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팜플렛

 어제 부산문화회관에서는 좀 특별한 공연이 열렸다. 고3 수험생들을 위한 음악회. 전석 초대로 무료 공연이었다. 입시에 심신이 고단한 학생들에게 문화적 시간을 선물하고픈 문화회관의 노력이 보이는 대목이다. 하지만 학교 일정과 맞지 않은 부분이 많았던지, 고3 수험생은 정말 거의 없었다. 출연하시는 분의 지인이거나 그냥 이런 음악회에 관심이 많아 보이는 아주머니들이 주였다. 그래도 객석의 1/3도 채 채우지 못했다. 좋은 공연은 훌륭한 연주자와 좋은 곡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객석을 꽉 채운 관객의 박수와 호응이 공연의 절반을 책임진다. 그런 점에서 어제 공연은 아쉬운 부분이 많은 셈이다.(그렇다 하더라도 무척 애쓰신 연주자분들의 노력은 충분히 인정한다. 감사했다.) 

 이 공연에 나는 독서 동아리 활동을 했던 명진이와 아영이를 데리고 갔다. 다른 아이들도 생각이 났지만, 입시 결과가 천차만별이라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았고, 내 차가 많은 아이들을 태울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연주는 여운국악관현악단에서 홍희철의 지휘로 진행됐다. 수험생이 예상 관객이었으니 선곡은 친숙한 것을 중심으로 이뤄졌고, 또 교육적 효과까지 고려하여 우리 음악이 즐겁다는 걸 알게 하기 위하여 슬기둥의 <신뱃놀이>같은 흥겨운 가락까지 포함됐다. 연주 사이 사이 지휘자의 설명이 곁들여져 이해가 좀 쉬웠고, 우리 국악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이들과 나눈 이야기도 대체로 이와 같았다. 근사한 공연장에서 멋진 공연을 경험해보지 못한 아이들이라 대학에 가면... 이라는 계획도 세울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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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달 전에 고호석 선생님에게서 책 한 권을 선물받았다. 이상경이 쓴 <갈팡질팡하더라도 갈 만큼은 간다>는 제목. 저자는 <사랑으로 매긴 성적표>, <못난 것도 힘이 된다>를 쓴 이상석 선생님의 동생이다. 형과 동생이 함께 좋은 글을 쓴다는 것은 참 부러운 일이다.(정약용, 정약전 형제 이후 대단한 문필가, 지식인 형제를 꼽으라면 단연코 서승, 서준식, 서경식 형제를 꼽겠다.)

 이상경의 저 책에 음악에 관한 이야기가 좀 나온다. 저자가 고등학교 시절, 좀 논다 할 때, 음악 연주회와 시낭송회를 기획하고 공연했다. 지금의 고딩들로서는 상상하기가 쉽지 않은 그림. 만날 학원에 야자에 보충에 시달리는 요즘의 학생들과는 문화적 대화가 쉽지 않은데, 그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여튼 이상경은 주페의 `시인과 농부`를 친구의 집에서 듣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런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풀 수 있으면, 여학생을 꼬득이는 데도 참 좋겠다, 그리 생각했겠지. 그리고 아침에 눈을 뜨고 이 음반을 올려 들을 수 있다면, 찬 겨울 이불 속에서 따뜻한 구들의 온기를 조금 더 잇고 싶은 것처럼, 꿈속에서 만난 그녀와의 황홀한 만남의 여운을 더욱 오래 지속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겠지.

 사실, 나도 음악을 듣는 귀나 미술을 보는 눈이 없다고, 평소에 생각해 왔다. 부끄럽게도 책으로 하는 공부 말고는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다. 물론 경제적 이유도 큰 몫을 차지했겠지. 대학 시절을 포함한 학창 시절을 지나오면서 클래식은 나에게 저 먼 나라의 이야기였다.

 그러다 우연히 김해 문화의 전당을 알게 되고, 오페라 `라트라 비아타`를 시작해서 몇 번 좋은 공연을 보았다. 나는 다른 것은 잘 모르겠고, 소리의 울림에 확 이끌렸다. 내 뱃속을 울리는 것 같은 소리의 파동에 나는 가끔 몸을 떨기도 했다. 그리고 까닭 모를 일로 시간의 충만함을 느끼는 게 아닌가. 그것으로 내게 꽤 매력있는 것으로 인지되기 시작했다. 그 뒤로 - 육아와 생활의 번다함이 주 이유지만 - 공연 일정은 확인하지만 실제 티켓팅까지는 하지 못하는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이 사실을 인지한 순간, 나는 올 연말 꽤 괜찮은 공연을 꼭 보겠다, 마음에 새긴다.)

 서경식 선생님이 쓰신 <나의 서양 음악 순례기>를 읽고 있다. 그 가운데 무척 공감한 부분이 있어 여기 남긴다. 

음악이란 정말 무서운 것이다. 한없는 청순과 고귀함, 그리고 바닥 모를 질투와 욕망을 동시에 지닌 존재, 이쪽의 이해를 거부하면서 끌어당기고는 다시 뿌리치고 농락해 마지않는 존재, ``어디가 그렇게 좋다는 거지?``하고 누가 물어도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는 묘한 존재, 한마디로 불가해한 여성과 같은 존재, 그것이 음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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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여행자 몽도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진형준 옮김 / 조화로운삶(위즈덤하우스) / 2006년 7월
평점 :
품절


우연한 발견, 르 클레지오

 르 클레지오. 프랑스의 유명 소설가. 2008년 노벨 문학상 수상.

