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비행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6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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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부에노스아이레스 공항. 야간 우편비행기 관리 책임자 리비에르가 밤을 맞고 있다. 오늘 밤 안으로 남미의 세 곳, 파타고니아, 칠레, 파라과이에서 우편비행기가 도착하면 유럽행 우편비행기에 우편물을 실어 보내야 한다. 야간 비행은 우편비행기가 열차 등 다른 교통과 비교하여 상대적인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불가피하다. GPS 시스템이 존재하기 전, 일기예보도 불확실한 시대다. 야간 우편비행은 목숨을 담보해야 하는 위험한 일이었고 작가 역시 비행 사고로 목숨을 잃은 것으로 보아 요즘 같은 수준의 안전과는 거리가 먼 상황이었던 것 같다. 벌써 백 년 전이니. 

 

주인공 리비에르는 대의를 위해 생겨나는 개인의 희생에 대해 무감각한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시스템을 바꾸고 미래를 앞당겨야 하는, 이 책에서는 '의무'라고 표현하는 것을 위해 인간의 나약함이나 실수를 바로잡아야 한다며 앞으로 나아간다. 결국 그날 밤에 도착해야 하는 비행기 한 대가 연락이 끊기고 도착하지 못한다. 결혼한 지 6주 된 아내가 남편을 잃는다. 비행사 가족을 둔 이들의 슬픔도, 인간의 의무 앞에 선 자의 갈등도 헤아릴 수 없다. 인간이 가는 길이, 의무와 대의 그리고 개인의 희생 사이의 어딘가라고 말하는 것 같다.

 

p19

이제 그는 밤의 한복판에서 불침번처럼, 밤이 인간을 보여준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런 신호, 이런 불빛, 이런 불안을 보여준다는 것을 말이다. 어둠 속의 별 하나는 고립된 집 한 채를 의미한다. 별 하나가 꺼진다. 그것은 사랑에 대해 문을 닫은 집이다. 어쩌면 권태에 대해서도 문을 닫았거나. 그 집은 세상에 신호 보내기를 중단한 집이다. 전등 불빛 아래, 식탁에 팔꿈치를 괴고 앉은 농부들은 자신이 무엇을 바라는지 모른다. 농부들은 그들을 가둔 거대한 어둠을 뚫고 자신들의 욕망을 아주 멀리까지 보내고 있음을 모른다. 그러나 파비앵은 이제 막 천 킬로미터를 날아와서, 높은 파고가 살아 숨 쉬는 비행기를 들어올렸다 내렸다 하는 것을 느낄 때마다 전쟁터 같은 뇌우를 열 개쯤 통과하고 그 사이사이 달빛 받은 공터를 지날 때마다 그리고 이 빛들을 하나하나 정복하는 기분으로 지나갈 때마다 그들의 욕망을 알아본다. 농부들은 자신들의 불빛이 소박한 식탁을 밝히기 위해 빛난다고 생각하지만 그들로부터 팔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사람은 그 불빛 신호에 감동을 느낀다. 마치 그들이 바다 한가운데 무인도에서 절망에 빠져 구조의 불빛을 흔들기라도 하는 양 말이다.

 

숭고하고 무거운 주제이지만 야간비행을 소재로 하고 있어 소설 전체가 무척 서정적이다. 목숨을 거는 일인데 이렇게 아름답게 느껴도 될까. 작가마저도 비행사로서 행방불명되어 소설 속으로 떠나버렸다. 끝내 돌아오지 못한 비행사 파비앵이 폭풍우 속에서 한줄기 빛에 취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묘사는 너무 아찔하다. 위험인 줄 알면서도 가까이 가서 데어버리는 인간의 욕망하고도 비슷하다. 갈등과 모순, 욕망이 밤하늘의 별자리처럼 캄캄한 곳에 아름답게 수놓아져 있다.

