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시대 - 출판인 한기호의 열정 인생
한기호 지음 / 교양인 / 2006년 9월
평점 :
절판


남의 일을 해도 목숨 바쳐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선 내 올케언니만 해도 일을 할 때 몸을 사리지 않는다. 누구에게 쫓기는 사람도 아닐진대 100m 달리기하듯 일을 한다. 때문에 올케가 잠시 놀고 있으면 어느새 들었는지 연락들이 온다. '아지매, 요새 논다면서? 우리 집 일 좀 해 주이소. 내 다른 집보다 좀 많이 줄게.'

그러면 난 얼마 더 준다는 말에 혹하지 말고 얼마 덜 주어도 좋으니 쉬엄쉬엄 일할 수 있는데 가서 적당히 분위기 봐 가면서 남들 하는 양만큼만 하라며 귀띔하곤 하였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무아지경이 되는 기라."

난 그런 올케언니를 보면서 시대를 잘못 만나서 그렇지 좋은 세상에 태어났더라면 분명 성공한 직장여성이 되었을 것이라며 아쉬워하곤 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주어진 일에 몰입해서 남이 알아줄 정도로 열심히 하는 성실성을 늘 부러워하였다.


출판인 한기호씨의 <열정시대>(교양인)를 읽고 보니 이분 또한 올케 언니처럼 몸바쳐 일하는 사람이었다. 아니 이분은 올케언니와도 차원이 다른 분이었다. 올케언니는 해지면 집에 들어오는데 이분은 아침 9시에 출근해서 저녁 6시에 퇴근하는 사람이 아니라 24시간 회사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군부독재의 어려운 시절 '창작과 비평사'를 물밑에서 이름없이 이끌어 온 사람이 다름 아닌 그였다. '1983년부터 1998까지 만 15년'을 '창비'의 영업담당자로 일했다니 돌이켜보면 그는 우리 출판계의 황금기였던 시기를 현장에 쭉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좋은 책이라도 홍보에 실패하면 많은 독자를 만나기 어려울진대 그는 영업 담당자답게 글이 아닌 '온몸'으로 전국 구석구석의 서점을 돌면서 판매망을 구축했다. 그는 특유의 친화력과 신실한 행동으로 지방 서점 사장님들의 마음에서 감동을 끌어냈다.

한 예로, 영업차 속초의 어느 서점(동아)에 들렀을 때, 밥 먹으러 간 직원들 대신 사장님이 혼자 계산대를 지키느라 분주한 것이 보였다.

때마침 어느 중년 여성이 20여권의 제목이 적힌 쪽지를 사장님께 보여주었는데 그는 사장님의 손이 달리는 것을 보고 자신이 18권을 후딱 찾아주었다. 이놈 봐라. 감동한 서점사장님은 횟집으로 가 한턱냄은 물론 형님 아우로 평생 동지가 되었다고. 그는 이런 신뢰 관계를 대도시, 중소도시 전국의 모든 서점들을 돌며 발품을 팔아 형성했다.

찍고 또 찍어도 동나던 베스트셀러들...

<소설 동의보감>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 <서른, 잔치는 끝났다.> 열거한 제목들은 다 한때 이름을 떨쳤는데 그러고 보니 모두 출판사가 '창비'였다. <소설 동의보감>은 400만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1권만 해도 100만부, <나는 빠리의…>와 <서른, 잔치는…>은 발행 당해에 각각 30만과 39만부를 팔았다고.

요즘은 책을 내서 1~2만권만 팔아도 성공했다 소리 듣는 것 같은데, 그 당시 사람들은 웬 책을 그렇게 읽어댔는지 문득 부끄러워진다. 밤을 새워 찍고 또 찍던 시절도 있었다니, 지금 출판계 현황을 보자면 그 마음이 얼마나 답답할까 싶었다.

평소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라는 이름으로 된 그의 글들을 보면서 참 옳은 말만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 책에는 그렇게 옳은 말밖에 할 수 없는 그의 지난 삶이 들어있었다.

또, 제목 그대로 책을 향한 열정으로 책에다 청춘을 바친 한 사나이의 인생이 애잔하게 녹아있다. 뿐만 아니라, 지지리도 가난했던 고학시절과 군부에 맞서 데모하다 고문당한 이야기 그리고 무엇보다 영업사원으로 시작해서 15년 동안 브레이크 없이 몸 바친 '창비사랑'이 고스란이 녹아있다.

그의 마눌님은 그런 그를 일러 가장으로서는 모든 면에서 다 0점인데 딱하나 가족들 모두 에게 책을 알게 해준 것은 잘한 일이었다고. 여담이지만 창비의 간부 한 분이 그의 사주를 물어서 용한(?) 분에게 의뢰했던바. 그 용한 분 왈.

"이분 교수이신가요?"
"아니오."
"그러면 글을 쓰는 문인인가요?"
"아니오."

"그러면?"
"출판사 영업부장입니다."
"거참… 글을 많이 쓰고 글로 성공할 사람인데, 그리고 이런 사람 부하로 데리고 있으면 회사가 번창하니 절대 내보내지 마씨요. 단 자기 사업하면 잘 안 되는 사람이여."

사주 본 사람 말대로 그는 창비의 성공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자기사업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를 차리자 궁해졌다. 그래서 원고료 줄 돈이 없어서 할 수 없이 자기가 글을 많이 쓸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글을 많이 쓰고 글로 성공'한다는 말에 부합되기에 아마 자기 사업으로도 머잖아 성공할 것이다.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는 뭐 하는 곳?

그는 1998년에 자신의 광주 민주화 운동 보상금이 나왔을 때 그 돈으로 ‘한국 출판 마케팅 연구소’를 설립했다. 설립의 변을 들어보자면.

도산 안창호 선생은 좋은 책 한 권이 학교 하나를 세우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런 뜻으로 나 혼자 학교를 세우는 것은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렇다면 1만 명이 책 한 권씩을 내면 1만개의 학교가 세워지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연구소는 지금껏 부족하나마 모든 출판인들이 좋은 책(학교)을 세우는 데 유용한 정보를 어떻게든 생산해 내려고 애쓰고 있다. -본분 162쪽

그의 출판연구소는 문을 연 지 햇수로 벌써 10년째이고 그동안 단행본만도 40여권 이상을 펴냈다고 한다. 또, 격주간지로 나온다는 소식지 <기획회의>에서는 한국 출판계의 문제점과 바람직한 방향, 그리고 출판 활성화를 위한 그의 고민들이 녹아있는 것 같은데. 출판계에서 잔뼈가 굵은 그의 주장들이니 만큼 당국의 도서 문화정책에 그의 해법이 많이 반영되길 기대해 본다.

아무튼, '1만 명'이 책 한 권씩 내서 '1만개의 학교'를 세우는 그날까지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를 잘 꾸려 가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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