 한 달 전만 하더라도 나는 르 클레지오의 존재 자체를 몰랐다. 부산에서 큰 인문학 행사를 하고, 기조 발제자로 온다는 내용의 공문을 내가 접수했으면서도 그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내 관심 밖의 일이었으니 당연한 일.

 그런데 우연한 일로 그와 나가 닿는 일이 생겼다. 우리 학교 한 선생님의 `몽도`에 대한 지극한 사랑 때문이었다. 나는 `모모`는 알고 있었는데, `모모`보다 `몽도`라니. 호기심이 동했다. 그리고 바로 구입했다. 그의 소설집 `어린 여행자 몽도`

 지금 그 소설집은 온통 띠지로 붙어 있다. 소설, 이렇게 읽기는 처음이다. 내가 띠지를 붙인 곳은 감각적 표현이 넘쳐나거나, 도저한 자연의 세계에 대한 묘사가 있는 부분이 주다. 가끔은 지극한 동심이 표현된 곳도 있다. 읽으면서, `우와 어떻게 이렇게 표현할 수 있지?` 놀란 부분이 그만큼 많았다는 거다. 언어의 마술적 위력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 과감히 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린 여행자 몽도>의 매력

 누가 그랬다. 좋은 산문은 시가 된 산문이라고. 클레지오의 이 소설은 충분히 시적이다. 몽롱한 꿈같으면서도 서사도 탄탄하다. 각각의 단편을 읽고 나면, 이야기의 결 사이에 스며있는 몽환감에 한 편의 꿈을 꾼 것만 같다.

 그런데, 왜 그의 이 몽환적인 소설이 매력적일까? 앞에서 언급한 표현의 탁월함 말고.

 그것은 이 소설의 배경이 인간의 저 근원에 자리잡은 공백한 공간, 이상적 공간, 내밀히 꿈꾸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치열한 경쟁과 우승열패만이 존재하는 세상, 살기가 얼마나 피곤한 일인가. 눈 뜨고 출근하면 생각하거나 꿈꿀일 없이 일에 휘둘리다 늦은 밤 퇴근하고 쓰러져 자는 삶. 혹은 그것도 얻지 못해 이리 저리 방황하는 삶. 그럼에도 이들은 역시나 인간. 근원적으로 사람답게 살고 싶은 꿈을 갖고 있는 사람. 세상에 적응하며 파도타기 하듯 곡예를 부리지만, 마음 저 바닥에는 사랑을 꿈꾸고, 더불어 행복할 수 있는 나날들을 그리고들 있지 않겠나. 다만, 현실 논리에 갇히고 묻혀 적극적으로 추구할 수 없을 뿐!

 그런데 이 소설은 그런 공간을 충분히 드러내 보이고, 다시금 우리의 저 깊숙한 내면 세계를 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으니 흡인력이 있어 보인다.

 소설집 <어린 여행자 몽도>는 8편의 중단편을 모아 놓았다.
 어린 여행자 몽도, 륄라비, 신이 사는 산, 물레, 바다를 본 적이 없는 소년, 아자랑, 하늘을 만나는 소녀, 목동들. 이 가운데 몇 작품만 언급을 하고 이 글을 마쳐야겠다.

`어린 여행자 몽도`

 `어린 여행자 몽도`에서 몽도는 10살 남짓의 소년, 고아다. 바다를 끼고 있는 어느 마을에서 살고 있으며 집시나 처지가 비슷한 어른들과 친구로 지낸다. 시멘트로 된 방파제에 혼자 앉아 바다, 방파제와 친구가 되어 지낸다. 특히, 움직이지도 못 하고 한 군데 처박혀 있어야 하는 방파제가 무척 심심해할 것 같아 쉼없이 배와 바다와 고래와 여행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준다. 꼬마는 방파제도 그의 이야기를 좋아할 것이라 믿는다. 방파제가 얌전히 있는 것은 이야기가 좋아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몽도는 해변에 앉아 일출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클레지오는 몽도가 바라보는 일출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의유당의 `동명일기`의 일출 장면 묘사와 비교가 돼서 기록으로 남긴다.

네 시 삼십 분 경이면 하늘은 맑은 잿빛으로 물들었고, 바다 위로는 구름만 몇 점 떠 있을 뿐이었다. 해는 금방 떠오르지 않았지만, 밝아지는 불꽃 같은 것이 서서히 솟구칠 때쯤이면 몽도는 수평선 너머에 벌써 해가 와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먼저 창백한 햇무리가 하늘 위로 펼쳐지면 수평선을 떨리게 만드는 야릇한 진동을 마음 깊이 느낄 수가 있었다. 그것은 마치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 공을 들이는 것과 같았다. 이윽고 둥근 원판이 수면 위로 나타나 한 다발의 빛을 눈 속으로 곧장 던져 보내면 바다와 대지가 같은 빛깔로 물드는 듯했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최초의 색과 최초의 그림자들이 형성되었다. 그렇지만 거리의 가로등들은 창백하고 피곤한 듯한 빛으로 여전히 불을 밝히고 있었다.  - 32쪽

 

  몽도가 일출 장면을 좋아하는 것처럼, 클레지오 역시 빛에 대한 관심이 많아 보인다. 이 소설집 곳곳에 빛의 여러 가지 면에 대해 감각적으로 표현한 부분이 있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몽도`에서도 몽도가 우연히 베트남 여인이 사는 집을 발견하게 되고, 집을 감싸고 있는 햇빛에 반해서 `황금 햇살의 집`이라고 이름 붙인다. 그리고 그 여인과 가깝게 지내게 되고, 과자를 얻어 먹으며 이런 대화도 나눈다. 