 

문명의 대의와 개인의 희생 사이를 생각하다보니 요즘의 택배기사들이 떠올랐다. 혹서기에 그들의 노동은 종종 언론에도 오르내리지만 피할 방법이 있을까. 이 시대에 택배를 사용하지 않고서는 돌아가지 않는 부분이 많다. 하루 이틀 늦을 수는 있지만 어떻게 해야 사회를 멈추지 않고 그들도 살아갈 수 있을까. 시간에 쫓겨 물류를 상하차하고 배달하는 위험스런 일에는 어떤 아름다움이 깃들 수 있을까. 말이 되지 않는다. 무수한 황토색 직육면체들 사이로 흐르는 땀방울 사이에는 인간의 숭고함 자체가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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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절한 정원 (리커버 에디션)
미셸 깽 지음, 이인숙 옮김 / 문학세계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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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절한 정원은 프랑스의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1880-1919)의 시구 우리의 처절한 정원에서 석류는 얼마나 애처로운가에서 따온 문구이다. 프랑스 현대시의 심장이라 불리는 기욤 아폴리네르는 캘리그램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시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러보니 시인이 죽은 지 올해가 백 년이 되는 해다. ‘비가 내린다는 문구를 비처럼 내리는 그림으로 표현한 이미지를 보니 캘리그램이 무엇인지 감이 온다. 이 제목이 인용된 시 전체를 알 수는 없지만, 비참한 현실에도 존재하는 인간미를 비유한 것이 아닌가 싶다.

 

나치 시대 프랑스에 있던 레지스탕스의 활동과 관계된 사건을 그린 소설이다. 실화인지 픽션인지 이 책만으로는 알 수 없지만 검색해보니 실화라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한다. 줄거리가 간단하지만 가슴에 하는 충격을 준다. 책 리뷰에 줄거리를 언급해도 좋지만 왠지 이 이야기는 줄거리를 생략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결말을 모른 채 읽고 느끼는 감동이 다를 것 같다. 

 

전쟁의 폐허에도 피어나는 꽃처럼 인간의 숭고한 아름다움은 이렇게 뜻밖이고 극적이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또 다른 비극과 쌍곡선을 그리듯 만나지는 않지만 같은 모양으로 비껴간다. 프랑스 친독 인사 모리스 파퐁의 재판 이야기가 그것이다. 모리스 파퐁은 2차 대전 중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했던 시기에는 나치에 협력하고 해방 후에는 레지스탕스로 둔갑한 기회주의자다. 다행히도 모리스 파퐁은 1998년 재판에서 10년형을 언도받고 80세가 넘는 나이에 복역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3년 만에 신병을 이유도 형 집행이 정지된 채 2007년 사망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듯이 진실은 언젠가 드러난다. 폐허에서 피어난 아름다움도 이렇게 발견이 되어 읽히고 널리 퍼진다. 우리 사회에도 이런 일의 조짐이 있기는 하다. 최근 서지현 검사의 미투 폭로 일 년 만에 안태근 전 검사장이 1심에서 검찰 구형대로 징역 2년이 선고되었다. 재판 거래를 지휘한 의혹을 받고 있는 전 대법원장 양승태도 구속영장이 발부되었다. 부디 대법원까지 재판이 무사히 진행되고 정권이 바뀌지 않아 죄값을 치르길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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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면 왜 - 여자이기 때문에, 남자이기 때문에, 우리의 쉬운 선택들
김은덕, 백종민 지음 / 어떤책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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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젊은 친구들에게서 많은 걸 배운다. 나도 이 친구들처럼 가부장제와 결혼 문화에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지만 이십대에 사회화 과정을 거치면서 현실에 너무 잘 적응을 해서 그랬는지 내 뜻을 소신 있게 드러낸 적이 많지 않았다. 나의 이십대는 어떤 뜻을 세워야 할지 갈피를 못 잡은 채 눈앞의 현실에 불려 다닌 시절이었던 것 같다. 나름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연애를 하고 결혼을 했지만 누군가 말한 타자를 경유한 자기애에서 멀지 않은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결혼 제도 안에서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감정적인 반응이 지나쳐서 논점을 흐리는 경우가 많았다. 결혼 제도 안에서 의견을 나누고 조율해나가는 것, 인간관계의 기본에 해당하는 게 의외로 쉽지 않다는 걸 지금도 느낀다.

