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를 묻는다
이경자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4년 12월
평점 :
절판


소설가 ‘이경자’하면 먼저 <절반의 실패>라는 TV드라마가 떠오른다. 20대 초반 그 드라마를 본 것 같은데 당시에 그 드라마는 무척 파격적이었다. 남녀가 만나서 부부가 되고 가정을 이루고 거기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유형의 갈등을 왜곡 없이 솔직하게 여성의 입장에서 보여 주려 했던 드라마였다.

많은 여성들이 공감했지만 일부 사람들은 극단적이네 어쩌네 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니 그 당시의 현실은 그 드라마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으리라 짐작된다. 다른 것은 다 잊어 버렸는데 유독 지금은 이름난 원로가 된 전원주씨가 허드렛일 역할을 버리고 처음으로 주인공 '마눌' 역할을 하여 열연했던 것이 뇌리에 스친다. 주인공 마눌 역이었지만 존중 받는 마눌이 아니라 남편으로부터 구박을 받다 못해 외도하는 것까지 지켜보다 인간 선언을 하는 역이었다.

그 드라마가 끝나고 책으로 <절반의 실패>를 읽었고, 결혼한 여자의 위상이 그것밖에 안 되는가 절망했다.

최근 이경자씨는 <남자를 묻는다>(랜덤하우스중앙)를 내놓았다. 비슷한 시기에 나는 은행 같은 데서 펼쳐진 월간지에서 그녀가 이혼했다는 얘기를 읽었다. 아주 행복한 중년을 보낸다고 나왔던 과월호들의 내용들과는 달라서 당혹스러웠다.

다른 사람 다 억압 받고 살아도 그녀만큼은 거침없이 당당하게 그러면서도 행복한 가정을 꾸미고 살 줄 알았다. 그녀가 느낀 이혼의 몫이 배신이었고 배신을 넘어 ‘허망’과 ‘환멸’이었다니 충격이었다.

이혼에는 세 가지 절차가 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행정적인 절차로의 이혼, 몸의 이혼, 마음의 이혼이 그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행정적 절차로서의 이혼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몸도 마음도 이혼이 되지 않았다. 아주 사무적이고 냉정한 그와는 달리 자꾸만 그와 대화를 하고 싶었다.

행정적 절차의 이혼은 간단하게 끝났으나 몸의 이혼과 마음의 이혼은 쉬이 끝나지 않았다. ‘버림받은 폐경기 여자’에 지나지 않은 그는 밤마다 불면증에 시달리며 내부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화’를 삭힐 수 없어 괴로워하였다.

이혼한 몸에 분노가 집을 짓기 시작하는데 정작 몸의 주인인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한때, ‘화’는 내 엄마에게만 있는 줄 알았다. 그래서 ‘화’를 삭힐 필요가 없어 보이는 다른 엄마들이 부러웠고 나의 엄마가 불쌍했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 나도 아줌마의 세계로 진입하고 아줌마들의 세상을 보니 그 ‘홧병’이란 것이 나의 엄마만 아닌 이 땅의 중년이상의 여성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분노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딸은 어머니를 통해 여자를 배우고 아버지를 통해 남자를 배우지요....여자에게 미풍양속은 자신을 스스로 ‘비하’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여자와 남자도 생명의 요구로 서로 다르니, 그 차이를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자와 남자를 차별하는 일은 생명에 반하는 일입니다. 생명에 반하는 제도, 교육은 결국 남자 여자 어느 쪽에도 이익이 되지 않습니다. 여자와 남자는 서로의 반쪽 같아서 온전한 하나로 살기 위해서라면 절대로 반신불수를 만드는 제도나 이념은 세우지도 만들지도 말아야 합니다.


얼마 전 유명을 달리한 고 길은정씨에게 그렇게 싫은 사람이었는데 왜 결혼을 하고 행복한 척 했느냐고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어 한다. 또 개그맨 김미화씨가 그동안 사실은 이러했는데 참고 살았다고 하자, "유명 개그맨이나 되는 지위를 가졌는데 왜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냐"고 답답해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참으면서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경자씨도 마찬가지였고 박완서씨도 마찬가지였다. 이름을 걸고 사는 여자들도 그러하거늘 이름 없는 여자들은 오죽 했을까.

박완서씨는 중산층 주부로 취미가 독서이다 보니 자연스레 소설을 쓰게 된 걸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도 소설가가 아니 될 수 없었던 이유는 분단의 아픔이 그에게 준 상처도 상처였지만 이 땅의 여자로 살면서 느꼈던 분노를 삭이지 못했음도 한몫했음을 이 책을 통해서 새로이 알게 되었다.

똑똑한 여자들을 거짓말쟁이로, 바보로 만드는 일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경자씨의 이번 에세이를 읽고서 그에게는 아직도 여자로서 못다한 할 말이 많음을 느꼈다. '갱년기 여성'의 삶에 대한 그의 후속편 얘기를 기대한다. 그는 우리 아줌마들의 대표 선수 중의 한사람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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