  어느날, 몽도는 해변에서 한 노인을 만난다. 글을 모르는 몽도는 그 노인에게서 글을 배우게 되는데, 노인의 알파벳 설명이 무척 특이하다. 가령, A는 뒤쪽으로 꼬리를 접고 있는 커다란 파리처럼 생긴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O는 까만 하늘의 보름달 이야기를 하며, N은 사람들이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이런 설명 끝에 몽도(MONDO)는 자기의 이름을 풀이하게 되는데, `산이 있고, 달이 있고, 초승달에 인사하는 사람이 있고, 그리고 또 달이 있네요.`

 몽도는 혼자 해변에 앉아서 자신이 만난 사람들을 떠올리며 조용히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한다. 지탕, 코사크, 이다, 조인에 대해 생각하고 그들을 떠올리며 나직이 이야기를 하는데, 그들은 몽도가 보내는 생각과 이야기를 파동으로 감지한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고개를 갸웃할 뿐이다. 그래도 몽도는 만족한다. 그들이 파동으로 감지한다는 것은 몽도의 동심에 대해 공감하고 이해하며 동경한다는 의미로 읽힌다.

 이랬던 몽도가 공무원같아 보이는 사람에게 잡혀간다. 뭐 보호시설 같은 곳에 수용이 된다. 그리고 곧 몽도는 거기서 탈출해서 어디론가 사라지고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그러자 막 여름이 시작된 도시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추위를 느낀다. 그 전처럼 환하거나 따뜻한 밝은 빛의 이미지가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더 많은 것이 변했다. 

모든 것이 이미 전 같지 않았다. 얼마가 지난 어느 날, 지탕이 길거리에서 마술 쇼를 펼치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코사크는 이제 코사크가 아닌, 한 명의 주정뱅이에 불과했다. (중략) 일요화가는 하늘을 그리는 데 실패하고는 바다와 죽은 자연만을 그려댔으며, 공원의 작은 소년은 빨간색 세발자전거를 도둑맞았다. - 85쪽

   몽도의 사라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다들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소리와 어둠 한 가운데, 목동들

 중편 `목동들`을 읽고는 사막에 가보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를 느꼈다. 삶과 죽음이 맞닿아 있는 공간. 그래서 더욱 생의 기운이 넘쳐나는 곳. 뜨거운 태양빛이 부서지는 소리와 바람에 몸을 뒤척이는 모래 알갱이들의 울림. 새로운 변화들을 감시하는 동물들의 예민한 시선들의 부딪힘. 침묵의 분주함이 넘쳐나는 공간으로서의 사막이 이 소설의 배경이다.

 클레지오는 사막의 소리를 아래와 같이 표현하고 있다.      

소리가 한꺼번에 울렸다. 소리는 밤에 더욱 강하고 더욱 뚜렷했다. 대지는 추위에 떨며 소리를 냈고, 흥얼거리는 거대한 사막, 이야기를 건네는 거대한 포석이 되었다. 곤충과 전갈, 다족류 벌레와 사막의 뱀도 이빨을 갈았다. 때때로 바다의 소리, 대양의 물결이 무섭게 으르렁대며 해변의 모래까지 왔다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따금 바람이 약간의 물보라와 함께 바다의 목소리를 이곳까지 싣고 왔다. (중략) 온 땅과 하늘이 소리를 질렀다. - 281~ 282쪽

  어둠 외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곳에서의 울림이란, 그 벅참이란 과연 어느 정도일까? 상상만으로도 가닿을 수나 있을까? 저 마음 깊숙이서 무한으로 울려나는 공명, 그 소리가 존재하는 곳이 사막이 아닐까? 저 소리, 덮여지고 무뎌진 생의 태초에 지녔을 저 소리, 그 소리를 듣는다면, 그 순간이 카이로스의 시간이지 않을까?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저 소리에 취했다. 소설을 읽는 내내 충만한 시간, 카이로스를 경험했다. 주인공 소년 역시 사막에서 목동과 함께 한 시간이 카이로스의 시간이었을 것은 분명하다.

 또 좋았던 것은 `경험`에 관한 거였다. 주인공 소년은 도시를 떠나 사막 한 가운데서 목동들과 어울려 삶을 산다. 거기서 같이 사냥하고 추위에 떨며 두려움을 이겨낸다. 이것은 위험이 따르며 이런 삶은 소비되지 않는다. 주인공 내면 세계에 형언할 수 없는 변화를 불러오고 잔상으로 남게 마련이다. 이것이 체험과 구별되는 경험이다.

 <오늘의 교육> 11, 12월 호에서 엄기호는 `경험의 죽음, 교육의 죽음`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그에 의하면 경험과 체험은 아주 다른 차원이다. 경험은 무정형성, 예측 불가능, 우연성, 만남, 시간의 정지와 재정의, 위험으로 정리될 수 있다면, 체험은 소비와 스케줄로 이야기된다. 결국, 그는 현대 교육의 문제를 진단하면서 교육이 죽은 이유를 경험이 죽은 데서 찾고, 그 경험을 복원하고, 경험을 경험답게 할 수 있는 어른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의미있는 경험을 `목동들`의 등장 인물들은 해내고 있다. 그러면서 이 등장 인물의 내면에는 잔잔한 파동같은 것이 잔상으로 남았을 것이다. 

