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포 선라이즈 + 비포 선셋 박스세트 (2disc) - [할인행사]
리차드 링클레이터 감독, 에단 호크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07년 9월
평점 :
품절


지난 9월 영화 <외출>이 개봉될 즈음, 정확히 언제 개봉되는지 그리고 첫 번 상영은 몇 시인지 궁금하여 내가 살고 있는 소도시의 극장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극장 아저씨가 말하기를.

"손님, <외출>은 내일부터 합니다만 그보다 오늘이 <비포 선셋> 마지막 날인데 영화가 너무 좋습니다. 꼭 보시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그래요… 그런데 오늘은 시간이 좀…."
"그러면 이따가 저녁시간에라도 꼭 와서 보십시오. 영화가 괜찮은데 별 주목을 못 받고 간판을 내리는 일이 안타깝습니다."
"예, 가능한 보도록 노력해 볼게요."

물론 내 마지막 대답은 건성이었다. <비포 선셋>이라, 순간 '선 라잇 선 셋'이란 노래가 떠올랐다. 그 노래와 관련이 있는 것일까. 물론 관련이야 없겠지만 이름이 비슷하니 자꾸 연관지어졌다. 그리고 내가 '선 라잇 선 셋'이라는 노래에 그리 흥미가 없으니 도매금으로 <비포 선 셋>도 그냥 그랬다.

다만 무시하고 지나자니 극장아저씨가 강력 추천한 것이 뭔지 모르게 마음에 걸렸다. <외출>도 보러 갈 것처럼 말해놓고 딴 데 가서 보는 등(물론 <외출>을 두 번 보는 바람에 나중에 다시 가 보기는 했지만) <비포 선 셋>만 생각하면 극장아저씨의 선의를 무시한 나 자신이 떠올라 외면하고 싶었다.

그 후, 지인에게 무슨 얘기 끝엔가, 얼마 전 극장 아저씨가 <비포 선 셋>이라는 영화를 권했는데 당기지 않아서 그냥 보지 않았다는 말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지인은 <비포 선 셋>과 관련된 내 모르는 정보를 또 하나 알려주었다.

"그거 옛날에 나온 영화 <비포 선 라이즈>의 후속편이야."
"그래?"
"<비포 선 라이즈>에 나왔던 주인공들이 그대로 <비포 선 셋>에도 나온대."
"속편까지 찍을 정도라면 꽤 재미있었던 영화였나 보네."

순간 어떤 영화일까 살짝 궁금증이 일기는 했으나 이미 극장 간판에서 사라진 영화인지라 미련을 가져도 소용이 없었다.

아무튼 <비포 선셋>과 나의 인연은 거기까지였는데 며칠 전 우연히 새벽 유선방송에서 <비포 선 라이즈>라는 제목을 보게 되었다. 평소 같으면 조금 보다 내가 모르는 배우가 나옴을 확인하고 그냥 지나쳤을 것이나 위에 언급한 일화가 있기에 보게 되었다.

아름다운 이국적 풍경 속을 쉴 새 없이 재잘대며 걸어가는 두 주인공들이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 음, 이 영화 보통영화가 아닌가봐 하는 인상을 받았고 그리고 바로 빠져들었다. 이런 좋은 영화를 나는 왜 듣도 보도 못했을까. 이럴 줄 알았으면 <비포 선 셋>을 극장에서 봐둘 것을.

<비포 선 라이즈>

▲ <비포 선 라이즈> 영화 포스터
ⓒ 캐슬 락 엔터테인먼트
걷다가 지치면 잠시 쉬었다가 다시 걸으면서 쉴 새 없이 열어가는 그들의 웃음과 대화는 나에게 회한처럼 다가왔다. 맞아, 내 젊은 날 해보고 싶은 게 바로 저런 거였어. 제시와 셀린느, 스물 셋 그들은 그 나이에 어울리게 이성에 대한 동경뿐만 아니라, 세상과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고 확장해 가는 열정에 가득 차 있었다.

문득 나는 그 나이에 무엇을 생각하며 살았을까 더듬어보니 이런저런 호기심과 '나'라는 빈 그릇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 고민은 많이 했어도 영화의 그들처럼 밝지도 못하고 넓게 살아가지도 못 했다.

이웃나라가 이웃 동네 같은 유럽의 특수성을 축복 삼으며 유럽횡단열차를 타고 방학 때마다 이런저런 도시를 여행하며 보고 듣노라면 마음의 크기가 저절로 한량없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 삶의 '순간'은 또 얼마나 햇살 같을까.

