몇 권 낸 바 있다). 독자로서 출판 편집의 세계를 들여다 본 느낌은 뭐라고 할까. 세상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다.

책 한 권이 잉태되고 태어나는 과정, 이 책이 기대치만큼 성공을 거둘 것인가 아니면 기대를 져 버릴 것인가. 아마도 편집자는 책을 세상에 내 놓는 순간 아주 조마조마한 경험을 하게 될 것 같다. 서점에 가보면 질식할 정도로 많은 책들이 누워있고, 꽂혀 있는데 거기에 묻히지 않고 그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책이 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 그들이 바로 출판 편집자들이었다. 독자들은 그런 의미에서 좋은 책은 입소문을 많이 내어 출판 편집자들의 노고에 보답하기로 하자. 그들이 없다면 우리는 양서와 만날 수 없게 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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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패배자 - 한 권으로 읽는 인간 패배의 역사
볼프 슈나이더 지음, 박종대 옮김 / 을유문화사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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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자라는 말속에는 기쁨과 환희가, 패배자라는 말속에는 연민과 슬픔이 배어 있다. 패배자의 모습은 다양하다. 살아서는 주목받지 못하다가 사후에 큰 명성을 얻게 되든지 부모나 형제의 그늘에 가려 평생 주목받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경우, 또한 초기의 안정된 생활과는 달리 불운한 말년을 보내게 되는 경우 등. 볼프 슈나이더의 <위대한 패배자>는 다양한 패배자의 삶을 조명한다. 어쩌면 패배자라는 말보다 불행했던 승리자라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인물을 통해서 그 시대의 흐름을 읽을 수 있고, 분야 또한 정치, 문학, 음악, 미술, 과학 등 다양하다는 게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평전이라 하기에 짧은 분량. 하지만 불행한 운명에 초점을 맞췄다는 점에서 일반 전기와 차별된다.

하인리히 만

하인리히 만은 1929년 <마의 산>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토마스 만의 형이다. 저자는 토마스가 그를 '궁지로 몰아넣지만 않았더라면 어느 정도 만족스런 삶을 살았을 뛰어난 작가'라며 안타까워한다. 어머니는 동생을 편애했고, 형은 동생과 태어난 뒤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경쟁해야 했던 것.

"무료함의 고통이 두려워 쓸데없는 책이라도 잇달아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도덕적인 행위다."

해마다 장편소설을 하나씩 발표하려고 노력했던 하인리히의 활동에 대해 토마스가 한 말이다. 어쩌면 형제가 이렇게 서로에게 상처를 줄 수 있을까. 더 이상 형이 경쟁자가 아니라고 판단된 순간부터 토마스는 공개적으로 형을 칭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외롭게 골방에 갇혀 글만 쓴 하인리히는 동생의 경제적인 도움 없이는 최소한의 생계도 잇기 어려웠다고 한다. 상호 경쟁적이면서도 서로의 발전을 이끌 수 있는 그런 관계였다면 좋았을 텐데. 그들 개인에게도 고통스러운 일이겠지만 독자로서도 사회적으로도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오스카 와일드

외과의사인 아버지와 시인 어머니를 둔 오스카 와일드는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열아홉 나이에 옥스퍼드대에 입학한다. 졸업 후 미술평론가로 처음 일하기 시작했으나 원래 꿈이 작가였던 오스카 와일드는 몇 년 후 시집을 발표한다. 그러나 큰 주목을 끌지는 못했고 가정을 이룬 후 그는 서른 둘 나이에 소설가로 데뷔하여 명성을 쌓기 시작한다. 왕성한 작품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으며 승승장구하던 그에게 시련이 닥친다. 바로 '사랑'이었다.

문학적 야심이 강했던 옥스퍼드대생 더글러스와 사랑에 빠진 것. 더글러스가 열여섯 연하의 여성이었다면 차라리 사회는 관대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남자와 사랑에 빠진 와일드는 ‘남색죄’로 고소되는 지경에 이른다. 유명한 작가에서 일개 죄수로 신분이 급격하게 하락된 와일드의 '재산은 경매에 붙여졌고, 연극은 무대에서 내려졌다. 책은 압수되고 자식들에 대한 친권까지 말소'된다.