 

예전에 어떤 후배와 결혼에 관해 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나는 결혼 제도를 어떤 큰 기업에 비유했다. ‘생각해 봐. 어떤 기업에 들어가면 기업문화라는 게 있잖아. 신입사원 둘이서 창의적으로 이렇게 저렇게 해본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이 –문화가- 그걸 놔두지 않는다고. 아무리 신경을 쓰지 않겠다고 해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어. 그러니 결혼을 한다면 이런 상황을 이해하고 그 제도와 문화 안에서 어떻게 살 것인지를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는 거지.’

 

저자 부부는 이런 기업 문화에도 불구하고 치열하게 고민하고 소통하며 자신들만의 고유한 문화를 만들어낸 것 같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사회에 이런 가정 하나를 만들어 냈다는 것이 왠지 고맙다. 하지만 기존 체제에 얼마나 저항적이고 쉽지 않은 과정이었을까. 이미 삼사십년 이상을 우리 사회에서 자라온 사람들은 기존 관념을 의심하거나 바꾸기가 어렵다. 새로운 시도가 더 많이 읽히고 나누어지면 좋겠다.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라면 꼭 읽어보고 이야기 나눈 다음에 결혼을 해도 될지 생각해 보라고 하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읽어보고 소장용으로 구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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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의 사람들 - 인간 악의 치료에 대한 희망 보고서, 개정판
M. 스콧 펙 지음, 윤종석 옮김 / 비전과리더십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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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18

거짓은 동시에 악의 증상이기도 하고 악의 원인이기도 하다. 꽃이기도 하면서 뿌리이기도 한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을 <거짓의 사람들>로 붙인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인간의 악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다. 모든 인간이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상식적인 악함 정도가 아니라 악에 사로잡혔다고 할 수 있는 극단적인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나는 귀신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살면서 한 번도 귀신을 보거나 가위에 눌리거나 그 외 영적인 경험을 한 적이 없어서 이런 문제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소장하던 책을 처분하면서 나한테 읽고 싶은 책을 골라 보라 길래 몇 권 골랐는데, 나중에 나한테 남긴 책을 보니 내가 고른 책 말고도 이 책이 들어 있었다. 처분하기가 어려워 다른 책들과 함께 나한테 보낸 것 같다. 어쨌든 본의 아니게 손에 들어와 읽게 되었는데, 악의 문제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점이 많아 유익했다. 살면서 이런 문제로 고민하게 될 일이 없으면 좋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자신이나 주변에 이렇게 악에 사로잡힌 경우로 고통을 겪는다면 크게 도움이 될 것 같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도 삶에 이런 문제가 찾아오지 않는 게 훨씬 다행스런 일이다.

 

저자는 1900년대 중반에 활동했던 미국인 정신과 의사로 저명한 기독교 저술가이기도 하다. <아직도 가야할 길>을 비롯하여 기독교에 영향력 있는 고전이라 할 수 있는 책들을 집필했다. 나도 오래 전에 <아직도 가야할 길>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내용은 거의 생각이 나지 않지만 이 책을 둘러싼 호평만큼은 기억이 나니 믿고 보는 저자라고 할 수 있다. 이 책도 악의 문제를 탐구한 책의 고전으로 꼽힐 만 하다. 비슷하다고 할 수도 있고 아니면 관계있는 주제를 다룬 책으로 안점심의 <세계관과 영적 전쟁>이 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도 영적인 세계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되었던 경험이 떠오른다.

