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를 보았다. 어쩐일인지 여성관객이 10중 9였다. 내가 사는 지역만 그런게
아니라 라디오를 들으니 다른 동네도 여성관객이 압도적인가 보았다.
사람 생각이 다 비슷비슷하다는 ..ㅎㅎ

온라인에서 책을 살까말까하다 늘 말았다. 다른 사고 싶은 책들도 많은데 연애가 웬말이냐 하면서....


그것도 썩 당기는 연애조합도 아니고 말이다. 십대와 칠십대라니...
20대와 60대라면 또 모르겠다..... 그랬는데, 서점에 직접가서 <은교>를 보니 생각보다
책이  두꺼웠고 작가의 사유가 묻어나는 책 같았다.
해서 다음번엔 꼭 사서 읽어봐야지 했다.

아무튼, 책을 읽지 않고서 영화를 본소감.
매번 8시간 걸리는 분장을 80번이나 감내했다는 선전이 가장 호기심을 일게 했는데
영화에서는 그 노고가 그렇게 찡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해피엔드>와 <사랑니>를 만든 감독이라는데 사랑니는 못 봐서 모르겠고
해피엔드는? 바람의 추이를 나름 잘 그렸다고 본다. 특히 바람이 들켜서 남편에 의해 쥐도새도 모르게
죽게 되는 것은 10여년전(?) 당시 남편들의 속마음을 대변한 것인가? ㅎㅎ
지금이라면 그런식의 응징을 결말로 내지는 못할것이다.
아무리 바람난 마누라가 미워도 아이의 엄마를 죽이면 어떡한단 말인가.

영화로 돌아와서, 나는 영화를 엉뚱한 시선으로 봤다. 이적요시인의 고독은 이해하겠다.
언젠가 김홍신씨가 김미화의 <여러분>인가 에서 그랬다.
해가뜨면 괜찮은데 해가지고 나면 고독이 사무친다고 했다.
정말 죽고못사는 연애소설을 마지막으로 써보고 싶다고도 했다.

다른사람도 아니고 작가, 정치인으로 사회적 성공도 하신분이
본인이 원한다면 친구도 몇트럭 되실 분이 '고독'을 가장 감내하기 힘들어하다니
의외였다.

한편으론 어쩌면 많은 것을 가졌던 적이 있기에 그만큼 고독의 무게 또한 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적요 시인도 마찬가지... 그러나 적요시인의 생활태도를 보니
고독할수 밖에..^^

자기는 손이 없나 발이 없나 . 왜 젊은 제자를 파출부처럼 부려먹나.
일주일에 몇번 파출부를 부를 것이지.


제자가 찾아오면 자기가 차를 끓이고 된장을 끓여줘야지 왜 제자에게 시키는지...그게 바로
고독을 부르는 생활방식.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는 것 아닌가. 문학모임에 가서는
선생님 소리 들으며 대접받는대나 익숙하고( 영화는 그런 원로들의 행태를 풍자했다는 생각도 들었...)
계속 그럴거면 갈수록 고독을 벗어날수 없으리.

영화의 결말도 꼭 그렇게 치정스럽게 흘러야 되나. 인간의 욕망이 조악하긴 하지만
그 누구도 아닌 대시인 이적요 아닌가.  화가 마네처럼 동생의 마눌로 천거하며
평생 그 재능을 키워주면서 조금 음침하게 바라볼수는 없었나.~ ㅋㅋ


(여기서 잠깐..)

<법륜스님이 말하는 남자들의 현명한 노후생활 비법>

얻어먹지 말고 직접 해먹어라. 해줘라.

얻어먹는 순간 갑자기 확 늙는다. 마눌은 마눌대로 진드기처럼 삼세끼 꼬박 얻어먹는
남편 너무 끔찍하다. 벗어나고 싶어진다. 웬수가 따로없다. 얻어먹을 생각하지 말고
아침에 일찍 눈 뜨면 남편 스스로 밥해서 마누라 먹게해라. 청소기도 돌리고...ㅎㅎ
그러면 마누라 잔소리 할일 없어지고 무엇보다 당사자 마음이 상쾌해진다.