  희망의 노래, 몽도

 결국, 클레지오의 소설집 <어린 여행자 몽도>가 매력적인 것은 어쩌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 안타까워 하는 것, 그래서 언젠가는 되찾고 싶은 것들을 아름다운 문체로 그려보이기 때문이다. 경험의 한 복판에서 온갖 위험에 두려워하지 않으며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어린 등장 인물을 통해, 그들의 순수함과 근원적 아름다움을 깨달 수 있으니, 읽는 내내 행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난 한 주는 `순수한 언어로 표현된 밝은 희망의 노래`를 흥얼거릴 수 있어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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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 2011-12-03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른 읽고 싶어요~ 기대돼요 ^^

2011-12-05 14: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05 15: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혼인 서약

강이 되어 만나리.
언젠가부터 흐를수록 깊어지고 넓어지는 강물처럼
귀한 사람 만나고팠습니다.
이곳 저곳을 에돌고 에돌아 모든 것을 품고
조용히 흘러가는 강물처럼,
귀한 인연 만나 풍성한 삶을 살길 바랐습니다.
서른 두해, 서른 해를 돌았습니다.
그 끝에 세상의 절반인 생의 반려자를 만났습니다.
아직 익지 않은 생이라 많이 어설프고 서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기 계신 여러 하객과 친지분들게 정중히 올립니다.

신랑 김은규는 이현주 양을 신부로 맞아
따뜻하게 보듬어 안고 존중하면서 살겠습니다.
신부 이현주는 김은규 군을 신랑으로 맞아
따로 또 같이 서로의 삶을 존중하며
매순간을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2008년 - 이것도 손가락을 꼽아봐야 했습니다. - 11월, 저는 지금의 아내를 맞아 위의 혼인 서약을 하며 한 가정을 꾸렸습니다. 돌아보면, 저때는 서약의 내용대로 살겠다, 그 각오 바위처럼 단단했던 것 같은데, 삶은 또 그와는 달리 흘러온 듯합니다. 그러니 때때로 부대끼고 엎어지며 고단했지요. 그래도 삶은 살아지는 법! 용케도 이만큼 흘러왔습니다. 

                                                                               

 모시는 글

                                                                                 내가 삶에서 발견한 최대 모순은 
                                                                                    상처 입을 각오로 사랑을 하면 
                                                                       상처는 없고 사랑만 깊어진다는 것이다
                                                                                                              -마더테레사

 강이 되어 만나리, 바랐습니다. 세상 곳곳을 에돌고 에돌아 귀한 사람 만나고 싶었습니다. 때로는 덜커덕거려 급해지기도 할 것이지만, 흐를수록 깊어지고 넓어지는 강물처럼 온전히 품고 흘러가겠습니다. 저희 둘의 시작을 지켜봐주시고 축하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때 : 2008년 11월 22일 (토) 낮 12시  

                       곳 : 민주공원 야외극장
                                                                                             김은규❤이현주 드림

 위의 글은 내가 초안을 잡고 아내가 결재를 한 우리의 청첩장입니다.  별스럽게 준비했지요. 특히 11월 말, 야외극장에서라니, 대체 이 사람들이 어떤 그림을 그렸을까요? 

 
신부 입장

 저런 그림이었습니다. 전통 혼례였죠. 그런데 우리의 혼례는 좀 달랐습니다. 백기완 선생님께서 만드신 민중 혼례의 형태에 가까웠지요. 거기다 노래와 시 낭송, 악기 연주 등 다양한 예술 활동 등이 포함되어서 시간이 두 시간 가까이 걸렸습니다. 하객들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는 소식은, 신혼여행 다녀와서 들었지요.  

 

 위의 사진은 고천문을 올리는 모습입니다. 내가 존경(?) 사랑(!!)하는 두 선생님께서 해주셨죠. 저 두분 부부의 연이신데, 참 닮고 싶은 삶입니다. 여튼 저희 혼례에 이렇게 마음과 몸을 내주신 분들이시죠. 조만간 식사 한끼 해야겠습니다. 


길눈이 말씀
  

 주례 선생님의 말씀입니다. 또 제가 존경하는 노영민 선생님이 맡아 해주셨죠. 늘 고맙고 감사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신부 이현주 선생과 신랑 김은규 선생의 결혼을 온 우주의 기운을 모아 축하드립니다.  

신부와 신랑의 양가 부모님께 감사의 인사 먼저 올립니다.

부족한 저가 앞 자리에 섰습니다.

훌륭하게 신부와 신랑 키우신다고 애 많이 쓰셨습니다.

  추운 날 별나게 야외에서 전통 혼례 치른다 하는데 안 와 볼 수도 없고, 와서 추위에 벌벌 떨고 계시는 화객 여러분께도 감사의 인사 올립니다.

아마 결혼식 끝나고 나면 떡도 있고 술도 있을 겁니다. 즐겁고 기쁘게 많이 자시고 몸 녹이면서 축하 많이 해주시기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결혼 축하하러 먼 길 달려온 학생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짜장면, 피자 먹고 싶으면 두 분 선생님께 언제라도 사달라고 하십시오.


저보고 신부와 신랑에게 덕담을 해달라는 부탁인데

저가 별 덕 있는 인간이 아니라 자신이 없습니다.

예전 우리 멋있고 늠름한 신랑과 강 따라 물 따라 같이 길 위에서 보냈던 얘기, 덕담이 될지 다부 신랑 흉보는 얘기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할까 합니다.