 

처음은 저자가 정신과 의사로 일하면서 겪었던 사례를 중심으로 시작하고 있다. 그 사례라는 것이 우리 사회에서 접하는 사회면 기사보다 훨씬 더 충격적이고 이해 불가능 한 것들이다. 예를 들면 형이 자살할 때 사용했던 권총을 동생에게 선물한 부모가 있다. 동생은 심각한 우울증 같은 문제로 고통을 겪고 있는데 알고 보니 원인은 이 선물이었던 것이다. 이런 부모가 있을까. 믿기 어렵지만 이와 같은 사례를 포함하여 심한 강박증이나 공포증의 경우도 있고 심지어는 저자가 4년 동안 400회 넘도록 면담을 하면서도 답을 찾지 못한 경우도 있다. 이 환자를 만나기 시작할 때만 해도 저자는 인간의 본질적인 악에 대해서 아는 게 없었고 악마의 존재도 믿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환자를 만난다면 구마와 축사 –귀신들림을 치료하는 것-를 권할 것이라고 한다.

 

이어서 구마와 축사를 목격한 내용까지 다루고 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귀신을 쫓던 그것 말이다. 예수님처럼 한 마디로 해결되지는 않는다. 오랜 시간 여러 사람들이 하나의 뜻으로 엄청나게 노력해야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데 무섭기도 하고 놀랍다. 축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고 한다.

 

여러 가지 사례와 저자의 신뢰에 대한 바탕이 없으면 믿기 힘들 SF소설 같기도 하다. 사건의 기록이 자세하고 쉽게 쓰여 있어 잘 읽어지고 재미-어울리지 않는 말이지만-있기도 하다. 나처럼 이 주제에 전혀 관심이 없던 사람도 읽다보면 점점 호기심이 생겨 끝까지 어렵지 않게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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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여행에게 묻습니다 - 진짜 여행에 대한 인문학의 생각
정지우 지음 / 우연의바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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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 이라는 단어가 주는 설렘,

일상을 벗어나는 기대감,

그리고 지난 여행을 떠올리게 만드는 이미지들,

여행은 왜 이렇게 특별한 걸까.

 

이 책을 읽어보면 여행을 대하는 우리의 감정과 태도를 분석적으로 잘 들여다 볼 수 있다. 스스로 여행을 계획하고 다녀와도 여행을 대하는 마음을 제대로 파악할 수는 없다. 여행은 강도 높은 문화적 자극임에도 여행지를 탐색하는 것 말고 여행 자체에 대해 성찰해 볼 기회는 많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특히 우리 사회에는 여행 –주로 해외여행-을 대하는 고정관념이 많다. 그래서 여행 자체를 성찰하는 것이 어렵고 더 중요하기도 하다.

 

이 책에서는 여행에 대해 우리나라의 지리적인 특성과 우리 사회에서 여행이 의미하는 지점에서부터, 그래서 우리는 여행에서 돌아와서 어떻게 되는지, 굉장히 예리한 인문한적 통찰의 도구로 마음과 생각을 샅샅이 훑는다. 이러한 도구로 살펴본 지적은 정확하고 마음에 와 닿는다. 언젠가 다시 여행을 간다면 이 책을 한 번 더 읽어볼 것 같다. 여행을 준비할 때 갈 곳의 지도를 챙기는 것처럼 이 책은 여행자의 마음의 지도와 같아서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마음의 지도를 읽은 소감은, 여행이든 삶이든 결국 내 삶에서 내가 얼마나 주체로서 충실할 것인지가 문제라는 것에 동의한다. 여행은 오롯이 나에 집중할 수 있는 순간이다. 이 때 맛 본 내 삶의 맛을 현실에서도 어떻게 주체적으로 드러내며 살 것인가. 개념적으로는 이렇게 이해할 수 있는데 아직 혼자 여행다운 여행을 떠나보지 않아서 일단 이렇게 마음에 담아두려 한다. 이런 태도를 견지한다면 여건상 멀리 떠나지 않아도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낯선 곳에 자신을 놓아 보고, 낯선 책이나 영화로 다른 문화를 접해 본다면 어떨까. 새로 만나는 사람들을 여행자의 마음으로 대하고 자신을 돌아본다면 일상이 좀 더 신선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혼자 하는 여행은 언젠가 꼭 떠나리라.

