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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출신 영화배우 ‘줄리아 오몬드’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러브 오브 시베리아>를 통해서였다. 그녀에 대한 첫 느낌은 매력이라곤 약에 쓸래도 찾을 수 없다였다. 그러나 그 영화를 다 보고나니, 여성스러운 매력은 없었지만 어떤 강인함 같은 것이 느껴졌는데 그것이 매력이라면 매력이었다.
그러다 ‘리처드 기어’를 찾아 <카멜롯의 전설>을 보게 되었다. 휙휙 칼 솜씨를 자랑하던 떠돌이 기사 ‘란슬롯’과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는 그 상대 ‘기네비아 공주’역으로 ‘줄리아 오몬드’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어머, 공주로 나오니 제법 예쁘기도 하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러브 오브 시베리아>에 비해서 다소 여성적이 매력이 풍긴다는 것이었지 다른 헐리웃 배우들에 비하면 그녀는 여전히 무미건조했다.
그런데 ‘사브리나’ 에서는 뭔가 다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번창한 기업 회장의 운전기사의 딸인 ‘사브리나’는 존재감도 없이 살았는데, 주인마님의 배려로 프랑스로 유학을 다녀온 후 몰라보게 아름다워져서 그 집 바람둥이 둘째아들의 바람의 종착역이 되었다? 그뿐인가 사업밖에 모르던 큰아들 ‘라이너스(해리슨 포드)’의 마음까지 흔들어 놓았다고?
‘그러면 정말 이번에야 말로 제대로 예쁘게 나오겠군.’
해서, 기대를 하고 ‘사브리나’를 보았다. 그러나 웬걸 내 눈에는 하나도 예쁘지 않았다. 2년 동안 파리에서 사진공부를 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기차역 플랫폼에 내려 택시를 잡으려는 그녀를 바람둥이 둘째아들 데이빗은 자기네 집 운전기사의 딸인 줄도 모르고 뿅 가는데 내가 볼 땐 별로였다. 오히려 2년 전 운전기사의 딸로만 존재할 때의 그 수수하던 모습이 더 낳았다.
‘어찌 저 여인이 아름다움의 대명사 ’사브리나‘가 될 수 있었는지 이해가 안가.’
내친김에 <가을의 전설>에 또 그녀가 나왔다기에, 세 남자의 사랑을 받았다니 기대해도 되겠지 생각했다. 과연 <가을의 전설>에서는 기존에 봐왔던 모습 중에서 가장 예뻤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얼굴이 아닌 머릿결에서 나왔다. 보통보다 훨씬 긴, 말 그대로 삼단 같은 머릿단을 휘날렸는데 그 물결치던 웨이브와는 달리 그녀의 극중 팔자가 너무도 기구해서 슬펐다.
이제 더 이상 그녀를 볼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가브리엘 번’ 때문에 빌려본 <센스 오브 스노우>에 아, 또 그녀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이번에는 아름다움을 흉내 낼 생각이 추호도 없는 듯 가발임이 분명한 단발머리를 뒤집어쓰고 세수하고 로션도 안 바른 듯 건조하게 나왔다.
‘아니, 내가 이 여자를 또 봐 줘야 한단 말인가. 그것도 멋쟁이 가브리엘 번의 상대역으로? 하느님 맙소사!’
그녀는 이 영화에서 그린란드 사냥꾼 어머니와 미국인의사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눈(雪)에 관한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과학자 ‘스밀라’로 등장하였다.
그린란드의 얼음벌판 위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스밀라는 아버지에 의해 강제로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살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도회의 삶과 사람들에 적응하지 못하고 늘 그린란드의 눈과 얼음, 카약 등을 그리워하였다.
그러던 중 유일한 친구였던 같은 아파트의 어린 소년 ‘이사야’의 죽음에서, 옥상 가장자리로 걸어간 이사야의 눈 위 발자국의 형태를 보고 자살이 아닌 타살임을 직감한다. 스밀라는 타살의 원인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이사야’의 또 다른 친구였던 수리공(가브리엘 번)으로부터 위기의 순간마다 도움을 받으며 의혹을 풀어갔다.
‘이사야’를 죽게 만든 과학자 집단의 음모로 한겨울 배위에서 타죽을 뻔 하다가 간신히 얼음물을 가르고 빠져나온 그녀를 수리공은 구해주었는데, 그로인해 마음이 열렸는지 그녀는 자신의 내면 한 자락을 그에게 풀었다.
<날 행복하게 하는 것은 수학밖에 없어요. 눈, 얼음, 숫자.... 내게 숫자는 인간사와 다름없어요. 완전하고 양수인 자연수는 어린아이와 같아요. 하지만 인간의 의식은 변하고 아이도 동경심을 갖죠. 동경을 나타내는 수학적 표현이 무언지 알아요? 음수예요.
뭔가를 잃은 허전함을 형식화 한거죠. 아이들은 이 공간들과 돌, 사람들, 숫자 사이에서 분수를 만들어내죠. 하지만 영원히 멈추진 않아요. 인간은 숫자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어요.숫자는 지평선을 향하는 대평원의 풍경화예요. 그린란드처럼. 난 그것 없인 못살아요. 감옥엔 못가요.>
촌스런 단발머리에다 아무런 꾸밈없는 그녀였지만 위의 얘기를 할 때의 줄리아 오몬드는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이는 나만이 아니었다. 그 앞에 앉아서 얘기를 듣던 수리공(가브리엘 번)또한 뿅 가다 못해 그녀가 얘기를 마치자마자 득달같이 한마디 내 던졌다.
“키스해도 될까요?(can I kiss you?)”
그랬다. <센스 오브 스노우>를 보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그녀에 대한 나의 ‘오만과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녀는 헐리웃 연예가 소식에 화려하게 등장하는 그런 배우가 아니었다. 그런 배우들과는 무언가 색깔이 다른데 같이 비교를 하고 그녀를 깎아 내렸다니. 물론 내가 깎아 내린 것은 그녀의 ‘연기’가 아니라 ‘생김’이었지만.
이젠 외모도 받아들이기로(?) 했다. 받아들이다 뿐인가, 그녀는 그냥 믿어도 되는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내가 보아온 그녀의 영화들이 그랬듯이 앞으로도 그녀가 선택하는 영화는 보고 나면 뭔가가 남아도 남을 것 같다. (위 영화들 보다 나중작인 <데브라 윙거를찾아서>와 <에니멀 팜>은 아쉽게도 우리 동네 비디오 가게에는 없었다.)
....... 줄리아 오몬드, 그녀는 지금 어떤 영화를 찍고 있는 중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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