우리 김은규 선생과는 <강강걸을래> 라고, 강을 따라 일주일씩 열흘씩 방학 때마다 걷는 모임에서 만났습니다. 금강 열흘을 걸었고 올 여름에는 낙동강 여드레 걸었습니다. 영산강도 닷세 함께 걸었습니다.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고 무릎이 아파 쩔뚝거리면서도 끝까지 걸었습니다. 체력이 대단하고 신심이 굉장합니다. 김은규 선생 몸집은 작아보여도 정말 차돌입니다. 버스 정류장 하나 길도 안 걷고 타고 가려고 버스, 택시 같은 기계에 의지하는 허약한 사나이들이 많은 시대에 강건한 체력은 살아가는 데 엄청난 밑천이지요. 운전 면허증 없고 그 흔한 컴퓨터 자격증 하나 없다는 말도 예사로 안 들립니다.  김은규 선생은 참으로 희귀종이고 이 시대의 특별한 존재, 별종입니다. 그만큼 귀하고 가치 높은 존재라는 말이지요. 절대로 가족 굶길 사람, 아내 돈 빌리러 길에 내세울 사람, 골골 아파서 장인 장모님 걱정  끼칠 사람 아닙니다. “밥만 먹고 사나?” 요즈음 아내들의 볼멘소리 있다지요? 신랑은 절대 그런 말 안 나오도록 할 겁니다. 설거지든, 빨래든 아니면 밤 잠자리든 하여튼 몸 보시만은 확실히 할 거니 신부는 기대해도 될 겁니다.

체력 좋지요, 마음 따뜻하지요, 인물 좋고, 글 잘 쓰고 또 목소리는 얼마나 좋은지요, 그 좋은 목소리로 글 읽을 때면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소리가 글 읽는 소리라는 걸 실감합니다.

한마디로 신랑은 신언서판 100점의 참사람, 정말 진국인 사나이입니다.

사실 저는 신랑이 탐이 나서 중매하려고 몇 번 애를 썼습니다.

“김은규 선생, 우리 학교에 좋은 처녀 선생 있던데” 소리 몇 번 했습니다.

껏떡도 안 합디다.

언젠가는 제 4촌 매제를 삼을려고도 했습니다. 아주 참한 제 4촌 여동생이 있거든요.

또 물 먹었습니다. 이렇게 아름답고 현숙한 신부를 숨겨놓은 줄도 모르고 제가 김은규 선생 꼬실려고 많이 껄덕거렸습니다.

신부님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대단한 사람 만났습니다.


신부님을 사실 저는 잘 모릅니다. 열 번 정도는 만난 것 같은데, 저가 워낙 요즘에 여자에게 목석이고, 무엇보다 신부가 워낙 빛이 나 눈이 부셔 감히 마주 보지 못해 서 더 그런 것 같습니다. 두세 번째 만났을 때는 얼굴도 몰라봤어요. 그러나 자주 만나봐야 그 사람을 꼭 아는 것 아니잖습니까? 김은규 선생 같은 단단한 사람을 고르는 것 보면 이현주 선생님을 다 알 것 같아요. 신부가 얼마나 높은 안목, 고결한 눈높이를 갖고 있는지 말입니다. 자신이 정말 멋있고 속이 꽉 찬 사람이 아니고는 상대방의 그런 것 알아내지 못하거든요. 그래서겠지요. 이현주 선생님은 교사가 되면서 시중에서 그렇게 말 많고 욕 많이 먹는 조직 전교조에 당당하게 가입해서 열심히 참교육 활동하고 있고, 입시 교육에 찌든 현실, 학교의 문제점을 느끼면서 대안 교육 열심히 공부하고 고민하고, 자기를 가꾸는데 도움이 된다 싶으면 시간 돈 아끼지 않고 먼 길 마다않고 배우려 다니는 열정 말입니다. 참하고 예쁘다, 곱다 그런 말을 늙은 저가 자꾸 하면 검은 속셈 다 들통 날 터이니 더 이상 말 안 하겠습니다.


슬기로운 결혼 생활의 덕목들 많고도 많겠지요. 준비 안 된 신랑으로서, 아버지로서 온갖 시행착오를 겪으며 근근이 오늘에 이른 저로서는 한 점 부끄럼 없이 신랑 신부에게 드릴 수 있는 말이 없습니다. 제대로 한 게 없는 결혼 생활, 부끄럼 가득한 결혼 생활이었습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지 않느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아이 낳아 키우고 살아왔지 않나, 뭔가 하나는 안 있겠나, 신랑 신부에게 도움이 되도록 빨리 털어놓으시오 하는 뜻으로 제게 덕담을 부탁했겠지요.