 

여행을 생각하다보니 지난 여행의 추억이 떠오른다. 가장 가까웠던 기억이라서 그런지 일 년 전 부모님과 함께 했던 시간이 자꾸 생각난다. 이 책에서는 주로 혼자 하는 해외여행을 위주로 설명한 면이 있어 여행지에서 만날 수 있는 세계의 여행자와의 만남은 다뤘지만, 상대적으로 함께 여행했던 일행, 친지, 가족들과의 친밀함을 다루지는 못했다. 여행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고유함뿐 아니라 함께 했던 사람들과의 친밀한 시간인 것 같다. 특히 가족이라면, 가족 여행이란 매우 어려운 미션이기 때문에, 잘 된다면 일상의 짐을 잠시 벗어 놓고 인간과 인간으로서 새로운 만남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이다. 쓰다 보니 이 책의 주제와 좀 거리가 있는 듯하지만, 부모님이 더 연로하기 전에 또 여행의 기회를 마련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가족이지만 일상을 벗어나서 만나니 우리 사회에서 누리지 못한 친밀한 시간을 누리며 새로운 에너지를 얻게 된다. 가족과의 친밀한 시간은 깊은 곳에서 나를 지탱하는 힘이다. 정체감과 안정감의 근원을 누리는 제한적인 시간이라 더 특별했던 것 같다.

 

여행,

언제나 설레는 말이 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나의 여행에게 묻고 싶다.

나의 삶은 어떤 맛일까

 

 

p8

우리는 언제나 우리에게 맹목적으로 요구되는 것들, 달리 말하면, 우리가 어느덧 자기도 모르게 욕망하게 된 것들에 대해 의심해야 한다.

이러한 원칙은 거의 모든 경우에 적용된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노동, 인생 과정, 라이트스타일, 사랑, 우정, 여행, 죽음 등 우리는 모든 것들을 의심해봐야 한다. 그러한 의심의 기반 위에 설 때, 제대로 자기만의 삶을 지켜나가고 살아갈 수 있다.

 

p43

이쯤 되면 여행은 애초에 현실로부터의 해방이라는 형식을 완전히 상실하고, 그저 값비싼 사치 행위, 쾌락 행위, 소비 행위에 불과하게 된다. 현실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무엇보다 그 현실을 채우고 있는 타자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항상 우리에게 비교를 강요하고, 우리를 시달리게 하고, 우리의 결정력을 빼앗아가는 다른 사람들 혹은 다른 존재들이야말로 현실의 가장 강력한 원인이다.

 

p148

나는 그게 삶이라는 걸 알았다. 삶은 단계적으로 흘러가며 각각의 나이에 맞는 미션을 수행하는 게 아니다. 그런 건 그저 삶을 한 걸음 물러나서, 추상적으로 바라볼 때나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오히려 삶은 오늘에 밀착할 때만 발견된다. 있는 것은 오직 오늘뿐이다. 그리고 매일 오늘을 살아 내다보면, 그 다음에 부수적으로 전체 시간으로 그 오늘들이 묶이는 것이다.

나는 그저 어제와 다르기만 하면 되었다. 어제와 다른 풍경을 보고, 다른 경험을 하고, 다른 글을 써내면 되었다. 삶도 다르지 않다. 어쨌든 어제보다 나아지면 된다. 책 한 줄이라도 더 읽고, 가치 있는 만남을 경험하고, 새로운 글 한 줄을 백지에 추가하면 되는 것이다. 결국 그런 오늘들이 묶여서 어떤 결과가 나오고, 또 어떤 오늘들이 오게 될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나는 항상 오늘 속에 있을 것이고, 언제나 그랬듯 최선을 다할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최선이란, 어디까지만 오늘의 삶에 대한 최선이다. 나는 여행을 하면서 모범생이 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에 대한 모범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삶 그 자체에 대한 모범과 성실이었다. 나는 삶을 살아 내고, 견뎌 내며, 긍정하는 방법을 여행을 통해 배우고 있었다.