그 상쾌해진 기분으로 등산을 갈수도 친구를 만날수도 집에서 책을 볼수도...
마눌에게는 친구 만나고 오라고 등 떠밀어주고....즉, 능동적으로 사시라.
먼저 베풀고 사시라.~

(30년 동안 벌어다 줬는데 하루 아침에 찬밥신세냐 하며 울어봐야 남자만 손해~
요는, 마눌하게 아부하라는게 아니라 . 인간은 먹고, 싸고, 치우는 일을 스스로 할때
스스로에 대한 자긍심(?)이 생긴다고. 그것을 남에게 맡길때 구차해진다고.
상대가 지겨워 한다고.)

법정스님 평생 혼자 살아도 궁상스럽지 않았던 것은 바로 그런이유!
할머니들이 영감죽고 10년씩 더 살아도 끄덕없는 것은 바로 소소한 일상생활을
스스로 하기 때문~ 남자들은 안돼, 체념하지 말고 미리미리 연습을~
참고로 서구에서는 먼저 일어나는 사람이 아침밥을 한다는...~

아무튼, 은교, 좀 다른 식으로 전개를 했더라면....
각자 결핍의 결과일뿐. 결핍의 해결이 겨우 그건가. 공감은 안가.
세계보편 노인에게 찾아오는 노년의 고독과 욕망이 아니라,
대한민국 남자들의 노년에나 일어날수 있는,
일상생활을 할줄 몰라 생긴 마음의 종기에 다름아니라...ㅎㅎ

특히 이 병은 잘난 남자로 살던 사람이 늙으면 발병하기 더 쉬우니  급주의.~

리처드 테일러의 <결혼하면 사랑일까: 불륜에 숨겨진 부부관계의 진실>
에 대한 한겨레21, 908호 남은주 기자의 기사에서 남기자가 인용한
정신분석가 이승욱씨의 말을 재인용하자면,

욕망이 다가가는 지점이 나의 결핍을 드러낸다.
마음을 끄는 대상을 만나면 , 자신을 바라봐야 한다.
지적이고 따뜻한 여성에게 꽂혔다면,
그 여자가 아니라 내게 결핍된 지성과 따뜻함을 욕망한다는 신호다.


내가 지적이고 섬세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야 하는데
다른 사람을 통해 내 결핍을 손쉽게 채우려고 하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아무리 사랑해봤자 다른 사람의 특성은 내 것이 아니다.
허전한 나머지 욕망의 대상을 옮겨다니기도 한다.


여태껏 내가 잘 사용해오지 않던 씨앗 상태로 남아있는
내 안의 가능성을 꽃피우려는 것,
이게 정신분석학적으로 외도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가 되지 않을까.

결론은 이 적요 선생도, 은교도, 서지우도 타인을 통해 결핍을 채우지 말고
자기를 채워라, 뭐 이런~
적요선생은 당장 아령이라도 들어서 젊음을 조금이라도 더 찾아 은교말고
10~15년 연하의 자신을 흠모하는 제자나 팬을 일주일 한두번
파출부겸 연인으로 들이심이 현실적~ㅋㅋ

제일 좋은 것은 순리대로 내 늙은 몸뚱이에 맞게 마음의 욕망을  맞출 것 . 혹은 비울 것.
텅빈충만을 그때 안 이루면 언제 이루나. ㅎㅎ

우좌간 이 영화와 함께보면 좋을 영화로
<로리타><이보다 더 좋을순 없다><사랑할때 버려야 할 것들>이 살짝 떠오른다.
.......

박범신의 책은 에누리 없이 괜찮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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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05-03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좌간 ㅎㅎㅎ 폭설님의 시원시원한 페이퍼, 이래서 제가 좋아한다니까요.
많이 웃으며 읽었어요. 이름처럼 '적요'시인은 고독을 즐기는 측면도 있어요.
원작에선 님 말씀처럼 좀 젊은 후배여자시인이 나와요.
시인을 흠모하지만 시인이 어느날엔가부터 받아주질 않아요. 은교를 본 이후..
원작보다 영화는 좀 못 미쳤다고 봐요. 어차피 원작도 연애소설이지요. 작가가 밝혔듯.
아흔살의 마르케스 할배도 열네 살 소녀와의 하룻밤을 탐했듯 그런 것이겠지요.
그나저나 욕망이 다가가는 지점이 나의 결핍을 드러낸다는 말은 맞는 것 같아요.^^
욕망이 나쁜 게 아니라 욕망의 대상과 색깔이 문제이겠지요.