그보다 더한 추락이 있을까? 만기 출소한 오스카 와일드는 허름한 여인숙에서 작품 활동을 다시 시작한다. 그러나 가난은 그를 인간적인 삶에서 멀어지게 했고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만약 오스카 와일드가 더글러스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의 인생은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만약 성적 취향이 문제가 되지 않는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빈센트 반 고흐

고흐는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고, 끊임없는 자기 학대와 자해를 일삼아 주위 사람들은 그와 같은 공간에 있기를 꺼려했다. 고흐는 외로웠다. 동거하던 매춘부와의 결혼이 가족의 반대로 무산되자 더욱 고독해졌을 것이다. 수십 차례 거처를 옮겨 다니던 고흐는 마침내 동생의 도움을 받고 프랑스의 시골 도시 아를로 거처를 옮긴다.

아를에 머무는 400여 일 동안 고흐는 350여 점의 그림을 완성했다. 그 와중에서 동생 테오에게 200여 통의 편지를 썼다고 한다. 그 중 상당수가 문학작품에 버금갈 정도로 훌륭한 편지들이었다고 하는데 천재는 다방면에 능한 게 사실인가 보다.

고흐가 남긴 800여 점의 그림 가운데 점심 값 등으로 치른 것을 제외하고 팔린 것은 불행하게 단 한 점뿐이었다고 한다. 전기 작가에 따라서 그것이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 치부하는 사람도 있다지만 그의 그림이 거의 팔리지 않았다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다.

1990년 고흐의 <가셰 박사의 초상>은 일본의 한 보험회사 그룹에 8200만 달러에 낙찰되었다고 한다. 다만 그가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 전에 팔렸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그림이 팔리는 데 따르는 성취감을 조금이라도 맛보았더라면, 미술평론가들의 극찬을 간식처럼 받을 수 있었더라면 고흐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지 않았을까.

훌륭하지만 불행했던 이들의 삶을 조명한 볼프 슈나이더의 <위대한 패배자>는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아리게 만든다. 그렇다 할지라도 우리는 천재들의 불행한 삶을 통해 만만하지 않은 현실, 혹은 별로 맞닥뜨리고 싶지 않은 일에 대해서 조금은 여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자신에게 처한 어려움이 세상에서 가장 힘들어 보이지만, 그 정도의 어려움은 나뿐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지속적으로 일어난다는 점을 환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패배자>는 그런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 태어난 책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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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남자를 살리다
권혁범 지음 / 또하나의문화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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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좋은 책은 꼭 사서 봐야 한다. 나뿐 아니라 가족 구성원 누구라도 읽어 숙지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면 책꽂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책을 꽂아두고 읽기를 종용하는 것도 인생을 좀더 편하게 살 수 있는 처세술의 한 방법이 될 것이다(내가 매일 얼굴을 맞대고 살아야 하는 우리 가족으로부터 쓸데없는 간섭을 받지 않기 위한 일종의 방어 전략이다. 입 아프게 이야기하지 않아도 책이 나를 대신해 이야기 해 줄 수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러나 언제나 나는 좋은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 보고 꼭 사지 않아도 될 책을 사는 오류를 범한다. 이럴 때 운명은 꼭 나를 피해간다고 투덜대곤 하지만 언제고 역전될 날도 오리라 믿으며 오늘도 나는 도서관으로 가벼운 발걸음을 옮겨 놓는다.

주간지나 일간지 칼럼에서 가끔 저자를 만나 왔다. 진보적인 인사 가운데 한 사람 정도로 여겼는데 이 책을 통해 뿌리 깊이 박힌 고정관념의 틀을 부수고 나올 수 있게 되었고, 저자에게 주례사를 부탁하고 싶어질 정도로 팬이 되고 말았다.

<여성주의, 남자를 살리다>는 '또 하나의 문화'를 통해 그간 여러 곳에 썼던 글들을 모아 책으로 만든 것으로 연둣빛 바탕의 책은 봄을 겨냥해 출간되었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인권에 대한 이야기들을 술술 풀어낸다. 저자는 자타가 공인하는 유머러스함과 부조리한 사회 현상에 대한 분노 혹은 안타까움을 제대로 버무려 우리에게 의식 전환만이 살길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사랑과 결혼, 출산과 양육에 대한 고리타분한 이야기에 일격을 가하고, 폭력과 편견, 권위에 맞서는가 하면 여성 억압이 곧 남성 자신을 억압하는 일이라는 걸 많은 사례를 들어 환기시킨다. 저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기실 여성주의는 남자와 여자 모두를 살리는 것이었다. 이처럼 제목은 그냥 붙여지는 게 아닌가 보다.