 

p162

여행에서 우리는 새롭게 표백된 자시 자신과 새로운 시간성을 발견한다. 나의 세계를 지배하는 건 나의 시간관과 장소성이었다는 것, 결국 내가 어떤 시간을 지향하느냐에 따라 내 삶도, 내가 느끼는 세계도, 나의 생각도 많이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 속에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배우는 것은 이 반복적인 성실성에 적응함으로써 내 삶이 새로운 양식으로, 창조적이며 건강한 양식으로 올라설 수 있다는 사실이다. 여행이 우리 삶을 획기적으로 바꾸어서 꿈꾸던 유토피아로 바로 데려다줄 리는 없다. 그러나 여행에서 얻은 삶에 대한 힌트와 힘은 우리에게 새로운 삶으로 향하는 문을 살짝 열어 보여 준다, 여행은 그 열린 문 바깥으로 한 박을 내딛을 기회까지 준다. 그러나 나머지 한 발을 더 딛는 건 우리들 몫이다.

 

p172

일몰의 순간에는 마치 내일이 없을 것 같다. 이 하루와 함께 이 여행지도 이제 마지막을 고하고, 이 곳에서 만난 사람들과도 기약 없이 헤어진다. 언제 다시 이곳에 올지 알 수 없다. 이 풍경이 오늘로서 마지막일 수도 있다. 오히려 그럴 가능성이 더 높다. ...... 그러나 어떠한 여행자도 그러한 사실 때문에 나머지 여행을 통째로 망쳐 버리진 않는다. 여행자의 우울에는 항상 그 다음이 예고되어 있다. 바로 또 새롭게 만날 도시와 그곳에서의 기쁨이 예견되어 있는 것이다. 결국 여행자는 삶의 가장 기본적인 진실에 익숙해진다. 누군가 혹은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나 기뻐하고, 정들고, 헤어지며 깊은 슬픔을 맛보고, 또다시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는 삶의 진실 맣이다. 삶이란 결국 가장 깊이 기뻐하고, 가장 깊이 슬퍼할 때만 진정으로 누렸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p175

여행은 단순한 즐거움 혹은 단순한 고통 이상의 경험이다. 여행뿐만 아니라, 삶에서 중요한 경험들은 모두 단순한 감정이나 일차적 감각 이상의 층위에서 말해야 한다. 모든 삶에는 좋게 느껴지는것과 나쁘게 느껴지는것이 함께 있다. 삶을 닮은 경험들, 혹은 삶 그자체라고 할 수 있는 특별한 경험들 역시 마찬가지다. 사람들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그러한 경험에 사랑, 글쓰기 그리고 여행을 놓는다. 이러한 경험들은 그 자체로 이미 삶이다. 우리는 삶을 이야기하듯이 사랑과 글쓰기, 여행을 이야기할 수 있다. 그것들은 존재의 구조가, 작동하고 이루어지는 형식이, 우리에게 머무는 방식이 닮았다. 사랑, 글쓰기, 여행은 모두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고통을 동반하며 우리를 그것으로부터 떨어질 수 없게 만든다.

 

p198

비트 세대는 기성의 질서에 저항하여, 또 메마른 현실과 획일화된 소비문화에 반항하며 무한한 청춘의 시대를 열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이 택한 방법은 새로운 세계의 건설이라기 보다는 끊임없는 파괴에 가까웠다. 섹스, 마약, 방항은 그것 자체로 대안이 되기에는 충분하지 못했다. 청춘을 불태워 삶의 정수에 도달하는 것, 그리하여 쾌락과 생명의 극한을 맛보고, 그러한 상태의 무한한 연장을 추구하는 것은 우리 인간의, 또 인생의 궁극적 대답이 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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