저는 아내에게 고개 많이 숙이고, 손 많이 비비고 그랬습니다. 눈물 글썽글썽 울기도 했고요. 아내에게 저지른 제 잘못은 알았다는 건대요, 그래서일까요, 우리 집사람이 아직 절 밖으로 안 내쫒고 지금까지 함께 살아주는 것은 말입니다. 요즈음 반성, 자기성찰 이런 말 유행하던데요,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내와 남편으로서의 끊임없는 성찰, 좋은 아버지 어머니 되기 위한 공부, 꼭 내 자식만의 어머니 아버지가 아니라 세상의 훌륭한 어머니 아버지가 되는 자기성찰과 공부 말입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두 분이 피붙이 부모님의 아들과 딸로서 잘 성장해 살아온 것을 넘어, 이제는 처가 장인 장모님의 아들, 시갓댁의 훌륭한 딸로서, 더 나아가 세상의 아들과 딸로서, 부모로서 잘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살다보면 웃음이 늘 가득하고 행복하게 사랑을 나누는 때만이 있지는 않을 겁니다. 때로는 싸우고 그 뒤끝을 잘 풀지 못해 며칠 서로를 미워할 때도 있을 겁니다. 그럴 때 필요한 일이 바로 고개 숙여 잘못을 빌고 눈물을 흘리는 일입니다. 고개 숙여 잘못을 빌고 용서를 구하는 용기, 눈물을 흘리고 깊은  자기 성찰을 하는 진심, 끊임없이 몸과 마음을 닦는 공부, 그게 바로 행복한 결혼 생활의 든든한 받침돌이 될 것을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결혼은 힘이 셉니다. 결혼은 단순히 남자 하나에 여자 하나를 태기 하는 일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인 아내로서의 온 생명과 또 세상의 전부인 남편으로서의 온 생명이 만나 더 훌륭한 세상, 더 온전한 생명을 이루는 일입니다. 결혼은 참으로 힘이 셉니다. 사랑으로 이루는 결혼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온 우주를 들어 움직일 만큼의 힘입니다. 이현주와 김은규의 결혼으로 세상은 좀 더 살만해졌다, 더 평화로워지고 정의로워졌다, 자비로워졌다, 그런 말 나오고 그런 일 벌어지도록 두 분 결혼의 위대한 힘 제대로 쓰면서 살아라, 두 분에게만이 아니라 이 말을 하고 있는 저 자신에게 다짐하면서 이만 결혼 축하의 말씀 줄입니다.   

 민주공원 야외 무대에서의 혼례식을 마치고  저희는 라오스로 신혼 여행을 떠났습니다. 비행기 티켓만 예약하고 나머지는 닿으면 닿는대로 움직이겠다는 용기를 부렸지요. 비옌티엔, 방비엥, 루앙프라방. 6박 7일의 여행이 참 고요했고 넉넉했습니다. 


라오스 탁밧
  

 신혼 여행 사진이 무척 많지만, 저는 루앙프라방의 탁밧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새벽 메콩강의 물안개와 붉은 장삼. 숙연하죠. 잘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절로 일었습니다. 


슬뫼 낳아 기르다
  

 혼인 6개월 정도가 지나고 슬뫼를 품었습니다. 10달. 아내로서는 참 힘겹고 고통스런 시간이었지요. 마음을 많이 졸였습니다. 남편이 내편이 되어 주지 않았으니 그 고통 더했겠지요. 그래도 이렇게 튼실한 슬뫼가 태어났습니다.   

 아기의 이름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의 다양한 반응이 있었지요.  제가 쓴 글은 아니지만, 저는 이런 마음입니다.  

슬뫼 
 
                      이청산
 

  우리가 너를 부를 때
  네가 웃음으로 대답하는
  이름 중 한 글자 `슬`은
  책 속에 있는 글들이 아니라
  흐르는 강에게서 배우고
  거침없이 부는 바람에게서 느끼고
  아무런 바람없이 피는 들꽃에서 배우고
  어둠 속에서 더욱 빛나는 별들에게서 배우며
  너와 함께하는 뭇생명들과
  같은 가치를 가지고 어울려 사는
  삶의 지혜를 말하는 거란다.

  내가 너를 부를 때
  네가 웃음으로 대답하는
  이름 중 한 글자 `뫼`는
  우리가 땀흘려 오르는 산만이 아니라  

  오름으로 내림을 이야기하는
  슬픔 그 이상으로 기쁨을 알게 하고
  기쁨을 넘어선 슬픔을 넘어선
  천년의 호흡
  긴 바위의 호흡을 알게 하는
  긴 호흡의 끝자리에 자리하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끝없이 사랑하고 사랑하여
  함께 하여야 할 사람을 말하는 거란다.
  우리가 너를 부를 때
  네가 대답하는 웃음
  우리가 산을 오를 때
  우리가 산에 보내는 웃음
  우리가 산을 내려올 때
  산이 우리에게 보내는 웃음
  그 웃음은
  생명을 사랑하는 게 슬기로움이라는
  산을 닮아가는
  천년의 웃음

 이런 슬뫼를 아내는 살뜰이 잘 길렀습니다. 저야... 


슬뫼 돌
 

 1년이 지나 이렇게 첫 생일을 보냈네요. 이모 가게에서 어르신들만 모시고 소박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녀석이 얼른 자라서 아빠랑 제주도 하이킹 가는 날, 곧 오겠죠? 


지리산 여행
 

 혼인 3주년 기념으로 지리산으로 여행을 갔다 왔습니다. 지리산 흙집 세상이라는 곳에서 묵고, 쌍계사 등을 둘러봤지요. 녀석, 그새 이렇게 자랐습니다. 


곡성 - 기차마을
 

지리산을 거쳐 곡성까지 갔어요. 슬뫼가 기차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이것도 부모 마음 아닐까요?) 


남포동
 

 11월 22일. 딱 그날. 우리는 기념하기 위하여 남포동으로 갔습니다. 맛있는 저녁도 먹고, 구경도 했지요. 

 3년,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습니다. 모시는 글에서 말했듯이 덜커덕 거린 시간도 많았지요. 그래도 깊고 넓어질 것이라는 희망, 잊지 않고 있습니다. 우린 부부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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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길산 - 전12권 황석영 대하소설 1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4년 4월
평점 :
품절



나와 황석영

  황석영의 <장길산> - 이번에 내가 읽은 건, 2003년 6월에 초판 26쇄 발행된 것이다. 이것은 구판이 되어 버렸다. 다행히 학교 도서실에 있어 빌려볼 수 있었다. - 을 다 읽었다. 3주라는 짧지 않은 시일이 걸렸다. 다른 책을 조금 집적이기도 했지만, 등장하는 인물이 무척 많고 배경이나 사건이 다종다기해서 흐름을 짚지 않으면 내용을 놓칠 것 같았기 때문에 조금 신경써서 읽어야 했다.