폭설 2012-05-03 23:13   좋아요 0 | URL
ㅋㅋ~ 나의 결핍을 나의 것으로 채우지 않고
상대를 통해 채운다 해도
정도가 지나치지 않으면 아름다움을 간직할수 있는데
인간은 꼭 끝을 보고 말죠. 진흙탕 개싸움 같은...ㅋㅋ
표현이 너무 심했나~~

남은주 기자왈,

'로맨스가 지나간 자리는 황폐하다. 사회적 가정적으로 맺는 관계가 황폐해질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자기안에서 빈틈이 커진다.'

짧은 로맨스를 댓가로 치를 기회비용이 너모 큰거죠.
때문에 이십대가 그렇듯,
앞으로는 사십대도, 오십대도, 육십대도.... 어쩌면 미래에
처들어 올지도 모르는 로맨스에 대한 백신을 미리 스스로에게 맞혀야 되는
것은 아닐런지..^^

백신을 맞으면 전염병이 약하게 지나가듯이 '로맨스백신'도
미리 맞아두면 로맨스의 끝이 덜 항폐하겠죠.^^
로맨스 백신은 다름아닌 '내적 충만'이겠죠.
그 내적 충만을 위한 노력은 삶이 끝나는 날까지 지속되어야 할것이구..

그렇게 되면 그 어떤 사랑을 하더라도 좀 덜 황폐해지겠죠.^^
(횡설수설...뭔소리 했는지 모르겠네요.ㅎㅎ)

아무튼, 아름다운 봄날의 밤이에요.
이런 봄날의 밤은 잠자는게 아까워요.
잠이 안와요.ㅋㅋ 프레이야 님도 이 순간의 봄밤의 만끽하시길~~~




2012-05-03 23: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04 09: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신의 뇌 - 신은 뇌의 창조물. 뇌과학이 밝혀내는‘믿는 뇌’의 메커니즘
라이오넬 타이거 & 마이클 맥과이어 지음, 김상우 옮김 / 와이즈북 / 2012년 1월
평점 :
품절


천국은 없다.

사후세계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들이 만들어낸 동화일 뿐이다.

사람들은 열망하지만 결국은

성취 불가능한 윤리적 질서나

생활 방식의 근거로서 신을 찾는다. 

 

<스티븐 호킹>

 

신은 과연 존재하는가? 신이 있다고 철떡 같이 믿는 사람은 수없이 많다. 반대로 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또한 많다. 신이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 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만큼 시간 낭비가 없고, 없다고 믿는 사람에게 있다고 강조하며 믿어보라며 정열을 쏟는 것만큼 헛수고도 없을 것이다.

 

미군이 코란을 태우는 것을 보고, 아프가니스탄 병사들이 순식간에 달려들어 코란을 꺼내려다가 사망하는 웃지 못할 사고가, 21세기에 일어났다. 도대체 신이 무엇이기에 활활 타오르는 불구덩이도 개의치 않고 뛰어들어 타고 있는 코란을 가슴에 안은 것일까.

 

인간의 지독한 충성심과 순교를 통해 존재하는 종교를 보면 우리가 종교를 위해 사는 것인지, 종교가 우리를 위해 있는 것인지 헷갈린다. 아무튼, 지구촌 인구 80%가 종교를 믿는다고 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가장 쪽수가 많은 종교는 불교(4억?), 기독교(21억), 이슬람(15억), 힌두교(9억) 등이다.

 

그러나 다만 우리가 모를 뿐, 이 지구 곳곳에는 위에 언급한 굵직한 종교들 외에 수많은 종교가 있다. 곳곳에 산재한 많은 소수민족과 원시부족들의 수만큼 종교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초록별 지구에는 얼마만큼의 서로 다른 종교가 있는 것일까.

 

인간은 왜 신을 믿는 것일까?