끊임없이 얘기꽃을 피우며 또, 서로에게 경도되는 것을 확인하며 해뜨기 전까지 충실히 보내자던 두 젊은이들의 꿈같은 밤이 지나고. 헤어짐의 순간이 다가왔다. 하프시코드 연주가 흘러나오는 어느 길가에서 그들은 각자의 눈을 카메라 렌즈로 하여 서로의 모습을 가슴 깊이 찍었다.

이윽고, 셀린느가 타고 떠날 파리행 플랫폼에서 이별이 아쉬운 두 주인공은 6개월 후 다시 그 자리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서야 헤어질 수 있었다. 한 사람은 공항으로 또 한 사람은 파리로 향하는 열차 안에서 각자 지난밤의 추억을 떠올렸고 영화는 그들이 지난밤 거닐고 앉았던 추억의 장소들을 하나하나 비춰주었다. 두 젊은이가 없는 그 풍경들은 조금 쓸쓸해 보였다.

검색해 보니 <비포 선 라이즈>는 95년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 최우수 감독상을 수상했다고 나와 있는데 내겐 어찌 이리 금시초문일 수가. 해서 기억을 더듬어 95년 나의 삶을 반추해보니 그때 내가 본 외국영화로는 <포레스트 검프> 딱 한 편이 기억났다. '세로자막' 읽기 싫어 외국영화 보기 싫어했는데 손해가 이렇게 클 줄이야.

<비포 선 셋>

다음날 사소한 일상들을 모두 접고 동네 비디오가게에서 달랑 하나 밖에 없는 <비포 선 셋>을 빌려왔다. '감독과 배우들이 9년만에 다시 만나서 보름 동안 해질녘에만 찍은 영화'라기에 더더욱 기대가 크고 궁금하였다.

셀린느를 '몰래 바라보곤 하던' 청년 제시는 유명작가가 되어서 책 홍보 차 파리의 한 서점에서 인터뷰에 응하고 있었다. 이미 그의 책을 읽었는지라 셀린느 또한 서점 한 귀퉁이에서 만감을 가슴에 품은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둘 다 늙었구나. 다음 작품에 대해 열심히 설명을 하던 제시는 무심코 고개를 돌리다가 셀린느를 발견하였다.

다시 만나게 된 그들은 조금 어색한 가운데 예전에 그랬듯이 일단은 걸었다. 오후의 햇살이 조금은 덥게 느껴지는 거리를 여리게 또각또각 발소리를 내며 두 사람은 내쳐 걸었다. '또각또각, 또각또각…' 들릴 듯 말 듯한 그 은은한 발걸음이 거듭될수록 9년의 거리감은 점점 메워졌고, 할 말이 너무 많았던 그들은 그 옛날처럼 잠시도 쉬지 않고 말들을 쏟아냈다.

"그날을 쉬이 잊어버리고 싶지 않아서 책으로 썼어. 그리고 작가가 되면 너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 이렇게 만나게 되어서 너무 기뻐."
"그렇게 말해주니 고마워."

그러나 재회의 미소 끝에는 9년이라는 세월이 가져다준 다시 되돌릴 수 없는 회한 같은 쓸쓸함이 그들의 주름과 함께 오버랩 되었다.

"결혼 했다면서?"
"응, 4살 된 아이가 있어."

▲ <비포 선셋> 영화 포스터
ⓒ 워너 브러더스
비혼들이야 어쩐지 모르겠지만 결혼한 사람들은 '결혼했고, 아이가 있다' 이 두 마디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 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들이 한눈에 이해가 될 것이다. 결혼생활을 얘기하는 제시의 표정에서 미국사람들은 자식은 아랑곳없이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기만 하는 줄 알았는데, 실지와는 얼마의 간극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미국사람들(서양인들) 또한 '자식 때문에 산다는' 핑계는 뭐랄까 인간적이었다.

6개월 후에 만나자는 약속을 제시는 지켰으나 셀린느는 할머니의 장례식이 마침 그날이라 갈 수 없었다. 9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제시를 잊지는 않았지만. 제시와의 만남은 현실이 될 수 없기에 셀린느는 재미없는 프랑스 남자들과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했다. 현재는 전선기자인 남자친구가 있긴 하나 전쟁기자라는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있으나마나한 친구였고 그녀는 몹시 외로웠다.