 내가 황석영을 접한 것은 대학에 들고서였다. 고등학교까지는 시키는 공부만 했으니 우리 문학에 관해서는 청맹과니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고도 국어교육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는 것은 입시교육의 폐해를 여실히 보여주는 거겠다. 여튼 나는 대학에 들고서 황석영을 알았고, 틈틈이 그의 소설을 읽었다. 모랫말 아이들, 무기의 그늘, 오래된 정원, 장산곶매, 삼포가는 길... 어느 새 그의 신작 소설이 발표될 때를 기다려 사서 보려고 노력했다. 민중의 삶에 대한 자각이 전혀 없었던 나에게는 그의 소설이 충격을 넘어 설렘이기까지 했던 기억이 난다. 특히 오래된 정원의 한윤희의 삶과 죽음을 통해 본 유토피아 건설의 좌절은 시대의 아픔이자 인간 삶의 아픔이기도 했다. 하지만 오현우와의 사랑 이야기는 긴장과 함께 설레기까지 했으니 이것이 황석영 소설의 힘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이렇게 황석영의 소설을 찾아가며 읽던 내가 어느새 시들해져버렸다. 아마도 <심청>이 마지막이었을 거다. 그 이후로 <바리데기>니 <강남몽>이 나와도 나는 시큰둥했다. 그 전까지 내가 읽었던 황석영의 힘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내게는 황석영만한 소설가를 찾기가 쉽지 않고 - 조정래나 조세희 선생님같은 분을 절대 폄훼하는 것은 아니다. 황석영이 그전에 보여준 그만의 소설을 쓸 사람이 없다는 의미에 가깝다.- 황석영에 대한 기대 또한 없지 않아서 그의 역작 <장길산>을 펼친 거였다. 물론 국어교사로서 가졌던 부끄러움도 크게 작용했다.

<장길산> VS 장길산

 <장길산>의 주인공 장길산은 조선 숙종 임금 당시의 실존 인물이었다. 아래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극적 장길산은 날래고 사납기가 견줄 데가 없다. 여러 도로 왕래하여 그 무리들이 번성한데, 벌써 10년이 지났으나, 아직 잡지 못하고 있다. 지난번 양덕에서 군사를 징발하여 체포하려고 포위하였지만 끝내 잡지 못하였으니, 역시 그 음흉함을 알 만하다. 지금 이영창의 초사를 관찰하니, 더욱 통탄스럽다. 여러 도에 은밀히 신칙하여 있는 곳을 상세하게 정탐하게 하고, 별도로 군사를 징발해서 체포하여 뒷날의 근심을 없애는 것도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 조선왕조실록 숙종 31권, 1697년 기사

 

사료에 의하면 장길산은 민심을 흉흉케한 도적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을 황석영은 소설가적 상상력으로 변용 재창조해낸다. 탐관오리들의 탐욕과 학정으로 인해 고통받는 민초들의 삶, 동인 서인 노론 소론 등으로 국론이 분열되어 민심을 살피지 않았던 양반가의 행태, 송방 상인들을 중심으로 한 초보적 자본 시장의 활성화 - 사실 이 부분은 역사적 맥락과 닿지 않는 부분이 있는 듯하다. 소위 보부상과 시장의 활성화는 영정조 이후에 일어난 일이니 시대적 순서와 맞지 않다 - 등을 배경삼아 의적, 혹은 활빈도 장길산을 그려낸 것이다. 즉, 황석영이 실존 인물 장길산을 모티프로 창작한 역사 소설인 것이다. 결국 여기서 말하는 장길산은 역사적 실존 인물의 그가 아니라 소설 <장길산>의 그인 것이다.

 
<장길산>과 용화세상

 장길산은 태생부터가 반체제적일 수밖에 없었다. 길산의 생모생부는 노비였다. 아버지는 탈출하여 숨어지내는 처지가 되었고, 길산을 잉태한 어미 역시 사노로서 도망나왔다. 광대패에 속해 있던 장충의 도움으로 길산의 어미는 무사히 추노들을 따돌렸지만 추위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길산을 낳고서 눈을 감는다. 결국 장충이 길산을 데려다 키우게 된다. 길산은 자라서 광대로서의 삶을 살게 되지만 본성이 원래 의기가 충만해서 부정과 불의를 쉽게 보아 넘기지 못한다. 또한 자신의 신분적 한계가 갖는 의미를 깨달은 후로는 보다 큰 그림을 그리게 되고 녹림당을 꾸린다. 그러면서 본격적으로 활빈(活貧)의 길로 들어서고 한반도 북부를 중심으로 근거지를 확충해간다. 그리고 장길산을 비롯한 활빈당은 활빈을 넘어 세상을 바꿀 꿈을 꾼다. 그렇다면 그들이 꿈꾼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장길산과 함께 활빈 활동을 한 여환 스님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확인할 수 있겠다. 