 

<신의 뇌>(와이즈 북) 저자들은 대략 '4200여 개'라고 말한다. 참으로 많기도 하다. 인간들은 4200개의 저마다 종교를 가지고서, 자신의 종교가 가장 으뜸이고, 가장 바른길이라고 믿는다.

 

여고 시절 도덕수업에서는 인간은 '한계상황'에서 신을 찾고, 믿게 된다고 배웠다. 그런데 <신의 뇌>의 저자인 라이오넬 타이거와 마이클 맥과이어 두 생물학자는 자신들의 학문 세계에 걸맞게 이게 다 '뇌' 덕분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신이 뇌를 창조한 게 아니고, '인간의 뇌가 신을 창조했다'고 말한다.

 

사실 모든 생물의 삶은 뇌가 명령을 내리기에 영위된다. 뇌가 명령을 멈추면 '뇌사'다. 뇌가 사(死)하면 첨단 의료장비가 없다면 그야말로 죽은 거나 마찬가지다. 인간이 사용하는 많은 기기 또한 뇌에 해당하는 본체의 명령체계가 있어야 작동된다.

 

이렇듯 인간의 모든 행동은 뇌가 통제하는데, 이 저자들은 '신'이라는 존재 또한 인간의 뇌가 '상상'하여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인간의 뇌가 '편안함'을 추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종교는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앞날에 대한 불안, 걱정이나 현재의 괴로움,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믿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종교만큼 위로를 주는 것은 없다. 종교가 제일 따뜻하고 마음의 평화와 위로를 준다.

 

뿐인가. 종교는 우리의 내세마저 꼼꼼하게 정의해준다. 저자들은 '내세는 종교의 최고 발명품' 이라 했는데, 과연 그런 것 같다. 선한 사람(혹은 믿는자)은 죽으면 천국에 가서 갖가지 영원한 복락을 누린다. 반면 악한 자는 지옥의 유황불에 던져지고 죄과에 따라 지옥의 단계도 제각각인데 성직자들은 신자들에게 마치 가 본 듯이 반복적으로 상세히 설명해준다.

 

현실의 갖은 괴로움도 다음 세상의 천국을 생각하면 훨씬 극복하기 쉽고 이승에서의 짧은 영화란 천국의 영원 복락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종교에는 이승과 저승, 천당과 지옥에 대한 '스토리'가 넘친다. 저자들은 '믿는 뇌'는 종교적 스토리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대부분 종교는 경전, 신, 교리, 행동규범 등의 종교적 스토리를 갖고 있다. 그 스토리는 매력적이다. 타 종교인이 보면 안타까운 점도 많지만, 당사자들은 흔들림 없이 믿는다.

 

예를 들어 이슬람교도는 순교하면 그 보상으로 많은 처녀가 천국에서 자신을 기다린다고 믿는다고 한다. 기독교의 이단들은 미래의 어느 날 자신들만 '휴거'될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으며 그날을 위해 기도하며 살고 있다.

 

"그런데 믿음은 우리가 자주 무시하는 뇌의 편견에 의해 지속 된다. 편견 때문에 뇌는 자신의 믿음에 어긋나는 생각이나 증거를 거부한다.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내세가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여호와의 증인의 경우, 여호와 이외의 신이 존재할 가능성을 거부한다.

 

창조론자는 지구의 연령에 대한 지질학적 증거, 창조론의 신빙성을 떨어뜨리는 인류 조상들에 대한 명확한 증거, 4천년 이전에 존재했던 종교의식을 묘사한 암벽화, 진화론으로 추적한 종의 변화, 그리고 죽음(특히 영혼의 죽음)이 실재한다는 것을 거부한다.(여호와의 증인은 죽음을 죽음으로 보지 않고 영원한 천상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타는 과정이라고 믿는다.)"(본문 59쪽)

 

'뇌의 편견'은 모든 종교가 갖는 공통적 의식인 '종교의식', '교류', '믿음'을 통해서 지속되는 것 같다. 종교의식을 통해 신을 만나는 동안 뇌는 '샹그릴라를 경험'하고 종교적 교류는 신도들에게 좋은 '사회적 관계를 맺어' 준다. 믿음 또한 뇌를 '편안하게' 해주고 알 수 없는 것을 '알려'주고 '미래를 보여'준다.
 