꼭 때려야 하는가?

아이들은 아무리 부모나 선생님이 잘 교육해도 규칙을 위반하고 실수하기 마련이고 꼭 사고 치게끔 되어 있다. 나름대로 반항도 한다. 그게 정상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어떤 식으로 수용해야 하는 것일까? 아이들 야단치기와 때리기는 어쩔 수 없는 일일까? … 별다른 설득과 교육 없이 이뤄진 폭력은 정신적 '외상'으로 몸 어디엔가 흔적 없이 남으며 아이들의 자존심에 치명적인 상처를 낸다. 스스로를 존중하는 마음은 사라지며 사물을 이치에 맞게 따져 판단하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는 합리적 윤리적 태도 역시 형성되기 어렵다. 야단맞고 자란 아이는 위축되기 쉽고 외부의 자극에만 반응하는 수동적 인간이 되기 쉽다. 또 그만큼 자신보다 약한 자를 똑같은 방식으로 대하기 십상이다. - 본문 중에서

우리가 무심코 '한 대 치는' 게 이렇게 무시무시한 결과를 낳으리라고 상상해 본적이 있는가. 우리는 '사랑의 매'라는 미명 아래 습관화된 매 속에서 자랐고,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받아들이고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매질이 돌아가야 하는 건 아닐까. 얼마든지 말로 훈육이 가능하고 저자의 말처럼 '참을성이 없다면 맨발로라도 노래방으로 뛰어가서 10곡만 뽑고 돌아오기'로 하자.

폭력이 무서운 것은 당사자에 그치지 않는 파급효과에 있다. 언제 증상이 나타날지 모르는 잠복 바이러스처럼 어린 영혼의 가슴에 '흔적 없이 남는' 무서운 폭력으로부터 우리 자신과 우리의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우리는 머리로 가슴으로 생각하는 일을 놓지 말아야 할 것이다.

사랑하지 않을 권리, 결혼하지 않을 권리

사랑에 빠지는 일쯤은 누구라도 할 수 있다. 그걸 지켜 나가고 키워 나가는 것은 성숙한 인간의 몫이다. 더구나 사랑의 조건을 만드는 노력은 팽개치고 사랑에만 빠져 있다면 그 결말은 뻔하다. 그 주제에 살림까지 차린다면 허구한 날 술이나 퍼먹고 애인 혹은 아내나 구타하는 아저씨 혹은 비슷한 유형의 아줌마가 되는 건 시간문제다. 사랑은 영혼을 먹여 주지만 사람이 멀쩡하게 행복하게 살려면 쌀도 필요하고 자아실현의 길도 열려야 한다. 후자를 희생하면서 진정한 사랑의 길로 구도자처럼 걸어가는 사람도 훌륭하지만 사랑을 포기하고 홀로 서기 하는 사람의 몫도 인정해 줘야 한다. - 본문 중에서

저자의 말처럼 우리 사회에서는 '사랑하지 않으면 바보나 불쌍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혼자 사는 사람은 뭔가 비정상적이라거나 외로울 것'이라는 편견이 지배적이다. 젊은이들에게는 "애인 있어요?" 결혼적령기의 사람에게는 "결혼 안 해요?" 독신에게는 "혼자 살기에 외롭지 않아요?" 이런 말들은 다분히 인권 침해적인 발언들이다.

질문하는 이들은 악의 없이 하는 질문일지 몰라도 듣는 이에 따라서는 상처 부위에 다시 생채기가 난 것 같은 아픔을 겪을 지도 모른다.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듯이 말이다. 문제의식 없이 습관적으로 사람을 대하다 보면 그렇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 '실수'하게 된다. 더 큰 문제는 스스로 '실수'한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데 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책이 많이 팔려야 한다는 역설이 가능하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지극히 당연한 권리, 인권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책장을 덮는 순간 독자들은 더욱 더 자신을 사랑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몸살을 앓게 될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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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식햄 2007-05-14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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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식햄 2007-05-14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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