한편, 제시는 역시 줄곧 셀린느를 잊은 적이 없다 해도 결혼과 아이는 명백한 현실이었다. 때문에 제시는 더 이상의 진전없이 '너를 이렇게 만나게 되어 너무 좋아'라는 말만 몇 번이고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겨우 할 수 있는 부탁이란 노래 한 곡 들려 달라는 것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셀린느의 집에서 제시는 그녀가 작곡했다는 몇 곡의 노래 중 한 곡을 듣게 되었다. 제시가 9년 전의 사랑을 한 권의 책으로 추억했다면 셀린느는 한 곡의 노래로 추억하였다.

"왈츠 한 곡 들어봐요/그냥 문득 떠오른 노래/왈츠 한 곡 들어봐요/하룻밤 사랑의 노래… 다시 한번 돌아가고 싶어/그날 밤의 연인이 되고 싶어/어리석은 꿈일지라도/하지만 내겐 소중한 당신/그런 사랑 처음이었죠/단 하룻밤의 사랑 나의 제시…."

영화를 떠나 실제로 에단 호크가 책을 내었고 줄리 델피가 영화 마지막에 기타 치며 부르는 왈츠노래를 직접 작곡했다는 것 또한 너무 신선했다. 영화 속 제시와 셀린느도 아름다웠지만 실지의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도 그에 못지않게 내겐 매력적이었다.

영화를 본 후의 여진(餘震)...

아무튼 <비포 선 라이즈>와 <비포 선 셋>은 내겐 너무 멋진 영화였다. 영화를 많이 보며 살지는 않았지만 하여간, 그동안 내가 본 영화 중에서 가장 매력적인 영화였고 느낌이 오래 갈 영화였다.

<비포 선셋>을 연거푸 두 번 본 후, 둘째의 학원시간이라 밖으로 나오니 아파트 마당에 동네 '아짐'들이 벤치에 앉아 얘기들을 하고 있었다. 나는 '동작 그만'을 주문하며 위의 두 영화를 보았느냐고 물어보았다. 나만 이 영화에 혼이 나갔는지 아니면 남들도 다 그랬는지 궁금하였다.

"어제 새벽에 <비포 선 라이즈>를 보고 방금 <비포 선 셋>을 보고 나왔는데 아아, 이 속세가 도무지 접속되질 않아. 영화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흑흑(?)."
"아니, 그 영화가 언젯적 영화인데 이제 와서 난리야. 하여간 뒷북은. 물론 후속편은 못 봤지만. 좀 지루하던데. 나는 하룻밤의 사랑이니 삼일간의 사랑이니 하면서 시각을 다투는 영화는 싫어."
"지루하다니? 그런 섭섭한 말이 어디 있어?"
"내 맘이여."

'아줌마' 넷 중 둘은 보고 둘은 못 본 영화였다. 저녁엔 대전에 사는 친구에게 전화를 하니, "음, 그 영화 보지는 않았지만 옛날에 나왔다는 것은 알지. 여자주인공으로 '화이트'의 줄리델피가 나오잖아. 하여간 진짜 영화가 괜찮은지 너가 황당한 건지 함 봐야겠군" 한다.

자칭 영화광인 구미에 사는 중학교 동창에게 역시 물으니, "응, 알지. 나 옛날에 그 영화 극장에서 봤지.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 다 선남선녀지. <비포 선셋>이 나왔다는 것도 신문에서 보긴 했지. 그래 한 번 보지 뭐, 옛날엔 극장에서 하는 영화 중 안 본 영화가 없었지만 결혼하곤 땡이었다" 한다.

어디선가 읽으니. 남자 주인공 에단 호크가 말하기를, 40대 50대의 제시와 셀린느도 보여주고 싶다고 하였던가. 내 말이 그 말이라. 20대의 제시와 셀린느도 좋았지만 30대의 그들도 보기 좋았다. 일상의 삶이 주는 회한과 쓸쓸함까지도. 어찌 해볼 수 없는 그들의 사랑까지도. 그 이마의 주름살과 건조한 피부까지도.

설사 40대의 그들이 삶에 지쳐 더 주름지고 포악해진다 해도 보고 싶다. 아니, 그들은 더 고양되어 나타날 것이다. 때문에 40대의 제시와 셀린느를 만났을 때 내 자신이 초라하지 않도록 나도 뭔가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살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한편에 이 정도면 중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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