이 책은 제목으로만 넘겨짚을 때는 종교적 체험이나 믿음 등에 당연 부정적인 결론에 도달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만은 않다. 대저 종교적 행위란 인간을 편안하게 하기 위한 뇌의 작용임을 학자로서 근거를 갖고 담담하고 꼼꼼하게 설명할 뿐이다.

 

"근심과 공포를 관리하기 위해 뇌가 하는 일 중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뇌의 믿음 체계가 창조해낸 종교를 활용하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종교에 대한 비난이나 찬성의 입장에서 제기한 것이 아님을 유념해주기 바란다. 단지 사실이 그렇다는 것이다. 이는 참으로 보편적이고 끈질기고 중요한 사실이다."(본문 277쪽)

 

그러니 믿어? 말어?

 

이 책은 종교를 과학으로 풀어내기에 흥미롭다. 두 생물학자는 전혀 흥분하지 않고 왜 종교가 '뇌의 상상물'인지 조목조목 설명한다. 인류가 왜 종교를 갈망했는지? 종교를 믿으면 뇌의 상태가 어떻게 변하는지? 종교가 섹스에 개입하여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 또는 종교가 왜 똑같은 의식을 수도 없이 반복하는지? 그리고 미움과 다툼이 없는 종교를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지? 등등 종교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의문들을 설득력 있게 답해준다.

 

저자들의 설명이 비신자인 내 경우는 전혀 거북하지 않았는데, 신자들이 읽으면? 글쎄 어떨지 궁금하다. 현대 과학은 수년에 걸쳐 게놈 프로젝트를 완결한 끈기가 보여주듯 끊임없는 연구로 신의 영역에 계속 도전할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배타적이지만 않는다면 종교가 기죽을 필요는 없다고 본다. 뇌도 인정한 것이 아닌가. 나의 종교는 그저 지구상 4200여 개의 종교 중 하나일 뿐이라는 관용의 정신을 가진다면 종교(宗敎)는 글자 그대로 '으뜸 가르침'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것이다. 우리의 뇌를 편안하게 함은 물론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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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

 

이런, 이런! 이렇게 위안을 주는 말이 다 있었네. 사람들의 호감이 다 제각각이니 설마 나를? 하며 겸손을 떨지라도 이 세상 어딘가에 적어도 한 사람 쯤은 나를 첫사랑으로 바라봤을 확률, 확률적으로 가능하겠다. 아흐, 심심한 위로가 된다.^^

 

<시사인> 236호에서 김세윤씨가

 

"보고 나면 술 좀 당길 거다. '기억의 습작'을 틀어놓고 후우~괜히 한숨 한번 쉬게 될 거다. 이 아저씨들아!"

 

라며 목 놓아 부르짖었기에 아저씨는 아니었지만 호기심 급상승하여 <건축학 개론>을 보게 되었다.

 

 

 

어느 날, 통 기억에 없는 삼십대의 여인이 동창이라면서 승민의 일터에 나타나 반가운 척을 했다.

 

 
  
늙은~

"그런데 누구세요?"

"건축학 개론 같이 들었던 서연이야. 음대의..."

 

그래도 기억이 가물가물한 승민, 용건을 물었다.

 

"내가 살 집을 지어줘."

 

그리하여 승민(엄태웅 분)은 자신의 이름을 건 첫 작품으로 첫사랑 서연(한가인분)의 집을 짓게 되었다. 건축의 건자도 모르는 의뢰인에게 일일이 설명과, 때로는 설계변경까지 들어주며 집을 지어나갔다. 그 과정 속에서 티격태격 두 사람은 과거의 추억과 만나게 된다.

 

승민이 보통의 서른 중반에 비해 조금 더 싹아 보였다면 서연은 역시 여느 보통의 서른 중반에 비해 얼마간은 복부인의 느낌이 났다. 그간의 삶에 대한 쓸쓸한 반증인 듯 한쪽은 수수했고 다른 한쪽은 도도했다. 그러나 늙은 현재의 그들과 달리 젊은 날의 그들은 풋풋했다.