   
 

장차 밝아올 미륵의 세계에서는 온갖 악한 것과 욕심 상극이 모두 사라지고 서로 사이좋게 같이 사는 화평한 나라를 이룰 것입니다. 재물은 나누어질 것이며 땀흘리고 수고하는 보람도 똑같아질 것입니다. 땅은 기름지고 풍족하며 병고와 가난이 사라져서 계두성에서는 누구나 문물의 혜택을 고루 받게 됩니다 - 중략 - 사람의 마음도 어긋남이 없이 평등하여 만나면 즐거워지고 착하고 고운 말을 주고받을 것이며, 뜻이 틀리거나 어긋나는 말이 없어서 온 세상이 성인의 도를 이룹니다. 

                                                                                    -<장길산> 9권, 400쪽

 
   
 

 이쯤되면 지금 우리 사는 사회가 떠오르지 않을 수가 없다. 마침 이 권을 읽을 때가 한미 FTA 날치기를 한 날이었으니, 장길산을 기다려야만 하는 것일까. 어쨌든 장길산 일행이 원한 세상은 그야말로 `사람사는 세상`의 모습에 가깝다 하겠다.
 그렇다면 정말 그들은 이 세상을 지금 당장 이룰 수 있다고 믿었을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묘옥이 원향에게 오랜 세월이 지나야 새로운 세상이 열릴 텐데, 뭣하러 애를 쓰냐고 묻는데, 원향은 이렇게 말한다. 

   
  가뭄이 들어 천리가 적지(赤地)가 되고 나서 소나기는 어째서 오지요? 단비가 내리지 않으면 산천초목이 모두 죽어요.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비가 되어 떨어지는 것이지요. 그러면 땅은 다시 회생하고, 또 가물어 팍팍하고 또 비가 오고…… - <장길산> 9권, 363쪽
 
   

 

   
  도대체 진인(眞人)이란 무엇입니까? 진인은 따로이 있는 게 아니라 역병에 쓰러져가는 팔도의 백성들이 다시 살아 환호하며 춤추는 세상에서 서로 정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모든 이가 진인이지요. 차라리 왕후장상의 씨를 새로이 만들 바에는 북관의 곳곳마다 널려 있는 무인지경으로 들어가 우리끼리 용화세상을 이루어 살아가는 것이 낫겠지요. - <장길산> 10권, 458쪽  
   

  말하며 동참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힌다. 그리고, 

   
  저는 세상이 바뀌지 않더라도 저희 활빈도가 백성의 군사임을 알고, 참 용화세상을 이루는 일을 끊임없이 벌이고 다닐 것입니다. - <장길산> 10권, 459쪽  
   

라고 지금 당장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고 해서 백성을 위한 일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죽는 그 순간까지 백성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애쓰겠다는 의미로 읽힌다. 이것은 길산이 살아생전에 용화세상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성공에의 욕망보다 뒤이어 올 많은 백성과 민초들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으로 읽히며 언젠가는 그런 세상이 오고야 말리라는 역사적 낙관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장길산>의 未濟괘

  어쨌든 장길산의 활빈당은 새로운 세상을 만들지 못했다. 소설 마지막 부분에 운주사 - 원래는 運舟寺였는데, 후에 雲住寺로 되었다고 황석영은 서술하고 있다. 運舟寺의 의미는 만백성을 바닷물 삼아 배(백성이 주인인 나라)가 앞으로 나아간다 것이다. 그러니까 만백성의 나라인 셈이다. 하지만 후에 雲住寺로 된 것은 물이 차오르지 않아 배가 구름처럼 머물렀다는 의미이다. - 천불천탑, 와불 이야기를 하며 아직 미륵의 세상, 백성이 주인인 나라가 도래하지 않았음을 알려주고 있다. 하지만, 서술자가 소설을 이렇게 끝맺는 데에서 낙관적 희망을 읽어낼 수 있다.

역(易)에 이르기를 미제(未濟)의 뜻이 해가 바닷속에 잠겨 있으므로 장차 밝게 떠오를 것을 안다 하였으매, 티끌처럼 수많은 생령(生靈)들의 뜻이 어찌 이루어지지 않으랴. - <장길산> 10권, 469쪽

그런데 신영복 선생님은 책 <강의>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이렇게 풀고 계신다.

   
  나는 세상에 무엇 하나 끝나는 것이라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람이든 강물이든 생명이든 밤낮이든 무엇 하나 끝나는 것이 있을 리 없습니다. 마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세상에 완성이란 것이 있을 리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64개의 괘 중에서 제일 마지막에 이 미완성의 괘를 배치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 신영복, <강의>, 127쪽
 
   
 

 그렇다. 장길산이나 여환스님, 많은 녹림당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내는 데에 실패했지만, 그것이 끝은 아닌 것이다. 이들의 이야기가 밑거름이 되는 것은 앞에서의 원향의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들이 만들고자 한 세상도 완성은 아닐 것이다. 그저 보다 나은 세상의 한 과정일 것이며, 백성의 행복과 용화세상을 위한 한 방편일 뿐.

 그러니 여기서도 용기와 겸손의 지혜를 얻게 되는 거다. 민중들의 좌절이 영원한 실패는 아니며 또 사소한 승리가 완성은 아니라는 것. 완성은 오히려 미궁에 가깝고 그저 진리의 편에 가까이 서려는 절제와 겸손의 미덕이 필요하다는 것.

뱀꼬리

묘옥과 길산의 엇갈린 사랑, 이경순의 지순한 사랑,
최형기의 지극히 인간적인 야욕과 좌절,
마감동과 최형기의 칼싸움

그리고 지금은 갈 수 없는 이북의 산세와 지형에 대한 섬세한 묘사
이북이 고향인 작가의 개인적 역량과 경험이 투영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모든 것들이 이 작품을 더욱 빛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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