 

어린 승민(이제훈분)과 서연(배수지 분)이 워낙 청초해서 그들을 바라보자니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늙은 우리 모두 저마다 그런 한때가 있었을 터인데 영화완 달리 증명할 방법이 없네.~

 

아무튼 이 영화는 없던 첫사랑도 생각나게 하는 영화이다. 또, 비단 첫사랑이 아니어도 청춘의 한때를 스쳤던 이런저런 얼굴들, 다들 잘 살고 있으려나? 있겠지? 문득 안부가 궁금해지는 그런 영화다.

 

나는 무엇보다 뜬금없이 빛바랜 순댓국 집 전경이 가슴을 후렸다. 승민 엄마(김동주 분)의 억척스런 성정을 보자 괜시리 눈시울이 뜨거워 졌다.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그런 정서, 우리네 시장 통의 일상이었다.

 

작은 물건 하나 사면서도 사는 사람은 다만 일 이 백 원 혹은 일 이 천원이라도 깎아야 직성이 풀렸다. 장사꾼은 장사꾼들대로 일지감치 가격을 올려 불러 놓고는 깎아주는 척, 이러면 밑지고 파는데 하면서 오만 생색을 다 내었다.

 

그 속엔 유쾌한 시끌벅적함도 있었으나, 때로는 사소한 일에도 고성이 오갔다. 내 가족 내 새끼를 위해서라면 악다구니 좀 쓴들 어떠리. 목소리 큰사람이 제일. 때로는 손님이 왕.

 

그렇게 억척으로 아끼고 모아서 결국에는 또 자식에게 다 헌납하고 자신은 그제 것 살던 대로 하루세끼 풀칠만 겨우 하면서 쪼그랑 할망구로 살다가 가고 말.... '백 말'이 필요 없는 승민 엄마의 그 자글자글한 주름과 푸석이는 머릿결에서 지난시절 우리네 어머니들의 삶이 겹쳐져 짠하면서도 고맙고 아름다웠다.

 

  
젊은~

 

 

청춘 남녀라면 어린 승민과 서연에 감정이입이 될 것이다, 라고 쓰려다 문득, 흐미, 지금은 21세기 아닌가. 스마트폰으로 시공에 구애받지 않고 카카오 톡을 날리는 젊은이들이 이 영화를 보면 어떤 느낌일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혹 영화를 보고 집에 와서,

 

"아빠, 그리고 엄마! 그 시절엔 다들 그런 식으로 연애 했나벼? 푸훗~아이구, 답답해. 쯧쯧. 뭘 그리 끙끙 앓고 난리야.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오케이?"

 

하지 않을까 몰라.

 

때문에 이 영화는 지금의 청춘보다 한때 청춘이었던 아줌마 아저씨들에게 더 잘 어울리는 영화일지도 모르겠다. 현실의 무게에 낭만은 개뿔! 혹은 그날이 그날인 지루한 일상의 배 나온 아저씨들, 혹은 독 오른 아줌마들.

 

일단 극장 문을 열고 들어가면 술보다 더 위로가 되는 친구가, 젊은 날의 한 때가 거기 있음에 모처럼 고개를 끄덕끄덕, 알싸한 추억의 순간을 반추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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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03-28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폭설님, 정말 스맛폰에 카톡에 지금 세대의 친구들은 그런 애틋함을 잘 모를지
몰라요. 아주아주 오래전 지금처럼 폰도 없고 삐삐도 없을 때 제게도 대단한 사건이
있었지요. 연락이 안 되니 약속장소가 어긋나도 서로 어쩔 도리 없이 어긋날밖에요 ㅎㅎ

폭설 2012-03-29 09:08   좋아요 0 | URL
어머, 대단한 사건? 살짝 궁금해지네요. ㅋㅋ
사건이 있었다는 것은 좋은 일이죠.
나만이 아는 은행 적금통장처럼 든든한...^^ 세련된 영화도 아니고
곳곳에 하자가 보이는데 누구에게나 있을 첫사랑에 대한 공감을
자아내게 한게 흥행요인인듯하네요.^^

너무 흥행해도 감독이 차기작에 부담을 갖지 않을지요...ㅋㅋ

 

'신용카드와 체크카드, 뭐가 다르단 말이지? 뭘 체크하라는 거야?'

 

지금은 확실히 이해를 하지만 몇 년 전엔 지인이 몇 번을 설명해줘야 '아하!' 했다.

 

"왜 헷갈리게 이름을 다르게 쓰냐고. 둘 다 카드만 주면 물건살수 있잖아. 똑같은 것 아냐?"

"쉽게 말해 신용카드는 외상카드고, 체크카드는 통장에 돈이 있어야만 쓸 수 있는 서비스야. 체크카드는 통장에 돈이 없으면 그어도 결제가 안 된다고요."

 

"오호, 그러니까 현금은 쓰자면 1, 2주에 한 번씩 통장에서 돈을 뽑아야 하는 귀찮음이 있고, 체크카드는 값을 지불 할 때마다 '사인'을 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는 거네."

"굳이 그렇다면 그럴 수도 있지. 호호."

 

"그렇다면 나는 돈 뽑는 귀찮음을 택할래. 체크카드는 신용카드만큼은 과소비를 조장하지 않겠지만, 통장에 돈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를 현금을 찾을 때처럼 요량하지는 않을 것 같아."

 

아무튼 나처럼 물정 어두운 사람은 모르던 체크카드란 말이 지난 연말부터 부쩍 많이 들렸다. '체크카드 쓰고 연말정산 혜택보자'는 뉴스들이 무슨 캠페인처럼 퍼지곤 해 도대체 얼마나 혜택을 보나 궁금하여 알아보려니 그 셈법이란 게 복잡난해했다.

 

그러던 차, 어느 경제기사를 보니 연봉 4천만 원 정도인 사람이 3천만 원을 체크카드로 결제하면 대략 45만 원인가 환급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그들이 누구인가. 화려한 미사여구로 소비자가 엄청나게 이득 볼 것처럼 얘기해도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별로 혜택이랄 것도 없는 것이었다. 기껏 45만 원정도 환급받고자 3천만 원을 쓰나. 그냥 2천5백만 원쯤 쓰고 45만원 환급 안 받는 것이 훨씬 유리한 것이 아닐까.

 

은행이나 정부가 체크카드를 장려하는 것이 순전히 우리네 이용자들을 위해서일까. 말로는 이용자들의 편의 어쩌고 하지만 결국은 쉽게 이용하면서 돈 많이 쓰게 하되 미납연체 사태는 당하고 싶지 않다는 속셈 아닐까. 

 

언제는 신용카드 쓰자고 마구 홍보하더니. 그에 소비자들이 너무 호응을 하다못해 연체사태가 또 문제가 되니 정부고 은행이고 체크카드로 선회한 모양이다. 필요에 따라 카드를 쓰기는 써야겠지만 연말 정산 환급 많이 받으려고 무조건 쓰고 보는 것은 자제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

 

현금 영수증 카드를 권장해야

 

지난해 말, 어쩌다 그간 사용하던 현금영수증 카드를 잃어버렸다. 차일피일하면서 몇 달을 미루다 얼마 전 재발급 받았다. 현금 영수증 카드는 국세청 누리집에서 누구나 간단히 신청 할 수 있다. 카드도 초기에 비해 훨씬 튼튼하고 세련되기까지 하다.

 

신용카드나 체크카드가 편리한 듯하지만 매번 이용할 때마다 사인하는 일이 귀찮지 않은가. 드드득 영수증이 긁혀 나오는 그 몇 초가 지겹지 않은가. 그에 비해 현금 영수증 카드는 현금과 함께 주기만 하면 되고 분실해도 걱정할 필요 없다. 재발급 받으면 그만이다. 신용카드나 체크카드는 자칫 잃어버릴 경우 여차하면 손해가 막심이다.

 

무엇보다 식당에서 1, 2만원 점심 밥값마저 일일이 카드로 계산하는 것은 가뜩이나 어려운 자영업 하는 사람들을 두 번 울리는 일이다. 그분들의 카드수수료 부담은 덜고 세금은 확실히 내게 하는 방법은 따로 있다. 소비자인 우리가 현금영수증 카드만 내밀면 간단하게 해결된다.

 

체크카드니 혹은 각종 카드보다 현금영수증 카드가 서민들에겐 가장 이로운 카드가 아닐까 생각한다. 금융사들은 더욱 편리하고 간편하게 어디에서든 쓸 수 있는 카드라며 각종 최신 카드를 끊임없이 만들어내지만 결국은 다 우리 주머니에서 돈을 가져가는 수작이 아닐까. 

 

부자들이야 뭔들 상관이겠냐 마는 서민인 우리들은 이런 유행에 속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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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아침마당>을 보다가 '아줌마는 나라의 기둥' 김용숙 대표의 주장에 공감했다. 매주 수요일은 부부간 혹은 가족 간 갈등의 사례자에게 정신과 의사, 변호사, 개그맨 김학래, 그리고 김용숙 대표와 시민 아줌마대표단이 종합 처방을 내려주는 것으로 진행된다.

 

아무튼 그날의 상담에서도 다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말씀들을 하였는데, 말끝에 김용숙 대표가 부부간 호칭을 언급하였다. 대충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호칭을 바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요즘 젊은 사람들이 남편을 오빠라고 하는 것을 고쳤으면 해요. 특히 이런 방송이나 드라마에서 왜 그 오빠라는 호칭을 허용하는지 모르겠어요. 말 따라 행동도 나옵니다. 말이 바로 서야 가정의 행복도 있다고 봅니다."

 

김 대표의 말을 듣고 나는 마침내 구원 투수를 만난 듯 손뼉을 쳤다. 평소 드라마나 방송에서 남편을 오빠라 부르는 말을 들으면 저게 아닌데 하며 불편해했다. 부부간 호칭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가 않다. 결혼 생활에 알게 모르게 많은 영향을 준다. 결혼 전에는 그 "오빠" 소리 듣는 남자들이 간이라도 빼 줄지 모르지만 결혼하고 나면 '오빠'라는 호칭은 계급 성을 띈다.

 

부부는 나이 차가 많든, 적든 일단 부부가 되면 서로 평등해야 한다. 그래야 자녀에게 남녀의 평등을 알려줄 것 아닌가.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면 남편은 '갑'이고, 부인은 '을'이 되기 쉽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오빠가 "시끄러!"라도 하게 되면 대번 기가 죽기 십상이다.

 

결혼 초, 쑥스럽더라도 서로 호칭을 정하자

 

모든 것을 이해하고 배려할 것 같은 신혼의 달콤함이 몇 년이고 이어지면 뭐든 문제이겠느냐 마는 인간사 그렇게 달콤하지 않다.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는 저 요르단 시인의 말처럼 가정의 평화가 오래가기 위해서는 '거리'가 필요하고, 그 거리는 예(배려)를 통해서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적정선이 유지되는 것 같다.

 

아무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예를 지키기 가장 좋은 방법은 호칭이다. 호칭이 평등하다면 남편은 "이게 어디?" 같은 위압적인 말을 함부로 쓸 수 없다. 또는 남편이 약자면 오빠에게 생떼 쓰는 듯한 부인의 비난을 면할 수가 있다. 주변이나 TV 속 상담 프로에서 "오빠가 이렇게 못살게 굴었어요. 저렇게 나를 힘들게 했어요"라며 오빠가, 오빠가 하면서 훌쩍이는 젊은 아내들을 보면 속상하다. 그렇게 힘들게 하는 오빠는 더이상 연애 시절의 그 오빠가 아니다. 오빠가 아니고 남편이다. 남의 편일 수도 있는 남편이다. 냉정함이 요구되는 것이다.

 

하여간 하루 이틀 살 것도 아니고, 결혼생활에서 이 호칭은 기계의 윤활유처럼 결혼생활을 매끄럽게 하는 데 무척 중요하다. 쌍방 다같이 존대하며 이름을 부르든가, 아니면 다같이 반말을 하든가, 또 아니면 서로 별칭을 부르든가 해야지 남편을 오빠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일부는 아이가 자라면 오빠라는 소리를 접고 대신 누구누구 아빠도 아니고 그냥 자녀와 똑같이 '아빠, 아빠'라고 부르던데 이 호칭도 문제가 있다고 본다. 유머 있는 존재가 되어야지, 애교 부리는 존재? 글쎄다. 자녀에게 물어보면 답 나온다.

 

"엄마가 아빠에게 애교 떠는 게 좋니? 유머로서 웃기는 게 좋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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